오늘은 초대교회사 강좌 여섯 번째 시간으로 교황제도의 발전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이 되겠습니다. 우리 개신교와는 달리 천주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해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천주교의 일사불란한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좀 부럽습니까? 어떻게 생각이 되십니까? 우리 개신교 같은 경우는 교황도 없고 뒤죽박죽인 것 같고, 교파들도 많고, 그리고 그냥 교회들마다 천차만별이고 하나의 통일성도 없어서, 어쩌면 우리 개신교는 뒤죽박죽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천주교 같은 경우는 교황이 있고 그 교황이 인정해 주는 그런 시스템 속에서만 돌아가고 있어서, 사실 천주교 시스템 속에서는, 이 사람이 정식 천주교에 속한 사람이다. 아니다. 이런 것들이 명확한 것 같아요. 그래서 신부면 이 사람은 진짜 신부구나. 수년이면 수녀구나 하는 걸 아는데, 우리 개신교 같은 경우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딱 나타나서 내가 목사라고 해버리면,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기도 어렵고, 여러 가지로 복잡하게 보이는 것이 우리 개신교회의 모습이어서, 한편으로는 이런 교황제도가 있는 천주교회가 상당히 부럽게 느껴지는 분들도 많이 있을 것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과연 이렇게 교황 제도와 이런 교회 시스템이 어떻게 이렇게 발달하게 되었는가? 그 역사적인 과정들을 한번 쭉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다음에, 교회로 모여서 교회가 출발하게 되었을 때는, 초대교회 정말, 아주 오래된 가장 최초의 교회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작은 규모의 교회였을 거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그 주변의 사람들 아무튼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아주 핵심 그룹, 제자들로 구성된 교회로 모였을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 숫자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지만 교회는 아주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죠.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으나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러한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그 교회는 계속해서 확산되고 커나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어느 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던 그 교회가 이제는 숫자가 늘어나게 되면서, 교회가 아주 크게 성장하게 된 겁니다. 복음을 증거 할 때 회개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게 돼서, 한 번 한 번에 3천 명의 성도들이 모여들기도 하고, 수천 명의 성도들이 모여들어서, 교회가 어마 어마하게 커지게 되는 성장을 보게 되었죠. 그러니까 숫자가 성장하게 됨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직분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처음에 교회가 몇몇이 모일 때는 소규모로 모일 때에는 직분이 필요가 없잖아요? 그냥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씀을 가르치면, 그것을 배우기만 하면 되는, 그런 작은 규모의 교회였는데, 그런데 갑자기 교회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지게 되면, 그 교회가 하는 일들에 따라서 직분들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집사라고 하는 직분을 세우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사도행전 6장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그리고 구제를 하는 일을 행하기도 하고, 교회의 모든 일들을 다 도맡아서 했었는데, 규모가 커지게 되므로 말미암아 그걸 다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전하는 일은 사도들에게 맡기고, 이제 집사님들을 세워서, 그 집사들이 교회의 구제를 총괄하는 그런 시스템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교회는 더 성장하기 시작해서 그 외부 지역으로 더 많이 발전해 나가게 되는데, 교회 안에 따라서 다양한 직분들이 추가적으로 더 생기게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선지자라고 하는 직분, 교사라고 하는 직분도 나타나게 되었죠. 어디에 나타납니까?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안디옥 교회 내에 선지자가 있었고 교사가 있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바울 사도가 소아시아, 지금의 튀르키예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증거 하고, 거기서 교회를 세우게 되었을 때, 교회를 세우고 바울 사도는 다른 지역으로 옮아가야만 했었던 그 상황 가운데서, 새로 탄생한, 그 교회를 그냥 방치해 둘 수 없어서 어떻게 했는가? 장로를 세워서, 그 장로로 하여금 그 교회의 영적인 상황을 돌아보게 만들고, 말씀을 전하게 하는 그렇게 장로라고 하는 직분을 세우게 된 것이죠.
이렇게 장로의 직분을 세우게 된 것은 가정의 시스템을 교회 시스템으로 가져온 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은 가족 중심의 사회였어요. 씨족 중심의 사회인 것이죠. 한 마을이 전부 일가친척으로 구성된 마을인 겁니다. 일가친척으로 구성된 그 마을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그 마을의 어르신들, 그 마을의 장로들에게 찾아가서, 장로라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이죠? 장로 할아버지라는 뜻이에요. 노인이라는 뜻이에요. 장로가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다 젊어가지고 어울리지는 않습니다마는, 장로라고 하는 게 무슨 얘기냐면, 연장자라고 하는 얘기예요. 노인이라는 얘기예요. 옛날에 우리나라에서도 무슨 큰일이 있으면 집안의 할아버지가 모든 권한을 가지고 집안일을 다 다스렸던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그 지역의 모든 일들은 누가 책임졌는가? 가장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이 우리 동네의 연장자가 그 마을을 다스리던 그런 시스템으로 계속 지내왔던 것이죠. 그런 가족의 시스템이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 겁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세워졌는데, 그 교회 공동체는 무엇이냐? 하나의 가족과 같은 것이죠. 믿음의 가족인 것이죠. 그러니까 믿음의 가정을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가정에는 할아버지가 있어서 그 가정을 다스리듯이, 교회도 교회 어른이 하나 있어서 그 교회 어른이 교회의 신앙생활을 잘 다스리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장로를 세워서 교회를 돌보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결국 이제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장로를 중심으로 해서, 그런데 그 장로가 오늘날의 장로와는 좀 약간 기능이 좀 다르겠죠. 그 당시에 장로라고 하는 역할이 무엇이냐면, 사실은 목회자와 같은 그런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장로가 그 교회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그래서 교회를 바로 세우게 나가게 되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그 일이 교회가 점점점점 더 성장해 나가게 되면서, 이제는 이제 조직이 갖추어진 그런 교회 시스템들이 각 교회에 등장하게 된 겁니다.
3세기에 들어가게 되면서, 각 교회마다 교회가 세워지게 되면, 거기에는 장로 목회자가 있는 것이고, 또 그런 교회들이 여러 개 있으면, 그 여러 교회들을 관할할 수 있는 그런 대교구의 감독이 있어서, 장로가 있어서 여러 교회들을 돌보는 시스템으로, 그렇게 자연스럽게 성장해 나갔을 거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래도 교회가 그냥 진공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구조를 그대로 반영해서 교회가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 사회 가운데 있으니까, 그 당시 사회는 어떤 사회였나요? 그야말로 왕정 체계 속에서의 사회였습니다. 로마 황제가 있고, 그 황제 밑에 군신들이 있고, 그래서 한 나라가 돌아가는 시스템으로, 한 나라가 돌아가는 그 모습을 사회 속에서 보아왔기 때문에, 교회도 교회의 어떤 우두머리가 하나 있고, 그 우두머리 밑에서 교회가 다스려지는 이 사회의 시스템을 그대로 교회에 가져와서 장로 밑에서 교회가 움직이게 되는 그런 시스템으로 발달해 오게 된 것이죠.
그러다가 그때만 해도 교회가 탄압을 받던 시기였는데, 놀랍게도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로마 정부가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기독교를 인정해 준 황제 이름이 무엇이죠? 대단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인정해 줬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인증을 받게 되었고 392년에는 국교로 승인을 받게 되었습니다. 국교로 승인한 황제가 누구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국교로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죠. 그러니까 교회의 위상이 갑자기 높아져 버렸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라고 하는 것은 핍박을 당하는 공동체였고,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지하에서 정말 고난을 당하면서 믿음을 지켜야 했었다고 한다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교회가 인정을 받고,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서 교회가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서, 갑자기 교회의 위상이 높아지게 되어 버린 것이죠. 그러면서 그 교회를 목회하던 목회자의 위상이 높아졌겠습니까? 어떻게 됐겠습니까? 굉장히 높아진 거죠. 왜냐하면 로마 황제도 신자예요. 로마 황제도 신자이기 때문에, 결국 이 교회의 권한이 굉장히 높아지게 된 거죠.
제가 군목으로 있었는데요 군목으로 있어서 제일 처음 9사단 30 연대에 부임했을 때는 연대장이 불교 신자였어요. 그러니까 군목으로 갔는데, 제가 군목이지만 힘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부대 간부들한테 이야기를 해도, 전혀 말이 먹히질 않아요. 아무도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다음에 부대를 옮겨서 9사단 28 연대에 부임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9사단 28 연대에 갔는데, 그때 연대장님이 교회 집사님이에요. 그래가지고 예배 시간에 맨 앞자리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예배드리고, 친교시간에 딱 앉아 있는데, 연대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모들도 다 와서 친교 시간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는 연대장님이 저한테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얘기를 막 하니까, 그 부대에서는 제가 그 부대의 참모들한테 이야기를 하면은 말을 얼마나 잘 듣는지 몰라요. 이거 인사 참모님 이것 좀 협조해 주세요. 군수 참모님 이것 좀 협조해 주세요. 그러면 너무나도 말을 잘 들어요. 왜 잘 들어요? 제가 똑똑하기 때문에? 그게 아니고, 연대장이 신자니까, 나머지 그 참모들이 연대장이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저에게 제 말을 아주 잘 듣는 거죠. 한마디 얘기하면 30 연대에 있을 때는 될 일도 안 됐어요. 될 일도 안 돼. 그런데 28 연대에서는 정말 부탁만 하면 다 되는 거예요 다. 그래서 참 지휘관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참 많은 유익한 면이 있었다 생각이 들었는데요.
기독교가 공인되고 나서, 로마 교회의 위상이 당연히 높아진 겁니다. 황제가 성도예요. 그래서 이 황제가 성도이면서, 로마 감독의 로마 그 감독의 신앙의 지도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결국 이 로마 교회의 위상이 자꾸만 자꾸만 높아져 버린 것이죠. 지난번에 우리가 지난 시간에 기독론 논쟁하는 것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지지난 시간에는 삼위일체 논쟁에 대해서, 삼위일체 논쟁이 어떻게 흘러가는가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그 삼위일체 논쟁이나 기독론 논쟁이나, 늘 그 교회의 논쟁 가운데 어떤 세력이 개입을 했어요? 황제의 세력이 개입이 된 것이죠. 그래서 삼위일체 논쟁을 할 때도, 지금 이 감독은 이런 얘기를 하고, 저 감독은 저런 얘기를 하고, 그래서 감독들끼리 서로 네가 맞다 내가 맞다 하면서, 막 논쟁하고 있는데, 결국에는 삼위일체 교리가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성립하게 됐는데, 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정통 삼위일체 교리가 어떻게 인정을 받게 됐어요? 황제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게 인정이 된 거예요. 기독론도, 예수님이 신성과 인성을 가지고 있고 그 인성이 섞이지도 않고 혼합되지도 않고 하면서 신성과 인성을 모두 다 가지고 있다고 하는 이런 기독론 논쟁의 결론도 왜 이 정통 교리가 성공하게 됐어요? 황제가 후원해 줬기 때문에 성공한 거예요. 황제가 나타나서 이단을 지지하면 이단이 성공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다시 황제가 바뀌어가지고, 이번에는 정통 교리를 지지하면 정통 교리가 승리하는 겁니다. 결국 이 교회가 이렇게 국교로 인정되면서, 교회의 문제가 단순히 교회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가 되었고, 국가가 이 나라를 신앙적으로 하나로 묶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개념 때문에 결국 국가와 교회가 밀접하게 연관이 돼서, 교리 문제까지 개입을 하게 되는 경우가 나타나게 되었고, 결국 교회 그 파워는 누가 가지게 되었는가? 로마. 수많은 지역의 감독들 중에서, 예루살렘 감독도 있고 콘스탄티노플 감독도 있고 알렉산드리아 감독도 있고 안디옥 감독도 있고 로마 감독도 있는데, 그중에서 어느 감독이 제일 파워를 가지고 있을까요? 당연히 로마 감독이 파워를 가지게 된 겁니다. 황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던 로마 감독이 파워를 가지게 된 것이죠. 그래서 로마 교회가 점점점점 힘을 가지게 되었고, 그 로마 교회가 다른 지역에 있는 교회들도 관할할 수 있는, 그러니까 수많은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지역 교회들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로마 황제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그 로마 교회가 점점점점 더 많은 힘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로마 교회 중심으로 세계가 재편이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로마의 수도가, 나라의 수도가 옛날에는 로마에 있다가 나중에는 콘스탄티 노플로 이전을 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이 어디냐면, 오늘날의 이스탄불이라고 하는 것이 콘스탄티노플이에요. 그곳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지만, 그렇게 이전을 했어도 여전히 예전부터 파워를 가지고 있던 로마 교회가 전 교회를 장악하게 되었고, 결국 그 로마의 주교가 엄청난 힘을 가지게 됐는데, 이 로마 주교가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들의 권한을 더욱더 확립하기 위한 여러 가지 근거들을 하나씩 둘씩 만들어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 보면 다마수스 1세 감독 때 교황 때 366년부터 384년에 있었던 그런 교황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다마수스는 말하기를 베드로에게 주어진, 묶고 풀 수 있는 권한이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내가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운다 하면서, “네가 묶으면 하늘에서도 묶일 것이고 네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라고 했는 그런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렇게 베드로에게 주어진 묶고 풀 수 있는 그 권한이 로마 교회 교황에게 그대로 연결되어서, 그 베드로의 권위를 로마 교회가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것이죠. 베드로가 결국 로마에 와서 순교를 하고, 그 로마 교회가 베드로의 순교의 터 위에 세워졌다고 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러니까 로마 교회가 베드로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이야기를 한 겁니다. 다마수스는 제롬이라고 하는 사람에게 “히에로니모스”라고도 하는데요.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하라고 해서, 라틴어 성경을 했고요. 또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 때 로마 교회의 우위를 인정받는 일을 이 다마수스 1세가 했던 것입니다.
그 뒤에 레오 1세 황제가 등장했는데요. 440년에서 461년의 이 레오 1세 교황은 로마 교회 의식을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나는 베드로의 후계자라고 스스로 선포하면서, 로마 교회가 다른 지역에 대한 교회적 사법권을 가지고 있다. 교황이 모든 교회를 종교 재판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주장하고, 결국 445년 발렌티누스 황제가 로마 교회의 우의를 인정함으로 말미암아, 로마 교회의 권한이 자꾸만 커지게 된 것이죠.
그 뒤로 겔라시오스 1세 황제가 나타났는데요. 492년에서부터 496년까지 재위했던 교황입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교황은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한 능력을 부여받았고, 법을 세우는 역할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왕의 권력을 받은 것이고, 법을 집행하는 역할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두 개의 권한을 주셨는데, 교황과 왕이라고 하는, 그 두 개의 그 권한을 주셨는데, 교황과 왕의 권력이 다르다고 이야기하면서,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교회와 국가의 분리를 주장하는 것은 그냥 똑같다고 하는 의미에서 분리한 것이 아니고, 국가가 교회에 참견하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의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주장한 거예요. 그러면서 교회가 훨씬 더 우위에 있다고 하는 것을 주장했는데요. 결국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고 한다면, 교황이 나가서 황제를 위해서 변호해야 되기 때문에, 교황의 권위가 훨씬 더 높은 거라고 주장하면서, 결국 교권이 이 세상의 왕권보다 높아지게 만드는 그런 주장을 했고, 거기에 사람들이 따르게 되어 버린 것이죠.
나중에 그레고리 1세도 왕권보다 사제권이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 이 로마의 교황들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그 권한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지위가 있다고 하는 것을 자꾸만 여러 가지 이론들을 가지고 만들어내면서, 교황권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황권을 강화하는 데 사용된 성경 구절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부터 19절 말씀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라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에 근거해서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고,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는데, 그 베드로의 정통성을 누가 이어받았는가? 베드로가 순교한 그 로마 교회가 받았고, 결국 로마의 황제는 베드로의 후계자요 후계자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이 로마 교회가 우선권을 가진다고 하는 그런 주장을 하게 된 것이죠.
누가복음 22장, 31절, 32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예수님께서 특별히 베드로에게 보호해 주셨고, 형제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줬다고 주장한 거죠.
누가복음 22장 38절의 말씀도 보면 “그들이 여짜오되 주여 보소서 여기 검 둘이 있나이다 대답하시되 족하다 하시니라.” 베드로에게 검이 주어졌다는 거예요.
누가복음 22장 23절 말씀에 보면 “그들이 서로 묻되 우리 중에서 이 일을 행할 자가 누구일까 하더라.” 베드로가 그 일을 한다고 이야기를 한 거죠.
또 한 번 요한복음 20장 21절에서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죄를 사하는 용서를 주었다고 주장한 겁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17절 말씀에도 보면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시고,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하시고,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라고 했는데 그 권위가 계속 이어진다라고까지 주장하게 된 것이죠.
사도행전 3장 6절에서부터 8절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베드로가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명하니, 기적이 나타났다.
이런 구절들만 보면 베드로가 특별한 어떤 영적인 권세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니까 로마 교회가 베드로의 권세를 이어받아서, 이런 권한이 있는 것이고, “로마 교회의 감독인 교황이 전 세계 교회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라고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악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해서 잘 살펴보아야 하는데요. 베드로에게 이런 권한을 준 것도 아니거니와, 설사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 권한이 로마 교회로 자동으로 연결된다고 하는 것은 결코 성경적인 관점이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억지 주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사도행전 3장 12절 말씀에 보면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베드로가 이야기한 것이죠. 베드로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기도 했지만,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영광이 주어지면 안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무슨 특권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성경적인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고 하면 무엇이죠? 모든 능력은 어디서부터 와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인데, 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그 능력이 어떤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든지, 어떤 물건을 통해서 나타나든지, 어떠한 것을 통해서 어떤 나라를 통해서 나타나든지,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도구가 영광 받을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전혀 없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때만 사용이 된 것일 뿐,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가지고 홍해 바다를 갈랐는데, 그러니까 그 지팡이를 우리가 가져다가 우리가 그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올까요? 안 나와요. 왜 안 나와요? 지팡이에게 파워가 있어서, 홍해 바다를 가르고 반석을 통해서 물을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지팡이를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런 기적들이 나타난 것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그 지팡이는 일반 지팡이와 똑같은 지팡이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법궤입니다. 법궤를 만들어서 이스라엘 민족은 그 법궤와 함께 행진을 했는데요. 여리고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 그 요단강을 가를 때는 법궤를 들고 요단강을 갈 때 요단강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 법궤를 들고 여리고성을 돌을 때 여리고성이 무너졌습니다. 그러니까 그 법궤만 들고나가면 기적이 나타날까요?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 거죠.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은 그 법궤 자체가 능력이 있는 줄 알고, 그 법궤를 들고 어디로 가요? 블레셋과의 전쟁터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블레셋과의 전쟁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긴 것이 아니라, 블레셋 민족에게 처참하게 패배를 당한 것이죠. 법궤가 능력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능력이 있었던 것이지, 법궤 자체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 아닌 것이죠.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역을 했지만, 베드로 자체가 어떤 높임을 받을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라간 것은 결코 아닙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고, 사람들이 자기 주변에 몰려들 때 왜 나를 주목하느냐? 마치 내 개인과 경건으로, 내 능력으로 이것을 행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라고 겸손하게 이야기를 했던 것이죠.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그런 유혹으로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이것은 누가 조심해야 되는가? 우리 사역자들이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목회자들이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선교사들이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주의 일을 한다고 하는 선교 기관이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나를 드러내고, 내가 무엇인가 권한을 가지고 있고, 내가 무엇을 한다고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벗어나게 되는 그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드러내게 될 때 사람들은 영광을 환호하기 시작하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박수를 받을 수 있고, 지원을 받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수많은 목회자들이 그런 유혹에 빠져서, 그렇게 그런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선교사도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것은 바른 방법이 아니고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그 초대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면, 초대교회가 로마 황제 밑에서 박해를 받을 때는 정말 진실된 믿음으로 순교를 각오하면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잘해왔습니다.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나는 경제활동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사회생활에서 왕따를 당하게 되는 것이고, 고통을 당하면서도 이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공인되고 승인되고, 더 나아가서 기독교가 국가의 종교로 인정받게 되면서부터, 교회는 개인적인 영달을 위한 아주 좋은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죠. 목회자들도 자기의 권력을 가지고 부를 누리고, 그리고 자신의 탐욕을 추구하기에 교회가 아주 유익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자신의 권한을 더 강화시키고, 자신의 탐욕을 더 강화시키기 위한 방법들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마치 성경 말씀인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을 왜곡해서 그래서 자신의 권한을 높이고, “나는 베드로의 후예다”라고 하면서, 교황의 권력을 가져가게 되고, 결국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어서, 나중에 종교 개혁을 해야만 하는 그런 아주 심각한 단계까지 탈락의 길로 갔었던 것을 오늘 우리가 분명하게 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 목사님들 중에는, 한국만이 아니고 미국의 목사님들 중에서도 많이 있는데요.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만들 것인가를 갈망하고, 어서 속히 우리나라가 기독교 국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갈망하는 경우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 옛날 제헌국회 때 기도하고 국회를 시작했다고 하는 그런 감동적인 스토리들, 정말 믿음으로 우리나라를 세우려고 했다고 하는 이야기들, 그래서 대통령이 기독교인이었으면 좋겠고, 대통령이 성경책을 들고 교회 안에 나타났으면 좋겠고, 그래서 우리 교회가 좀 세상적인 권력이나 이런 것에 좀 힘을 발휘할 수만 있다고 한다면 복음을 훨씬 더 쉽게 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꿈꾸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은 아닙니다. 우리 이미 콘스탄틴 황제와 데오도시우스 황제를 통해서 교회가 인정받고 국교로 인정받으면서 타락하는 길로 갈 수밖에 없었고 사실은 교회가 확장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교회가 더 망해져 버리는 그저 권력을 종교 권력을 탐하기 위해서 서로 싸우고 다투는 그런 결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사실은 어 이것이 바른 길이냐면 바른 길이 아니고 방향이 아닙니다.
복음은 칼과 능력으로 권력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으로 참된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것이지, 교회가 정말 내가 돈을 벌기에 참 좋겠구나. 내가 교회에 가는 것이 돈을 벌기가 좋고, 교회에 가는 것이 권력을 얻기가 좋고, “교회에 나가는 것이 성공하기 좋구나”라고 하는 것으로 알려져서, 사람들이 교회에 오게 되면, 모양은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교회에 오는 것이 아니라, 탐욕을 위해서 이 세상의 성공을 위해서, 사람들이 그 돈의 우상, 성공의 우상, 탐욕의 우상을 섬기기 위해서 교회 안에 몰려드는 것이지, 참된 믿음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없는 것이죠.
로마 교회는 그렇게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 겁니다. 그래서 로마 교회가 종교 권력을 가지고 지금까지 자신의 권한들을 강화해 오면서, 타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을 우리가 부러움의 눈초리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아 “저 길이 잘못된 길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기억하면서 순수한 믿음을 잘 지켜나가는 그런 우리가 되어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황 제도가 실패한 것이고, 그건 타락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하면서 오늘날 우리들도 역시 굉장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날에 우리 개신교 성도들 중에서도, 특히 목회자들이 어떻게 하면 우리도 뭔가 세를 만들어서, 좀 파워를 좀 보여줄 수 있을까를 많이 생각을 해요. 그래서 한국 내 모든 기독교 기관을 연합해 가지고, 뭔가 좀 단일대오를 갖추어서, 목소리라도 좀 크게 낼 수 있는 그런 통일된 무슨 조직을 만들면, 그러면 “복음 전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은 우리가 역사를 통해서 잘 배워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무튼 교황제도의 발달은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낸 종교를 자신의 권력으로 만들어 내려고 했던, 그런 탐욕의 결과였던 것이지 성경적인 바른 가르침이 아니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