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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데나리온의 약속 (마 20:1-16)

오늘 본문에는 아주 특이한 주인이 등장합니다. 이 주인은 일꾼들에게 수고의 대가를 계산해 줄 때, 그 수고한 양의 만큼대로 계산해 준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나 한 시간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대우해 준 이상한 주인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 데나리온이라고 하는 것은 당시에 남자 장정이 하루 종일 일했을 때 받을 수 있는 금액입니다. 오늘날로 환산하면 어느 정도의 가치일 거라고 아마 상상이 될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하루 종일 일한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 그것은 정당한 대우일 것입니다. 하지만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하루치 일당을 똑같이 준 이상한 주인입니다. 우리 가운데 우리들은 아마 이 주인처럼 하지 않을 겁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비즈니스를 경영한다고 하면, 사람들을 쓴다고 한다면, 수고한 만큼, 수고한 대가만큼 주려고 하는 것이지, 12시간 일한 사람이나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대우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이런 식으로 대우를 하기 시작한다면, 아무도 하루 종일 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시간만 일하고 한 데나리온 받을 수 있으면, 한 시간만 일하지, 뭐 하려고 하루 종일 일할 수가 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주인의 이러한 이상한 행동을 본 한 사람이 당장 즉각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고 나옵니다. 마태복음 20장 11절, 12절 말씀인데요.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토록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불만을 터뜨리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해 주신 그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포도원 주인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여기에 비유에 나오는 이 주인은 정말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들은 사람들을 일을 시킨다고 한다면 자신이 그 사람들을 일을 시켜서 최대의 이익을 끌어내기 위해서 일을 시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주인의 관심사가 무엇인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을 활용해서 최대의 이익을 낼 것인가 그게 주인의 관심사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비유에서는 놀랍게도 그런 주인에게 그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게 만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서인 것이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보통 주인과는 다른 하나님인 것이죠. 하나님과 주인 사이에 닮은 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주인이 품꾼들을 쓰기도 하고, 사용하지 않기도 하고, 대가를 지불하기도 하는 그런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 주인인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하나님은 주인을 닮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주인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비유를 볼 때는 항상 유사점도 보아야 되지만 다른 점을 보아야 될 텐데, 하나님이 인간 주인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 주인은 사람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이익의 대상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활용해서 내가 많은 이익을 얻을 것인가,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주인의 일반적인 주인의 모습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득을 얻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고 하는데 차이점이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능력이 필요해서, 우리를 잘 활용해서, 우리를 잘 이용해 먹기 위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 결코 아니라고 하는 점이 엄청난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말씀한 마디로 이 세상을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들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우리의 헌신과 우리들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 아쉬워서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기 위해서 불러주시는 것이죠.

오늘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이 주인을 묘사하면서, 이 주인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을 가능하면 닮게 만들려고 이상한 주인을 등장시키는 겁니다. 이 주인은 인력 시장에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오는데요. 사람들을 불러올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언제 불러옵니까? 아침 일찍 부르는 거죠. 인력시장은 언제 형성이 됩니까? 새벽에 형성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할 일을 생각하고, 오늘 건축을 하겠다. 아니면 오늘 농사를 지으면서 양파를 뽑겠다. 아니면 오늘 “무엇을 하겠다”라고 일거리가 생각이 나면 사람들을 데리러 갈 때, 새벽 일찍에 가서 그 사람들이 우리 일에 맞는 만큼의 능력이 되는가를 보고, 그만큼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하루 종일 일을 시키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 비유에 등장하는 이상한 주인은 아침 일찍 가서 저 사람을 불렀을 뿐만 아니라, 세 시간 뒤에 또 그 자리에 나아갑니다. 3시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하면 아침 9시가 될 텐데요. 이미 아침 일찍 6시경에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 그 주인은 다시 3시간 뒤인 9시에 나가서 사람들을 또 불렀고, 제6시 오늘날의 시간이면 점심시간에 나가서 또 사람들을 불렀고, 제9시 오늘날의 시간으로 오후 3시에 또 사람들을 불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11시 오늘날의 시간으로 하면, 오후 5시에 다시 나가서 사람들을 불러 포도원에 들여다 보내는, 포도원의 일꾼이 필요해서 불렀다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 것이죠.

처음부터 주인의 행동은 비상식적인 행동인데요. 왜 이 주인은 그렇게 자꾸만 가서 사람들을 부르는가? 우리 하나님이 그러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은 어떠한 하나님인가? 우리를 초대하시는 하나님이에요. 저 천국에 우리를 초대하기를 원하시는데, 미리 불러서 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을 환영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기다리고 계시고 또 기다리고 계시고, 마지막까지 기다리시면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그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상한 주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의 비상식적인 행동 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중에 일당을 지급할 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똑같이 하루치 일당을 다 주는 것이죠. 일반적인 주인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왜 이런 이상한

주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향해서 엄청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과분한 사랑을 우리가 받았다고 하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거죠.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우리가 받을 임금에 대해서 엄격하게 계산한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얼마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인생이 다 마치고, 우리의 인생 하루가 다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서, 우리가 인생 동안 살았던 그 인생을 마감하면서, 너희들이 어떻게 살았는가 한번 결산해 보자 하며,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서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는 얼마짜리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받을 삯은 천국의 상이 아니라 사실은 죄와 사망의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었으나, 늘 악을 행했고, 마음속에 미움이 가득했고, 용서하지 못했고, 위선적으로 살아왔고, 늘 하나님의 뜻에서부터 벗어난 삶을 살았던 게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우리가 예배드릴 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나 나가면서부터 우리는 미워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들은 사랑하는 그 마음을 닫아버렸고, 이웃들에 대해서 우리들의 마음을 문 닫아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식대로 살아갔던 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었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정당한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하늘의 그 놀라운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아무런 자격이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너는 내 아들이라, 너는 내 딸이라.” 인정해 주시고, 환영해 주시며 받아주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과분하게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사람들인가? 오늘 이 포도원의 품꾼에 비유해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12시간씩 일한 사람이나 아니면 한 시간 일하는 사람이 있고, 3시간 일하는 사람이 있고, 5시간, 10시간 이렇게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여러분은 도대체 이 품꾼들 중에서 몇 시간 일한 사람과 똑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나는 수고하고 애써서 내가 당연히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사실은 그것은 착각일 뿐입니다. 우리의 구원, 우리가 수고하여 애쓴 대가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지금 우리는 아무런 죄가 없이 우리는 당당하고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그 순간, 마치 어두컴컴한 방 안에 한 줄기 햇빛이 비치게 되면 온 방 안에 먼지가 가득 드러나 있는 것이 보이게 되는 것처럼, 지금 우리가 이렇게 근사한 옷을 입고 앉아 있을 때는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그 하나님의 찬란한 빛 앞에서 우리의 더러운 모습이 그냥 낱낱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연약한 죄인인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장 8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늘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 하고, 내가 이만큼 수고했고 내가 이만큼 열심히 일했다고 나 자신을 드러내고, 기뻐하기를 원하지만, 그러나 사실 우리들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보다도 못한, 너무나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망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해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 앞에 나와 있던 마태복음 19장에 있었던 이야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20장의 말씀만 읽었는데, 바로 한 장 앞에 있는 마태복음 19장에 보면 어떤 청년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쩐 청년 관원이 예수님께 나와서 “선한 선생님, 어떻게 해야 내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을 아느냐?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그때 이 청년은 의기양양하게 예수님 앞에 대답을 했습니다. 주님 선생님 저는 어려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다 잘 지켰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그 청년을 보시면서 아주 충격적인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이 청년은 당황하기 시작했어요. 천국에 어떻게 하면 가느냐? “영생을 어떻게 얻느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을 다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줘버리라고 말씀한 것이지요. 그때 이 청년은 그 말을 듣고, 근심하며 그냥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그러니까 신앙생활하려고 한다면 무소유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이 말씀을 통해서 이 청년에게 도전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청년아, 너의 주인이 누구냐? 너는 지금 하나님을 섬기느냐? 돈을 섬기느냐? 묻고 계시는 거죠. 제1 계명에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너는 너의 하나님을 섬기느냐? 돈이 너의 하나님이냐를 묻는 것이죠. 만일 예수님께서 제1 계명을 지켰느냐고 묻는다고 한다면, 이 청년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나는 하나님만 섬긴다고 대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 문제를 약간 변형시켜서, 돈이 너의 하나님이냐? 하나님이 너의 하나님이냐를 물었을 때 이 청년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왜? 돈이 그 사람의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지만, 사실은 성공이 이 세상에서 잘 되는 것이 돈이 자신의 우상이었고 하나님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주셨습니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말씀해 주신 것이죠. 부자는 돈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라, 돈을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돈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놀랍게도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버리고 가족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 우리가 받을 상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의 말씀을 해 주신 것이죠.

다시 비유로 돌아가서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는 이 품꾼들의 이야기를 보면, 이 일꾼들은 처음에는 기쁨과 감격으로 포도원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지만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내가 일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지 않던 아주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새벽 여섯 시쯤 인력시장에 서서 돈 많은 주인들이 나를 선택해서 포도원에 들어가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바라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주인이 선택해주지 않으면 그날은 공치는 겁니다. 주인이 불러주지 아니하면 일할 수조차 없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아침에 나가서 서 있으면서 하나님, 오늘은 내가 일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음씨 좋은 한 어른이 나타나서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이야기해 줬을 때, 이 사람의 마음이 너무나도 기뻤을 것 같아요. 오늘은 내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구나. 오늘은 내가 일을 한 다음에, 한 데나리온을 볼 수 있겠구나. 오늘은 내가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는, 그 임금을 받아서 집에 갈 때 사랑하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들어갈 수 있겠구나. 기쁨으로 들어가서 아침부터 기쁨과 즐거움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햇볕이 쨍쨍 내리는 그 순간에도, 지금은 힘들지만 조금 있으면 내가 임금을 받아서 집에 가지고 갈 수 있다고 하는 생각 때문에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어느 한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고 불평과 원망으로 바뀌고 말았던 사건이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이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그 사람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주는 그 모습을 보면서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감사와 찬송과 기쁨으로 시작했던 삶이었고, 일이었는데 그 옆에 있는 사람, 자격도 없는 사람이 나는 열두 시간 일을 했지만, 저 인간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한 저 사람도 나와 똑같은 그 돈을 받아 간다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분노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어쩌면 바로 그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나와 같은 죄인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구원해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해서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수고하고 애쓰기 시작했는데, 그런데 주님을 따르다 보면 그때 느꼈던 기쁨과 감격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불과 원망과 그리고 분노가 치밀어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런 분노에 쉽게 빠지는 게 교역자들이죠. 내가 주를 위해서 내 인생을 바치겠다고 했는데, 그런데 사역을 하다 보면서 만나는 여러 가지 불평등과 모순과 나를 인정치 않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아무런 기쁨도 없이 오히려 원망과 불평 가운데 살아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사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분들이 분이 아니라, 사실은 자격이 없기에 불러주신 분이에요. 주인은 나가서 여러 사람들을 부릅니다. 아침에 나가서 사람들을 부르고, 3시간 뒤에 가서 부르고, 또 3시간 뒤에 가서 부르고, 또 5시간 뒤에 가서, 3시간, 2시간 뒤에 가서 사람들을 부르는데,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불려 나가지 못한 사람은 왜 불려 나가지 못했을까요? 몸이 약하니까 아무도 써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내가 부르지 아니하면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그런 너무나도 연약한 그 사람을 보며, 저 사람 데리고 가봤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그런 자들까지도 불러서 일을 시키며, 은혜를 베풀어준 그 주인의 모습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서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마다 이내 우리들의 공로를 생각하기 쉽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내가 얼마나 많이 수고하고 애썼는가에 관심을 둘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수고하고 했었을 때, 사람들이 박수 쳐주지 않고, 그러나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에게는 박수를 쳐주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모습을 보면서 시험에 들고 믿음이 연약해지는 그런 모습들이 많이 있는 것이죠.

우리들에 있는, 우리들의 마음속에 어느 순간에 찾아온 보상 심리와 우리들의 욕심, 나 자신을 드러내고 있는 그런 모습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해 버렸던 이유일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들의 삶도 그런 상황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사람을 사랑해 주셔서, 그래서 감사함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며 애쓰는 가운데 박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나를 인정해 주지 주는 그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이내 힘이 빠져버리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고, 아무도 나에게 아는 척해주지 않는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마음들이 시험에 들고 있다고 한다면, 오늘 이 시간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아무런 자격이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고 피 흘려주신 그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며, 감사함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가 그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웃들을 사랑하며, 자격 없는 자들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을 통해서 흘러가게 해 주옵소서. 결단하며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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