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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1-15)

다윗이 죄를 짓는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행위가 악하다고 하는 것을 보셨다고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악을 행하는 다윗을 그냥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로 하여금 다윗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고, 나단을 보내신 것이죠.

지금까지 우리가 이 이야기를 살펴보면서,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불러오게 하기도 하고, 우리 야를 전쟁터에서 소환해서 다시 오게 만들고, 그리고 집으로 가라 말하기도 하고, 그리고 말을 듣지 않으니까 결국 다시 전쟁터로 보내고, 다윗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의해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그 모습, 그리고 그렇게 다윗이 가지고 있는 권력을 가지고 죄악을 저지르는 모습에 대해서 우리가 살펴봤습니다.

다윗이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고, 다윗이 이스라엘 민족의 최고의 권세를 가지고, 다윗의 말에 의해서 사람이 움직이기도 하고, 다윗의 말에 의해서 요압 장군은 그 우리 아를 최전방에 보내기도 하고, 다윗의 말에 따라서 이 사람 저 사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 같은 모습을 우리가 보았습니다마는, 오늘 12장에 들어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는 보내시는 거예요. 우리가 보기에 이스라엘의 왕은 다윗인 줄 알았고, 다윗이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었으나,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이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시는 거죠.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이 온 세상의 주권자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이 사무엘하 12장 1절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확인해 볼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이제 그 다윗의 죄를 다루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세상의 주권자는 사람이 아니요, 천지를 주관하고 계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와서 좋은 이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윗의 죄를 질책하고 꾸짖는 책망자의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와서 먼저 비유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는데, 부자가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고 하는 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다윗왕은 엄청난 분노를 하기 시작합니다. 다윗은 나단에게 말을 합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부자로서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착취한 그 부자를 향해서, 다윗이 분노하면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고, 그가 빼앗은 양에 대하여서는 네 배나 갚아야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이때를 놓치지 않은 나단 선지자는 다윗 앞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다윗이 분노하고 있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그 마땅히 죽을 자가 누구냐? 바로 당신이다 이거예요.

우리는 설교를 들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 버리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그 설교가 너무나도 은혜스럽고, 너무나도 감동이 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슨 생각이죠? 오늘 그 아무개 권사 안 왔나? 그 권사님이 이 설교를 오늘 들었어야 되는데, 왜 오늘 안 왔을까? 그 생각납니까? 안 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우리 남편이 와서 들었어야 되는데, 왜 우리 남편이 지금 결석을 해가지고, 이 말씀을 못 들었는지? 그렇게 애타하는 반응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에게 있어요. 누구에게 있다고요? 나에게 있어요. 나에게. 누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이 들을 메시지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들려질 메시지가 아니고, 바로 내가 들어야 될 말씀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이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가? 나에게 말씀하시는 거겁니다. 설교를 들을 때 이 설교를 통해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 말씀하시는가 바로 나에게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내 심령을 꿰뚫어 보시고, 우리가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의 허물을 바라보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앞에서 우리가 보여야 될 다른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이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 우리들의 마음에 찔림이 있을 수가 있어요. 성경 말씀을 읽을 때, 우리들의 마음이 찔리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그 찔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목사님이 여러분들을 염두에 두고, 그 사람을 혼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 위해서, 개인적인 원수를 갚기 위해서 이런 말씀을 한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살리시기 위한, 영적인 수술을 집도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어놓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종종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보면, 목사님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아무개 성도가 들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설교한다고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교회 내에서 무슨 결정을 할 때, 그 결정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향해서, 혹은 교회에서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목사님이 의도적으로 그런 사람들의 귀에 들릴 만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해서, 시험 드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보면, 설교를 하는 걸 굉장히 어려워들 하세요. 왜냐하면 내가 이 설교를 하면, 설교를 준비하는 가운데 이 메시지에 시험들을 사람들이 생각이 난다는 거예요. 내가 이 말을 하면 이 말에 시험 들 사람들이 생각이 나서, 그래서 목사님들이 설교할 때 뭐라고 설교하냐면, “여러분, 이 말은 우리 교회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 얘기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 좋은데, 다른 교회에서, 다른 교회는 이렇습니다.”하면서 설교를 하는데, 다른 교회에서 설교할 말을 왜 우리 교회에서 하겠어요? 우리가 들어야 될 설교를 우리가 여기서 해야지.

설교란 무엇입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말하기를, “설교란 3인칭의 방어막을 피해 돌아서, 2인칭으로 냅다 찔러 버려서, 결국 1인칭의 반응을 끌어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3인칭으로 설교를 비껴갑니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 이야기로. 이것은 저 부자의 이야기로, 어떤 나쁜 사람의 이야기로, 3인칭으로 설교를 들을 때 그 제3인칭으로 방어막을 치면서 빗겨나갈 때, 3인칭이 아니라 “바로 당신이오”라고 하는 2인칭으로 냅다 찔러서, 그 2인칭으로 찔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1인칭으로 회개하는 반응을 가져오는 것이 설교다 그랬어요.

우리가 남의 이야기로 들을 때는 설교가 은혜롭다고 이야기합니다. 감동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의 설교가 끝나고 나면, 나가면서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어요. 그러면 제일 좋아할 것 같죠? 하나도 안 좋아요. 왜냐하면, 은혜받았다는 얘기는 나랑 상관없이 그냥 좋은 말로 들었다는 얘기예요. 아무개 집사 아무개 권사 아무개 장로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 속 시원하게 들었으니까, 통쾌하다고 하는 의미에서, “아이고, 오늘 은혜의 말씀, 정말 좋은 말씀 해 주셨습니다.” 하면서 갑니다.

그런데 참된 하나님 설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에 대한 참된 반응은 무엇이냐면, 내가 가슴을 우리의 허물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배우는 것이 참된 반응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설교를 들을 때 갖게 되는 세 가지 태도가 있습니다. 첫 번째 태도는 다윗의 태도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설교를 들을 때에 그 설교에 대해서 철저하게 동감을 합니다. 분노합니다. “아니, 부자가 가난한 사람의 양을 빼앗다니?” 동감하면서, 그 설교에 몰입하고 감동하면서, 그리고 같이 분노하면서 그 설교에 반응합니다. 하지만 철저하게 이 설교는 나에 대한 설교가 아니라, 제3자에 대한 설교요. 저 부자들이 좀 회개해야 되는데. 저 옹고집들이 좀 회개를 해야 되는데. 우리 남편이 회개해야 되고, 우리 자식이 변화돼야 되고, 우리 부모님이 좀 이 설교를 들어야 되고, 나는 비껴 나가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바로 다윗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두 번째 반응이 있는데 그것은 헤롯왕의 반응입니다. 헤롯왕의 반응은 어떤 반응이었습니까? 세례 요한이 헤롯 왕에게 나아가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게 잘못된 결혼을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형제의 아내를 취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범죄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헤롯대왕은 세례 요한이 전하는 그 메시지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주는 메시지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런 점에서는 제3자로 들은 사람들 다윗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 메시지를 정확하게 들었어요. 하지만 그 메시지를 듣고 난 다음에 회개한 것이 아니라, 세례 요한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성도들 가운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목사님이 설교하는데, 나를 두고 했다고 이를 갈면서, 목사님을 쫓아내려고 하는 교인도 있고, 원수가 돼서 말도 안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런 반응을 보이는 반응은 헤롯 대왕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참된 반응은 무엇입니까? 참된 반응은 베드로의 반응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심문을 당하던 바로 그 현장에 있을 때, 옆에서 오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 새벽닭이 우는 그 닭 울음소리를 듣고, 저 닭 울음소리가 그냥 우는 울음소리가 아니라, 나의 죄를 들추어내는 그 울음소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울부짖으면서 회개하며 나갔던 그 베드로의 반응,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든지, 설교 말씀을 들을 때든지, 이 모든 것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적용되는 말씀이오. 나에게 해당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내가 회개해야 되는 말씀으로 깨닫고 회개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이 이 설교를 들었을 때, 이 나단 선지자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분노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분노의 심리학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그것은 분노하게 되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죄가 가려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악을 보면서 그 악에 대해서 분노하고 화를 내면, 조그마한 잘못, 잘못된 것들을 바라보면서, 용납하지 못하고 화를 내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렇게 화를 내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죄를 짓고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지 않았습니까?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다고 생각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죄를 지적합니다. 어떻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을 수가 있느냐? 어떻게 손을 씻지 않고 먹을 수가 있느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비판하고 분노하면서, 그러면서 그렇게 분노하는 그 순간에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떠나 있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정의를 주장하면, 저절로 내가 정의로워질 것 같은 그런 착각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내가 사랑이 많은 사람처럼 착각하게 돼요. 우리 다른 사람들을 구제합시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줍시다.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냥 가만히 그 말만 하는 것 가지고, 내가 저절로 착한 사람이 된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게 되는 그런 최면 효과가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분노하기도 하고, 거룩한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실생활에서 그렇게 많이 경험해 봤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판단하고 비판하는 그 사람이 사실은 더 죄가 많은 사람이고, 더 악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현실 세계에서 더 많이 깨달아 왔습니까? 우리가 거룩한 척, 우리는 죄를 짓지 않는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비난하고, 다윗처럼 처럼 저 사람은 죽여야 된다고 분노하는 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감춘 것이 아니라, 내 죄를 감추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최면만 걸 뿐이지, 곁에 있는 사람들은,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허물과 그 죄를 너무나도 잘 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을 향해서 뭐라고 말합니까? “당신이 그 사람이라.” 오늘 우리가 들어야 될 메시지가 있다고 한다면, 다른 메시지가 아니에요. 내가 바로 그 죄인이구나. 설교를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마다, 우리가 깨달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내가 이런 잘못을 하고 있구나. 내가 이런 악을 행하고 있구나. 나 자신의 죄를 살펴보아야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죄를 자꾸만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에, 우리의 죄에 대해서는 망각해 버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우리 자신의 죄를 바라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향해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이야기했을 때, 다윗이 보여준 반응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내가 죄를 범하였노라”라고 인정하는 반응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장점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데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를 지적하면, 그것을 인정하기보다는 변명하기에 급급하고, 계속해서 감추기를 원하고, 그것을 숨기려고만 하지,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다윗은 이 순간에 자신의 죄가 드러났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솔직하게 내가 죄를 범하였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우리 한국말 번역으로는 좀 교만하게 번역이 돼 있어요. “내가 죄를 범하였노라.” 뭔가 좀 왕처럼 이야기하는 것처럼 번역을 해놨는데, 사실은 다윗의 반응이라고 한다면, “정말 내가 죄를 지었군요” 하면서, 그 앞에서 무릎을 털썩 꿇으면서, “내가, 내 죄가 드러났군요. 내가 그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선지자 앞에 무릎을 꿇은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자 놀라운 반응이 나옵니다. 나단 선지자가 곧바로 다윗을 용서하는 선언을 한 겁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바로 그 자리에서 나단 선지자가 “하나님께서도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라고 하는 용서의 선언을 해주셨습니다.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좀 약간 싱겁습니다. 아니, 잘못했다고 그러면, 이렇게 빨리 용서해 주나? 이해가 됩니까? 안 됩니까? 잘못했으면, 이렇게 용서할 게 아니잖아요? 그것도 그냥 잘못한 게 아니고, 간음의 죄를 저질렀고, 살인의 죄를 저지른 파렴치범, 그 다윗을, 그 다윗이 잘못했다고 하는 말 한마디에, “그래. 당신은 용서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옛날 “카놋사의 굴욕”이라고 하는 게 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세계사 공부를 하다 보면, 나오는 한 장면인데요. 로마의 교황이었던 그레고리 7세와 독일 이탈리아의 황제였던 하일리히 4세 황제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예전에는 황제가 교황을 임명하기도 하고, 성직자를 임명하는 그런 구조였는데, 그레고리 7세라고 하는 교황이 교황으로 등극하면서, 그 그레고리 7세가 이제는 황제는 성직자를 임명하지 말고, 교황이 성직자를 임명하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밀라노의 그 주교를 임명하는 건에 대해서 하일리히 4세 황제와 그레고리 7세 교황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 하일리히 4세는 교황을 비난하면서 교황을 바꿔버리겠다고 협박을 했고, 교황은 하일리히 4세를 파문하면서 출교 시킨 거죠. 출교 시키면서 성찬식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성찬예식을 거부해 버리고, 그렇게 해서 완전히 교황과 황제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됐습니다. 그래서 황제가 이겼을까요? 교황이 이겼을까요?

힘은 황제가 훨씬 더 세잖아요? 그런데 그 중세 시대 때 누가 이겼냐면, 교황이 이겼어요. 어떻게 이겼느냐? 교황이 황제를 파문하고, 성찬식을 거부하면서, “넌, 더 이상 우리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파문시켜 버리고, 성도들을 향해서 “여러분들은 더 이상 저 사람을 황제로 모시지 말라”라고 교인들한테 선포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당시 신앙심이 아주 많았던 중세 시대 때, 그 모든 사람들 유럽의 사람들이, 독일과 이탈리아에 있던 그런 백성들이 교황의 말을 듣고, 황제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황제가 혼자 황제가 됩니까? 백성들이 황제를 인정해 줘야 황제가 되는데, 아무도 황제로 인정해주지 않으니까, 황제가 큰일 났어요. 그래가지고 할 수 없이 눈이 엄청나게 많이 내리는 그날, 이 하일리히 4세는 그 로마 교황청 앞에 무릎을 꿇고 가서, 그 눈 속에서 삼일 동안 무릎을 꿇고, “교황님이여,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그러면서 3일 동안 막 회개하고 참여하는 그 모습을 본 이후에, 겨우 그레고리 7세 황제가 다시 복권시켜 주는 그런 결정을 했는데, 한 번 잘못했으면, 한 3일 정도는 좀 고생을 시키고, 그다음에 “이제 네가 잘못한 거 알렸다.” 하면서, 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다음에, 용서해 주는 게 그게 정상 아닌가요?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향해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니까, 다윗이 그 즉시 무릎을 꿇고, 나단 선지자에게 말하기를 “내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죄인입니다.”라고 이야기하니까, 즉시 기다렸다는 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을 용서할 겁니다.” 선언해 준 것이죠.

다윗이 회개했던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그냥 글로 읽으니까, 그냥 쉽게 회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무엇입니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변명하면 변명했지, 회개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시간에, 진실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하 12장에서는 이 다윗의 회개가 자세하게 기록은 되지 않았지만, 이때 했던 다윗의 회개가 정말 진실한 회개였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시편 51편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시편 51편의 말씀은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와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지적했을 때, 다윗이 회개하면서 불렀던 노래 회의 참회의 시가 시편 51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51편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좀 길지만 전체적으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 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다윗의 이 시를 읽어보면, 다윗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일까요? 다윗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 그것은 내가 왕위에서 쫓겨나서, 왕위를 박탈당하고,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쫓겨나는 거.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것에 대해서, 그것을 제일 두려워하지 않았어요. 그럼 무엇을 제일 두려워했습니까? 다윗이 제일 두려워했던 것. 시편 51편의 말씀에 의하면,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이게 다윗의 고백입니다. 지금 죄를 지어가지고,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 있는데, 다윗이 가지고 있던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저를 하나님에게서 쫓아내지 마십시오. 하나님,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십시오. 이게 가장 두려웠던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울과 다윗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최고의 관심사는 무엇이었습니까? 사무엘 선지자가 와서 왜 이런 죄악을 저질렀냐고 책망하고 했을 때, 사울왕의 최고의 관심은 무엇이었습니까? 나랑 같이 가주세요. 제발 나랑 같이 움직여주세요. 백성들이 나를 왕으로 계속 모실 수 있도록, 좀 나를 좀 인정해 주세요. 이 왕 위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달라고 하는 그 자리에 대한 연연함이 사울왕의 최고의 관심사였다고 한다면, 다윗의 최고의 관심사는 무엇이냐면, 하나님과 나 사이에 끈이 끊어지는 게 가장 두렵다. 죄악을 저지른 내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격이 없어요. 어쩌면 가장 파렴치한 죄를 저질렀어요. 하나님 앞에 합당하지 못한 인생이에요. 그런데 그 다윗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두려움이 무엇이냐면, 하나님, 그런데 저를 하나님에게서 쫓아내지 마십시오. 주의 성령을 거두어 가지 마십시오. 이게 다윗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관심사였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았어요.

다윗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무엇이라.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께서는 재물을 더 많이 바치는 것을 원하시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돈이 없습니까? 능력이 없습니까? 그 무슨 힘이 달립니까? 하나님에게는 아무것도 필요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상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을 원했고, 다윗은 이 순간에 사무엘하 12장에서는 아주 간단한 말 한마디로 “내가 범죄 하였노라”라고 하는 간단한 말로 표현되어 있지만, 그러나 다윗은 그 앞에서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될 때, 그 모습을 보았던 나단 선지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그 즉시 선언하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는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들 가운데 죄가 없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들추어내지 않아서 그렇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포장하고 있어서 그렇지, 선을 행하는 그 이면에는 늘 죄와 더러움과 악한 모습들이 숨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가기가 어려운데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인도 회개하며 나오면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하나 있는데, 죄는 다윗이 지었는데 그 죄로 말미암아 죽어야 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죠. 누가 죽습니까? 다윗이 죽는 게 아니고, 다윗이 낳은 아들이 죽을 것이라고 예언해 주는 것이죠. 이것은 어떻게 보면 불공평한 일이에요. 죄를 지었으면 죄지은 사람이 죽어야지, 왜 다윗이 낳게 되는 아들이 죽습니까? 아주 불공평한 일이죠.

그런데 바로 그게 우리들이 당한 일이에요. 사실은 우리가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아니하시고 누구를 죽이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신 거죠. 예수님께서 빌라도 법정에 서게 되었을 때 빌라도가 말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이라.” 사실은 누구를 향해서 “바로 이 사람”이라고 말을 해야 되나요? 우리를 향해서 “당신이 그 사람이라”라고 나단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우리가 들어야 될 말이 바로 “바로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되는데, 우리들에게 가야 될 그 손가락을 빌라도가 누구를 향해서 손가락질하면서 이야기합니까?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놓고, “바로 이 자라” “바로 이 자가 죽을 자”라고 선언해서, 결국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는 놀라운 은혜를 얻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많은 실수를 하고 잘못들을 범하며 삽니다. 그래도 우리에게 소망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고, 그 은혜를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얻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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