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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소원 (롬 9:1-13)

오늘 우리가 로마서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로마서를 쓴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라고 불립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한 사도였기 때문에,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사도라고 불린 반면에,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라고 불리게 되었던 것이죠.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의 사도였다고 하는 그 사실은 우리들에게는 그렇게 이상할 것이 없을 겁니다.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였다고 하는 것은 아주 위대한 일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던 1세기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정말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구약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했던 유태인들이 바라볼 때는, 바울 사도야말로 이상하고 괴짜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다고 쓰여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고 한다면, 바울 사도는 이상한 짓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을 겁니다.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에서부터 끊어질 거라고 했는데, 오히려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선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유대인들은 의심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스라엘 민족을 포기한 것이 아니냐?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 이스라엘 민족을 버린 것이 아니냐?”라고 하는 그런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오늘 우리가 로마서 9장 1절에서부터 5절까지의 말씀을 읽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바로 이러한 배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참말을 하고 있다. 내 진심을 담아서 말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하는 말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느냐면, 나의 간절한 소망이 하나가 있는데, 내 소망이 무엇이냐면, 나의 민족, 나의 동포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고 다니고 있고, 그리고 이 이방인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까,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바울 사도는 동포를 버린 것이 아니냐? 이스라엘 민족을 포기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의심이 나오는 것이 당연할 것인데요. 그런 오해를 받을 만한 상황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아니다. 내가 지금 이방인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가지고 있는 소원이 하나 있다.”라고, 내 마음 가운데 가지고 있는 소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내 형제, 내 동포, 내 골육 친척인 우리 유태인들이,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는 것을 간절하게 소망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 민족, 유태인들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가? 어디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내가 저주를 받아서 내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우리 민족이 구원받는 것을 간절히 소망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유대인들이 구원만 받을 수 있다고 한다면, 내가 지옥에 가도 괜찮겠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가 지옥에 가는 것이 만일 우리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지옥에라도 내가 들어갈 수 있겠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은 과장법입니다. 과장법적인 표현인 것이죠. “내가 정말 지옥에 가도 무방하다. 나는 지옥에 가도 상관없다.”라고 하는 이야기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우리 민족이 구원받는 것, 우리 동포가 구원받는 것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내가 지옥에 가는 것이 만일 우리 민족이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그것을 마다하지 않겠다.”라고까지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바울의 표현은 우리 부모님들이 하는 표현과 비슷할 것 같아요.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과 비슷할 것 같아요.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이 어떤 마음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아파서 몸져누우면, 그 옆에서 병간호를 하는 부모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말이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차라리 내가 아팠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차라리 우리 아이 때문에, 아이 대신에 내가 아팠으면 좋겠고, 내가 고생했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우리 아이들은 좀 건강하게 빨리 낳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부모의 마음인 것처럼, 바울 사도는 마치 이 이스라엘 민족 자기 동포 유대민족을 향한 그 간절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내가 지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민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진정성 있는 그 고백이 오늘 본문에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을 받는 것에 대한 정말 간절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지금 이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고 바로 그러한 모습을 본 유태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오해와는 달리, 나는 정말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있고, 우리 동포가 구원받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 민족을 이야기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말하면서, “이스라엘 민족이 누구냐?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민족이냐?” 하는 것을 4절 5절 말씀 가운데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9장 4절 5절 말씀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4절 5절 말씀을 봤는데요. 이 4절 5절 말씀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민족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세우셨는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떤 특권이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을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이 된 민족이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 수많은 민족이 있지만,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들에게 나타났고,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민족이고, 율법이 바로 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으며, 이스라엘 민족은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하며 나아갈 수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민족이고, 바로 위대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과 같은 그런 위대한 조상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며, 뿐만 아니라 이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에서, 누구에게서 태어났는가? 바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태어난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그냥 허접한 민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민족이오. 하나님의 놀라운 특권을 가진 민족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4절 5절 말씀 가운데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로마서 9장 1절에서부터 5절까지만 살펴보면, 바울은 자기 민족을 정말 사랑하고 있는 민족주의자이고, 그리고 자기 민족이 간절히 구원을 받기를 원한다고 하는 그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떤 적용을 할 수가 있을까요? 세 가지로 적용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1) 바울 사도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간절히 소망했다고 하는 바로 그 사실은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품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도 바울 사도가 자기 민족을 그렇게 사랑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민족을 사랑해야 되지 않겠는가?”라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2) 아니면 우리 민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가족에 대한 그런 소망을 품어야 할까요? 우리 가족들이 좀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 바울 사도가 자기 민족의 구원을 간절히 사모했던 것처럼, 우리 자녀들, 우리 남편, 우리 아내, 우리 부모님, 우리 가족의 구원을 이 바울처럼 열망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요? (3) 아니면 다른 세 번째 적용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바울 사도가 이스라엘의 구원을 열망했는데, 그 말은 우리도 지금 저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열망하고, 정말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니까, 지금은 예수님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 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열망하고 이를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결론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 세 가지 적용, 이 세 가지 결론은 우리가 가능한 결론이고, 다 좋은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이 부분만 따로 떼어서 읽기보다는 로마서 전체의 흐름 가운데서 이 본문의 말씀을 읽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종종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을 큰 그림으로 보지 아니하고, 몇 구절만 뛰어서 읽고, 몇 구절만 뛰어서 읽고 큐티를 하면서, 짧은 부분만 그 부분만 읽어서 묵상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흐름을 보지 못하고, 그 부분만 읽다 보면 그런 맥락에서부터 벗어난 읽기가 되어 버려서,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놓치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되겠는데요.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9장 1절에서부터 5절까지만 읽었지만, 이 부분만 볼 것이 아니라, 사실은 큰 흐름 속에서 보아야 합니다.

9장은 9장 1절에서부터 5절까지는 사실 9장 10장 11장까지 이어지는 이 석장에 걸친 이 전체적인 그 그림 속에서 보아야 되겠는데요. 그래서 그 전체적인 그림을 한번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5절까지만 읽었지만, 바로 그다음 6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이 않다고 말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볼 때, 이상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1세기에서 발생되고 있는 그런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아주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복음 기쁨의 좋은 소식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이방인들은 복음의 기쁨 소식을 받아들이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지금 하나님의 기쁜 소식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그 구원의 기쁜 소식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정말 주어졌는데,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그 복음을 거부하고 있는 반면에, 이방인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이상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십니까? 사실은 구약 성경에서부터 약속해 놓은 거예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수많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 민족을 축복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셨고, 약속해 주셨던 그 약속의 결정체로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예수님이 오셨다고 한다면,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받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 특권을 누려야 되는데, 그 특권을 유대인들은 거부해 버린 겁니다. 그런데 누가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이방인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거예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너희는 나의 선택된 민족이다.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겠다. 너희와 언약을 맺겠다. 율법을 주겠다.” 해서, 그렇게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 속에 있던 그 이스라엘 민족인데,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그 약속에 따라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되는데, 놀랍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그 복음을 거부해 버린 상황, 이상한 상황이 발생해 버린 겁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은 이방인이 받게 된 반면에, 이스라엘 민족은 그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된 것이고요. 그리고 그 일을 앞장서서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굽니까? 바로 바울 사도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다니고 있는 겁니다.

그 상황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는가?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했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제는 버리신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해주셨던 그 약속은 이제 파괴된 것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주었던, 그 약속이 흐지부지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라고 하는 그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 해 주었던 대답이 무엇이냐면, 바로 6절의 말씀이 바로 그 바울 사도의 대답입니다. 그런데 그 6절의 말씀이 어떤 대답이냐면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그다음 문장이 무슨 말이냐면,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이 다 구원을 받을 거야.”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 특권을 누리게 될 거야.” “결국은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민족이라고 하는 게 증명이 될 거야.”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 사도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겁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혈통적으로 태어난 유태인들이, 혈통적으로,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유대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이스라엘 민족들이 구원을 받는 게 아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권을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으로 한번 보았으면 좋겠습니까?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누구에게 이루어지는가? 참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구약 성경에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것은 누구에게 성취되는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그 사람이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든, 혈통적으로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야말로 참 이스라엘이고, 그 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이지, “혈통적으로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거부해버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이고, 참 이스라엘이 아니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 혈통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해서 나는 혈통적으로 유대인이니까,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누구, 누가 이스라엘인가? 누가 진짜 이스라엘인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진짜 이스라엘인 것이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스라엘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개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는데, 구약성경에서는 물론 혈통적 이스라엘 유태인들을 의미하는 것이 될 겁니다. 하지만 신약에 오면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말이 이중적으로 사용됩니다. 이중적으로 사용되는데, 어떤 때는 혈통으로 된 유태인들을 가리키는 말이 이스라엘을 말하지만, 그러나 신약 성경의 대부분의 경우에는 참 이스라엘이 누군가를 구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죠. 이스라엘 하면 둘로 나눌 수, 둘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 육신적 이스라엘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혈통에 따른 유대인을 가리키는 그 말이 바로 육신적 이스라엘인 거예요.

하지만 신약 성경에서 “참 이스라엘” “진짜 이스라엘”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참 이스라엘은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가리켜서 참 이스라엘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저 중동지방에 예루살렘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은 신약 성경에 말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종종 우리 기독교 진영 안에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그런 기독교인들이 있는데요. 그런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들 중에는 성경을 너무 단편적으로 읽고, 그리고 성경을 종합적으로 이해하지 못해서, 이스라엘 그러면 육체적 이스라엘 혈통적 이스라엘이라고만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살고 있는 국가 이스라엘, 민족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이며, 그 혈통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된 바로 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아주 특별한 특권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민족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만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 서로 싸우고 서로 문제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이스라엘 편을 들어야 됩니까? 팔레스타인 편을 들어야 합니까? 누구를 더 응원해야 합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은 팔레스타인, 저 팔레스타인은 나쁜 놈들이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은 그 이스라엘 민족은 예수님을 믿지도 않는데, 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편이라고 생각하고, 심정적으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광화문에 나가면 성조기도 들고 나오고, 이스라엘 국기도 들고 나오는 경우도 많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편을 들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어떤 이스라엘 편, 저 국가 이스라엘 편, 민족 이스라엘 편을 들어야 될 이유가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누구 편을 들어야 되는가? 정의(justice)의 편을 들어야 되는 거예요. 옳은 편을 들어야 되는 것이지, 저 민족적 이스라엘,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특권의 위치를 가진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성경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인데요. 육신적인 혈통에 따라서 태어난 이스라엘 민족,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냐? 아니라는 거예요. 6절 말씀에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저 팔레스타인 땅에서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참된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고,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참된 이스라엘인 것이지, 민족적 이스라엘 국가, 이스라엘이 참된 이스라엘은 아니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나셨다고 하는 이야기는, 저 민족의 왕으로, 저 혈통적 이스라엘의 왕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바로 그 사람들의 왕으로 오셨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누구든지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 그가 참된 이스라엘이고, 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바울 사도는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로마서 9장 7절에서부터 9절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이스마엘이고 하나는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이 누구죠? 이스마엘? 우리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창세기를 살펴보면서 생각해 봤던 바로 그 사람이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이 없을 때 사라는 자기의 몸종인, 사라는 자신의 몸종이었던 이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아들을 낳게 만들었는데, 바로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아브라함의 씨, 이스마엘인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사라에게서 아브라함의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그 아들은 바로 이삭입니다. 그런데 그 이삭과 이스마엘이 있을 때, 결국 이 가정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고, 그래서 나중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쫓아내 버립니다. 이스마엘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유산을 받을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스마엘을 쫓아내 버리는 것이죠. 그래서 이스라엘은 어떤 사람들인가? 이스마엘은, 이스라엘 민족은 이삭의 후손입니다. 이스마엘의 후손이 아니라, 이삭의 후손으로 자신들은 적법한 적자인 것이죠.

이 이야기를 바울 사도가 예를 들면서,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지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아브라함의 피를 받았지만, 아브라함의 피를 받았다고 해서, 이스마엘은 이스라엘 민족이 될 수가 없다. 오로지 누구만 이스라엘 민족인가? 이삭만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스라엘 이삭에게서 태어난 사람만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자랑거리예요. 우리는 아브라함의 진짜 자손이다. 그런데 그 진짜 우리가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하는 바로 그 이야기를 바울 사도는 유태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겁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어도, 이스마엘은 유산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적법한 아들이 아닌 것처럼,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났다고,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백성일 수가 없다. 이스라엘의 혈통을 받고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참 이스라엘일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어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는데, 진짜 아들 이삭만 아브라함의 참 아들로 인정된 것처럼,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만 참 이스라엘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이지, 유대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마치 첩을 통해 낳은 이스마엘과 같은 신세가 되는 것이라고 놀랍게도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데, 그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너희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야. 예수님을 거부한 너희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야. 오직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만 참 이스라엘이고, 그들이 참 하나님의 백성이고, 심지어 혈통이 아브라함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인 이방인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 참된 이스라엘이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설명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에게 쌍둥이 아들이 있었는데, 그 쌍둥이 아들 가운데 야곱과 에서가 있었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미워하셨고 야곱만을 선택하신 겁니다. 둘 다 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피를 통해서 태어난 두 쌍둥이 아들이었지만, 두 아들이 다 참된 적법한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피를 이어받은 그 에서도, 한 배에서 난 아들도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누가 이스라엘 민족이에요? 야곱의 아들들만 참된 이삭이 된 것처럼, 신약적인 개념에서 누가 참된 이스라엘인가? 혈통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가 이스라엘이라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주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가 아브라함의 후손이오. 이삭의 후손이오. 야곱의 후손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고, 우리는 자동적으로 천국에 간다고 생각했지만, 바울 사도는 “그게 아니다.” 나는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구원받는 것을 간절히 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혈통이 우리 동포가 우리 가족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러니까 그들이 무조건 다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에게 흘러가고 있는가? 바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흘러간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축복의 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때문인 것이죠. 바울 사도는 자신의 동포가 간절히 구원받기를 원했지만,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고, 자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옛날 세례 요한이 외쳤던 메시지와도 같습니다. 세례 요한은 마태복음 3장 7절에서부터 9절 말씀 가운데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결론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속에 영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참된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우리들의 구주가 되셨습니까? 바로 바울 사도와 같은 심정 때문이었죠. 자신의 동포를 동포가 구원받는 거라고 한다면, 내가 지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던 그 바울 사도의 심정처럼,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십자가를 지는 것, 하나님에게서부터 끊어지는 것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십자가 위에 올라가셔서 우리를 위해 피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받게 해 주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그 놀라운 주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구원의 확신을 엉뚱한 데서 찾습니다. 우리 집안이 몇 대째 신앙 집안이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 우리 집안에 목사가 몇 명이고 장로가 몇 명이 나왔다고 하는 그런 자랑, 내가 이래 봬도 교회의 중직자라고 하는 그런 자랑, 내가 이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많이 했는가 그런 자랑, 내가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많이 했는가, 그러한 신앙적인 교만함, 내가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그런 유명한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그런 헛된 자부심이 그것이 나의 구원의 근거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어리석음과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서 있지 않은 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채, 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오. 나는 이삭의 후손이오. 야곱의 후손이오. 나는 할례 받은 민족이기에 당연히 구원받을 줄 알았다고 하는 그런 이스라엘 민족의 어리석음과 같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아깝지 않게 내어주신 그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만이 우리의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진실하게 믿음으로 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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