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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골리앗 (삼상 17:41-49)

오늘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리 자녀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우리 자녀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하는데요.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해서 크리스천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골리앗이라고 하는 거대한 거구의 장수를, 정말 작아 보이는 어린 한 소년이 무찔렀다고 하는 이야기는 정말 통쾌한 이야기죠. 정말 대단한 사람, 무엇인가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데 약해 보이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물리치고 쓰러뜨렸다고 하는 그 장면을 보게 되면, 속에서부터 엄청난 기쁨이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은 블레셋이라고 하는 강대국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아주 작고 힘없는 약소국을 쳐들어온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블레셋이라고 하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작은 나라를 쳐들어오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아주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이죠.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전쟁하면 여러분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아마 여기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을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안 겪어봤습니다. 안 겪어봤기 때문에, 전쟁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이 잘 와닿지 않을 겁니다. 전쟁하면 그냥 땅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 그 정도로 생각하기가 쉬울 것 같습니다. 저 멀리 우크라이나에서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냥 서로 싸우면서 누가 땅을 차지할까? 누가 권력을 가져갈까? 그런 싸움 정도로만 우리는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고대 세계에 있어서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땅을 빼앗고, 곡식을 빼앗고 짐승들을 가축들을 빼앗아 가는 것 정도에 지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의 결과에 따라서 그 나라 백성들은 모두가 다 노예가 되는 것이죠. 전쟁에서 진 나라의 백성들은 손이 묶이고, 그리고 목에 밧줄이 메이고, 그래서 묶인 채로 끌려가게 되는 겁니다. 이긴 나라에게 끌려가면서, 그렇게 노예로 팔려가게 되는 것인데, 때로는 눈알을 빼기도 하고, 때로는 그 몸에 인두로 지지면서 노예라고 하는 낙인을 찍어버리기도 하고, 그래서 평생 노예로 처참하게 살아가야 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전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전쟁에 처한 이스라엘 민족들은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전쟁에서 이기게 된다고 하면, 승리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지만, 전쟁에서 지게 된다고 한다면 지금까지 누리던 모든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내가 노예로 끌려가서 그리고 눈이 뽑힐 수도 있고, 온몸에 인두로 지지면서 노예라고 하는 낙인이 찍혀서, 평생 고통을 당하며 살아야 되는 그런 처참한 위기 가운데 놓여 있는 것이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전쟁 가운데서 이스라엘이 승리할 수 있었는가?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는가? 전혀 없는 겁니다. 당시 블레셋이라고 하는 나라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기병이 있었고, 철갑 부대가 있었고,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던 나라가 블레셋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였는가? 아직 철기 문화가 도입이 안 된 나라예요. 무기도 변변치 않게 구할 수 없는 나라예요. 그저 몽둥이 들고, 겨우 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한두 명, 몇 명 되지 않고, 전쟁하려야 전쟁할 수 있는 능력이 안 되는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인 겁니다. 그 강대국인 블레셋과 온갖 최첨단 무기를 가지고 있는 그 블레셋 나라와 정말 변변치 않은 보잘것없는 무기를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싸운다고 하는 것은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이 블레셋에게는 아주 커다란 장수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이 누구죠? 골리앗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잘하세요? 골리앗이에요. 골리앗이라고 하는 장수가 있었는데, 그 골리앗이 얼마나 키가 컸는가? 한번 그림을 한번 보면 좋겠습니다. 성경의 묘사에 의하면, 그 키가 2.9미터가 된대요. 세상에, 최홍만보다 더 커요. 이런 사람이 실제로 가능했었는지, 이해가 잘 되지는 않지만, 엄청나게 큰 거구가 나타나서 소리를 지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는 겁니다. 손에는 6.8kg의 구리 단창을 들고 있고, 머리에는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고, 갑옷은 57kg이나 되는 무거운 비늘 갑옷을 입고 있고, 그리고 다리에는 구리로 만든 각반을 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골리앗 장군 앞에는 한 병사가 방패를 들고 막아서고 있는 그런 어마어마한 그 거구가 나타나서 소리를 지르게 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이었겠습니까? 바로 이 그림에 나오는 것 같아요. “아이고 무서워라. 큰일 났다. 이제는 망하게 됐다. 이제는 죽게 됐다.”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구해줄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요? 사울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수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원래 왕이 없었던 나라였던 이스라엘 나라의 왕을 세워달라고 한 목적은 이스라엘을 전쟁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게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나라를 이끌고 가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그런 지도력을 발휘해달라고 하는 의미에서, 왕을 세워달라고 한 것이죠. 하지만 그 사울 왕이 저 골리앗 장군과 싸울 수 있었는가? 사울 왕도 나가서 싸울 만한 능력이 안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수들은 나가서 싸울 수 있었는가? 이스라엘 나라의 장수들도 저 골리앗 앞에서, 블레셋 민족 앞에서 벌벌 떨면서, 이제는 큰일 났다. 간담이 서늘해지고, 이제는 죽게 됐다. 이제는 망하게 됐다. 그렇게 고통 가운데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때 골리앗은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싸움을 더 부추깁니다. “덤벼봐라. 이놈들아. 어서 나와라.” 하면서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대는 그 상황 가운데서, 이제는 모두가 “끝났구나.” 이제는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그 상황 가운데 한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다윗이에요. 어쩜 그렇게 잘하는지 몰라요. 다윗이 나타났어요. 그런데 그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골리앗이 2.9m의 키라고 한다면, 다윗은 키가 작았어요. 골리앗이 볼 때는 정말 작아 보이는 한 소년이 나타난 거예요. 어른도 아니고 아직 소년이에요. 갑옷도 맞는 게 없어서, 갑옷을 입을 수도 없이, 그냥 맨몸으로 나아갔어요. 칼도 없어서 칼을 들고나갈 그런 것도 없어서 창도 없어서 가지고 나갈 게 없었어요. 그냥 맨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어린 한 소년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 두 사람이 싸운다고 하면, 누가 이기는 게 정상이겠습니까? 골리앗이 이기는 게 정상입니까? 다윗이 이기는 게 정상입니까? 골리앗이 이기는 게 정상인 거죠. 도무지 상대가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이 전쟁을 하러 나가겠다고 이야기했을 때, 다윗의 형인 엘리압은 그 다윗을 보면서 분노했습니다. 화를 냈습니다. 뭐라고 화를 냈을까요? “야, 이놈아. 전쟁이 애들 장난인 줄 알아?” 그랬을 거 아니에요? “빨리 집으로 안가?” 그랬을 거 아니에요? 왜 욕을 했겠어요? 자기 동생 다윗을 아끼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전쟁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집으로 가라고 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런 상황 가운데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내가 이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하는 그 결심을 물리지 않았는데요. 왜냐하면 만일 자기가 물러서게 되면, 그리고 전쟁에서 지게 되면, 모두가 다 노예로 끌려간다고 하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가족들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고, 내 친구들이 노예로 끌려가게 되고, 우리 모두가 다 노예가 될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기 때문에, 다윗은 그 상황 가운데서 물러선 것이 아니라, 골리앗과 맞서 싸우려고 결단한 것이죠. 다윗이 이 순간에 걸음 하나 살려라 하면서, 혼자 도망갔다고 한다면 자신의 목숨을 살릴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나는 죽어도 괜찮다” 골리앗과 싸워서 죽더라도, 내 부모 형제를 지키고, 우리 민족을 지키겠다고 하는 그런 열정을 가지고 골리앗 앞에 나아가게 되었는데요.

그냥 나간 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나간 것이죠. “하나님 도와주세요.” 객관적으로 보면 싸워서 이길 힘이 안 돼요. 분명히 골리앗이 훨씬 더 유리해요. 훨씬 더 키가 커요. 싸워봤자, 내가 질 것만 같아요. 하지만 이 다윗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 저 블레셋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을 모욕하고 있는데, 하나님 도와주세요.” 기도하면서 골리앗에게 나아가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하나님, 그 예전에 사자가 나타나서 우리 양들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그 사자를 물리치게 해주지 않았습니까? 곰들이 나타나서 우리 양들을 잡아먹으려고 할 때, 그 곰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이번에도 좀 도와주세요.” 하면서, 다윗은 그 골리앗 앞에 나가게 되었는데, 골리앗과 싸울 수 있는 그런 칼도 없고, 힘도 없고 아무것도 없을 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물맷돌을 가지고 나간 거예요.

물맷돌을 가지고 나가면서, 그 자갈을 다섯 개에 골라 넣어서, 그리고 그 물맷돌을 돌려서 던졌는데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예요. 그 물맷돌이 날아가서 누구를 맞혔습니까? 골리앗을 맞힌 거죠. 한번 그림 한번 보여주세요. 어떻게 하나? 저렇게 키도 작고 칼도 없고 창도 없는 한 어린 소년이 그 물매에다 돌을 넣어서 돌려서, 그 돌을 골리앗에게 던졌을 때, 그 골리앗이 중무장하고 있었지만, 머리에도 놋 구리로 만든 투구를 쓰고 있고, 몸도 갑옷을 입고 있고, 다리에도 각반을 차고 있고, 다 방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러나 갑옷으로 가릴 수 없었던 부분이. 골리앗에게 있었던 것이죠. 어디가 비어 있습니까? 얼굴이 비어있는 거예요. 또한 움직여야 되니까, 어디가 비어 있었을까요? 팔꿈치도 아마 비어 있었을 것이고, 무릎도 아마 비어 있었을 것이고, 비어 있는 그 조그마한 공간들이 있는데, 그 몇 개의 공간 가운데 돌을 던져서, 그 짱돌을 날려버릴 때, 놀랍게도 그 돌이 어디로 날아갔는가? 하나님께서 도우셨기 때문에 그 돌이 어디로 가서 맞혔어요?

이마에 가서 박혀버렸다는, 어떤 히브리어 학자는 우리나라 성경에서 이마로 번역된 이 단어는 이마로 번역하기보다는 무릎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디에 맞혔는지 정확하게는 몰라요 이마를 맞혔든, 무릎을 맞혔든, 아무튼 비어 있는 그곳을 맞히게 됐는데, 그 순간에 그 거구의 골리앗이 쓰러져 버린 거죠. 쓰러져버릴 때, 그 순간 다윗은 잽싸게 달려가서 그 골리앗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하게 됐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은 얼마나 기뻤을까요? “이제는 죽었구나” 싶었는데 승리하게 되는 그 순간에 얼마나 기뻤을까요?

무슨 노래를 불렀을까요? “오, 필승 코리아”를 불렀을까요? 그게 아니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기뻐 노래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제는 끝났구나” “이제는 죽었구나” “이제는 노예로 팔려갈 수밖에 없구나” “우리들에게는 소망이 없구나” 생각했던 이스라엘 민족인데, 정말 생각지도 못한 어린 소년이 나타나서, 키가 조그마한 그 녀석이 나타나서, 물맷돌을 던져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그 모습을 보게 될 때, 이스라엘 민족들이 너무나도 기뻐서 노래하고 찬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기는 했지만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됐습니다. 그 뒤로부터 이스라엘은 더 이상 겁날 게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겁날 게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최대 강국이 되기 시작했고, 주변 나라들은 이스라엘에게 복종하고 항복하면서, 그 주변 나라들이 이스라엘에게 조공을 바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는 동안에는 이스라엘 나라 가운데 태평성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죠. 그 모습을 보면 부러운가요? 안 부러운가요? 부러워 죽겠어요.

우리나라도 이런 대통령 다윗과 같은 대통령이 있어서, 저 4대 열강에 눈치 안 보고 우리나라도 좀 승리하면 좋겠다. 중국이 힘 한 번 쓰면 꼼짝 못 하고, 일본이 힘 한 번 쓰면, 러시아가 힘 한 번 쓰고, 미국이 힘 한 번 쓰면, 맨날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는 그런 우리나라가 이런 다윗과 같은 그런 지도자가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솔직하게 있습니다. 아니 우리나라가 아니라도, 내 곁에 이런 다윗과 같은 사람이 한 명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학교에서 내가 왕따 당하고 힘들어할 때 나를 위해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그런 사람, 직장에서 아무도 나를 인정해주지 않고 무시당하고 있을 때, 나를 위해서 변호해 주고, 나를 힘 돋우어줄 그런 사람, 내게 없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 만나는데,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 그런 사람이 없을까? 내가 질병으로 인하여 고통스러웠는데, 내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 줄 그런 사람이 어디 없을까? 다윗과 같은 그런 친구가 어디 없을까? 우리들은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이죠. 아주 충격적인 일이 하나 일어나고 맙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은 최대 강국이 되었지만, 그러나 그 사이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한 번은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서 모두가 다 전쟁을 하러 나갔던 그 사이에, 다윗은 왕궁에 홀로 남아 있다가, 자기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 버렸습니다. 다윗이 우리의 영웅인 줄 알았는데, 그 다윗이 자기 부하의 아내를 빼앗아 버리고, 그 가정을 파괴해 버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서, 그 자신의 부하를,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그 부하를 최전방 최 맨 앞에 보내어, 적군에 화살에 맞아 죽게 만드는, 교살하는 일을 벌이고 만 겁니다.

알고 보니 다윗이 이스라엘의 영웅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아주 나쁜 파렴치범으로 판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 인간의 모습인 것이죠. 우리는 다 악한 본성이 있어서, 착한 일을 하는 면도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뒤에서는 나쁜 일들을 많이 하고 있는 게,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착한 사람인 줄 알아서, 어떤 사람이 정말 의로운 사람인 줄 알아서, 그 사람은 정말 공정과 상식을 추구하는 사람인 것 같아서, 박수 쳐주고 열광하고 환호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까 그 사람 자신이 순 비리와 불공정으로, 그리고 순 나쁜 짓을 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 주변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쪽 면만 바라보기 때문에, 다윗을 보면서 다윗은 위대한 사람인 줄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런데 다윗에게 열광하고, 다윗을 기뻐했던 바로 그 부하의 아내를 다윗이 빼앗아 버리고, 그 부하를 교살시켜버리는 배신 행위를 해버리고 만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이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사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망을 걸면, 그 소망을 건 사람이 우리들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가?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만 있으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저 사람만 있으면 나에게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사람과 결혼한다고 한다면 나는 행복할 것 같고, 저 사람이 우리 편이 되어 준다고 한다면,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고,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두고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 열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그 어느 것에 소망을 걸든, 그 대상이 사람이든 그 대상이 돈이든, 그 대상이 어떤 것이든 결국 우리는 실망감과 배신감을 느끼게 될 거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살아가면서 늘 의심하고 불신하며, 그리고 정말 두려운 마음 가운데,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말고 살아야 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에요. 정반대예요. 우리는 사람을 믿어줘야 되고, 우리는 신뢰해야 되고, 함께 같이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만일 우리 가운데 완벽해서, 더 이상 아무런 죄도 짓지 않고 정말 완벽한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께서 굳이 이 세상에 오실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모두가 다 연약한 사람들이에요. 모두가 다 허물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정말 착한 사람 같은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허물이 많고, 정말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면이 있는 것이고, 정말 좋은 사람인 줄 알았지만, 나중에 보면 실망과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다 이율배반적인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 인간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상황은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민족의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그래서 이제 노예로 끌려갈 수밖에 없는 그런 위기 상황 가운데 봉착해 있었던 것처럼, 사탄은 지금도 강력한 힘으로 우리를 억누르고 사탄의 노예로 삼아 버리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고난을 주면서, 때로는 우리들에게 엄청난 풍요로움을 주면서, 그 모든 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을 노예로 삼아버리고, 사탄의 종으로 만들어서 결국 지옥 자식이 되게 만들려고 하는 그 사탄의 엄청난 세력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데,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렇게 사탕과 맞짱을 써 싸워서 이길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옛날 다윗이 골리앗과 나가 싸우려고 나갔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아무런 힘도 없는 나약한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아무런 창과 칼이 없이 그냥 혈혈단신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래서 저 이 세상의 거대한 세력 앞에서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게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그런 나약한 모습으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주님께서 죽을 줄 알았는데, 그러나 다시 부활하셔서, 다시 살아나셔서, 사탄을 완전히 물리치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의 구세주가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둘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가르치는 교사 선생님들은 완벽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는 저는 여러분들보다 훨씬 더 도덕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전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면,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해서 피 흘려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 주님이 나의 주님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주님이 되신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망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남편에게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아내에게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선생님에게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 부모님에게 소망을 두고 있습니까? 정말 튼튼할 것 같았던 우리 부모님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가 소망을 걸었던 우리 아이들이 우리의 소망과는 달리 엉뚱한 길로 가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때때로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믿고 신뢰했던 목사님이 쓰러져가는 모습을 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믿고 신뢰했던 장로님이 나쁜 짓을 하는 것을 보지 않았습니까?

저는 어떤 분을 만났는데 지금은 교회를 떠난 분이에요. 왜 떠났는가?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배신감을 느낀 거죠. 세상에 저런 나쁜 사람이 장로라니, 세상에 저렇게 나쁜 사람이 목사라니, 그 모습을 보면서 교회를 떠난 것이죠. 그런데 그게 떠나야 될 이유가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거예요. 우리는 구세주가 될 수가 없고, 우리는 완벽한 인생이 될 수가 없고, 우리는 무엇인가? 조금 잘하면서도, 그러나 또 다른 뒤로는 호박씨를 까고, 뒤로는 나쁜 짓을 하고, 또 이기적이고 탐욕적이고 연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 인생들이기 때문에,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이 사탄의 권세는 너무나도 커서 골리앗의 2.9m 키보다도 훨씬 더 큰 사탄이 우리를 노예로 삼고 우리를 마귀의 종으로 삼아서, 우리를 파멸시킬 수밖에 없는 그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께서는 홀로 그 사탄과 맞닥뜨려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시고, 죽음의 권세를 쓰러뜨리시고, 저와 여러분들의 구세주가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참된 주님은 우리의 참된 구세주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인물이 우리의 구세주가 아니라,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된 구세주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모순들 황당한 일들, 슬프게 만들고 우리를 실망스럽게 만드는 일들을 볼 때마다 우리가 좌절하고, 넘어질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 엄청난 사탄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보며 늘 오늘 또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그런 믿음의 귀한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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