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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슬픔 (삼하 18:19-33)

압살롬의 죽음 (삼하 18:1-18)

압살롬이 일으킨 쿠데타는 얼마 가지 못하고 바로 종결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압살롬의 군사들은 2만 명이나 죽었습니다. 2만 명이 죽었는데, 그 죽은 군사들이 죽은 이유가 칼에 맞아 죽은 것보다도, 수풀에서 죽은 자의 숫자가 훨씬 더 많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우리는 이 압살롬을 하나님께서 징벌하고 계시고, 전쟁을 하나님께서 다윗의 편으로 인도하고 계시다고 하는 그 점에 대해서 볼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셔서 다윗의 군대가 이기게 하시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도우셔서 그 압살롬을 심판하시는 것이 아주 명백한 전쟁이 명백한 싸움이 이번 싸움이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압살롬이 죽은 것도 상수리나무에 머리가 걸려 죽게 되었는데, 나무에 달려 죽은 자들은 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신명기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 압살롬을 심판하셨다고 하는 그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는 방식으로, 이 압살롬의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습니다.

압살롬이 죽게 되자, 이제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다 모두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승리한 소식을 이제 다윗에게 알려야 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그 승리한 소식을 다윗에게 알리는 것은 뭔가 꺼림칙하고 찜찜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쟁에서 아들 압살롬이 죽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이중적인 것이죠. 압살롬과 전쟁을 해서 이겨야만 하는데, 그러나 그 아들이기 때문에 죽일 수는 없는 그런 이중적인 마음, 그것이 바로 다윗의 마음이었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들도 군인들도 이 승전보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가 요압 장군에게 말을 하면서, 내가 가서 승전보를 전하겠다고 말하는데, 이 아히마아스라고 하는 사람이 누굽니까? 이번 작전에서 아주 큰 공로를 세운 사람입니다. 후새로부터 압살롬의 작전 계획을 전달받아서, 다윗왕에게 알렸던 사람이 바로 아히마아스고, 그래서 다윗이 무사히 피난할 수 있도록, 그런 아주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 아히마아스였는데, 이 아히마아스가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는 소식을 전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쩌면 이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아주 인정을 받는, 그런 절호의 찬스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이 아히마아스는 자기가 가서 승전보를 다윗에게 알리겠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요압은 아히마아스에게 그런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네가 가서 이야기해봤자, 상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은 그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해서 알고 있기 때문에, 전하지 못하게 하고, 구스 사람, 구스 사람은 누굽니까? 지금으로 말하자면 에티오피아 사람을 이야기하는데요. 에티오피아 흑인인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을 그 소식을 전하도록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두 사람은 다윗에게 보고를 하러 가고 있는 그 상황 가운데서, 아히마아스는 견딜 수가 없는 겁니다. 자기가 이 소식을 전해야만 하겠고, 빨리 가서 내가 정말 좋은 소식을 전하고 싶어서, 자꾸만 떼를 쓰고 졸랐는데, 결국은 요압이 그 아히마아스의 뜻을 굽히지 못하고, 그렇게 하라고 해서 결국 아히마아스가 다윗에게 먼저 지름길로 달려가서, 승전보를 전달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제일 궁금한 내용이 무엇이냐면, 전쟁에서 승리했느냐가 질문이 아니었어요. 과연 이 싸움에서 우리 편이 이겼느냐가 다윗의 마음 가운데 가장 중요한 소식이 아니라, 나의 아들 압살롬이 살아있느냐, 그것이 가장 중요한 관심사였습니다. 결국 아히마아스는 다윗의 질문을 듣는 그 순간에, 눈치를 채고서 그 소식을 전하지 못합니다. 승리의 소식만을 전하고, 진중에서 무슨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듣기는 들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때, 구스 사람이 와서 승전보를 전하고, 아들의 전사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때 보여주었던 다윗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33절에 다윗의 그 울부짖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내 아들아, 히브리어 표현에서 이렇게 두 번씩 반복하는 것은 아주 깊은 애정을 표현하는 방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아브라함을 향해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두 번 부르셨던 것처럼,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말씀 가운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때 말씀했던 것처럼, 두 번씩 히브리어 표현 가운데서는, 두 번씩 반복하는 것은 강조하는 표현이고, 그 사랑의 마음을 최선을 표현할 때 표현하는 표현이 바로 두 번씩 반복하는 표현인데, 여기서 다윗의 간절한 사랑과 슬픔이 이 말 표현 속에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쿠데타를 진압하고 승리한 소식이 다윗에게는 전혀 기쁨의 소식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자기 아들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뻔했고, 아니 이미 자기 아들에 의해서 왕궁에서부터 쫓겨났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험한 꼴을 봐야만 했던 바로 그 다윗이 또다시 도망자의 신세로 변해버린, 그 정말 고통스러운 일을 겪어야만 했던 그 다윗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가 무엇이냐면, 내가 빨리 전쟁에서 승리해서, 아들과의 싸움에서 쿠데타 세력과 싸워서, 어서 속히 내가 왕궁으로 돌아가서 다시 왕의 지위를 다시 한번 회복했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다윗의 관심사가 아니라, 다윗의 관심사는 오로지 자기 아들 내 그 아들이 살아 있느냐는 것이죠.

비록 잘못을 했다고 할지라도,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질렀다고 하다라도, 그 아이를 죽이지 않고 살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인 것이죠. 저는 이 본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다윗의 삶의 태도를 보면서, 이것이 어쩌면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가 아닐까 공감하게 됩니다. 성경은 다윗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다윗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다윗은 허물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한다면, 쉽게 타락해버려서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파렴치한 인간으로 타락할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이 다윗이라고 하는 인물은 완벽한 사람으로서 우리들에게 제시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이 얼마나 나약한 인생이고, 얼마나 쉽게 죄를 저지를 수 있고, 얼마나 쉽게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날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그런 우리와 똑같은 인물이 바로 다윗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종종 이 다윗이 보여주는 성도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크리스찬들이 보아야 할, 우리 크리스천들이 따라야 할 멋진 그런 모습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특별히 사무엘서를 읽다 보면, 사울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지 않게 행동했던 것과 대비하면서,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동했던 그런 모습들을 보여줄 때가 많이 있는데, 오늘 이 점을 보면서도 이 장면을 보면서도 다윗이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하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윗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관심사가 무엇이었는가? 다윗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냐 하면, 바로 사람이었어요. 다윗에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자기의 아들이 제일 중요한 것이죠.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내가 왕궁으로 복귀하고, 내가 다시 권력을 얻고, 내가 다시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이 살아있는 것이 제일 중요했던 그 모습을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제 이 사울 왕과는 정말 정반대되는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울 왕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가 무엇이었습니까? 사울 왕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사는 자리를 보존하는 거예요. 내가 왕으로서 이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왕으로서 내가 이 나라를 계속해서 다스릴 수 있는 것이 보장되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것이죠. 왜? 사울에게 이 자리를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게 됐을까요? 그것은 사울의 마음 가운데 이미 왕이라고 하는 그 자리가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해 주셔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다른 우상들을 만들지 말고, 절대로 그런 우상들을 섬기지 말라고 말씀해 주시는 그 이유가 무엇이고, 만일 너희가 그렇게 한다고 한다면 정말 엄청난 큰 고난을 당할 거라고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조폭 두목과 같은 분이어서가 아닌 것이죠. 조폭 두목은 내 나와바리 안에, 내 영향력 안에, 나에게 순종한다고 하면, 내가 너희들을 잘 보살필 것이지만, 나를 배신하면 죽여버릴 것이라고, 나를 배반하면 너희들의 팔 모가지를 잘라버릴 것이고, 너희들을 죽여버릴 것이라고 그렇게 협박하는 그런 조폭과 같은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죠. 마치 부모님이 자녀들에게 ”너희들이 유괴범을 따라가면 안 돼. 너희들 정말 이웃이 와서 사탕을 주면서 강아지를 보여주면서 나와 함께 가자고 하는, 그런 유괴범이 와서 너희들을 유혹할 때 절대로 따라가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부모님의 마음처럼, 우리가 우상을 따라가다 보면 따라가다 보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우리들의 신으로 섬긴다면, 우리가 망해버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너희는 나 위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다른 것을 우상으로 두는 순간 너희는 망하게 될 것이니까, 그렇게 섬기지 말라고 요구하고 계시는 것인데, 사울에게 있어서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사울에게 있어서 우상은, 왕의 자리가 우상이 됩니다. 왕의 자리.

하나님께서 나에게 축복으로 주신 그 자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도구요, 수단이기에, 우리가 잘 누리면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그런 왕의 위치를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왕으로서 사역을 잘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축복의 자리가 될 것인데, 사울 왕에게 있어서 그 왕의 자리는 어느 한순간에 우상이 되어 버린 거예요. 내가 왕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내가 왕으로 살아가는 것이 제일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려서, 하나님도 그 왕위를 지키는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리고, 내가 왕으로서 잘 살기 위해서는 전쟁에서 이겨야 되는데, 그 전쟁에서 이겨야 되는 그 수단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이용하고, 제사를 이용하고, 그리고 그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아들도 자신의 충신도 다 적으로 삼아버리고, 정말 이 사람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왕좌를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가장 충신도 적으로 대적하면서 그 다윗을 쫓아내 버리고,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뿐만 아니라, 요나단과 같은 그 아들을 향해서 하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다윗이 있으면 네가 내 왕위를 얻어 이어서 왕이 될 수 없다“고 말해놓고도, 정작 요나단이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의 편을 드는 그 순간에, 단창을 던져서 자기 아들을 죽이려고 든 자가 누구예요? 사울 왕이에요.

그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아들도 중요하지 않아요. 아들도 내가 왕 지위를 지키는 그것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고 한다면, 단창을 던져서라도, 죽여서라도, 내 자리르 보존하겠다고 하는, 사탄의 영에 사로잡힌 자, 왕좌가 우상이 되어 버린 자의 비참한 말로가 바로 사울 왕의 모습 가운데서 보이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다윗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다윗은 자기가 왕좌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의 자리에 올려주실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양치기로 지나게 할 수도 있고, 아니면 멀리 도망가는 도망자의 위치에 놓을 수도 있는데,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주시는 그 은혜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면, 왕좌 중심의 가치관이 아니라, 이것이 내가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켜서 자신을 괴롭게 하지만, 그래서 그것을 바로 잡는 것도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 데, 아들 압살롬이 살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한 거예요.

오늘 우리가 다윗에게 배워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 이 세상의 것들이 우상이 되는 그 순간 그때부터, 모든 그것들은 다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신앙도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사람도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말 수밖에 없는 것이죠. 하지만 그게 아니라, 내 이득이 우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좋은 것들을 우상으로 만들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요, 그분만이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된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때부터 바른 관계가 시작되기 시작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은 완벽한 사람이 결코 아니었고,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겼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였던 다윗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의 유혹 때문에 그는 밧세바와의 관계 가운데서 그러한 원칙이 깨어질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 보면 인구 조사를 하는 과정 가운데서 또 깨어지는 그런 연약한 모습을 보인 사람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고, 과연 우리는 누구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있는가? 사울처럼 자신의 그 자리, 왕좌가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우상이 되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고 살아가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되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귀하고 복된 이 저녁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기를 추적하는 그 순간에, 놀랍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씩이나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부하들은 신앙적인 용어를 써가면서 그리고 다윗을 설득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돌아보셨고, 하나님께서는 그 옛날 약속하셨던 바로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이제는 이런 고생을 끝내고, 왕이 될 수 있는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이니, 사울 왕을 죽이고 이제 이 모든 것을 끝내야 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모든 말이 다 신앙적인 용어였고, 또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말처럼 들려주었지만, 그래서 그들의 말에 따라서 그냥 칼 한 번만 휘두르면, 모든 고통은 다 끝나버리고, 다윗은 이제 이스라엘 민족의 왕이 될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다윗에게 중요한 것은 왕좌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거기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거기서 한 번 더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받은 자를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 특권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똑같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을 어떻게 우리가 죽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기름을 붓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어떻게 우리가 미워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을 어떻게 우리가 죽일 수 있겠는가? 살릴 수 있는 이유들을 대야 되는 것이죠.

만일 다윗이 성취 중심의 사람이라고 한다면, 왕자가 우상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에게 있어서 왕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에게 우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었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지, 왕좌가 우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 순간에 사울 왕을 죽이지 않을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사울이 죽었다고 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는 모든 고통이 끝났구나. 이제는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는구나 하는 그 상황 가운데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춤춘 것이 아니라, 아들 압살롬이 죽었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사울의 그 처량한 죽음 앞에서, 어찌 이스라엘의 왕이 저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죽을 수 있겠는가? 슬퍼하며 애통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성취 중심의, 왕좌 중심의 우상을 섬기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것이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닌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분별해야 되는데요.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고, 정말 크리스천인 것처럼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신이 정말 경건한 신앙인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특별히 정치인들 같은 경우 그렇고요. 또 장사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런 경우들도 많은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정말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어떤 이득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인지 우리가 분별해야 되는 것인데요. 다윗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윗은 이 순간에 하나님 앞에서 울고 짖는 겁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사실 압살롬은 불쌍히 여길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야말로 정말 배은망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살인자였을 뿐만 아니라, 배은망덕한 사람이었고, 쿠데타를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후궁을 겁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죽이려고 군대를 풀었던 자가 바로 압살롬입니다. 그런 압살롬을 향해서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아들을 향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데 그런 아버지가 또 한 분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누구와 같은 자들인가? 우리는 압살롬과 같은 자들이에요. 우리는 다윗과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 압살롬과 같은 사람들이죠.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어마어마한 은혜를 받았어요. 하나님께서 사랑을 엄청 베풀어 주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원수를 갚았고, 하나님을 배반하며 살았고, 이 압살롬보다도 더 악한 죄를 저지르면서 사는 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그 압살롬을 차단하기 위해서 그 범죄자를 향한 정당한 판결이 있다고 한다면 심판이고 사형을 시켜버리는 것이고 죽여버리는 것이 그것이 정당한 판결이라고 할 텐데, 그런데 그 정당한 판결 앞에서 다윗은 그 아들을 살려내지 못하고 그냥 빼앗겨 버려서 슬피 울고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가 죽어야 될 그 자리에 우리가 메어 달려야 될 그 나무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으시고,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살려내신 것이죠. 우리가 죽는 그 모습을 그냥 보고만 손 놓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내어주시고, 그리고 우리를 영원한 그 죄악 가운데서 건져내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면서, 날마다 날마다 감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평이 가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짜증이 치솟아 오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나무에 달려 죽어야 마땅한 압살롬과 같은 처지라고 하는 사실들을 망각해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날마다 날마다 기억하면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늘 감사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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