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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는 것과 허세 (잠 12:9)

칭찬 받는 길 (잠 12:8) +++ 긍휼함과 잔인함 (잠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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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잠언서 12장 9절 말씀 한 구절인데요. 한 문장인데요. 아주 간단한 문장이죠. 비천히 여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종을 부리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높은 체하는 그 사람이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렇게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종을 부리는 그 사람이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정확하게 어떤 뜻인지를 한번 세밀하게 살펴보았으면 좋겠는데요. “종을 부리는 자가” 종을 부리는 자가, “음식이 핍자란 자보다 낫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종을 한 명이라도 좀 두고 있어야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까요? 종을 부리는 자가 훨씬 더 낫다고 그랬으니까, 반드시 종을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도대체 종을 부린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무슨 의미일까요?

종을 부린다고 하는 말을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가 있겠는데요. 첫 번째는 종을 소유한 자가 되어야 된다라고 하는 말로 이해할 수도 있겠고, 두 번째는 소유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종을 부릴 수 있는 위치에까지는 올라가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말로도 이해할 수도 있겠는데 그런 말일까요? 그런 말이 아니죠.

우리가 이 말씀을 보면,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종을 부리는 자”와 대비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종을 부리는 자와 대비되는 표현이 무슨 표현입니까? “음식이 핍절한 자”와 대비되고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종을 부리는 자의 반대말이 종이 없는 사람, 종을 한 명도 부릴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반대말이 아니라, 종을 부리는 사람의 반대말이 무슨 말이냐면, “음식이 핍절한 자”가 반대말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을 부린다고 하는 이야기는 문자 그대로 정말로 종을 소유하고 있거나, 종을 부려야 한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사실은 어떤 의미겠습니까? 부자를 나타내는 말이죠.

부자,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낫다고 하는 말을, 종을 부리는 사람이 음식이 핍절한 사람보다 낫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의 표현법을 가리켜서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죠? 일부를 사용하여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이죠. 예를 들어서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라고 하는 표현은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펜이 칼보다 강하다고 하는 이야기는 문학이나 언론이나 이런 것들이 무력이나 전쟁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죠. 그러니까 어떤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드러내는 표현법이 바로 제유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역시 마찬가지죠. 종을 부린다고 하는 것은 한 측면을 나타내는 거죠. 한 부분을 나타내는 겁니다. 부자가 누구겠어요? 부자라고 한다고 하면 큰 집을 가지고 있고, 넓은 땅을 가지고 있고, 그리고 수많은 그런 생산물을 거둬들이기도 하고, 그리고 장사를 해서 많은 돈을 남기기도 하고, 많은 노예들을 거느리고 있기도 하고, 여러 가지 금은보화를 많이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을 부자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 부자를 나타낼 때 어떻게 표현하냐면 “종을 부리는 자”라고 하는, 부자라고 하는 것에 한 일부분의 특성을 가지고, 종을 부리는 자가 누구보다 낫다?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핍절한 사람보다 낫다.

역시 음식이 핍절한 사람은 그야말로 어떤 사람을 나타냅니까? 가난한 사람을 나타내는 것이죠. 가난한 사람을 표현하면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는데, 음식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는 한 측면을 가지고, 가난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말씀이 어떤 의미냐면, 종을 부리는 자가 음식이 핍자란 사람보다 낫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하는 의미의 말씀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표현의 말씀을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에 아주 오래전에 쓰인 말씀이니까,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고, 수천 년 전에 이런 식의 잠언을 써서 표현을 하고 있지만, 만일 21세기를 사는 오늘날 이 교훈을 우리들에게 한다고 하면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아우디를 끌고 다니는 사람이 라면 먹는 사람보다 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죠. 그 말은 꼭 아우디를 끌고 다녀야 된다고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꼭 아우디라고 하는 차를 타야만 좋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닌 것이죠. 라면을 먹으면 나쁘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 표현을 통해서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낫다고 하는 것을 이런 표현들을 사용해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오늘 읽은 잠언서 12장 9절의 말씀은 어떤 의미냐면,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좋다.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 앞에 묘사하는 말이 따라와 있는 겁니다. 부자, 즉 종을 부리는 자인데, 어떻게 종을 부리느냐 하면, 비천히 여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사람들로부터 별로 존중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이 깔보고 무시당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런데 그 사람이 만일 부자라고 한다면, 내가 높은 체하고, 내가 잘난 척하고, 그렇게 아주 으스대고 건들대는 그런 사람이지만, 그런데 실제로는 너무나도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보다는 사람들한테 무시를 당해도, 그렇게 비천히 여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부자라고 한다면, 그 사람이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일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 12장 9절의 말씀을 읽으면, 어떤 그림이 여러분들 가운데 그려지십니까? 우리나라 옛날 조선시대에 양반과 상놈의 모습이 아마 그려질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가난한 선비가 있고 그리고 부자 장사꾼이 있을 때, 누가 더 나은가 하는 것이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서, 큰 소리만 치고 그리고 정말 으스대면서 그렇게 행세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먹을 것이 없어서 배를 곯고 있는 그런 양반이 나은가? 아니면 그런 양반들에 의해서 무시를 당하지만 그러면서 시장에서 장사를 한다고 해서 천한 것들이라고 무시를 당하지만, 그러나 그런 장사를 통해서 돈을 많이 번, 그래서 돈이 많이 있는 그런 장사꾼이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참 허울뿐인 선비가 낫습니까? 실속 있는 장사꾼이 낫습니까? 누가 더 낫습니까? 아마 그 그림을 보면서 오늘 잠언서 12장 9절의 말씀을 이해하셔도 아마 이해가 되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잠언서 12장 9절의 말씀은 어떤 말씀이냐면, 실속이 없이 허세를 부리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따라서 오늘 본문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을까요? 잠언서 12장 9절의 강조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1번, 가난한 것보다는 부자가 돼야 된다고 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것일까요? 2번, 사람들 앞에서 허세를 부리는 것이 허망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데 강조점이 있을까요? 이 둘 중에 어디에 강조점이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볼 때는 후자에 점이 있는 것 같아요. 부자가 돼라. 가난한 자보다 부자가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에 강조점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가진 것도 없이 허세를 부리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으로 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됩니다.

본문의 이야기를 보면서 이 허세를 부리는 것에 정말 무의미함,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면서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으려고 하고 허세를 부리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정말 어리석은 것이고 허망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사람들한테 무시당해도 비참해 보여도 부자라고 한다면 스스로 높은 체해봤자 아무것도 없는 사람보다 훨씬 낫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부자가 돼야 되겠구나.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낫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부자가 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결론을 내리신다고 한다면, 그건 약간 핀트를 잘못 맞추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런 의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은 허세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것을 교훈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아무것도 없으면서, 정말 사람 정말 내놓을 것도 없으면서, 실속도 없으면서 사람들 앞에서 내가 무엇인가 된 것처럼, 으스대고 자랑하고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 모습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정말 무시당하면서 비천해 보여도 부자가 그런 사람들보다는 훨씬 낫다고 말씀하셔서, 오늘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이냐면, 정말 가진 것도 없이 정말 있는 것도 없이 실속도 없이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으스대고 스스로 높은 체하고 뻐기고 하는 그런 교만한 행동들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경고의 말씀으로 오늘 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자, 왜 우리들은 허세를 부리게 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우쭐거리고 인정받으려고 그렇게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 사람들 모두에게는 여러 가지 욕구가 있는데, 그 욕구 가운데 아주 중요한 욕구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욕구가 있습니까? 있죠. 사람들에게는 그게 기본적으로 다 깔려 있어요.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나를 인정해 주는 것을 갈망하는 그런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다 있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나쁜 것일까요? 나쁘지 않은 것일까요? 그렇게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배고픈 게 죄가 됩니까? 배고파서 무엇인가 음식을 먹고자 하는 게 죄가 되나요? 아니요. 그건 자연적인 현상인 거예요. 배가 고프면 먹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인간의 욕구고 갈망이고 자연스러운 겁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뭐가 문제가 되는 것이죠? 자연스러운 그런 음식을 먹고자 하는 그 갈망의 욕구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과식하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이고요. 그리고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게 문제가 되는 것이고요. 여러 가지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 내가 배고픔을 느끼고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서 음식을 먹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것이죠.

성욕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부부간에, 부부간의 울타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그 성적인 욕구를 발산할 수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에요. 그것이 문제 되는 것이 어디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까? 법적인 그런 테두리 안을 벗어나서, 잘못된 방식으로 강압적인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지 않은 채, 잘못된 방법으로 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지만,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하여서 그 안에서 사랑을 나눈다고 하는 것은 그런 자연스러운 것이고 바람직한 것이지, 금욕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정받는 욕구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우리 인간에게는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런 자연스러운 욕구가 있는 것인데요. 그런 욕구라고 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인정받게 되면 행복한 것이고, 인정받게 되면 기쁜 것이고, 그렇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동기가 되어서 그래서 열심히 일을 하게 되기도 하고, 무엇인가 동력이 되는 그런 긍정적인 감정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수고하며 땀을 흘린 후에, 그리고 보상을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인정받는 것이죠. 내가 열심히 수고해서 그 수고한 대가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 스스로 인정받는 것이겠고요. 또 사람들로부터 박수를 받고 또 칭찬을 받는 것도 인정을 받는 것도 역시 자연스러운 욕구인 것이고, 실제로 그렇게 인정을 받게 된다고 한다면 기쁨을 누리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칭찬은 코끼리도 춤추게 한다고 하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인정받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욕구이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해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다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는가? 내가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만큼, 다른 사람들이 나를 격려해주고 나를 칭찬해 주기를 원하는 만큼,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늘 칭찬하고 격려해주고 인정해주는 그런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불평과 원망과 비난을 한다고 하면, 결국 그런 소리를 듣게 되면 사람들이 의기소침하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실력을 발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아주 찌그러지고 망가져 버립니다.

어떤 사람을 만일 망치고 싶다고 한다면, 그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끊임없이 화를 내고, 혼을 내고,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비난하면 됩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남편을 망가뜨리려고 한다면, 계속해서 화를 내고 불평하고 인정하지 않고 원망하고 비평하면 됩니다. 우리 가정에서 우리 아내를 아주 망가뜨려버리고 싶다고 한다면,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고 욕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면 됩니다. 우리 자녀들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만들고 싶다고 한다면, 우리 자녀들을 향해서 계속 꾸지람을 하고, 화를 내고 욕하고 비난하고 비아냥거리면 됩니다. 아주 간단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망가뜨리면 안 되는 거죠.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이 나로 인해서 잘 성장해 갈 수 있도록, 어떻게 해라? 칭찬해 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매일 아침 우리가 기도하며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할 때, 기도의 제목이 있다고 한다면, 그 기도의 제목 중에 하나가 어떤 기도의 제목이어야 됩니까? 하나님 오늘 하루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셔서, 오늘 하루 하는 말 가운데서 감사의 말이 나오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들의 말 가운데서 칭찬하는 말, 인정하는 말, 격려하는 말, 용기를 붙들어주는 말이 나오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들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과 비난하고 비아냥거리고 책망하는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욕하고 비난하는 말들이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우리들의 입술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일 저녁에 기도하는 가운데 하루를 반성하면서, 내가 오늘 하루 살아오면서 말로써 내가 사람들을 칭찬했는가? 비난했는가? 인정해 주었는가? 인정하지 못했는가? 내가 격려해 주었는가? 아니면 무너뜨려버렸는가? 불평하고 원망했는가? 감사했는가? 생각해 보면서 만일 혹시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못했다고 한다면 저녁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회개하며 나아가고 그래서 우리들의 입술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하신 그 역사가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예수비전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예수 “비” 할 때 “비”가 뭐죠? 비단 물결 같은 목소리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요?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 믿습니까? 한번 따라서 해봅시다. 같은 비단 물결 같은 목소리로 서로를 칭찬하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교회. 믿습니까? 제발 좀 그렇게 좀 합시다. 제발 칭찬 좀 합시다. 칭찬 좀. 믿습니까? 왜 이거 못했어? 왜 못했어? 저렇게 잘못했어? 더 잘할 수 있는데 왜 이렇게 못했어? 비난하고 인정하지 못하고 그렇게 하지 말고 우리들의 입에서 늘 감사와 찬송이 나와야 되고 인정하는 목소리들이 나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욕구가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인 것이고 그렇게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욕구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그런데 그 자연스러운 욕구가 잘못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어떤 때 잘못된 지점인가요? 허기진 것이 죄가 아니고 허기지기 때문에 밥을 먹고 싶은 욕망이 생기는 것이 죄가 아니지만, 그것이 어느 지점에서 죄가 되고 잘못이 됩니까? 과식을 하게 된다거나, 다른 사람들과 나눠 먹지 아니하고 나만 먹거나, 혹은 내가 먹지 못할 것을 빼앗아서 훔쳐서 먹거나, 잘못된 방법으로 먹는다고 한다면, 그 자연스러운 식욕이라고 하는 욕구가 죄악의 욕구로 변화되어 버리는 것처럼 인정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가 열심히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노력한 다음에 그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서 그 좋은 결과가 나타난 걸로 인해서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박수 쳐주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이겠지만, 그것이 잘못된 단계로 넘어가는 인정받는 욕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게 언젠가요? 첫 번째는 교만의 단계로 넘어갈 때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애써서, 그래서 어떠한 업적을 이루었다면, 그것 때문에 기뻐하고 행복해하고 좋아하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는 지점이 어디냐면, 그것이 약간 선을 넘어서 교만의 단계로 넘어갈 때입니다.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하는데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없기 때문이에요. 시편 127편 일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에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셨기에 이러한 업적을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는데,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의 단계로 넘어가게 되면 그것은 죄가 되는 것입니다. 교만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까? 잠언서 16장 18절 말씀.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 번째로 인정받으려고 하는 욕구가 잘못될 경우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는데, 내가 이룬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룬 것 이상으로 인정받으려고 할 때, 그것은 잘못된 욕구입니다. 문제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나요? 그것은 항상 내가 노력하지 않고 열매만을 거두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 선악과도 역시 마찬가지 아닙니까? 선악과라고 하는 것을 보면서 사탄이 유혹합니다. 이 선악과를 먹게 된다고 한다면 네가 하나님처럼 될 거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같이 될 길이 있어요. 어떤 길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죠.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과 같은 그런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 될 때가 있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수고와 노력을 피한 채, 그냥 노력 없이 그냥 열매만을 먹어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했었던 것이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은 채, 우리가 간단한 방법으로 그 열매를 누리고자 하는 것은 그건 잘못된 것인 것이고요. 역시 도둑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도둑질이 무엇입니까? 이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좋구나. 성과라고 하는 것은 좋구나라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 그 성과를 얻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지 않는 거죠. 내가 수고하지 않고 내가 힘쓰지 않고, 그런데 그 열매는 탐스럽고, 공부는 하지 않지만, 공부는 하기는 싫지만, 그러나 좋은 성적을 받고 싶어서 커닝하는 것이고요. 시험지를 훔쳐보는 것이고요. 우리가 정당한 노력을 통해서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결과를 얻고 그래서 인정받아야 되는데, 그렇게 수고하고 애쓰는 것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남들이 이루어 놓은 그 업적만을 내가 가로채서, 그래서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런 잘못된 것들이 결국 잘못된 인정받으려는 욕구의 발산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한다고 하면 수고의 땀이 필요한 거예요. 그냥 가만히 있어서 인정받을 수 없는 겁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수고하고 땀을 흘리고, 정말 최선을 다했을 때, 그랬을 때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고, 우리가 땀을 흘리며 씨앗을 뿌렸을 때, 그래야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되는 것인데,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성과만을 욕심내는 것은 그리고 인정받는 것을 욕심내는 것은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고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오늘 말씀이 하고 있는 말씀이 무슨 말씀입니까? 잠언서 12장 9절에서 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스스로 높은 체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으려고 하고 있는데, 그런데 정작 그렇게 인정받기 위한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아서 먹을 것도 없고,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고, 해놓은 것은 없는데,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러한 노력은 허망한 것이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고요.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나를 무시한다고 할지라도,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써서 그래서 스스로 만족함을 누릴 수 있도록 내가 부를 축적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 훨씬 더 낫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인정받는 것에 신경 쓸 게 아닙니다. 내가 애쓰고 수고하고, 그리고 거기다 그걸 내가 수고한 만큼 얻은 그것을 바라보게 될 때, 스스로 만족감을 누리게 될 것이고 스스로 자부심을 얻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4절에서 5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잊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갈라디아서 6장 4절 5절 말씀을 영어 성경에서는 좀 더 쉽게 우리가 이해하기 좋게 번역을 했습니다. “각각 자기 자신의 행동을 살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자기 자신을 다른 그 누구와 비교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각각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짐을 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가운데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인정해주느냐? 거기에 신경 쓸 게 아니라, 내게 주어진 그 사명을 충실하게 해 나간다고 한다면, 그 이룬 업적을 보면서 스스로 기뻐할 수 있고, 스스로 행복할 수 있고, 내가 수고한 그 땀의 결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이루지 아니한 그것을 보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가지지 않은 채, 내가 인정받으려고 하는 그런 허망한 욕구를 꿈꾸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남들이 인정 안 해주면 좀 어떻습니까? 내가 수고하고 신실하게 땀을 흘려서 그래서 그것으로 결과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보상을 얻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하다가 늘 이 문제 때문에 우리가 넘어져요. 우리 이웃들이 우리 성도들이 인정해주지 않는 것, 목사님이 아는 척 안 해주는 것, 그런 것 때문에 시험 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러지 말고 그 자체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비천한 사람들에게 비천히 여김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인정을 안 받는다고 할지라도 종을 부리면 되는 거예요. 내가 내 수고의 땀을 가지고서 그것을 얻으면 되는 거예요.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아무리 그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수고하고 땀으로써 그래서 열매를 거두게 된다고 한다면, 그래서 종을 부리면 부하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의 수고의 열매들이 있다고 한다면, 아무것도 없어도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그런 사람들보다 100배 낫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세상 사람들의 인정에 너무나도 민감해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실하게 일해서 신실하게 수고해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체험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묵묵하게 주님께서 그 길을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실패한 인생이었나요? 아니요.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그 길은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요. 고린도후서 8장 9절의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유하신 이로써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유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주님께서 가난하게 취급을 당했지만, 무시를 당했지만, 그러나 우리를 그걸로 인해서 우리를 부유하게 만드신 그 주님의 은혜를 오늘 또 기억하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서 건전한 인정받는 욕구가 제대로 잘 충족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엉터리 욕구가 아니라, 엉터리 소망이 아니라, 참된 욕구가 인정받으려고 하는 참된 욕구가 건전한 욕구가 수고와 애씀 가운데 이루어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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