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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함과 잔인함 (잠 12:10)

인정받는 것과 허세 (잠 12:9) +++ 풍성함의 비결 (잠 1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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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잠언서 12장 10절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잠언서 12장 10절 말씀,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의인은 자기 가축의 생명을 돌보는 사람이다.”라고 오늘 잠언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가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짐승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존재인 것인가요? 가축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닭을 기르기도 하고 양을 기르기도 하고 소나 돼지나 염소 같은 것을 기른다고 한다면, 왜 기릅니까? 가축 길러보셨습니까? 가축을 집에서 기른다고 한다면, 왜 기르죠? 잡아먹기 위해서 기른 거죠.

제가 어렸을 때 춤 익산군 춘포면 천서리에 있는 우리 큰 집에 놀러 가면 거기에 돼지우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돼지우리에서 돼지들을 길렀는데, 우리 큰 집은 항상 무엇을 먹었냐면, 돼지를 잡아가지고, 빨간 돼지 김치 콩나물을 넣어서 끓인 국을 1년 365일 아침 점심 저녁 단 한 번도 변하지 않고 그걸 먹었는데, 그 맛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서 그게 나오면 제가 제일 좋아해요. 아, 그런데 돼지를 길러서 그 돼지를 잡아 고기를 먹기 위해서 기른 거죠.

우리 사람들이 짐승을 기르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요즘에는 좀 다르겠습니다마는 대부분의 목적은 그렇게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 기른 것일 겁니다. 잡아먹기 위해서, 팔아서, 이득을 얻기 위해서 기른 것이지, 사랑하기 때문에 닭을 사랑하고 돼지를 사랑해서 그래서 기른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가축을 기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죠. 물론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우리들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과 애정의 강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그냥 한없이 쏟아붓는 사랑일 겁니다. 심지어 우리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심지어 우리 자녀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부모의 기대를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그런 자녀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멈출 수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짐승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가축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축의 가장 큰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잡아먹기 위한 것이고, 팔거나 어떤 다른 방식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짐승을 기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잠언서 12장 10절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의인은 그런 가축의 생명도 어떻게 한다고요? 돌본다. 의인은 가축의 생명이라고 해서, 그냥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고, 그런 가축의 생명이라고 해서, 그냥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어떤 사람이라? 심지어 그런 가축의 생명도 정말 귀하게 보고, 소중히 여기고, 그 가축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돌보는, 그런 자가 바로 의인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본다고 하는 이 말은, 우리나라 말로 “돌본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는 “야다”라고 하는 그런 원어입니다. 그래서 “야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원어가 있는데요. 이 히브리어 “야다”라고 하는 말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냐면, “안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안다. “내가 안다” 할 때, “야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해서 그래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히브리어 “야다”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차적인 의미는 “안다”는 의미지만, 그 의미가 넓게 확장되어서, 성경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 “야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랑한다” “돌본다” “아낀다” “애정을 갖는다”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의미로 확대되어서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했다.”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죠? 이 어떤 처녀가 있는데 “남자를 알지 못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지식적으로 알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성적인 관계로서, 그런 관계로 들어가지 아니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낼 때, 히브리어에서는 “알다”라고 하는 의미의 “야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어 단어의 특성만이 아니라, 헬라어도 마찬가지고 헬라어에서는 “기노스코”라고 하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그 단어에서도 마찬가지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에서도 전 세계의 모든 말이 “알다”라고 하는 단어는 그 의미가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게 내가 밝히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했을 때, 주님께서 알지 못한다고 하는 얘기는, 지식적으로 모른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라고 하는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자기 가축의 생명을 알아본다.” “알아준다”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는 것인데요. 의인이 자기 가축의 생명을 알아준다고 하는 말의 의미가 어떤 의미냐면, 우리나라 말은 “돌본다”라고 하는 말로 번역했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본다면, 어떤 의미로 이해할 수 있냐면, 긍휼을 베푼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구절 바로 다음 구절에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악인의 긍휼은 잔인하다고 하는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의인의 긍휼과 악인의 긍휼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고요. 따라서 지금 이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 가축의 생명에 대해서도 돌보는 사람, 자기 가축의 생명에 대해서도 긍휼을 베푸는 사람, 가축에게까지 사랑을 베풀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그런 사람이 의인이라고 오늘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이라고 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짐승을 대할 때에도,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시겠죠. 오늘 이 말씀이 그렇죠? 이 말씀은 “우리가 짐승을 대할 때에도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인데요. 1차적으로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날에 보면 종종 사회에 문제가 되는 일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길 고양이나 혹은 강아지들을 학대하는 일들이 있고, 그렇게 학대하는 것에 대해서 고발하는 그런 방송들이 종종 나와서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사게 되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짐승들에게 학대를 하고 나쁘게 하는 그 행위가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이죠.

이렇게 된 상황을 우리가 보게 될 때, 아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이해가 잘 안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렸을 때는 짐승을 어떻게 대했죠? 우리가 예전에는 짐승을 정말 우리가 함부로 막대했잖아요? 어렸을 때, 제 기억에 보면 닭을 잡을 때 닭의 목을 치기도 하고, 개를 잡을 때 개를 치기도 하고, 돼지를 잡을 때 돼지를 아주 아주 잔인하게 죽이기도 하고 하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도 익숙해진 상태에서, 그렇게 자란 기억이 있는 우리들로서는, 오늘날 이렇게 짐승들을 애완견이나, 애완견이라고 안 하죠? 반려견이나 반려묘들을 그렇게 지극 정성으로 아끼고 돌보고 사랑하고 하는 오늘날의 문화를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이 뭐라고 가르치고 있냐면, “가축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자가 의인이다.”라고 말해주고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아주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오늘날 반려견이나 반려묘에 대해서, 과도하게 하는 그런 방식조차도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항상 모든 좋은 것들이 과하게 되고, 그리고 심하게 되면 우상이 될 가능성이 많이 있잖아요? 돈도 우리들에게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우상이 될 위험이 있는 것이고, 명예나 권력이나 성공이나 이 모든 것들도 사실 우리들에게는 유익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과하게 되고 심하게 되고, 그리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게 될 때는 우상의 자리로 가게 되어 버리는 것처럼,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겠지만, 이것이 아주 심한 우상화처럼 되는 그런 경향이 있을 수가 있겠는데, 지나친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성경 말씀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균형을 좀 잘 잡아야 되겠죠. 옛날 우리가 함부로 짐승들을 대했던 그런 잘못된 습성들을 우리가 버려야 되겠지만, 동시에 이것이 너무 과하게 우상화되는 것과 같은 단계로 넘어가지 아니하도록 적절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잠언서 12장 10절 말씀에서 “가축의 생명을 돌보는 자가, 가축의 생명에게까지라도 이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가 의인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말씀은 가축에 대한 말씀이 사실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제가 가축에 대해서, 짐승에 대해서, 우리가 잘 대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는 것을 먼저 말씀을 드렸지만, 1차적으로는 그렇다고 말씀을 드렸지만, 그런데 이 잠언서에서 이렇게 가축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들이 가축들에게 긍휼을 잘 베풀어야 된다, 그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잠언서 12장 10절에서는 가축의 생명까지도 돌봐야 줘야 되고, 가축의 생명까지라도 긍휼을 베풀어야 된다고 하는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이웃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의인이란 누구냐?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심지어 가축에게조차도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의인은 당연히 긍휼을 베풀어야죠. 짐승에게까지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것이 당연해요? 이웃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 하는 것이죠.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이 가축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심지어 긍휼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가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당시에 이익의 재료였고, 먹기 위한 대상이었고, 우리의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가 기르는 것이지,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던 그런 가축이지만, 그런데 의인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찮은 존재까지라도 긍휼을 베풀어야 하고, 의인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사람에 비하면 가치가 한참 떨어지는 그런 짐승의 생명까지라도 아끼고 돌보는 것이, 그게 당연한 의인이 행해야 될 일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더욱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람에게는 더 잘해야죠. 더 잘해야 되는 거예요. 이웃들에게 더 잘해야 돼요. 짐승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다고 한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웃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의인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짐승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 단위 안에 이미 가족 구성원들이 있고요. 가족 구성원들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집에 이웃 동료들이 있을 것이고요. 직장에 가면 직장의 동료들이 있을 것이고, 교회에 오면 교회에 같은 믿음의 식구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한 나라의 일원으로서, 우리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아니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모두가 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야 될 대상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의인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의인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생명조차도 돌봐야 하고 짐승의 생명조차도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 짐승보다도 수천만 배나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사랑해야 되고, 더욱더 긍휼을 베풀어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늘 잠언서에서는 짐승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자신의 반려견과 반려묘에 대해서는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사랑을 하면서도, 자기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는 안하무인의 태도로 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반려묘나 반려견에 대해서는 그렇게 지극 정성을 쏟으면서, 다른 인종을 향해서는 경멸과 멸시를 보내기도 하고, 자신과는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들, 자신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멸시를 보내고 경멸하고 있는 태도로 일관할 뿐만 아니라, 신분이 자기보다 조금 낫다 싶으면 깔보고 갑질하고 아주 무례하게 구는 그런 주객이 전도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반려견이나 반려묘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고 아끼는 것은 오늘 잠언서 12장 10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짐승들에게 잘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자기 애완견이나 반려견이나 반려묘에게 자라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신의 것이고, 자기 가족처럼 생각되는 것이고 하기 때문에, 그 강아지나 고양이에 대해서는 지극정성을 보이고 정말 사랑을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우리 옆집 사람에게는, 쿵쾅거리는 우리 윗집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나의 신경을 거슬리고 있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향해서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리고 욕하고 싸우려 들려고 하는 그런 악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겁니다.

이런 가축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고 의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생각으로 탐욕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 이웃들에게 행하는 그런 모습들을 본다고 하면, 그 사람은 의인이라고도 할 수도 없고, 착한 사람이라고 결코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강아지를 품에 안고, 그리고 지나가는 거지를 향해서 모욕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이 과연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고양이를 정말 아끼면서, 그리고 다른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그 사람이 과연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기는 그 강아지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면서, 자기보다 돈이 없는 사람들, 자기 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멸시하고 천대하는 그 사람이 과연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 12장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그러니까 가축들에게 잘해야 그 사람이 의인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축들에게도 의를,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사랑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인 것이죠. 의인은 누굽니까?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 이웃들에게,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같은 직장의 동료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나를 미워하는 원수들에게조차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푸는 것이, 그게 의인인 것이지,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의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에서부터 48절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에서부터 4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오? 세리도 이 같지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들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우리가 잘해주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나에게 잘해줘요. 그렇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내가 잘해주면, “아, 나는 참 마음이 착한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사랑을 베풀고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니까,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생각을 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향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 일은 누구도 할 수 있다. “세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의 말로 말하자면, 누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있어요? 조폭도 할 수 있어요. 김정은이도 할 수 있어요. 푸틴도 할 수 있어요. 히틀러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이에요.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의로운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좋게 해주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나를 핍박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조차도 긍휼한 마음을 가지는 자가 의로운 자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의 사랑의 범주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그 원수까지라도, 나를 괴롭게 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 까지라도, 우리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들이 펼쳐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내가 이래 봬도 다른 사람들보다 인격이 뛰어난 사람이니까, 그래. 나는 너 같은 인간이 아니고, 나는 그래도 인격이 뛰어난 사람이니까, 나는 원수 안 갚아. 내가 긍휼을 베풀게. 너는 나를 미워해도, 그래. 나는 너와 똑같은 인간이 아니라,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나는 너를 사랑해 줄게.” 그렇게 해서는 긍휼한 마음이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의 태도로는 곧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원수 되었던 우리들을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한다고 하면, 나에게 악하게 굴고, 나에게 나쁘게 구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용서와 사랑 자비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씻겨주셔서, 미워하는 마음들을 제거해 주시고,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인자할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12장 10절에서 악인의 긍휼은 잔인하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악인의 긍휼이 잔인하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악인은 긍휼을 베풀기는 한다고 할지라도, 악인이 긍휼을 베푼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긍휼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사실 이것은 악인에게 긍휼함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이 아니라, 악인은 긍휼이 없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하심이 우리의 강함보다 강하다.”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잖아요? “하나님의 약하심이 우리의 강함보다 강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약함이 있어서 그런 약함을 쓰는 말인가요?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무조건 강하셔요. 하나님이 완전히 강하셔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완전히 강하신 그 강하심을 나타내려고 할 때, 그 완전 강하다고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극단적인 표현을 쓰냐면, “하나님의 약하심이, 하나님의 연약한 부분이 우리의 강력한 부분보다 더 강하다.”라고 하는 그런 말을 써서, 하나님이 정말 강하다고 하는 것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인 것처럼, “악인의 긍휼이 잔인하다.”라고 하는 표현은 악인에게 긍휼이 조금 있어서, 악인의 긍휼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악인은 정말 잔인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의 말씀의 의미는 아주 간단합니다. 우리가 이웃들에게 긍휼을 베풀면, 의인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이웃들에게 잔인하게 대하면, 내가 악한 자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는 이웃들에게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잔인하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풀며 인자하게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 잔인해집니까? 언제 잔인해지죠? 그것은 우리가 정의롭다고 생각될 때, 잔인하게 됩니다. 내가 정의롭지 못하고, 내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이 되면, 잔인해질까요? 아니요. 그때서는 숨으려고 해요. 용기를 낼 수가 없어요. 내가 잘못했다고 하는 것을 알면, 할 말이 없어요. 어떻게 해요? 소리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언제 잔인해질 수 있냐면, 내가 옳다고 생각될 때 잔인해질 수 있어요.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은 잔인해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까? 없는 사람들입니까? 있는 사람들이에요. 우리는 옳은 것을 믿고 있고, 옳은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잔인해질 수 있어요. 그것을 항상 우리가 염두에 두고 있지 아니하면, 우리는 이내 악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아주 아주 분명하게 보여지는 예가 바로 누구였냐면, 베드로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후에, 군사들에 의해서 잡혀가게 될 때, 베드로는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인데, 그 메시아를 군병들이 와서, 저 나쁜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잡아간다고 했을 때, 잡아가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고, 예수님은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마음 가운데는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당연히 그 군사들을 막아야 될 권리가 있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그 순간 다 베드로는 칼을 빼어서 제사장 종의 귀를 내리쳤던 것입니다. 내가 옳기 때문에 칼을 휘둘러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기 때문에 휘둘러도 정당한 겁니다.

그런 현상들이 우리 사회에 많이 나타납니다. 얼마 전에, 몇 년 전인가요? 어린아이를 성폭행하고 불구로 만들어버린 아주 몹쓸 죄인이, “조, 무슨, 무슨 순”이라고 하는 그런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몇 년 안 살고 밖에 나오게 됐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옆으로 달려가서, 그 사람을 죽이려고 달려들고, 돌을 던지고, 그 사람, 그 죄인을 향해서, 사생활을 침해해 가면서, 유튜브를 찍기도 하고, 돌을 던지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나쁘다고 판단되는 순간, 우리는 그를 향해서 욕을 해도 정당하고, 우리는 폭력을 써도 괜찮고, 그 사람을 향해서는 무슨 짓을 해도 정당하다고 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이 우리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언제 악마가 되는가? 내가 옳을 때, 악마가 되는 겁니다. 엄마 아빠는 언제 악마가 되는가? 엄마 아빠가 옳을 때 자녀들에게 악마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함정인 것이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켰고, 그래서 결국 악마가 되었습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을 향해서 정죄하고 욕하고 비난한 것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우리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우리 주변에 악을 행하는 무리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짓밟아버리고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일들이 많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처럼 식사를 하기 위해서 식당에 들어갔습니다. 돈을 내고 식사를 하려고 했는데, 내가 낸 돈에 비하여 형편없는 음식이 나오게 되었을 때, 우리는 주인을 향해서 욕을 해대고 소리를 치게 되는 겁니다. 주방장을 향해서 욕을 하고 비난하는 모습이 자꾸 나오게 되는 겁니다. 내가 가는 정당한 길을 초보 운전자가 끼어들면, 그 나쁜 초보 운전자를 향해서 빵빵거리면서, 보복하려고 하는 그런 악한 마음이 우리들에게 드는 겁니다. 저 엉터리 운전을 하는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사고를 당할 뻔한 그런 위험을 당하게 될 때, 그 나쁜 사람을 향해서는 뒤쫓아가서 빵빵거리고, 위협을 하고, 그래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잘못된 생각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이죠. 백화점에 가서 내가 낸 돈만큼 제대로 된 서비스를 해주지 않았을 때, 그 직원들을 향해서 무릎을 꿇리고, 소리를 지르고, 뺨따귀를 때려서라도, 내 권리를 찾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바로 악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악인은 잔인한 자입니다. 왜 잔인해지는가? 내가 정당하고 내가 옳기 때문에 잔인해지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는 언제 긍휼해지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옳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때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심판을 받아야 될 죄인이었으나, 내가 진 그 죄의 대가를 주님께서 대신 지시고 십자가를 지신 그 놀라운 은혜를 받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그런 엄청난 은혜를 받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긍휼의 모습을 보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 잔인함이 나오고 있다고 한다면, 내가 정말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나보다 연약한 사람,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 나에게 잘못했던 사람들을 향해서 내가 화를 내고 욕하고 갑질을 하고, 잔인하게 굴고 있는, 그런 악한 일을 우리가 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될 죄악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구조적이고 정치적이고 강력한 불의의 체계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순응해야만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이거나, 불의한 체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할 것이고, 항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나보다 힘이 없고 연약한 자들, 부족한 사람들, 허물이 많은 사람들, 우리 주변에 있고 우리를 나쁘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한없이 자비롭고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반대로 해요. 반대로 구조적이고 강력한 불의의 체계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면서, 내 곰탕에 고기 몇 개, 몇 점 밖에 들어있지 않은 그 식당 주인을 향해서는, 소리소리를 지르며 욕을 해대는 게, 우리들의 모습인 것이죠. 김수영이라고 하는 시인이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라고 하는 시를 통해서 고백했던 것처럼, 나는 저 정말 나쁜 사람들을 향해서는 한마디 하지 못하면서, 나는 저 야경꾼들에게 화를 내고, 식당 아주머니에게 화를 내고, 일원 때문에 화를 내고 있는, 그런 너무나도 나는 작고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 그런 악한 모습이 우리들에게 있다고 한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강아지에게조차 긍휼을 베푸는 것이 의인이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 강아지보다 훨씬 더 소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그런 우리 이웃들에 대해서, 사랑과 긍휼의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의인의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또 십자가 앞에 나가고, 또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까지 닮아갈 수 있는 그런 훈련들이 되어줄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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