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 강해

긍휼함과 잔인함 (잠 12:10)

인정받는 것과 허세 (잠 12:9) +++ 풍성함의 비결 (잠 1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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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가 잠언서 12장 10절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잠언서 12장 10절 말씀,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의인은 자기 가축의 생명을 돌보는 사람이다”라고 오늘 잠언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가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있어서 짐승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존재인가요? 가축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닭을 기르기도 하고 양을 기르기도 하고 소나 돼지나 염소 같은 것을 기른다면 왜 기릅니까? 가축을 집에서 기른다면 왜 기르죠? 잡아먹기 위해서 기른 것이죠.

제가 어렸을 때 익산군 춘포면 천서리에 있는 우리 큰집에 놀러 가면 거기에 돼지우리가 있었습니다. 그 돼지우리에서 돼지들을 길렀는데, 우리 큰집은 항상 무엇을 먹었냐면 돼지를 잡아가지고 빨간 돼지 김치 콩나물을 넣어서 끓인 국을 1년 365일 아침, 점심, 저녁 단 한 번도 변하지 않고 그걸 먹었는데, 그 맛이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그 기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그게 나오면 제가 제일 좋아해요. 아, 그런데 돼지를 길러서 그 돼지를 잡아 고기를 먹기 위해서 기른 거죠.

우리 사람들이 짐승을 기르는 이유가 있다면, 요즘에는 좀 다르겠습니다마는 대부분의 목적은 그렇게 우리들의 이익을 위해서 기른 것일 겁니다. 잡아먹기 위해서, 팔아서 이득을 얻기 위해서 기른 것이지, 사랑하기 때문에 닭을 사랑하고 돼지를 사랑해서 그래서 기른 것이라기보다는 무엇인가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 가축을 기른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죠. 물론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우리들의 자녀들을 사랑하는 그 사랑과 애정의 강도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죠. 우리 자녀들을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그냥 한없이 쏟아붓는 사랑일 겁니다. 심지어 우리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더라도, 심지어 우리 자녀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부모의 기대를 벗어난다고 할지라도 그런 자녀에 대한 사랑을 우리는 멈출 수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짐승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요. 가축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축의 가장 큰 목적이 있다면 그것을 잡아먹기 위한 것이고, 팔거나 어떤 다른 방식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짐승을 기른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잠언서 12장 10절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의인은 그런 가축의 생명도 어떻게 한다고요? 돌본다. 의인은 가축의 생명이라고 해서 그냥 하찮게 여기고 함부로 대하고, 그런 가축의 생명이라고 해서 그냥 무자비하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 의인은 어떤 사람이라? 심지어 그런 가축의 생명도 정말 귀하게 보고 소중히 여기고 그 가축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돌보는 그런 자가 바로 의인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돌본다고 하는 이 말은, 우리나라 말로 “돌본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는 이 말은 히브리어로는 **“야다(yada)”**라고 하는 그런 원어입니다. 이 히브리어 “야다”라고 하는 말은 어떤 뜻을 가지고 있냐면 “안다”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안다. “내가 안다” 할 때 “야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여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 히브리어 “야다”라고 하는 말은 단순히 우리가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1차적인 의미는 “안다”는 의미지만 그 의미가 넓게 확장되어 성경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 “야다”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사랑한다”, “돌본다”, “아낀다”, “애정을 갖는다” 등등 이런 여러 가지 의미로 확대되어 사용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남자를 알지 못했다”라고 하는 말은 무슨 말이죠? 어떤 처녀가 있는데 “남자를 알지 못했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지식적으로 알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사람 사이의 어떤 성적인 관계로서 그런 관계로 들어가지 아니했다는 것을 나타낼 때 히브리어에서는 “알다”라는 의미의 “야다”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어 단어의 특성만이 아니라 헬라어도 마찬가지고, 헬라어에서는 “기노스코(ginosko)”라는 단어를 쓰고 있는데 그 단어에서도 마찬가지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말에서도, 전 세계의 모든 말이 “알다”라는 단어는 그 의미가 확대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주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들에게 내가 밝히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을 때, 주님께서 알지 못한다는 얘기는 지식적으로 모른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너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다”라고 하는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는 그런 표현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자기 가축의 생명을 알아본다”, “알아준다”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는 것인데요. 의인이 자기 가축의 생명을 알아준다는 말의 의미가 어떤 의미냐면, 우리나라 말은 “돌본다”라고 번역했지만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본다면 어떤 의미로 이해할 수 있냐면 긍휼을 베푼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구절 바로 다음 구절에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라고 하는 말이 나오고 있기 때문에 지금 의인의 긍휼과 악인의 긍휼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고요. 따라서 지금 이 말씀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자기 가축의 생명에 대해서도 돌보는 사람, 자기 가축의 생명에 대해서도 긍휼을 베푸는 사람, 가축에게까지 사랑을 베풀고 인자하고 자비로운 그런 사람이 의인이라고 오늘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천들이라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짐승을 대할 때에도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대해야 된다는 것을 가르치는 말씀이시겠죠. 1차적으로 그런 의미입니다. 오늘날에 보면 종종 사회에 문제가 되는 일들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가는 길고양이나 혹은 강아지들을 학대하는 일들이 있고 그렇게 학대하는 것에 대해서 고발하는 그런 방송들이 종종 나와서 많은 사람의 공분을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짐승들에게 학대를 하고 나쁘게 하는 그 행위가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분노하는 행위가 되어버린 것이죠.

이렇게 된 상황을 우리가 보게 될 때, 아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대부분의 사람은 좀처럼 이해가 잘 안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렸을 때는 짐승을 어떻게 대했죠? 우리가 예전에는 짐승을 정말 우리가 함부로 막대했잖아요? 어렸을 때 제 기억에 보면 닭을 잡을 때 닭의 목을 치기도 하고, 개를 잡을 때 개를 치기도 하고, 돼지를 잡을 때 돼지를 아주 아주 잔인하게 죽이기도 하는 그런 일들이 너무나도 익숙해진 상태에서 그렇게 자란 기억이 있는 우리들로서는, 오늘날 이렇게 짐승들을 애완견이나—애완견이라고 안 하죠?—반려견이나 반려묘들을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아끼고 돌보고 사랑하는 오늘날의 문화를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그런 시대를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경이 뭐라고 가르치고 있냐면 **“가축에게도 긍휼을 베푸는 자가 의인이다”**라고 말해주고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아주 놀라운 말씀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오늘날 반려견이나 반려묘에 대해서 과도하게 하는 그런 방식조차도 정당하다고 말해주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닐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항상 모든 좋은 것들이 과하게 되고 심하게 되면 우상이 될 가능성이 많이 있잖아요? 돈도 우리에게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우상이 될 위험이 있는 것이고, 명예나 권력이나 성공이나 이 모든 것들도 사실 우리에게는 유익한 것일 수 있지만 그것이 과하게 되고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게 될 때는 우상의 자리로 가게 되어버리는 것처럼,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 그리고 함께 생활하는 것은 아주 좋은 것이겠지만 이것이 아주 심한 우상화처럼 되는 그런 경향이 있을 수가 있겠는데, 지나친 단계로 들어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성경 말씀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균형을 좀 잘 잡아야 되겠죠. 옛날 우리가 함부로 짐승들을 대했던 그런 잘못된 습성들을 우리가 버려야 되겠지만, 동시에 이것이 너무 과하게 우상화되는 것과 같은 단계로 넘어가지 아니하도록 적절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아무튼 오늘 잠언서 12장 10절 말씀에서 “가축의 생명을 돌보는 자가, 가축의 생명에게까지라도 이렇게 긍휼을 베푸는 자가 의인이다”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는데, 그런데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이 말씀은 가축에 대한 말씀이 사실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제가 짐승에 대해서 우리가 잘 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먼저 말씀을 드렸지만, 이 잠언서에서 이렇게 가축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들이 가축들에게 긍휼을 잘 베풀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이웃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의인이란 누구냐?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심지어 가축에게조차도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의인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런 의인은 당연히 긍휼을 베풀어야죠. 짐승에게까지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것이 당연해요? 이웃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죠. 그 말을 하기 위해서 이 가축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 심지어 긍휼의 대상이 될 수 없는—제가 서두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가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당시에 이익의 재료였고 먹기 위한 대상이었고 우리의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우리가 기르는 것이지 사랑과 애정의 대상이 아니었던 그런 가축이지만—그런데 의인이라면 그렇게 하찮은 존재까지라도 긍휼을 베풀어야 하고, 의인이라면 그렇게 사람에 비하면 가치가 한참 떨어지는 그런 짐승의 생명까지라도 아끼고 돌보는 것이 그게 당연한 의인이 행해야 될 일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더욱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사람에게는 더 잘해야죠. 이웃들에게 더 잘해야 돼요. 짐승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웃들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바로 의인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짐승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가족 단위 안에 이미 가족 구성원들이 있고요, 이웃집에 이웃 동료들이 있을 것이고 직장에 가면 직장 동료들이 있을 것이고 교회에 오면 같은 믿음의 식구들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한 나라의 일원으로서 전 세계 인류가 모두가 다 우리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야 될 대상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의인은 어떻게 해야 되는가? 사랑과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다. 짐승의 생명조차도 돌봐야 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면, 그 짐승보다도 수천만 배나 고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사랑해야 되고 더욱더 긍휼을 베풀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오늘 잠언서에서는 짐승의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에는 자신의 반려견과 반려묘에 대해서는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사랑을 하면서도 자기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는 안하무인의 태도로 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반려묘나 반려견에 대해서는 그렇게 지극정성을 쏟으면서 다른 인종을 향해서는 경멸과 멸시를 보내기도 하고, 자신과는 다른 상태에 있는 사람들, 자신과는 정반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멸시를 보내고 경멸할 뿐만 아니라 신분이 자기보다 조금 낮다 싶으면 깔보고 갑질하고 아주 무례하게 구는 그런 주객이 전도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반려견이나 반려묘에 대해서 사랑을 베풀고 아끼는 것은 오늘 잠언서 12장 10절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이 의인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짐승들에게 잘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들이 자기 애완견이나 반려견에게 잘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의 것이기 때문에 그래요. 자신의 것이고 자기 가족처럼 생각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강아지나 고양이에 대해서는 지극정성을 보이고 정말 사랑을 보이지만, 그러나 우리 가족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우리 옆집 사람에게는, 쿵쾅거리는 우리 윗집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나의 신경을 거슬리고 있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향해서는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며 욕하고 싸우려 드는 그런 악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는 겁니다.

가축들에게 사랑을 보여주는 것은 그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이 많은 사람이고 의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의 것이기 때문에 이기적인 생각으로 탐욕적인 생각으로 그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지, 사실은 우리 이웃들에게 행하는 그런 모습들을 본다면 그 사람은 의인이라고 할 수도 없고 착한 사람이라고 결코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강아지를 품에 안고 지나가는 거지를 향해서 모욕을 하고 있는 그 사람이 과연 의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의 고양이를 정말 아끼면서 자기보다 공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그 사람이 과연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기는 그 강아지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면서 자기보다 돈이 없는 사람들, 자기 집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멸시하고 천대하는 그 사람이 과연 착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잠언서 12장 10절에서 말하고 있는 이야기는, 가축들에게 잘해야 그 사람이 의인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축들에게도 사랑을 베풀고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사람이라면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사랑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인 것이죠. 의인은 누구입니까? 긍휼을 베푸는 사람입니다.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죠. 우리 이웃들에게, 나와 함께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직장 동료들에게, 그리고 심지어 나를 미워하는 원수들에게조차 사랑과 은혜를 베풀고 긍휼을 베푸는 것이 그게 의인인 것이지 사람들에게 긍휼과 사랑을 베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의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6절에서부터 48절까지의 말씀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 잘해주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나는 참 마음이 착한 사람이야.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 모습을 보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네”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 일은 누구도 할 수 있다. “세리도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누가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조폭도 할 수 있고 김정은이도, 푸틴도, 히틀러도 할 수 있는 그런 일이에요. 나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건 의로운 것이 아니에요.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나를 사랑하고 좋게 해주는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조차도 긍휼한 마음을 가지는 자가 의로운 자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원하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의 사랑의 범주를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미워하는 그 원수까지라도, 나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들에게까지라도 우리의 긍휼과 자비의 마음들이 펼쳐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내가 인격이 뛰어나니까 참아주겠다” 하는 태도로는 곧 밑천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 된 자였으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원수 되었던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나에게 악하게 굴고 나쁘게 구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용서와 사랑, 자비와 긍휼을 베풀 수 있는 용기가 생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 순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씻어주셔서 미워하는 마음들을 제거해 주시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조차 사랑과 긍휼을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12장 10절에서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악인의 긍휼이 잔인하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이것은 악인에게 긍휼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는 말씀이 아니라 악인은 긍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께 약함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완전히 강하십니다. 그 강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것처럼, “악인의 긍휼이 잔인하다”라는 표현은 악인은 정말 잔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잔인해집니까? 그것은 우리가 정의롭다고 생각될 때 잔인하게 됩니다. 내가 잘못이 있다고 생각이 되면 소리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옳다고 판단되는 순간 우리는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항상 염두에 두지 않으면 우리는 이내 악한 모습을 보이게 될 것입니다.

아주 분명한 예가 베드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이 잡혀가실 때 베드로는 나쁜 사람들이 메시아를 잡아간다고 판단했습니다. 자신이 옳기 때문에 칼을 휘둘러도 정당하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대제사장 종의 귀를 내리쳤던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에도 많이 나타납니다. 어떤 죄인이 감옥에 있다가 나왔을 때 수많은 사람이 달려가서 돌을 던지고 사생활을 침해하며 유튜브를 찍습니다. 그 사람이 나쁘다고 판단되는 순간 우리는 그를 향해 폭력을 써도 정당하다는 잘못된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 악마가 되는가? 내가 옳을 때 악마가 되는 겁니다. 엄마 아빠가 옳다고 생각할 때 자녀들에게 악마로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함정이죠.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켰기에 죄를 짓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우리 주변의 악을 행하는 무리들을 향해 비난하고 짓밟아버려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식당에서 내가 낸 돈에 비해 형편없는 음식이 나왔을 때 주인을 향해 욕을 해대고 소리를 칩니다. 내가 가는 길을 초보 운전자가 끼어들면 보복하려 합니다. 백화점에서 서비스가 마음에 안 든다고 직원을 무릎 꿇리고 소리 지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게 바로 악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왜 잔인해지는가? 내가 정당하고 내가 옳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우리는 언제 긍휼해지는가? 내가 하나님 앞에 옳지 않다는 것을 발견할 때입니다. 영원히 심판받아야 할 죄인인 내가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비로소 긍휼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삶 가운데 잔인함이 나오고 있다면 내가 정말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있는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보다 연약한 사람, 힘없는 사람, 잘못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갑질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할 죄악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불의한 체계에 무기력하게 순응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불의에는 항거해야 합니다. 하지만 나보다 연약한 자, 허물 많은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롭고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반대로 해요. 강력한 불의 앞에서는 한마디 못하면서 식당 주인이나 야경꾼에게는 소리를 지릅니다.

강아지에게조차 긍휼을 베푸는 것이 의인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이웃에 대해 사랑과 긍휼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또 십자가 앞에 나가고, 또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우리들의 모습이 하나님의 완전하심에까지 닮아갈 수 있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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