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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아야 하는 이유

– 이국진

우리는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 참지 못한다. 하지만 부당한 대우를 당할 때에도 참아야 한다. 이스라엘의 2대 왕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하여 피난길을 올랐을 때, 부당한 욕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다윗이 권좌에 있을 때에는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시므이가 피난길에 오르는 다윗을 향해 욕을 하며 돌을 던진 것이다. 아마도 다윗은 압살롬 때문에 고통스러웠겠지만, 시므이 때문에 그 고통은 배가 되었을 것이다. 다윗의 충신들이 달려가 시므이를 죽이겠다고 허락을 요청할 때, 다윗은 거기서 참았다.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다.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사무엘 하 16:10).

다윗이 참은 이유는 복수할 시간이나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비록 피난길을 오른 그였지만, 그에겐 명령 한마디면 달려 나아가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충신 아비새가 있었다. 충신들은 이렇게 말했다. “왕이시여, 어찌 저 죽은 개가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사무엘 하 16:9).

오히려 다윗이 참은 이유는 자신의 죄를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충신 우리아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파렴치범이었다. 다윗은 그 죄에 대하여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지만, 그 죄로 인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나단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다.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 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사무엘 하 12:9-10). 아들 압살롬 때문에 피난길에 오르며 시므이의 욕을 들으면서, 다윗이 생각해낸 것은 자신의 죄였다. 자신이 지었던 죄 때문에 자신의 집에 칼이 난무하는 상황을 맞이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를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게 했다고 보았다. 1 그리고 이러한 고난은 자신이 당해야 하는 당연한 심판에 비하면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가 행한 악에 비하면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하다(cf. 욥기 11:6 개역한글). 밧세바와의 죄로 인하여 당연히 받아야 할 처벌은 다윗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을 살리셨다. 대신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다윗이기에, 시므이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틀란타에 있는 콜롬비아 신학교 상담학 교수인 존 패턴은 [인간의 용서가 가능한가?]라는 책에서, 용서는 발견되어지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가해자라는 사실을 발견해야 하고, 나도 주님의 용서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첫 단계라고 말한다. 2) 넓은 아량을 소유한 사람이기에 참는 것이라면, 오래갈 수 없다. 나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줄 수 있는 넓은 아량이 있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참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참는다면, 7번은커녕 3번도 반복해서 참을 수 없다.

1987년 여름에 나는 주일학교 전도사였다. 지금은 널려있는 에어컨이 그때에는 없었다. 선풍기 몇 대 켜놓고, 여름 성경학교를 했었다. 교회당을 가득 메운 주일학교 학생들은 율동과 찬양, 그리고 인형극 등 재미있는 프로그램들로 신났지만, 더위는 짜증나는 요소였다. 선풍기 바람을 쐴 수 있는 자리는 명당자리로 아이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난리였다. 그러다가 두 아이가 싸우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선풍기는 하나뿐인데, 모두가 좋은 자리에 앉을 수는 없구나. 누가 자리를 양보할래?” 그러자 힘이 꽤 있어 보이는 녀석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제가 양보할래요!” 나는 그 아이의 모습에 감동했다. 어린이는 천사와 같다는 말도 생각났다. 하지만 몇 분 뒤에 다시 그 자리에 갔더니, 다시 서로 싸우고 있었다. 그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까 내가 양보했으니까, 이번에는 네가 비켜!”

용서와 참음의 동기가 다른 사람을 향해 베푸는 넓은 아량에 불과할 때,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으로부터의 반대급부를 기대하면서 베푸는 용서와 사랑은 불완전해질 수밖에 없다. 참는 것에는 뿌듯한 무엇인가가 있다. 내가 참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될 때, 우리는 자부심이 생긴다. 3 그래서 한편으로는 참고 용서하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멋진 것”이기도 하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멋진 요소”에 매료되어 참게 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멋짐”의 무게보다 “고난”의 무게가 더 나갈 때, 즉 고난이 인내 속에 있는 멋짐의 인계점을 초과할 때, 우리는 폭발하게 된다. 용서의 참음의 동기가 그 “멋짐”의 요소에 근거한다면, 끝까지 오래 참을 수는 없다. 아무리 강한 고무줄이라 할지라도, 너무 무거운 짐을 달아놓으면 끊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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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유진 피터슨,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IVP, 1999), p. 231.[]
  2. John Patton, Is Human Forgiveness Possible? (Nashville: Abindon Press, 1985[]
  3. C.S. 루이스는 “미덕이란 인간 스스로 그것을 가졌다고 의식하는 순간에 위력이 떨어진다”고 간파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홍성사, 2000)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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