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언서 19장에 나와 있는 두 절, 11절·12절의 말씀을 통해서 ‘분노와 용서’라는 주제로 함께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9장 1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요.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일까요? 노하기를 빨리 하지 않고 더디 한다는 말, 노하기를 더디 해야 슬기라고 했으니까 분노할 때 바로 분노하지 않고 조금 시간을 두었다가 분노하면 그게 슬기라는 의미일까요? 빨리 분노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시간을 두고서 천천히 나중에 분노하면 그게 지혜로운 것이라는 의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성급하게 분노하지 않고 조금 기다렸다가 시간을 가졌다가 분노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그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말 다음 행에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라고 덧붙이고 있기 때문에,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은 건가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으로 다시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설명드린 것처럼 잠언서는 히브리 평행법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 행과 두 번째 행이 같은 내용을 반복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도 하고, 다르게 표현하거나 발전시켜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노하기를 더디 한다’는 말은 성급하게 노하지 않고 천천히 생각해 보고 나중에 노해도 괜찮다는 의미가 아니라, 용서한다, 노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 슬기 있는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분노할 만한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죠? 오늘도 분노할 만한 일이 있었나요? 아마 많이 있었을 겁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하루 생활을 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그 순간까지 사람들을 만나며 마음에 맞지 않아서 답답하고 분노할 만한 상황들이 많이 생기기 때문에, 우리 마음 가운데 분노할 일들을 많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분노가 가득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을까요? 마음속에 분노가 생겼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일까요?
분노의 감정이 생기면 바로바로 화를 쏟아내는 것이 좋을까요? 좋지 않은 것이죠. 분노의 감정이 생길 때마다 화를 쏟아내는 사람을 가리켜 뭐라고 하죠? 야만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야만인은 누구입니까? 교육받지 못하고 성숙하지 못한 사람, 미숙한 사람을 말합니다. 교양되지 못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 바로바로 분노를 쏟아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내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은 옳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인격적으로 성숙한 반응을 내보이는 것이 교양 있는 사람입니다. 상황 속에서 감정대로가 아니라 생각해 보고 적절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적으로 분노하거나 보복하려 하지 말고 공적 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맞습니다. 억울하고 손해를 보았다고 느낄 때, 내 화를 쏟아내고 폭력을 휘두르며 사적인 보복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일은 법과 절차, 재판관의 판단 등 공적 절차를 통해 해결해야 합니다. 누군가 내 돈을 떼먹고 갚지 않으면 멱살을 잡는 것이 아니라 법적 절차로 해결해야 하고, 누군가 내 명예를 훼손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때리며 분노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를 활용하는 것이 교양인의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공적 시스템이 정의롭고 공정하게 작동해야 합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사회는 무법천지가 되고 삶은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분노라는 감정 자체를 아예 없애려는 것은 바른 해법이 아닙니다. 많은 종교가 감정 소멸을 목표로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분노를 포함한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이 주신 생존과 정의 감각과도 연결되어 있어 긍정적 요소가 큽니다. 우리가 무서움을 알기에 조심하고, 불편을 알기에 발전을 도모하며, 분노가 일어나는 것은 공평과 정의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감정 자체를 없애는 것이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감정이 생겼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생산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표출해야 합니다. 사적 보복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오늘 잠언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가 슬기로운 자요, 허물을 용서하는 자가 영광을 얻는다.” 그리스도인은 내 마음에 분노가 가득하다고 해서 사람들에게 화를 내는 대신, 용서하고 절제하는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허물을 용서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바르(avar, 지나가다/간과하다)의 뉘앙스를 담고 있는데, 곧 상대의 잘못을 일일이 따지지 않고 지나가 준다는 뜻입니다. 잘못을 집요하게 파고들기보다 덮어 주고 용서해 주는 것, 이것이 지혜요 영광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왜 우리가 분노가 일어났음에도 화를 내거나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 분노를 참고 용서하는 것이 지혜일까요? 분노의 표출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키기 쉽기 때문입니다. 분노는 가정을 깨뜨리고, 자녀의 마음을 닫게 하며, 교회를 파괴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분노는 **말(혀)**을 통해 나오는데, 혀의 파괴력에 대하여 야고보서 3장 2–6절은 분명히 경고합니다. 작은 불이 큰 숲을 태우듯이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분노로는 문제를 고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내 말로 분노가 나가지 않게 하시고, 사람들을 상처 주지 않게 하옵소서.” 잘못된 것을 어떻게 바로잡을까요? 우리는 흔히 분노로 고치려 하지만, 사실 분노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자녀에게 분노하면 아이는 혼나지 않는 법을 연구할 뿐, 마음이 변하지 않습니다. 공부를 안 하는 자녀가 책상에 앉아 있어도 무서워서 앉아 있는 것이지 공부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변화는 분노가 아니라 사랑으로 일어납니다. 복음으로 마음을 다루어,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바꾸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 줄 때 사람이 변합니다.
잠언 19장 12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왕의 노함은 사자의 부르짖음 같고, 그의 은택은 풀 위의 이슬 같으니라.” 왕이 분노하면 사자가 으르렁거릴 때처럼 모두가 숨고 도망가 버립니다. 겉으로는 명령이 관철되는 듯해도 실효성이 없습니다. 그러나 왕이 은총을 베풀면, 그 은총은 이슬과 같아 풀을 무성하게 자라게 합니다. 사랑이 문제를 해결하고 사람을 세우며 열매를 맺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왜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까? 왜 분노하지 않고 사랑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만 심판하셨다면 진즉 망했을 우리를,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뿐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구원하셨습니다.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손을 내미는 믿음의 결단을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노하기를 더디 하는 슬기와 허물을 용서하는 영광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