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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오래 참는 것에서 시작한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귀엽고 사랑스런 두 딸을 가진 어느 목사님의 가정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두 딸이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본 사모님은 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두 아이를 앉혀놓고 성경을 집어 들었다. 고린도 전서 13장 1 말씀을 읽고, 그 아이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을 훈계할 작정이었다. 아이들도 성경을 펴게 하고, 고린도 전서 13장의 말씀을 읽어 나갔다. 너희들은 왜 서로 사랑할 줄 모르느냐? 훈계하면서 아이들을 가르칠 요량이었다. 하지만 “사랑은 오래 참고”를 읽는 순간, 사모님은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이들을 대하여 오래 참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아이들을 훈계하기는커녕 거기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30여분 동안 훈계는 하지 못하고, 두 아이들을 붙들고 울었다고 한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단순히 좋은 말씀이구나 하면서 마음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구절이 아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사랑의 15가지 특성을 모두 살펴보기도 전에, 우리는 첫 번째 구절에서 막힌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오래 참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같은 죄(잘못)에 대해서 얼마나 오래 참고 용서할 수 있을까? 1세기 유대교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요마(Yoma) 2 라는 글에서 같은 죄(잘못)에 대해서 3번까지 용서한다면 충분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3 이러한 생각에 비하면, 7번까지 용서하면 어떠하냐고 물었던 베드로의 생각은 훨씬 더 마음이 넓은 것이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말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베드로였기에 가능했던 생각이 아니었을까? 유대인들의 생각에 숫자 7은 완전함을 나타내는 수였다. 그러니 같은 죄(잘못)에 대하여 7번까지 용서한다면, 완전하게 용서했음을 충분히 드러내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7번뿐만 아니라,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여야 한다고 베드로에게 대답했다(마 18:22). 4  예수님의 의도는 70번씩 7번 즉 산술적으로 정확하게 490번까지 용서하라는 의미보다는, 무한대로 용서를 해야 한다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문학적 방편이었다. 5

바울 사도가 쓴 사랑에 관한 15가지 서술에서, 첫 번째로 오래 참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무한대로 용서하라는 말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신약 학계에서 바울과 예수의 차이점에 대해서 많은 강조점이 있었던 시기가 있었다. 6  반면 바울과 예수 사이의 공통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덜 조명되었던 것 같다. 살펴보면, 같은 점이 훨씬 더 많은데도 말이다. 용서(=오래 참음)에 관한 가르침은 바울과 예수 사이에 일치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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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고린도전서”는 기독교를 전파하였던 최초의 선교사라고 할 수 있는 바울(Paul) 사도(使徒)가 그리스(Greece)의 한 항구도시였던 고린도(Corinth)에 있는 교우들에게 쓴 첫 번째 편지를 말한다. 이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의 잘못들에 대해서 책망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 편지의 13번째 장(章)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이 책은 바로 이것을 풀이하는 것이다.[]
  2. 요마(Yoma)는 유태인들의 지혜가 담긴 탈무드(Talmud)의 한 장(章)이다.[]
  3. D. Hagner, Matthew 14-28, 537.[]
  4. 예수님의 말씀은 77로도 번역할 수도 있고, 70번씩 7번으로도 번역할 수도 있다. 그 정확한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은 용서를 무제한으로 하라는 의미이다[]
  5. 구약에서 라멕이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하여 참지 못하고, 더 심한 보복을 한 것을 정당화하면서 70*7이란 숫자를 사용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창세기 4:24).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라멕이 사용했던 70*7이란 숫자와 대비되는 의미에서 이 숫자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들이 복수를 무제한으로 하길 원하였던 것과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용서하고 참는 것을 무제한으로 하길 원하셨다는 것을 여기서 볼 수 있다. Cf. John Nolland, The Gospel of Matthew, 755.[]
  6. 이러한 것을 “바울과 예수의 문제”라고 종종 부르는데, 독일의 신학자 브레데(Wrede)가 쓴 Paul이란 책으로부터 문제제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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