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매일성경 사건 –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

성서 유니온에서 발행하는 <매일성경> 청소년 판에 나온 비유 해석을 두고 시끌벅적하다. 결국 독자들의 반발에 밀려, 성서 유니온은 저자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연재를 중단하는 결정을 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논란이 되는 것일까 궁금하던 차에, 그 해석을 입수하게 되었다.

그 글은 재미 경제학자 김재수 교수가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에 대해 쓴 글이었다. 그의 요점은 이렇다. (1) 주인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전통적인 해석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비유가 될 수 있다. (2) 하지만 품꾼의 입장에서 이 비유를 읽는다면, 공평한 계약을 맺을 수 없었던 품꾼들이 불공평한 계약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드러내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필요한 것을 모두에게 주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이러한 비유 해석이 이미 신약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해석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물론 청소년들을 위한 말씀 묵상집에 아직 타당한 해석으로 인정받지 못한 해석이 여과 없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에 익숙했던 한국 교회 성도들, 특히 매일성경을 통해 전통적인 말씀 해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이 일에 대해서 약간의 논평이 필요할 듯 하다. 적어도 비유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말이다.

+

+

1. 김재수 교수의 주장은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경제학자로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고 있으면서 또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의 문제, 그리고 분배의 문제, 공평함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시스템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은 그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시스템을 통째로 흔들어버린다면 그 누구도 좋아할 리 없다.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시스템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고, 너무나도 사악한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그 시스템을 고쳐보려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반발할 것이다. 사실 시스템과 우리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이기 때문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삶의 방식, 이 세상의 시스템에 그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옳지 않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질문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재수 교수의 문제 제기는 크리스천들에게 고민할 거리를 준다. 도대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필요한 것을 모두에게 주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한편으로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 많이 수고한 자가 더 많이 받는 것은 공평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충분히 일할 수 없었고 그렇게 일하지 못했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삶이 불가하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일한 만큼만 보상을 해주는 게 옳지 않다. 긍휼을 베푸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이 세상의 관점과는 다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2. 하지만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김재수 교수는 많은 허점을 보였다. 과연 1세기 품꾼이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받은 것은 불공정한 일이었을까? 물론 포도원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이익을 주인이 독차지하면서, 일꾼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의 품삯만을 준다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1세기 상황에서, 그는 아주 자비로운 주인이었음에 틀림 없다. 1 데나리온은 결코 부당한 액수가 아니었다. 더 나아가 그 주인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1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는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품꾼은 을의 입장이었지만, 결코 을처럼 대접받지 않았다.

김재수 교수의 실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에 투영하였다는 데 있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이 오늘날 유행하는 트렌드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바른 해석은 아니다. 신천지의 비유 해석이 작위적인 만큼, 김재수 교수의 해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를 화두로 삼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도 있다. 꼭 원래의 목적대로만 사용하란 법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화두로 사용한 것뿐이지, 그 비유에 대한 바른 해석은 아니다. 화두를 해석이라고 우기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3. 비유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가능하다. 첫 번째 접근법은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귀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무슨 목적으로 하셨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 복음서에서는 왜 이 비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접근법은 본문을 읽고 오늘날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비춰줄 수 있는 교훈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자의 접근법은 결국 전자의 방법을 외면한다. 후자의 접근법은 김재수 교수의 접근법이고, <매일성경>에서 기대하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불편한 것이다.

4. 김재수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식 비난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적어도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세상이라는 낯선 곳에서 하나님의 시민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성경을 읽어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했을 뿐이다. 물론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성경의 큰 그림과 일치하는 면이 많다. 그리고 우리들이 많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기에 새겨 들어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구원의 이야기를 말하려고 했던 초대교회 교부들의 억지스런 해석과 닮았을 뿐이다.

비유에 대한 책을 써놓고 천천히 웹버전 <땅의 이야기로 들려주신 하늘이야기, http://bit.ly/예수님의비유>로 올리고 있는 중인데, 마음이 더 급해졌다. 빨리 완성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더 커졌다.

+

연관 글 – 매일성경 사건 – 달란트 비유

+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