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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4 게으름

– 이국진

다른 두 종들과는 달리,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일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땅에 감추어 두었을 뿐이다. 지금 주인이 없는데, 그 주인을 위해 충성을 할 이유가 그에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인이 자신에게 한 달란트를 맡긴 이유를 생각하지 않았다. 만일 그 이유를 생각하였다면, 땅에 감추어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한 달란트를 맡긴 주인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주인이 그를 믿어주었고,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생각하였더라면, 그는 돈을 땅에 감추어둘 수 없었을 것이다. 이미 그 종과 주인의 관계는 깨어져 있었다. 그는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굳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마 25:24). 그런 주인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수많은 방법 가운데 땅에 묻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아직 은행 시스템이 오늘과 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땅 속에 돈을 감추어두는 것이야말로 돈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랍비의 법에 의하면 다른 사람의 재산을 맡은 자가 곧바로 땅에 묻었다면 잃어버렸다 할지라도 배상의 책임이 없었지만, 맡은 재산을 땅에 묻지 않았다가 잃어버리면 신중하게 보관하지 않았다는 책임을 물어 배상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1

하지만 주인은 그 종을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어쩌면 억울한 평가처럼 들릴 수도 있다. 주인이 돈을 맡기고 떠났고, 그 돈을 정확하게 단 한 푼도 잃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여 돌려준 종은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것만을 하고 거기서 멈추어버렸다. 그는 그 이상의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달란트를 활용하여 장사를 하고, 모험을 하고, 수고를 하여 몇 배로 불리는 일은 시도하지 않았다. 그냥 땅에 감추어두기만 하면, 나중에 다시 그대로 주인에게 돌려줄 수 있는데 왜 그런 수고를 한단 말인가?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 자녀를 위해서 돈을 벌고 음식을 먹이고 옷을 입혀주면 그것으로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는가? 아니다. 부모는 자녀를 위해 불필요한 수고까지 기꺼이 수행한다. 오늘 저녁 피자 한 판 시켜서 자녀들을 먹이는 것으로 내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녁 한 끼를 제공할 때, 자녀들의 건강을 생각하고, 자녀들의 행복과 웃음을 생각하고, 자녀들이 그 식사를 하면서 어떤 마음의 자세로 먹게 될 것인지도 생각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에게 부족했던 것은 사랑이었다. 주인은 그에게 사랑의 대상이 아니었다. 자신을 억압하는 주인일 뿐이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추궁을 피하기 위하여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두었을 뿐이다. 주인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모든 것들은 기쁨이 되지 못했다. 달란트는 그에게 그저 부담이었을 뿐이다. 주인을 위해서 열심히 일한 대가가 무엇일까? 그것은 5달란트를 더 받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은 늘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 있어서 가장 지혜로운 것은 주인이 자신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무능함을 보여야만 했다.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은 더 많은 일(다섯 달란트)을 부여받는다.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이 두려운 것이었고,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그것이 기쁜 것이었다.

이사야 선지자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 그들은 율법의 규정에 따라 번제를 드렸고, 안식일과 월삭을 지켰다. 만일 율법의 규정을 가지고 이들이 철저하게 종교생활을 했는지를 평가한다면, 100점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놀랍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1-14)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 그대로 문자 그대로 100% 철저하게 지키는 것만으로 만족하시지 않는다. 100%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은 그 이상을 원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원하셨다.

영적인 게으름이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부재에서 나온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을 악하게 보았다. 주인은 그 종에게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일뿐이다. 여기서 주인을 향한 충성심은 기대할 수 없으며, 그에게서 근면을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물질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그 사랑을 온전한 헌신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라면, 그 두려움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헌신으로만 나타날 뿐이다.

십일조를 드리고 감사의 예물을 드리고 주일을 성수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열심히 읽고 전도를 열심히 하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마음의 동기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아니라,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두려움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게으름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의 헌신이 아무리 산술적으로 크다 해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은 헌신은 부족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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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요아킴 예레미아스,『예수의 比喩』(분도출판사, 1974),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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