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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3 신실함

– 이국진

주인은 종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떠났다(마 25:14-15). 종들은 주인 없는 세상에 놓이게 된 것이다. 주인 없는 세상에서 종들은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건축업에 종사하는 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의 고충은 작업의 현장을 도무지 비울 수 없다는 데 있었다.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일당을 받기로 하고 온 일꾼들은 도무지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인부를 시켜 일을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주인이 없는 그곳에서, 신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찾는 것은 참으로 어렵기 때문이다.

종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홀연히 길을 떠나버린 주인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고선 어디론가 사라지셨는가? 결코 그러실 수 없다. 하나님은 편재(遍在)하신 하나님으로(시 139:7-10; 렘 23:23-24), 우리가 어디 있든지 하나님의 부재(不在)란 결코 생각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주인에 비교되는(compared) 것이 아니라, 대조되고(contrasted)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하나님은 마치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장소를 특별하게 방문하시는 것처럼 표현하기도 하고, 다른 곳이 아닌 어떤 특정 장소에 임재하신다고 표현하기도 한다(출 25:22; 삼상 4:4; 요 14:23; 롬 8:9-10; 고후 3:17).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로부터는 멀리 계시다고 표현하기도 한다(잠 15:29; 사 59:2). 그렇다면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여행을 떠났다는 것은, 편재하신 하나님께서 마치 부재하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상황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종종 이 세상은 마치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또한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사정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생각될 때도 있다. 달란트 비유 속의 종들처럼,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는 상황 속에 던져져 있다. 1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존재가 생생하게 느껴지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가지고 충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겠다”고 하신 주님(행 1:11)을 기다리며 산다는 점에서, 달란트 비유의 종들과 같은 처지이다. 주님께서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심에도 불구하고(마 28:20),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바로 그 주님의 다시 오심과 그 이후에 심판이 있음을 나타내는 비유가 달란트의 비유이다.

주인이 떠난 후,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두 달란트 받은 종도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를 남겼다. 주인이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도, 그들의 삶은 달라지지 않았다. 주인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주인이 없을 때에도 성실하게 일을 하였다.

이들이 성실하게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의 비유에서 직접적으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이유는 상상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다. 우선 이들은 주인이 돌아올 것을 알았고, 그 후에는 결산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그래서 그때를 기억하면서 현재에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달란트의 비유에서 우리에게 교훈하고자 하는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있으며, 그때에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회계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지금 이 상태의 세상이 그대로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에서 속히 벗어나야 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라는 메시지는 지금 이 순간에 우리가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

미래는 현재의 삶을 지배한다. 미래에 대한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현재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 세상이 지금 이 상태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의 삶과 하나님의 심판이 마지막 날에 있을 것을 기억하는 사람의 삶은 전혀 다르게 나타날 것이다.

그런데 주인의 복귀가 늦어질수록 주인이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차츰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주인이 곧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생생하겠지만, 주인이 돌아오지 않는 상황이 반복되면 마치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주인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는 점이 왜 그렇게 성실하게 일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대답으로서는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이들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이유를 찾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성실하게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이 자신들에게 어마어마한 분량의 달란트를 맡겼다는 사실에 있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이 비유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은 주인이 종들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분량의 달란트를 믿고 맡겼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주인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었다. 그래서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하기 때문에 신실하게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나를 인정하고 믿어주는 주인을 위해서라면 그의 목숨을 내 놓아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라헬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그와 결혼할 날을 기대하면서 7년을 수일같이 여겼던 야곱처럼(창 29:20), 주인의 은혜를 기억하는 사람은 수년 동안을 묵묵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일할 것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주인에 대한 관점은 예수님의 비유 속에 표현되어 있지 않지만, 적어도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이 주인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관점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는 주인을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굳은” 사람으로 생각했다(마 25:24). 여기서 “굳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집트의 바로 왕처럼 “마음이 완악한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성경에서 이 표현은 주로 악인에게 사용되는 표현이었지, 결코 하나님에게 사용된 표현은 아니었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이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주인에 대한 관점이 그랬다. 다섯 달란트 받았던 종과 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똑같은 관점으로 주인을 보았다면, 그들도 역시 성실하게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서 성실하게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유에서 분명하게 밝히고는 있지 않지만, 이익을 남긴 두 종이 주인에 대하여 가지고 있었던 관점은 세 번째 종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과는 전혀 달랐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실하게 일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동력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많이 받은 존재인가를 깨닫는 데서부터 가능하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가(indicative)에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imperative)로 옮겨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의 찬미를 돌려야 하는 것이다(엡 1:3-14). 충성을 다하지 않으면 나중에 책망을 받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너무 크기 때문에 감격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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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최갑종 교수는 이 비유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예수님의 일시적인 떠남과 재림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주인은 인자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종들은 예수님의 종들을 가리킨다고 보았다.『예수님의 비유: 본문, 해석 그리고 설교/ 적용』(이레서원, 2001), 217-218. 하지만 마 25:14는 25:1과 직접 병행연결되는 것으로, 종말에 관한 비유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따라서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종들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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