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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 결산

– 이국진

오랜 기간이 지난 후 주인이 돌아와 종들과 함께 결산을 했다. 이 비유는 모두 언젠가 하나님께서 마지막 결산을 하실 때가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이 비유의 유사점이 있다. 종들에게 돈을 맡긴 주인은 언젠가 다시 돌아와서 결산할 때가 있다는 사실은 언젠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가 있을 것이라는 영적인 진리를 가리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판단하시는 기준이 무엇일까? 이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달란트를 많이 남겨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 쉽다. 장사는 남기는 게 목적이고, 남긴다면 많이 남기는 것이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긴 종을 주인이 칭찬했을 뿐만 아니라, 한 달란트를 그대로 가져온 종을 향해서 은행 이자라도 가져왔어야 했다고 책망했지 않은가? 결국 마지막에 한 달란트는 가장 많은 것을 남긴 열 달란트를 가진 자에게 주지 않았는가? 이 비유를 읽으면서 우리는 주인의 최대 관심사는 돈을 가장 많이 남기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도 그런 주인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도 우리가 실적을 많이 올리면 올릴수록 좋아하실 것이다. 전도를 한 명만 한 사람보다는 수많은 사람들을 전도한 사람을 하나님이 더 좋아하실 것이고, 헌금을 더 많이 드린 사람을 하나님은 더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나라에 가면 겨우 구원을 받은 사람은 개털모자만 주어질 것이지만, 전도도 많이 하고 하나님 앞에 최고의 헌신을 한 사람들은 영광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천국의 상급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1)

하지만 바로 이점이 이 세상의 주인이 하늘의 하나님과는 다른 대조점(tertium contrarietatis)이다. 이 세상의 주인에게는 종의 인격보다 돈이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돈을 더 많이 남기는 자를 좋아할 것이고, 종을 판단하는 기준도 그 종의 효용성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다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에 비교되는(compared) 것이 아니라 대조되고(contrasted) 있다. 이 비유를 읽으면서 하나님도 우리의 효용가치를 중요하게 보고, 우리가 얼마나 탁월하게 성과를 발휘하는가에 따라서 우리를 대우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 비유를 크게 오해한 것이 될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가 남기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엇인가가 부족해서 우리의 섬김이 필요한 분이 아니라, 오히려 친히 온 모든 사람들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다(행 17:24-25). 하나님은 우리들을 앵벌이 시켜서 돈벌이를 해야 하는 거지 왕초와 같은 분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을 오해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비유를 만드셨다. 우선 주인은 종들을 칭찬할 때, 종들이 남겨온 달란트 그 자체를 보면서 칭찬하거나 흥분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구나. 다섯 달란트를 더 남겨오다니, 아주 잘했어!”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남겨온 달란트의 액수에 초점이 가는 식의 칭찬을 하지 않았다. 주인의 반응은 정확하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인의 칭찬은 종의 착함과 신실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2 주인이 맡긴 적은 일에 신실하게 반응하였다는 사실이 칭찬의 내용이다.

더 나아가서 주인은 다섯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나 두 달란트를 남긴 종에게 똑같은 칭찬을 한다. 이 세상의 법칙은 1등만 기억되고 2등은 기억되지 않는 법인데, 주인은 두 명의 종들을 향해서 똑같은 칭찬을 하고 있다. 남긴 분량은 달랐지만, 그들은 똑같은 신실함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똑같은 칭찬을 받을 만 했다. 3

마지막으로 신실하지 못했던 종을 향해서 책망하는 그 책망은 읽기에 따라서는 돈에 혈안이 되어 있는 주인의 모습으로 읽혀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른 방향에서 그 책망을 읽는다면, 그 책망은 돈을 배로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에서부터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적어도 최소한의 신실함을 보여주었어야 한다는 호소에 가깝다. 악한 종은 주인을 미워했고 주인에 대한 삐뚤어진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종들처럼 열심히 일할 수는 없었다. 그게 마지막 종의 변명이었다. 주인의 책망은 설사 네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그 돈을 은행에라도 맡겨두어 주인에게 이자라도 줄 수 있는 정도의 최소한의 신실함의 모습이라도 보여주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책망이다.

결국 이 비유의 초점은 종들의 탁월함이 아니라, 신실함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창작하시면서 의도적으로 초점을 변경시키신 것이다. 하나님은 돈 밖에 모르는 이 세상의 주인과 닮지 않고, 우리들의 신실함을 요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장치였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우리를 탁월함이 아니라, 신실함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자신들의 탁월함을 보이면서 나올 것이다.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마 7:22) 선교 사역의 결과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교회당 건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전도의 열매들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십일조와 헌금을 했던 기록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아가면서, 이 정도면 개털모자가 아니라 면류관을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주님의 대답은 놀랍다.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얼마나 방언을 유창하게 했는가, 얼마나 많은 귀신들을 내어 쫓았는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을 이 세상에서 보여주었는가가 아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신실했는가를 보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찾으신다. 때로는 수고하고 애썼지만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할 수도 있다. 부흥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리 신실한 목회자라 할지라도 시골 지역에서 그저 몇 명의 성도들만 데리고 목회해야 했을 수도 있다. 아무리 신실한 선교사라 할지라도 이슬람 지역에서 개종자 한 명 만들지 못한 채 몇 년을 보내야 했었을 수도 있다. 주변에서 엄청난 결과를 보여주는 사역자들을 보면서, 왜 나는 저렇게 하지 못하는가 하고 자괴감에 빠질 때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러려고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는가 하면서 한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과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신실함을 보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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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권성수,『천국의 상급』(선교휏불, 2001[]
  2. 존 맥아더,『하나님 나라의 비유』(생명의 말씀사, 2015), 210; 최갑종,『예수님의 비유: 본문, 해석 그리고 설교/ 적용』(이레서원, 2001), 220.[]
  3. 배용덕,『예수님의 비유』(서울신학교),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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