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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 우리의 기도를 대하는 하나님의 태도

– 이국진

이웃집에 가서 떡을 달라고 요청하면 그 어떤 이웃이라 할지라도 떡을 100% 줄 것이라는 당시의 문화를 비유로 사용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계속해서 주옵소서”(τὸν ἄρτον ἡμῶν τὸν ἐπιούσιον δίδου ἡμῖν τὸ καθ᾽ ἡμέραν)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눅 11:3). 1 주기도문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양식을 제공해주는 분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인데, 바로 연이어서 예수님은 이웃집 사람에게 떡을 달라고 요청하면 반드시 떡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에게 양식을 제공해주시는 분임을 가르치신 것이다.

이 비유에서 여러 개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우리는 떡을 빌리러 가는 사람을 닮았다. 무엇인가 부족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는 우리들처럼, 비유에서 떡을 빌리러 가는 사람은 한 밤중에라도 떡을 빌리러 가야만 했다. 둘째, 하나님은 이웃집 사람과 닮았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어떤 요청이든지 응답할 수 있는 하나님처럼, 이웃집 사람은 떡을 빌리러 온 사람에게 떡을 빌려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셋째, 우리의 기도는 떡을 달라고 요청하는 행위를 닮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처럼, 떡이 필요했던 사람은 이웃집에 찾아가 떡을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유사점들이 있기 때문에 비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유를 읽으면서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우리에 대한, 더 나아가 기도에 대한 잘못된 결론을 내리기 쉽다. 유사점을 정확하게 짚어내지 못할 때 그렇게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들으시고 또한 그 기도에 응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점에서, 이웃집 사람과 비유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웃집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없다. 하나님은 이웃집 사람이 밤중에 잠을 자는 것처럼, 주무시거나(시 121:4; cf. 왕상 18:27) 2 우리의 사정을 알려주어야만 그때서야 우리의 필요를 아는 분은 아니시다(마 6:32). 그런데 만일 이 비유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해야만 그때에서야 우리의 사정을 알게 된다고 결론을 내린다면, 그것은 비유를 잘못 해석한 것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구하기 전에 이미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마 6:8).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이웃들과는 다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우리가 조르고 떼쓰듯이 간청하며 기도해야만, 겨우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라고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된다.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는 말씀은 하나님도 간청함에 의해서만 움직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3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라는 단어를 “수치” 혹은 “뻔뻔스러움”으로 번역해서, 하나님도 수치를 당치 않기 위해서 겨우 체면치레로 응답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 된다.

기도의 본질은 기도자의 끈질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있다. 이 비유에서의 초점은 기도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에게 있다. 4 우리가 끈질기게 요구하면 결국에는 그 간청에 못 이겨서 하는 수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이 많으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기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응답되는 것이다. 이웃집에 온 손님을 대접할 필요가 있을 때, 이웃집 사람이 일어나 마치 자신의 집에 온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여 음식을 제공할 뿐 아니라 그 외에도 더 필요한 것이 있는지 살펴서 더 주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들도 그러할진대, 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와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우리가 가져야 할 확신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요일 5:14-15)

하나님은 이웃집 사람과 비슷한 면도 있지만 전혀 다르시기도 하다. 이웃집 사람이 떡을 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은 이웃집 사람과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웃집 사람에 비유되고(compared)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웃집 사람을 전혀 닮지 않은 면도 있다. 이웃집 사람이 밤중에 일어나서 떡을 주는 내면의 동기는 “끈질김(persistence)” 때문이라든지 혹은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라든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들에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이유는 사랑이 많고 인자하신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웃이 강청하니까 혹은 동네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할까봐 두려워서 억지로 할 수 없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웃집 사람에게 비유되는(compared) 것이 아니라, 대조되고(contrasted) 있다. 5

그냥 이웃집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내면의 동기가 어떻든지 간에 결국 응답한다면, 하물며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귀를 닫아버리고 응답하지 아니하겠는가 하는 것이 이 비유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던 경중법(輕重法, qal wahomer)을 사용해서 하나님과 기도에 대한 논증을 하고 계신 것이다. 경중법이란 작고 하찮은 것에서 진리라면 그것보다 더 크고 중요한 것에서는 얼마나 더 진리이겠는가 하는 식의 설득방법이다. 그냥 이웃집 사람도 응답되는 것이 100%라고 한다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은 얼마나 더 잘 응답하시겠는가?

우리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6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기 싫지만, 하도 졸라대니까 혹은 귀찮게 하니까 하는 수 없이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이웃은 문을 두드리는 간청함에 못 이겨 떡을 줄 수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매정한 사람이라는 수치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 떡을 줄 수도 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의 마음속은 모른다는 우리 속담처럼, 떡을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결론은 어쨌거나 주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 사이에서도 요청하는 것이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여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롬 8:32).

우리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무런 답장도 없을 때, 과연 내가 보낸 그 편지가 제대로 잘 배달되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도 어쩌면 그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게 될 때가 많다. 과연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듣기나 하실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사 40:27). 하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항상 응답하실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은 그러니까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기도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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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이 기도문에 사용된 헬라어 동사는 현재 명령형(present imperative)으로 계속적으로 줄 것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일용할”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불분명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이란 의미가 될 수도 있고, “매일의”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고, “오늘의”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다. Cf. Fitzmyer, The Gospel According to Luke X-XXIV, 904-906.[]
  2. 홍창표,『하나님 나라와 비유』, 304.[]
  3. 김성수,『십자가로 읽는 예수님의 비유』(미스바, 2011), 56.[]
  4. Liefeld, “Parables on Prayer,” 241.[]
  5. 권성수 목사도 이러한 대조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 권성수,『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207.[]
  6. Liefeld, “Parables on Prayer,” 25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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