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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아나이데이아

– 이국진

한국 말 성경에서 “간청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단어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는 신약성경에서 단 한번만 사용된 단어(hapax legomenon)로 정확하게 번역하는 것이 쉽지 않다. 대부분의 성경 역본들은 이 단어를 “끈질김”(importunity) 또는 “뻔뻔함, 수치를 모름”(shamelessness)의 뜻으로 번역한다. 그래서 비록 잠을 자던 이웃집 사람은 떡을 달라는 요구를 들어줄 마음이 별로 없었다고 할지라도 간청하는 자가 끈질기게 또는 아주 뻔뻔스럽고 애타게 간청하게 될 때, 결국 그 요구를 들어주게 될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기도하는 자의 인내와 열정을 강조하는 비유가 될 수도 있다.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라는 대답도 실제적으로 가능한 대답이라고 생각하면, 결국 떡을 얻어내는 비결은 구하는 자의 강청함에 달려 있다. 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일어나 떡을 나누어 주고 싶은 마음이 설사 들지 않더라도 문을 두드리며 간청하는 소리에 하는 수 없이 억지로라도 문을 열고 나와 떡을 나누어줄 수 있을 것이다. 1 그러면 결국 이 비유는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강청하게 되면 결국 응답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교훈을 주는 비유가 될 것이다. 기도 응답의 비결은 우리들의 강청함에 달려 있는 것이다.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는 예수님의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웃집 사람이 밤중에 일어나 떡을 주기 싫어하는 상황을 생각했다. 한밤중에 일어나 떡을 빌려주는 것이 불편했던 이웃집 사람은 집 안에서 지금은 아이들이 함께 누워있는 상황이니 일어나서 떡을 빌려줄 수 없다고 대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러한 부정적인 대답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끈질기게 강청하면 결국 원하는 떡을 얻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2 그리고 끈질김(persistence)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중요한 열쇠라고 생각했다. 3 이와 비슷하게 권성수 목사도 성공적인 기도의 본질이 끈질긴 강청에 있다고 주장했다. “성공적인 기도의 본질은 그 끈질긴 강청에 있다. 응답받는 기도는 반대와 역경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달라붙는 기도이다.” 4 그러면서 권성수 목사는 낙관적이 개구리와 비관적인 개구리의 비유를 제시한다. 크림 사발에 빠진 두 마리의 개구리가 있었는데 비관적인 개구리는 그 상황에서 절망하고 말았지만, 낙관적인 개구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헤엄을 친 결과 크림이 굳어져 거기서 빠져나온 것처럼, 우리가 기도를 끈질기게 한다면 결국 무엇인가를 이루어낼 것이라는 교훈으로 본 것이다. 5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유사점(tertium comparationis)과 대조점(tertium contrarietatis)을 구분해보아야 한다. 위와 같이 해석할 때 과연 이웃집 사람은 적절하게 하나님을 나타내는가? 떡을 가진 이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가지고 계신 분이시라는 점에서 이웃집 사람과 하나님은 닮았다. 그렇다면 하나님도 이웃집 사람처럼 행동하시는가? 처음에는 응답이 없지만 결국 강청에 못 이겨 떡을 주는 이웃의 모습은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을 닮았다. 우리가 기도할 때 즉각적으로 응답되는 경우가 많지 않고 대부분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치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은 이웃집 사람처럼 “우리들의 기도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다. 이것들이 유사점일 수 있다.

하지만 대조점도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잠자리에 들지 않으신다. 이웃집 사람은 잠자리에서 일어나 떡을 주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지만, 하나님에게는 기도에 응답함에 있어서 번거로울 일이 하나도 없다. 6 그런 점에서 이웃집 사람과 하나님은 서로 다르다. 귀찮아하고 마지못해 떡을 주는 모습은 하나님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지 못하는 대조점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별로 응답할 마음이 없는 이웃에 비유되는(compared) 것이 아니라 대조되고(contrasted) 있다.

하지만 “아니아데이아”를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당시의 중동문화에 비추어보았을 때 바람직하지 않다. 당시의 사람들은 손님을 대접하는 것을 영예로운 일로 생각했고, 그 손님은 이웃의 손님이자 동시에 우리 마을 전체의 손님으로 기뻐하며 맞이해야 할 대상이었기 때문에, 간청함에 못 이겨 마지못해 겨우 일어나 떡을 줄 것이라는 해석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사실 비유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웃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는 표현이나 떡을 주기를 거부하는 이웃을 향해 귀찮을 정도로 반복해서 간청했다는 표현 같은 것이 등장하지 않는다. 7

떡을 빌리기 위해서 이웃집을 찾아간 사람은 그저 조용히 이웃 사람의 이름을 불렀을 것이고, 그리고 자신의 필요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여보게 시몬이 여행 중에 우리 집에 왔다네. 대접할 게 없는데 떡 좀 빌려주게.” 그 이야기를 들은 이웃은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래? 시몬이 왔다고? 그 친구 정말 오래간만이군. 정말 반가운 일일세. 나도 만나고 싶네만, 일단 오늘 밤에는 푹 쉬게 하게. 내일 아침 일찍 내가 집으로 갈게. 떡이 여기 있네. 아예 여섯 덩이를 가져가. 여행하느라 무척 배고팠을 것이니까 말이야. 그런데 이것도 좀 대접해봐. 우리 집에 포도주도 있는데, 가져가게. 아 그리고 치즈도 있어. 이것도 가져가게. 정말 반가운 일이군.”

그래서 베일리는 이 단어를 수치를 뜻하는 아이도스(αἰδώς)에 부정의 접두사인 알파(α)를 합하여 된 것으로 보아,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고”로 번역하는 것을 제안한다. 8 자꾸 밤중에 문을 두드리고 귀찮게 했기 때문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로부터 수치를 당하는 것이 두려워서라도 밤중에 일어나 떡을 이웃에게 나누어줄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9

이 비유는 내면의 동기가 자신이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는 동기에서이든 아니면 구하는 자가 애절하게 간청하기 때문이든, 아니면 서로가 친구라는 사실 때문이든, 떡을 달라고 요청하면 반드시 받게 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한다. 물론 떡을 빌리러 가는 사람은 간청할 필요도 없다. 밤중에 떡을 받으러 가는 것은 미안한 일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대의 문화 속에서 이웃집 사람에게 찾아가 떡을 요청했는데 거절당하는 경우는 단 한 번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 비유를 맺는다. “그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를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번역한 헬라어 단어 크레제이(χρῄζει)는 “그가 요구한대로”라는 뜻이라기보다는 “그에게 필요한대로”라는 뜻이다. 그 점에서 개역개정의 번역(그 요구대로)이 옛 개역성경(그 소용대로)보다 후퇴했다. 사실 손님을 대접하는데 필요한 것은 세 덩이의 떡만이 아니었다. 여러 가지 식기나 다른 음식들도 필요했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이웃은 떡 세 덩이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더 많이 빌려줄 것이다. 10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요구한 대로만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아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대로 충분하게 주시는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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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Derrett, “The Friend at Midnight,” 31-41; 유진 피터슨,『비유로 말하라』(IVP, 2008), 84; 홍창표,『하나님 나라와 비유』, 307; 권성수,『천국은 어떤 나라인가?』(횃불, 1993), 205-206.[]
  2. 키스트메이커,『예수님의 비유』, 233-234.[]
  3. 키스트메이커,『예수님의 비유』, 234.[]
  4. 권성수,『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206.[]
  5. 권성수,『천국은 어떤 나라인가?』, 209.[]
  6. I. Howard. Marshall, The Gospel of Luke: A Commentary on the Greek Text (Exeter/ Grand Rapids: Paternoster/ Eerdmans, 1978), 462; Charles H. Talbert, Reading Luke: A Literary and Theological Commentary on the Third Gospel (New York: Crossroad, 1982), 132; Blomberg, Interpreting the Parables, 276.[]
  7. Walter L. Liefeld, “Parables on Prayer (Luke 11:5-13; 18:1-14)” in The Challenge of Jesus’ Parables, ed. Richard N. Longenecker (Grand Rapids/ Cambridge: Eerdmans, 2000), 246.[]
  8.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220-230; Klyne Snodgrass, “Anaideia and the Friend at Midnight (Luke 11:8),” JBL 116 (1997), 506-510.[]
  9. 헬라어 아나이데이아(ἀναίδεια)가 떡을 빌려달라고 하는 자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는 요청을 받은 사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Evertt W. Huffard, “The Parable of the Friend at Midnight: God’s Honor or Man’s Persistence?” Restoration Quartery 21 (1978), 154-160. Johnson, “Assurance for Man,” 123-131. 최갑종,『예수님의 비유: 본문, 해석 그리고 설교/ 적용』(이레서원, 2001), 265-270; 존 팀머,『하나님 나라 방정식』, 75-76.[]
  10. 베일리,『중동의 눈으로 본 예수님의 비유』, 21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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