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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어거스틴의 비유 해석

– 이국진

어거스틴(Augustinus, 354-430)이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눅 10:30-37)를 설명한 것이 아주 유명한데, 그의 해석법은 그 비유를 소위 알레고리(allegory, 풍유 諷諭)로 본 것이었다. 알레고리의 기본적인 생각은 비유의 각 요소들이 지칭하는 대상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등장하는 모든 요소에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였다.

예를 들어, 예루살렘은 에덴동산 혹은 천성을 뜻하고, 여리고는 죄악의 도시를 뜻하며, 강도만난 사람은 아담을 뜻하고, 강도는 악마들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지나가는데, 이는 율법과 선지자(구약을 크게 둘로 구분할 때의 표현법)로서는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뜻하며, 상처를 싸매어 주었다는 것은 죄악을 억제한다는 뜻이고, 포도주와 기름은 소망의 위로와 선행을 권고하는 것을 의미하고, 여관은 교회를 뜻하고, 나귀는 성육신을 뜻하고, 나귀의 네 발은 사 복음서를 뜻한다. 그 다음날은 부활하신 다음 날을 의미하고, 두 데나리온은 사랑의 이중계명을 의미하며, 나중에 다시 돌아오겠다는 사마리아인의 말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인간의 타락과 구원의 과정을 설명하는 비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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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거스틴의 이러한 해석은 타당성이 없다. 예루살렘을 에덴동산 혹은 천성으로 보아야 할 논리적 근거가 없으며, 여리고를 죄악의 도시로 보아야 할 논리적 근거도 없고, 강도 만난 사람을 아담으로 해석해야 할 근거가 없는 등, 그가 제시한 모든 설명들이 아무런 논리적 근거가 없는 것이다.

만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복음서에서 제시되지 않고 아무런 문맥을 알 수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면 어거스틴의 해석이 가장 잘 된 해석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가능한 하나의 해석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복음의 문맥 속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읽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면 누가복음 속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서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바른 해석(exegesis)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의 유사점은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준 것처럼,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였으며,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친 후에 이처럼 행할 것을 주문하셨다. 예수님은 구원의 진리를 전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어거스틴의 비유 해석이 잘못된 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알레고리(allegory)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에 불편함을 느낀 사람들은 알레고리 해석법을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터툴리안(Tertullianus, 160-220)이나 존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7-407)같은 교부들과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과 같은 종교 개혁가들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알레고리 해석법이 너무 주관적이고 객관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평하였다. 이런 전통 속에서 현대 해석학의 기초를 마련한 사람은 아돌프 율리허(Adolf Jülicher, 1857-1938)였다. 율리허는 예수님은 결코 알레고리를 사용한 적이 없다고까지 주장하였다.

하지만 어거스틴 해석이 가지고 있는 더 큰 문제는 유사점을 무시했다는 사실에 있다. 유사점이란 비유가 성립하는 근거이자 해석의 열쇠이다. 오늘날에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텍스트 자체를 독립적인 것으로 보고 비유 해석의 가능성이 무한대로 열려 있다는 포스트 모더니즘에서의 해석학이 아니더라도, 복음주의 학자인 크레이그 블럼버그(Craig Blomberg)도 조심스럽게 비유에는 단 하나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큰 주제 밑에 작은 의미 연관들을 찾아낼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어거스틴처럼 비유의 모든 요소들이 각각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비유에 등장하는 많은 요소들이 다른 것이 등장하지 않고 그것이 등장하는 그만큼 이유가 충분히 있으며, 그런 점에서 알레고리적 성격을 갖는다고 하였다. 적어도 비유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의 숫자만큼의 상관관계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비유에 의미가 하나인가(율리허의 경우) 혹은 그 이상인가(블럼버그)는 논점을 제대로 짚은 것이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유사점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이다. 때로는 그 유사점이 하나일 수도 있고, 때로는 그 유사점이 여럿일 수도 있다. 등장인물의 숫자만큼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유사점의 숫자만큼 의미가 존재한다. 그 비유가 등장하는 문맥에서 어떤 점들이 유사점으로 사용되고 있는지, 문맥으로 그 비유점들을 결정하는 것이 옳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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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성수,『천국은 어떤 나라인가?』(횃불, 199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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