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견디는 사랑

사랑에 대한 4가지 정의가 모두 참고 견딘다는 것과 관련이 있지만, 헬라어 원어를 자세히 조사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있다. 모두 참고 견딘다는 점에서는 근본적으로 같은 의미의 범주 속에 들어간다. 하지만 마지막 정의가 가지는 미세한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참고 견뎌야 할 대상이 “고난, 아픔, 슬픔”이라는 점에서 약간 다르다. 앞에서는 참아야할 대상이 “화, 분노, 말”과 같은 것이었다. 물론 앞에 나온 정의에 고난을 참아야 한다는 의미가 부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15번째 정의는 보다 더 구체적으로 참고 견뎌야 할 것으로 고난을 말하고 있다.

15번째 사랑의 정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마태복음 10:22에서도 사용된 바 있다(cf. 마태복음 24:13; 마가복음 13:13; 로마서 12:12).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태복음 10:22)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주신 경고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그 길 가운데 어려움이 있을 것을 예고하셨다. 사람들이 복음을 환영하지 않고 거부할 뿐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을 미워할 것이고 박해할 것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친절하게 복음을 전하고, 대상자들의 마음을 자극하지 않고 사랑과 친절을 베풀어도, 미움과 박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거슬리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복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구원을 받아야 할 정도로 현재 상태가 엉망이라는 점을 전제한다.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바로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에, 바로 모욕적으로 들리게 되어 있다. 그래서 뉴욕 리디머(Redeemer) 장로교회의 팀 켈러(Tim Keller) 목사님은 크리스마스는 모욕적(insulting)인 것이라고 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우리가 죄인이며 구원받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가지고 있는 모욕적인 성격 때문에, 듣는 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때로는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미움과 박해가 뒤따르는 것이다. 마치 수의사가 동물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물리고 할큄을 당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미움과 박해를 당할 것을 미리 아시고, 경고하시면서 그렇게 미움과 박해를 당할 것이지만 나중까지 견뎌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담대히 고백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산헤드린 공회원들을 베드로와 요한을 위협했다(사도행전 4:21). 스데반 집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서 신앙을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쳤다” (사도행전 7:57-58). 크리스천들이 부도덕을 선동한 것이 아니었다. 도둑질을 부추기거나 강도질을 정당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복음에 대하여 극단적인 반응을 보였다.

우리는 전도를 할 때, 무례한 방법으로 전도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1 그래서 아무런 인격적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는 방법은 오히려 복음전파에 역효과를 나타내고, 오히려 안티 기독교인들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뱀 같이 지혜롭게 전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예의바른 방법으로, 복음을 전한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복음을 싫어하게 되어 있다. “대중들은 진리를 빼놓고 무엇이든지 믿을 것이다”라고 했던 영국의 소설가이자 시인인 에디쓰 시트웰(Edith Sitwell, 1887-1964)의 말처럼, 진리에 대해서는 유독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선교의 역사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자행했던 순교의 이야기를 피할 수 없다. “선교 역사에서 순교자의 이야기가 없으면, 읽을 게 뭐가 있겠어요?”라고 반문했던 전재옥 교수의 말은 유감스럽게도 사실이다. 2

예수님은 복음전파의 길에 미움이 있을 것을 예고하면서, 미움을 받더라도 “견뎌내야” 한다고 하셨다. 이 때 사용된 단어가 사랑의 15번째 정의에서 사용되었다.

또한 이 단어를 바울 사도는 디모데 후서 2:10, 12에서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자신이 복음을 위하여 여러 가지 고난을 받았으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참았다”고 고백하였다. 이 때 사용된 단어가 바로 사랑의 15번째 정의에서 사용된 단어이다.

또한 이 단어는 히브리서 12:2-3에서 예수님이 고난을 참으신 것을 표현할 때에도 사용되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히브리서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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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제6장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참조[]
  2. 전재옥, “아프간 피랍 사건과 한국 교회 해외 선교” [목회와 신학] 2007년 10월호.,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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