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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하늘 (계 21:2-4 [21:1-22;5])

목차로 돌아가기 +++ 10. 구원 (계 19:6-9) +++ 12. 마라나타 (계 22:20)

우리가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데, 이제 거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됐습니다. 21장과 22장, 그리고 그 앞의 부분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데요. 다음 주에 마지막 요한계시록 강해를 하게 되면, 대단원이 마감될 것 같습니다. 오늘은 먼저 21장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보여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있었던 하늘, 예전에 있었던 땅, 바다들이 다 사라져 버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 보이는 그 모습을 보게 되었고, 하늘 보좌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그 장면을 보게 되는 것이죠.

새 예루살렘은 어떻게 생겼는가? 아주 큰 새 예루살렘인데요. 마치 신부가 신랑을 위해서 단장한 것 같은 그런 모습이었다.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묘사하는 장면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여러분 결혼하실 때, 기억이 나십니까? 저도 제 아내의 가장 아름다웠던 그 모습이 결혼할 때의 모습이었다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렇게 정말 아름답고 화려하고 황홀한 그 모습으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새 예루살렘의 특징을 몇 가지 살펴본다면, 그 성의 빛이 귀한 보석 같고, 수정같이 맑은 모습을 가지고 있고요. 12개의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12 지파의 이름이 그 문에 쓰여 있을 뿐만 아니라, 열두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 예루살렘 성 안에 성전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죠. 성전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해와 달이 비추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그 영광이 너무나도 밝아서, 어린양이 등불이 되기 때문에, 그 성전 예루살렘 자체가 너무나도 빛나서, 더 이상 태양도 필요 없고, 달도 필요 없고, 그 어느 형광등도 led 형광등도 필요 없는, 그런 밝은 곳이고, 밤이 없기 때문에, 성들의 문을 닫지도 않고, 오직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만이 그 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요한계시록 2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요한계시록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 도시 그 성을 보여주었는데, 이 성에 대한 환상은 미래에 대한 환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수차례 말씀을 하면서,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일이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거울과 같다고 수차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을 해석할 때, 모든 것들이 다 미래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해석하게 되면, 요한계시록을 오해하게 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그래서 기본적으로 이 요한 계시록이라고 하는 것이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고, 우리의 영적인 실체를 보게 만들어주는 그런 거울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런 거울과 같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죠. 오늘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는 이 환상은 미래에 이루어질 일에 대한 그런 예언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마지막 날에 성도들이 궁극적으로 들어가야 될 곳 그곳이 어디죠? 천국이죠. 저 새 하늘, 새 땅, 저 새 예루살렘, 저 하늘나라로 들어가게 되는 소망을 가지고, 우리가 살게 되는데, 오늘 하나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우리가 궁극적으로 들어가야 될 그 하늘나라, 성전, 하늘, 새로운 예루살렘, 새로운 예루살렘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가운데, 이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그 장면을 보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큰 위로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또한 사도 요한으로부터 이 새 예루살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 초대교회 성도들도 아주 큰 위로를 받았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 요한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살아가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세상은 아주 고통스러운 곳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악의 세력을 잡고 있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박해를 당하고 있고, 믿음을 지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게 힘들게 신앙생활해 가고 있는 그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살다가 망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이렇게 살다가 망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는 아주 큰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동시에 21세기를 살아가는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아주 큰 위로의 말씀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일상이 무너져 버리고, 이게 언제 끝나나 언제 끝나나 하고 있는데,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2차 대확산, 그리고 또 예고하기로는 3차 대확산이 있을 것이라고도 말하고, 2천 명씩 매일 확진자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는, 그런 불안한 이야기들이 우리 주변에서 들려지는 가운데, 이러다가 완전 쫄딱 망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다가는 우리의 삶이 완전히 무너져버리지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아주 놀라운 소식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도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여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이 세상에 돌아가는 것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어느 목적지를 향해서 가고 있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한 청사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 우리의 목적지가 바로 저기다.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저 목적지를 향해서 가자고 그 청사진을 이 하나님께서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현우빌딩에서 신앙생활을 할 때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니, 그 이전에 아주 힘들고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던 그때를 지금 기억하고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한다면,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당연할 것이고, 모든 일들이 순리대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는데, 우리들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그런 상황은 황당한 일들이 자꾸만 생겨나는 것이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우리들의 눈앞에 벌어지는 겁니다. 함께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쓰러져 버리고, 이러다가는 우리도 망해버릴 수 있겠다고 하는, 그런 위기가 우리들 마음 가운데 들어오던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현우빌딩에서 신앙생활하다가, 2년 전에 우리 이 지역에 예배당을 마련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얼마나 그 마음이 기뻤는지 몰라요. 이곳에 예배당을 매입하고, 그리고 증축을 해서 우리가 들어가게 되기로 했을 때, 여러분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굉장히 기뻤어요. 특별히 설계도를 보면서 1층은 어떻게 확장을 하고, 2층은 어떻게 조정을 하고, 3층에는 무슨 건물을 집어넣고 해서, 이 건물들을 그려주는 청사진을 보게 되었을 때, 드디어 우리도 이 빌딩에서 나가서, 우리가 지상으로 내려가는구나. 그리고 이런 건물을 마련하게 되겠구나. 그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굉장히 가슴이 벅찼던 기억이 있습니다.

설계도를 바라보면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설계도를, 설계도를 바라보면서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이 설계도대로 지어지겠지. 그게 사실은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우리 교회 성도님들 대부분의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어떤 집사님은 매일매일 자전거를 타고 운동하시는데, 운동하던 평상시에 다니던 그 길이 아니라, 교회 앞으로 방향을 바꾸어서, 교회가 지어져 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가시는 거예요. 성도들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짓는 그 모습을 보기 위해서, 출근하다가 와서 한번 바라보고 가고, 퇴근하면서 와서 바라보고 가고, 우리가 꿈에도 그리던 그것들이 점점점 이루어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가슴 벅찼던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시간이 빨리 흘러서 입당한 지 벌써 1년 반이라고 하는 세월이 지났고, 그리고 다음 주에는 우리 교회가 처음으로 이렇게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한 2013년 9월 8일로부터, 이제 7년의 세월이 흐르는 시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시는 것, 그리고 사도 요한을 통해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들려주시기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그것과 같아요. 지금 고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지금 이러다 이렇게 살다가 망하겠구나. 이렇게 살다가 완전히 짓밟혀버리겠구나. 우리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경제 활동이 불가능해지고,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감옥에 끌려가고, 우리 가운데 있던 사람들이 그러다가 사형을 당해서 죽게 되고, 또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하던 사람들이 믿음을 잃어버리고 하나씩 하나씩 변절해가는 그런 당황스러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저 하늘의 조감도를 보여주면서, 저 하늘의 이 청사진을 보여주면서, 너희들이 들어갈 곳이 바로 이렇게 생겼다. 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이 이렇게 생겼다. 보여주시면서, 소망을 갖게 만들어주시기 위해, 이 환상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우리들의 눈앞에는 로마 제국이 영원할 것처럼 버티고 있지만, 그리고 이 세상에 주권자들이 너무나도 강하고 위협적이어서, 모든 것을 삼켜버릴 것 같은 화마와 같고, 온 세상을 다 쓸어버릴 것 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그런 장면처럼, 그렇게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이것이 영원한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새 예루살렘 성, 그리고 주님께서 다스리는 그 성 안에, 우리 모두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거라고 하는 소망의 약속으로 보여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시면서, 이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께서 직접 다스리신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해서 보여줍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이 새 예루살렘 성이라고 하는 곳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면, 그곳에 성전이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좀 충격적인 일이기도 한데요. 왜냐하면 유대인들이라고 하는, 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 하면, 항상 성전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년에 세 차례 예루살렘을 향해서 여행을 하게 되는데, 그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루살렘 성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게 되면, 그 안에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성전이 있기 때문에, 그 성전을 향해서 가는 것이고, 그래서 예루살렘 성 하면, 그 안에 성전이 있고, 그 성전에 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매년 여행을 하고, 그 성전을 향해서 순례의 길을 가게 되는 것이, 그 성전이 있기 때문에 하는 것인데요.

유대인들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 소망이 무엇이냐면, 가능하면 예루살렘으로 가까이 가서 사는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가능하면 강남 가서 살려고 하겠지만, 유대인들의 소망이 무엇이냐면, 가능하면 예루살렘 성전 가까운 곳에 가서 살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돈을 벌어서 가능하면 그곳에 가서 살기를 원했고, 죽는다고 해도 묘지를 어디다 세워주기를 원했는가? 가능하면 성전 가까이에 자신의 묘지를 만들어 줄 것을 소망하면서, 그렇게 살았는데, 놀라운 것은 그곳에 새 예루살렘 성에는 성전이 없었다는 겁니다.

사실 이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러니한 곳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목적 자체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 주기 위한, 하나님과 만나는 목적이 있는 곳이 성전입니다. 하지만 실제 그 성전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성전 가운데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까? 왜냐하면 그곳에는 장사하는 사람들이 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되고, 하나님을 만나야 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곳이 되어야 되는데, 그 성전을 차지한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장사하는 사람들이, 동전을 바꾸는 사람들, 소와 양을 파는 사람들이 그곳을 빼곡하게 진을 치고 있어서, 아무도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이 성전에는 누가 있었냐면, 대제사장 제사장 레위인들이 있었는데, 종교 지도자들이 타락해 버려서, 영적인 착취를 일삼아서, 그곳에서 썩은 내가 진동해 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도자들만 썩었던 것이 아니라, 그곳을 찾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이 아니에요. 겉으로는 신앙적인 표현을 하고, 겉으로는 절기를 지키러 가는 것 같고, 겉으로는 내가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는 것 같지만,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면죄부가 필요했던 것뿐이고, 자신의 탐욕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그저 하나님을 이용해 먹는 데 급급했기 때문에, 종교적인 그 모든 행위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결코 만날 수가 없었던 것이 당시의 성전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새 예루살렘에는 그런 성전 기능을 하지 못하는 그런 성전은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요한계시록 21장 3절 4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더라.” 저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실제로 계셔서, 그래서 우리들의 아픔과 우리들의 고통과 우리들의 상처를 싸매시고 치유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큰 특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처럼 우리들에게 좋은 것들을 약속합니다. 하지만 좋은 것을 약속하면서, 그러나 결과적으로 우리들에게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우리들의 것을 빼앗아가 버리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로또나 카지노 같은 것을 들 수가 있습니다. 로또나 카지노가 약속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도 일확천금을 얻을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죠. 누가 알아? 너도 그 행운의 주인공이 될 수가 있어. 인생, 역전할 수가 있어. 우리의 이 힘들고 어려운 세상 가운데서, 유일한 소망이 복권에 당첨되고,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트리는 것이 그것이 유일한 소망이 되어 버린 사람들도 있는 것인데, 그런데 안타까운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해서 일확천금을 누리거나 인생 역전을 해버린 사람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들에 대한 뉴스는 항상 듣는데, 그런데 나한테는 그렇게 안 와요. 결국 무엇이냐면 이 로또나 카지노가 가장 사악한 게 무엇입니까? 가장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간다는 거예요. 누가 복권을 사겠어요? 누가 카지노에 가겠어요? 돈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모든 것에 소망을 걸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그곳을 향해 가는데, 그 사람들의 얼마 남지 않은 돈마저도 갉아버리는 그런 사악한 제도가 로또와 카지노의 모습인 것인데, 이게 바로 이 세상 우상들이 우리들을 향해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사이비 종교와 거짓 선지자, 교회에서 교회의 이름을 가지고 있고 목사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결국은 착취하고 모든 것을 다 앗아가 버리는 가짜들이 판치고 있는 세상이 우리들의 세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들에게 헛된 약속을 하면서 우리들의 모든 것들을 다 갈취해 가 버리지만,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들의 아픔을 아시고, 위로하시고, 남들이 전혀 알아주지 못하는 그 고통과 슬픔을 주님께서 아시며,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2장을 보면, 22장을 보면 또 다른 장면이 하나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의 보좌 어린양 보좌로부터 생명수 강이 흐르는데요. 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를 살리고, 우리에게 갈급함을 해결해 주는 그런 것이 바로 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 강이 그리고 그 좌우에는 생명나무들이 있어서, 그 생명나무에는 12가지 열매가 맺히고, 그 잎사귀는 만곡을 치료하는 치료제가 된다고 하는 그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이죠.

이러한 환상을 보여주시는 것을 볼 때에, 우리는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떤 장면이 기억이 나십니까? 창세기의 장면이 기억이 나는 것이죠. 에덴동산이 기억이 나는 것이죠. 에덴동산 하면 무엇이 생각이 납니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거역해서 쫓겨났던 안타까운 장면이 생각이 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영원한 행복의 길로 갈 수가 있었는데, 사람이 선택한 것은 하나님을 거부한 것이죠. 그리고 이 세상의 것을 우상으로 섬긴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탄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고, 하나님을 거역하는 삶을 선택한 그 결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창세기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 인생은 어떤 인생이 되었습니까? 죽음으로 달려가는 인생이 된 것이죠. 그래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앓고 산다고 하는 것인데, 그런 죽음에 이르는 병에 대한 치료제가 우리들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보여주는 환상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그 에덴동산의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것이에요. 3절 말씀에 요한계시록 22장 3절 말씀에 “다시 저주가 없음이요”라고 기록하고,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온 땅이 저주를 받고 사람들도 저주를 받아서, 정말 노동을 해도 땀을 흘려도 다 썩을 것밖에 되지 않아요. 아기를 잉태하는 것도 그것도 잉태에 고통을 당하는, 그런 것들로 다 변해버리는, 모든 인생의 삶 자체가 저주로 가득 찬 인생이 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고, 질병을 치유해 주시고, 이제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회복시켜줄 수 있는 그 환상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사실은 희망과 기대를 바라보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종종 요한계시록을 설명하면서, 이 요한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살다 보면 아주 힘들고 어려운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무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될 것이고, 정말 어마어마한 재앙들이 닥치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공포심을 조장하는 그런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회자들 가운데는 그렇게 잘못 배워서 그렇게 말하는 분들이 꽤 많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선교사님도 저랑 대화를 하는 가운데, 그분이 이 요한 계시록을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는데요. 그분이 저한테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나는 주님이 빨리 재림했으면 좋겠어요. 빨리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거까지 말할 때는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마디 더 붙이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가 천국에 가기 전에 있게 될 7년 대환란의 기간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서워서, 그날이 오기가 너무나도 걱정스럽고, 너무나도 두렵다고 하는 이야기를 제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말씀드렸어요. 선교사님, 7년 대 환란이 있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 7년 대환란은 미래에 있을 어떤 고통스러운 날이 아니라, 사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말하는 것뿐이고, 설사 7년 대환란이 마지막 날에 그런 날이 있다고 할지라도, 요한계시록에서 들려주시는 그 말씀이 무엇이냐면, 그 약속이 무엇이냐면, 아무리 고난과 고통이 다가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으시고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보호해 주신다고 하는 그 약속의 말씀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이야기해준 적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가 바라보아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가운데 우리의 삶이 늘 편안하고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통의 길을 걸어갈 수도 있고, 예기치 못한 커다란 장애물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바라봐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그 놀라운 청사진이, 하나님께서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시면서, 그리고 생명수 강가를 보여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회복시켜 주시고, 또한 너희들의 눈물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지금 이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이 세상의 것들만 바라본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옛날 하나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그리고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신 그 확실한 소망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그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들의 수고와 아픔을 만져주시고,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네가 고생한 거 내가 안다. 슬프고 고통스러웠던 그것들 다 안아주시며, 위로해 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닫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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