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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구원 (계 19:6-9 [19-20])

2020년을 맞이해서 여름 동안에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가지고 지금까지 계속 매주일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 열 번째 시간인데요. 10번째 이렇게 요한계시록만 갖고 메시지를 전하니까 좀 지겨우신가요? 기쁜 소식이 있습니다. 앞으로 두 번만 더 하면 끝납니다. 저한테는 개인적으로 아주 참 좋은 시간이었고, 요한 계시록을 이번에 정리할 수 있어서, 우리 성경적이고 건전한 관점으로 요한 계시록을 바라볼 수 있게 되어서, 너무나도 개인적으로는 좋았던 시간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예언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지금은 악의 세력이 판을 치고 있는 것 같지만, 지금은 악이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 같고, 악에 협조해야만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고 있지만, 그리고 믿음을 지키고 사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며, 목숨이 끊어질지도 모르는 그런 간당간당한 위협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며, 악을 행하는 자들을 혼내주시고, 또 억울하게 믿음을 지키다가 곤란을 당한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를 주신다고 하는 이 메시지는 모든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입니다.

특별히 고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는 이런 메시지만큼 정말 위로가 되는 메시지가 없을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렸을 때 밖에서 놀다가 동네 형들한테 맞아 터지면, 맞고 집으로 울면서 돌아옵니다. 펑펑 울고 있는 그 모습을 본 형이나 삼촌이 혹은 할아버지가 묻습니다. 도대체 왜 우냐고? 그러면 그 꼬마 아이가 얘기를 하는 거죠. 동네 형들이 나를 때렸다고. 그러면 삼촌이나 형이나 혹은 우리 할아버지가 그 아이 꼬마 아이의 손을 붙들고 갑니다. “누가 그랬어? 나한테 얘기해. 내가 혼내줄게.” 그 말이 그렇게 위로가 되는 거죠. 삼촌의 손을 붙들고, 형의 손을 붙들고, 혹은 할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나를 때렸던 그 못된 형들을 찾아가는 꼬마의 마음을 생각해 보시겠습니까?

어쩌면 하나님께서 지난 시간에 들려주셨던 메시지는 바로 그런 메시지와 같아요. 우리는 믿음을 지키고 살려고 하고 있는데, 믿음을 지킨다고 하는 그 이유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그 이름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는 우리 성도들의 삶들이 있는데, 이렇게 억울한 인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그 악한 세력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천사들이 금 대접을 하나씩 부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재앙들이 그들에게 쏟아져버리고, 그들의 권세들을 물리쳐버리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정의를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초대교회 시절에 살아가던 성도들에게 아주 크나 큰 위로의 메시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요한계시록 19장과 20장의 말씀을 살펴보게 되겠는데요. 19장의 그림을 보면, 환상을 보면, 수많은 무리들이 저 천성에서 노래를 하는 겁니다. 뭐라고 노래합니까?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심판은 의롭도다.” 음녀를 심판하시며, 주의 종들의 억울한 피를 갚아주시는, 그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들릴 뿐만 아니라, 24 장로들과 네 생물들이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아멘. 할렐루야” 노래를 하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들아, 하나님께 찬송하라”고 하는 그런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이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는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들리는 거죠.

우리가 지금 이렇게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이렇게 억울한 고난 가운데 인생이 끝장 나는 것이 아니라, 저 하늘에서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가 준비되어 있어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을 우리 주님께서 그 혼인 잔치에 초대해 주시고, 이제는 먹고 쉬라. 이제는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라. 혼인 잔치의 기쁨 가운데로 불러주시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준비되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과 감격이 넘쳤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백마 탄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되는데요. 하얀 말을 타고, 그 사람의 이름은 신실한 자, 진실한 자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양다리에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라고 하는 글씨가 쓰여져 있는데,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지고, 많은 관을 쓰고,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피뿌린 옷을 입고 있을 뿐만 아니라, 눈에 흰 검이, 예리한 검이 입에서 나오고,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리며, 진노의 포도주트를 밟는 그런 말탄 한 분이 등장하는 것인데, 이 말탄 분은 누구를 상징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이름이니까, 또 피뿌린 옷을 입은 분이라고 하니까,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는데, 이 예수님께서는 흰 말을 타고 나와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으면서, 만국을 싸워서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요즘 나오는 이단들 가운데 신 무슨 머시기 이단을 보면 그 교주가 하얀 말을 타고 사진을 찍었어요. 자신들의 신도들에게 마치 자기는 요한계시록에 나온 백마 탄 그런 분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흰 말을 타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이 왜 예수님께서 말을 타고 있을까요? 말을 타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이라고 하는 것은 장군의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장수가 말을 타고 나가서, 전쟁을 해서 승리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다스리고, 전쟁을 통해서 온 세상을 다 승리로 이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전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말탄 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죠.

역시 이 모습을 바라본 사도 요한, 그리고 사도 요한으로부터 이 메시지를 전해 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은 너무나도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지금 엄청나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도해도 하나님이 들어 응답해 주시는 것 같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도 않고,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처럼 그렇게 생각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계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통해서 악한 자들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실 거라고 하는 이런 환상은 우리 성도들에게 엄청난 위로의 메시지가 될 겁니다.

19장 그 환상 가운데 보면, 천사가 태양 가운데 서서, 지나가는 새들을 향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와라” 이야기하면서, 왕과 장군과 장사와 말과 말탄 자과 자유인과 종과 작은 자와 큰 자의 모든 자의 살을 파먹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을 유황불에 던져버리니까, 결국 그 자들이 죽게 되고, 새들이 와서 그 사람들의 살을 파먹는 그런 환상을 보여주는데,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우리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이고, 그 악한 자들을 재앙으로 물리쳐버리실 거라고 하는 그런 환상을 여기서 또 한 번 그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한 계시록을 살펴보면, 심판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천사들이 대접을 하나씩 쏟을 때마다 재앙이 일어나고, 또 두 짐승이 파멸을 당하고, 예수님께서 말을 타고 와서 전쟁에서 이기는 모습, 그리고 오늘 새가 나와서, 또 악한 자들의 살을 파먹는 모습, 이런 재앙의 이야기, 심판의 이야기가 여러 번 반복되고 있는데, 이렇게 여러 번 반복되는 이유는, 그러니까 미래의 어느 한 시점에 가게 되면, 천사들이 나타나서 금 대접을 하나씩 하나씩 쏟을 것이고, 그다음에는 또 예수님이 나타나서 말을 타고 나타날 것이고, 그다음에는 새가 나타날 것이라고, 순차적으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렇게 요한계시록에서 여러 번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죠. 아마 기억을 하실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바로 왕이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불려가서, 그 바로왕의 꿈을 해몽해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해석해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왕이 두 번 꿈을 꾸었습니다. 한 번은 소들이 나와서 아주 살진 소 7마리가 나오는 그 장면에 이어서, 아주 야 윈소가 나오는 그 장면, 그리고 그 야윈소가 살진 소들을 잡아먹는 그 장면을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런데 이 바로 왕이 또 하나의 꿈을 꿨는데, 이제는 벼 이삭들이 아주 아주 좋은 토실토실한 벼 이삭이 있는데, 마른 벼 이삭이 그다음에 나와 가지고, 또 그것을 없애버리는 거죠. 이렇게 두 번 바울 바로 왕이 꿈을 꾼 이유가 무엇이냐면, 7년 풍년 있다가 7년 흉년이 생기고, 그 7년 흉년이 끝난 다음에는 또 7년 풍년이 있다가 또 7년 훈련이 있을 거라고 하는, 그런 순차적인 의미에서 꿈을 두 번 꾼 것이 아니라, 요셉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죠? 왕께서 두 번 꿈을 꾸신 이유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정하셨다고 하는 것을 확실히 말하기 위해서, 반복해서 꿈을 꾸게 만드셨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한 계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이렇게 해석하는 분들이, 요한 계시록을 해석하면서,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이렇게 쭉 설명해 나가면서, 다음에는 이 이야기가 기록되었고, 이 이야기 다음에는 그다음 이야기가 기록되었고, 이렇게 여러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그냥 직선적으로, 직선적인 역사로 생각해서, 이 일이 끝나면, 이 일이 나고, 이 일이 끝나면, 요 일이 끝나고, 이 일이 지나가면, 이 일이 지나고 해서, 순차적으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거라고 그렇게 해석하시는 분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관점입니다. 그렇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렇게도 강조했다가, 저렇게도 강조했다가, 이렇게도 보여주시는 모습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천년 왕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천사에게 무저갱의 열쇠가 주어져 있고, 큰 쇠사슬이 주어져 있는데, 그 천사가 나타나서 용을 결박해서 천년 동안 무저갱에 집어넣고 인봉해 버려서, 더 이상 이 용이 사람들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만든다고 하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20장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용은 무엇인가? 용은 옛 뱀이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천사가 사탄을 결박해서 무저갱 속에다 확 집어넣어서, 천 년 동안 꼼짝 못하게 만든다는 얘기, 그 기간 동안에 성도들은 하늘 보좌에 앉아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천년이 지난 다음에는 보좌 앞에서, 백보좌 앞에서 생명책에 따라, 또 여러 가지 자신들의 일들이 기록되는 그 책에 따라, 사람들이 행한 행위대로 심판하는 일들이 있을 것인데, 그 심판에 의해서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보좌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되고, 결국 그 사람들이 불못에 던져진다고 하는 이야기가 요한계시록 20장에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천년 왕국에 대해서 기록된 요한계시록 20장 1절에서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한번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년 왕국에 대한 설명인데요. 천년 왕국에 대한 설명들을 좀 들어보셨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 천년 왕국이 언제 올 것인가? 천년 왕국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은 천년 왕국이 아니고,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가다 보면, 7년 대환란의 기간이 있을 것이고, 그 7년 대환란의 기간이 지난 다음에 천년 왕국이라고 하는 평화로운 시대가 올 거라고 그렇게 해석하시는 분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걸 가리켜서 전문 용어로 전천년설 Premillennialism이라고 하는데, 전천년설이라고 하는데, 역사의 흐름을 이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셔서 교회의 시대가 열리게 됐는데, 지금이 교회의 시대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교회 시대가 쭉 어느 정도 지나가다가, 예수님께서 공중 재림하게 되면, 그때로부터 7년 대환란이 시작하게 되는데, 전 3년 반 동안에는 두 증인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후 3년 반에는 짐승이 나타나가지고 666도 받게 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런 엄청난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지나간 다음에, 그 후에 7년 대환란이 지나면,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성도가 부활하고 휴거하면서, 그때부터 천년 왕국이 있다가 천 년이 지난 다음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인데, 백보좌 심판이 있을 것인데, “그 심판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갈거다”라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걸 가리켜서 전천년설이라고 하는 겁니다.

이렇게 보는 것은 요한계시록에 있는 사건들을 전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보면, 이렇게 해석을 할 수가 있습니다. 짐승이 나타나서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것도 미래적인 사건이고, 모든 것들이 다 미래적 사건이기 때문에, 그 순서 순서에 따라 언젠가는 짐승이 나타날 것이고, 어떤 때는 두 증인이 나타나고, 그 뒤에는 천년 왕국이 이루어졌다가, 그랬다가 나중에 심판이 있을 거라고 하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요한 계시록을 강해하면서 말씀드렸듯이,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라기보다는 오늘 우리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거울과 같은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삶이 어떤 삶이었는가? 어떤 삶인가를 영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죠. 그래서 거울을 비춰주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그래서 이 천년 왕국을 미래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한 성경 해석이 아니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아야 하나요? 그것은 천년 왕국의 미래에 있을 어떤 한 기간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기간이 천년 왕국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성경 전체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천년 왕국이 시작할 때, 어떤 일이 있습니까? 천사가 용을, 사탄을 무저갱에 집어넣고 결박해 버린다고 했는데, 그 결박한 것이 언제 일어났는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사탄을 물리치고, 결박한 사실이 바로 그것을 나타내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인가? 물론 이 세상에서 짐승과 같은 악마의 위험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온 세상을 통치하는 그런 역할이 주어진 그 상황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바로 이 시기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가 천년 왕국의 시기라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기가 지난 다음에는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게 되고, 사람들은 부활하게 된 다음에 심판을 받게 돼요.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는 그런 일 그런 과정으로 보는 것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일치하는 해석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해석설을 가르켜서 무천년설, Amillennialism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별로 마음에 안 듭니다. 아무튼 지금이 바로 천년 왕국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러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이 천년 왕국을 왜 지금 이 시간으로 봐야 되는가? 왜냐하면 성경적인 근거가 충분히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용을 잡아서 사탄을 잡아서 무저갱에 집어넣고 결박한다고 그랬는데, 실제로 그렇게 결박한 사건이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때 바리새인들이 와서 비방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쫓아내는 것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해주셨던 대답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2장 28절부터 29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강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다시 말하자면 예수님께서 지금 사탄을 결박하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하신 일이 사탄을 결박하는 일이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복음을 증거하며 다니다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누가복음 10장 17절 1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70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 가운데서, 이미 사탄이 그 힘을 잃고 떨어져버리고, 결박당하는 이야기가 벌써 예수님의 사역 가운데 나타나고 있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난 부활의 사건은 사탄을 결정적으로 파멸시킨, 사탄을 결정적으로 물리치신 사건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죽음인데, 그 죽음을 물리치고 승리하셔서, 예수님께서 사탄을 완전히 짓밟아버리고 승리하신 사건이 바로 부활의 사건이죠. 그러니까 예수님 이 천년 왕국 시작할 때, 천사가 용을 잡아서 무저갱에 집어넣는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사탄의 권세를 굴복시키고, 승리하신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고요.

그럼 우리 성도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저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제사장이 되어 다스린다고 요한계시록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어디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2장 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교인들을 향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오. 왕 같은 제사장들이오.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신 이에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다시 말하자면 우리 성도들은 누구인가? 성도들은 실패자나, 성도들은 아무 허접한 인생이 아니라, 너희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영접한 자들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하나님의 자녀일 뿐만 아니라,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온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그런 능력의 사람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천년 왕국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오늘날 우리 크리스찬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영적으로 들여다보게 만들어 주시는 것이죠.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이 실패자라고 생각해요. 지금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들은 정말 세상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 되었고, 우리는 주눅들어 살고, 언제 죽을지 몰라서 불안불안해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너희들이 누구냐? 너희들은 실패자가 아니다. 너희들은 버러지가 아니다. 너희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그림을 보여주면서,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이러한 설명이 약간 난제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요한계시록 20장 3절에서 표현하기를 사탄을 천 년 동안 인봉해서 무저갱에 집어넣어 버려서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한다고 하는 그 표현과, 실제 우리들이 느끼고 있는 것이 괴리가 있어 보인다고 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그 사탄을 무저갱 속에다 집어넣고, 완전히 봉인해 버리셨다고 한다면, 지금 우리는 사탄의 영향력을 전혀 안 받으면서, 정말 정말 천년 왕국으로 정말 행복한 시간을 살아가야 될 텐데, 그게 아니라 지금 우리는 늘 날마다 날마다 사탄의 유혹 가운데 미옥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게 그런 해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20장 3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용을 무저갱 속에 집어넣고 인봉해 버렸다고 하는 그 이야기는 그러니까 사탄이 우리를 전혀 유혹하지 않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실은 아무리 사탄이 날 뛴다고 할지라도, 그 사탄에 미혹하는 것이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건 마치 자전거를 배울 때 자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아들이나 딸이 두 발 자전거를 타려고 할 때, 아빠가 뒤에서 잡아주면서 딸아이를 안심시키는 말과 같습니다. 저도 우리 딸 아이에게 자전거를 가르쳤는데, 두 발 자전거를 타려고 할 때, 무서워하는 거예요. 벌벌 떠는 거에요. 내가 이 두 발 자전거를 끌고 가다가 넘어지면, 어떻게 하지? 불안해하고 있는 우리 딸에게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이 자전거 뒤를 꼭 붙들고, 내가 너를 따라가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안 넘어진다. 안 다칠 거야. 넘어지지 않을 거야. 왜? 내가 뒤에서 붙잡고 있기 때문에. 네가 자전거를 처음 타지만, 페달을 밟으면서 간다고 한다면, 내가 붙잡고 있으니까 넌 결코 넘어지지 않을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우리 딸이 그제서야 마음의 안심을 가지고,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 딸이 조금 가면서 뭐라고 저한테 물은 줄 아세요? “아빠 절대 손 놓으면 안 돼. 절대 손 놓으면 안 돼.” 그러면서 자전거를 끌고 가요.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자꾸 가다가 이 아이가 잘 갈 수 있을 만하면, 자전거에서 손을 살짝 떼는 거죠. 하지만 완전히 뗀 게 아니라, 혹시 넘어지려고 하면, 빨리 가서 붙잡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따라가는 거죠. “걱정하지 마라. 아빠가 있다.” 그 얘기에요.

하나님께서 이 초대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들려주시는 메시지, 지금 너희들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고, 악한 일들이 자꾸만 일어나고 있지만, 그러나 이런 모든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너희들을 상하거나 다치게 하거나, 너희들의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거나, 너희들이 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미 그 사탄을 인봉해버렸고,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꽉 막아버렸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들려주시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바라보고 있는 현실은 힘들고 어려운 현실입니다. 앞에는 로마 병장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재정적인 여러 가지 위협들이 우리들 앞에 놓여져 있고, 동네 사람들은 우리들을 무시하고 차별하면서, 정말 살아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 너무나도 힘들고, 이러다가는 망할 것만 같아요. 이러다가는 완전히 죽을 것만 같은데,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시는 말씀이 무엇이냐면, “아느냐? 이미 내가 그 사탄은 인봉해버려서, 무저갱에 집어넣어버려서 너희를 상치 못하게 만들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 성도들은 누군가? 실패자가 아니라, 저 하늘을 위해서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 같은 제사장으로 너희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의 말씀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는 지는 싸움이 아니에요. 성도들은 어떻게 신앙생활하다가 망해버리는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승리할 수밖에 없는 그 싸움을 싸우는 것이고, 어쩌다 보면 구원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승리하게 돼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본 영화 가운데 혹시 라이언 킹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신 적 있으십니까? 라이언 킹, 만화 영화인데요. 1994년에 나온 만화 영화이고 그리고 작년에 또 이것이 리메이크 돼가지고, 새로 상영이 된 영화가 라이언 킹이라고 하는 영화입니다. 애들 영화인데 어른들이 안 볼 수가 없어요. 애들 때문에 같이 봐야 됩니다. 저도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그 영화를 좋아하는지, 우리 아이들이 그 영화를 볼 때 같이 아이들과 함께 보고 와서,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영화입니다. 그 영화에 보면, 새끼 사자 심바가 있습니다. 심바. 그 심바는 누구냐? 아빠 사자인 무파사의 아들이기 때문에, 무파사라고 하는 아버지 사자의 뒤를 이어서, 밀림의 왕, 정글의 왕으로, 그다음 왕으로 되어 있는 자가 바로 심바라고 하는 새끼 사자입니다. 하지만 그 심바는 자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을 거라고 하는 그런 죄책감 때문에, 삼촌의 그 계략에 속아서, 결국 그 심바는 그 밀림을 떠나 먼 곳으로 도망가버립니다. 결국 그 사이에 스카라고 하는 삼촌이 하이에나를 불러들여서, 그 밀림을 장악해 버리는데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고, 이 심바는 그냥 그냥 사는 겁니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하쿠나 마타타.” 그냥 될 대로 되라 하는 인생 그냥 그런 삶을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자기 여자친구를 다시 다 커버린 여자친구를 만납니다. 날라라고 하는 암사자가 다가와서 밀림의 이야기를 해주는데 정말 고통스러운 곳이 되었으며, 네가 다시 돌아가, 심바 네가 돌아가서 이 밀림을 구원해달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심바는 밀림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과거의 그 상처 때문에 돌아갈 수가 없고, 자기는 밀림의 왕이 아니라, 나는 초라한 한 마리의 동물일 뿐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심바는 자기 밀림으로 돌아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결국 돌아가요. 왜 돌아가냐면 원숭이가 있는데요. 라피키라고 하는. 무당 역할을 하는 원숭이가 그 원숭이가 심바에게 다가와가지고, 심바에게 숨어 있는 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죠. 라피키 원숭이가 심바를 괴롭힙니다. 막 춤을 추면서, 괴롭혀요. 귀찮게 하면서. 그러면서 심바가 “나는 아빠를 죽인 자”라고 이야기하고, 아빠는 사라져버렸다고 이야기할 때, 그 라피키가 하는 얘기가 “아빠는 죽지 않았어” “내가 네 아빠가 있는 곳을 보여줄게” 하면서 그 심바를 데리고 가서, 간 곳이 어디냐면 호수에, 연못에 가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심바가 물에 비친 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아빠를 보여준다고 했기 때문에 아빠인 줄 알고 봤더니, 자기 모습이에요. 실망하고 있을 때 라피키 원숭이가 뭐라고 얘기합니까? “자세히 봐라.” 너의 모습이 아닌 네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자세히 봐라 하면서 물을 탁 흔들어 주니까, 아빠의 모습이 보이는 겁니다. 자기의 모습으로 보고 있는데, 아빠의 모습이 나타나는 거야 그러면서 구름이 쫙 나타나면서, 아빠가 심바를 부릅니다. 심바. 아빠가 뭐라고 얘기하죠? remember who you are. 네가 누군지 기억해라. 심바야 네가 누군지 기억해라. you are one true king. 넌 그런 허접한 동물이 아니야. 넌 내 아들이고, 밀림의 유일한 왕이야. 자신이 그냥 허접한 인생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는 그 심바를 향해 “너는 왕이라” 그 모습을 보면서, 심바가 그때 깨달았고 다시 밀림으로 돌아가는 거에요.

저는 요한 계시록을 읽으면서, 이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보여준 놀라운 거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 같은 놈. 나 같은 실패자. 나같이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 사람들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 괴로워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림을 그려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거에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보여주시는 거에요. 너희들이 누구냐? 왕 같은 제사장이다. 봐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을 결박시켰고, 그리고 그 사탄의 세력이 지금도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그 사탄의 세력 앞에서, 우리의 목숨이 간당간당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시는 것은 “그거 다 헛거야” “사탄의 그 모든 능력, 모든 권세, 그 위협이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이미 무저갱 속에다가 집어넣어 버리고, 인봉해 버리고 너희들을 털끝 하나 상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었다. 걱정하지 마라.” 말씀하시며, “그런데 너희들이 누군 줄 아느냐? 너희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하나님의 왕들”이라고, 이 세상의 왕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1세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산다고 하는 것은 이제는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교회를 다닌다고 하는 말이 아주 증오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고, 내가 교회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이 욕부터 하기 시작합니다. 식당에서 밥 먹고 있노라고 하면 옆 테이블에서 교회의 욕하는 소리듣는 겁니다. 어디 가서 예수님 믿는다고 이야기도 할 수 없는 그런 험악한 시절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이런 식으로 살다가는 정말 힘들고 어려울 것같은, 그런 상황 가운데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거울을 보면서, 너희들의 진짜 모습 바라보라고 말씀해 주실 때, 원하기는 우리 한 주간 동안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놀라운 은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간직하고 기억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member who you are. 내가 너희를 위해서 무엇을 했고, 너희를 어떻게 만들어주었는가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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