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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마라나타 (계 22:20)

목차로 돌아가기 +++ 11. 하늘 (계 21:2-4)

드디어 요한 계시록의 마지막 시간이 됐습니다. 요한 계시록이 좀 어려운 책이기 때문에, 좀 더 이해하기 쉬우라고 그림을 그려서 나누어 드렸는데, 그림도 조잡하고 글씨도 많고, 그래서 굉장히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읽으면서 그림을 대조해 가며 읽다 보면, 어느 정도 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고요. 특별히 요한 계시록은 이단들이 아주 잘못 해석해서 수많은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서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바른 관점을 깨닫고, 우리가 믿음 가운데 굳건하게 서는 그런 계기가 되었기를 소망합니다. 혹시 이해가 잘 안 되시는 분들은 홈페이지에 가셔서 다시 한번 복습해 보시면 큰 유익이 있을 거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오늘 드디어 마지막 시간으로 마지막 메시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분 천국은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천국은 도대체 어떤 곳일까요?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천국은 정말 좋은 곳입니다. 정말 좋은 곳입니다. 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그런 너무나도 좋은 곳이 천국인 것이죠. 천국이 어떠한 곳인가를 설명하는 말씀이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읽었던 요한계시록 21장 3절 4절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고 있는 모든 그런 문제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그 정말 골치 아픈 문제들, 천국에는 없을 거라고 하는 것, 천국에 가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거라는 것, 그래서 이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천국이 좋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천국에 빨리 가고 싶다고 하는 마음이 들 것입니다. 특히 이 세상에서의 삶이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정말 고통스럽고 정말 힘든 삶을 살아가다 보면, 빨리 이 세상의 모든 짐을 다 벗어버리고 빨리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종종 천국에 빨리 가고 싶다고 하는 그런 소망을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가 예전에 요즘에는 잘 부르지 않지만, 예전에 즐겨 불렀던 복음 성가가 하나 있습니다. 아마 기억하실는지 모르겠는데요.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 내 모든 보화는 저 천국에 있네. 저 천국 문을 열고, 나를 부르네. 나는 이 세상에 정들 수 없도다.” 이 세상 살아가는 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어서 빨리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고, 내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런 마음을 표현한 복음성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원자탄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손양원 목사님께서 만든 복음성가도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참 힘들고 어려운 그런 상황 가운데서 가지게 되는 유일한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 오시겠다고 했는데, 언제 오십니까? 빨리 이 세상을 정리해버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품 안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소망하는 것은 그것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적인 소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번 질문을 던져보려고 합니다. 과연 우리가 저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정말 바른 성도의 모습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보다,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아등바등거리면서 살아가는 것보다, 정말 다 썩어져 버릴 것, 아무 쓸모없는 것, 정말 아무런 가치 없는 이 세상의 것들은 다 끊어버리고, 어서 빨리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그 천국을 바라보면서 “어서 빨리 주님 오십시오.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서 더 이상 살기 싫습니다. 어서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소망하며 사는 것이 과연 믿음의 자세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될 삶의 태도인가?”라고 하는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박해를 받을 때마다, 크리스천들은 천국에 대한 소망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님들이 가지고 있던, 그 소망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순교했으면 좋겠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내 목숨을 버렸으면 좋겠다고 하는 순교의 소망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었던 교부들 가운데서는,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하나님, 나를 순교의 제물로 삼아주옵소서. 빨리 순교시켜주옵소서.” 기도하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한 것은 아주 고귀한 일로 여겨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고난을 당할 때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보다는, 순교당하는 것이 더 영예스럽고, 그것이 참된 믿음이라고 하는 생각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로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우리 동창 중에 한 분이 있었는데요. 그분은 늘 말 끝마다 자기가 순교자의 자손이라고 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일제시대 때 왜정시대 때, 자기 할아버지가 믿음을 지키다가 순교하셨는데, “그 순교자의, 내가, 자손이다”라고 하는 그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먼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다고 한다면, 이 세상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증오하면서, 이 세상에서의 삶을 회피하고,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고 소망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건전한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이 세상의 것들을 빨리 끝내버리고, 하나님에게로 빨리 가는, 천국의 천국에 빨리빨리 가야 되겠다고 하는, 그러한 생각이 결코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고, 건전한 신앙의 관점이 아니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 번째는 엘리야의 예를 통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던 적이 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에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더 이상 견디기 어렵습니다. 더 이상 이 사명을 감당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제가 할 만큼 노력을 했는데, 이 세상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악이 판을 치고 있는데, 더 이상 저는 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지금 당장 제 목숨을 거두어 가주옵소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있고 싶지 않습니다. 빨리 제 목숨을 거두어 가주셔서,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있고 싶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싶습니다.” 그런 소망을 피력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반응해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을 보시면서, “네가 이 세상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이 세상을 정말 목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천국을 목적으로 하고 살고 있고, 하나님을 목적으로 살고 있으니까, 정말 귀하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엘리아 선지자에게 위로하시고, 다시 용기를 북돋우어주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시고, 너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의인 7천 명이 남겨져 있으니, 지금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시고, 그 사명을 더 감당하도록, 엘리야 선지자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우어 주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볼 때, 주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에게 반응하셨는가를 볼 때,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는데요.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산 위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는 놀라운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이 얼굴이 환하게 빛나면서, 그리고 그 자리에 모세가 나타나고 엘리야가 나타나서, 세 분이 대화를 하시는 겁니다. 어쩌면 이 모습이야말로, 천국의 모습을 맛 보여주는 그런 장면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만일 천국에 간다고 한다면, 우리가 만날 분이 바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모세와 엘리아를 만나게 될 것인데, 지금 그런 천국과 같은 장면이 베드로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겁니다.

그때 이 베드로는 그 장면이 너무나도 좋았어요. 지금 이 세상에서는 헤롯 왕의 권력 밑에서 힘들게 힘들게 살아가고, 종교 지도자들, 타락한 그런 지도자들에 의해서 정말 타락한 모습을 보아야만 했고, 그리고 세리와 여러 가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펼치고 있는 그런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데, 정말 멋있고 아름다운 그 장면을 보게 된 겁니다. 예수님을 보고 모세를 보고 엘리아를 보는 그 상황 가운데서, 베드로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7장 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아를 위하여 하리이다.” 주님, 저 밑으로 내려가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이곳에 있고 싶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있고 싶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해주신 반응이 무엇입니까? “아, 네가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있구나. 이 세상에 소망을 가지고 있지 않구나. 오직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구나.” 너의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으라고 말씀하셨던 그 주님께서 그 베드로를 칭찬하시고, 그거 좋은 생각이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다시 산 밑으로 내려가셨어요. 거기에는 문제들이 기다리고 있고, 사탄의 그 억압으로 인해서 여러 가지 질병의 문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우글거리고 있고,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저 앞에 득실거리고 있는 그 땅으로 예수님께서는 내려가셨습니다.

세 번째로 어디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는 그 장면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할 그때가 지금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마지막 날에 대한 관심이 아주 지대했던 것이죠. 지금 이런 지긋지긋한 이 세상 끝장 내버리고, 주님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고, 그 어마어마한 영광으로 이 세상을 완전히 심판해 버린 그 어마어마한 영광의 나라가 도래할 때가 지금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7절에서부터 8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오.” 마지막 그 영광의 나라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결코 무의미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에 우리가 이 세상만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저 천국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고, 이 세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천국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종종 이 세상에 사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것이고,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최고로 좋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차피 죽으면 다 놓고 가게 되는 것이고, 어차피 죽으며 우리가 얻었던 모든 재물들 명예들 그 모든 것들 다 내려놓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니까, 어차피 사라져 버릴 것에 소망을 두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장례식장에서 설교를 듣다 보면, 죽은 자를 죽음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천국을 향하는 문이고, 죽음은 이제 영생의 길로 가는 길이라고 하는 그 설교 말씀을 열심히 하는 이야기를 듣다 보면, “왜 우리가 살아있지?”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거의 무의미한 것처럼 느껴지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이 세상의 것들은 내 집 아니네” 이 세상의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고, 어차피 우리가 천국에 간다면, 여기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아니라, 빨리 저 천국에 갔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 빨리 재림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는데, 사실은 그것은 성경적인 관점이 아닙니다.

누가 한 말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스피노자가 이야기했다고도 말하고, 마틴 루터 종교 개혁자가 말했다고도 하는데,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던 이 말은 보통은 이해가 잘 안 되는 말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 표현이 정확하게 성경적인 관점을 반영하고 있는 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이 세상에 대해서 염세적인 관점을 가지고, 다 썩어질 것, 다 없어질 것, 이 세상의 것들은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에, 빨리 죽어서 우리는 천국에 가야 되겠다고 하는 그 관점은 아무리 기독교적인 용어로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적인 관점이 아니라, 불교적인 관점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아무 소용없고 빨리 죽어서 천국 가야 되겠다. 염세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기독교적인 용어처럼 용어들을 가지고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불교적인 관점이고, 세속적이고 염세적인 관점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을 먼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계시록 22장에서는 사도 요한이 주님의 말씀을 들은 다음에 반응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여러 가지 환상을 보여주시고 이 세상에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영원한 천국이 약속되어 있다고 하는 그 모든 사실을 보여주시고, 그리고 마지막 심판이 있을 거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신 다음에, 주님께서 사도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말하노니 내가 속히 오리라.”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도 요한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 하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말을 아람어로 뭐라고 표현하냐면 “마라나타”라고 표현합니다. “마란”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라고 하는 말이고 “아타”라고 하는 말은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말인데. “마란 아타”라고 하는 그 아람어 표현은 “주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죠. 그러니까 이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오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을 때, 사도 요한은 너무나도 기뻐서 예수님에게 말하는 겁니다. “주여, 빨리 오십시오. 어서 오십시오.” 사도 요한이 했던 이 말은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먼저 어떻게 이해할 수 있냐면 “주님, 저는 이 고통스러운 이 세상 가운데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습니다. 빨리 이 세상을 끝장 내주시고, 빨리 이 세상을 망하게 만들어주시고, 주님께서 오셔서 심판해 버리시고, 그리고 빨리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시는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해석입니다. 건전한 삶의 태도가 아니고 주님께서 바라시는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요한이 했던 이 고백은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그것은 우리 주님께서 빨리 임하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을 다스려주시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는 간구의 기도의 제목으로 이해하시는 것이 옳습니다. 표현이 약간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요. 엘리야가 했던 기도의 제목과 그리고 사도 요한이 했던 기도의 제목은 약간 그 표현이 다릅니다. 엘리야는 뭐라고 이야기를 했습니까? “주님, 내 생명을 거두어 가주옵소서. 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으니, 저를 데려가 주시옵소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이 수고의 짐을 더 이상 지고 싶지 않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저를 거두어 가달라고 엘리야가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요한의 간구는 그런 차원과는 다릅니다. “하나님, 나를 좀 빼내어 주십시오.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살기 싫습니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관점이 바뀌어 있습니다. “주여, 오십시오.” 나를 빼내가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주님께서 오십시오. 그 의미는 상당히 다른데요. 그것은 이 세상을 포기하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지금 악이 다스리고 있는 이 세상, 그리고 악이 판치고 있는 이 세상에서, 주님께서 오셔서 그런 악들을 제압해 버리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오셔서 다스려 달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으로 이해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셨는데요. 그 기도하는 그것이 가르쳐주신 내용이 바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주기도문입니다. 그 주기도문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제자들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주님께서 이 기도문을 가르치신 이유는 죄 많은 이 세상은 더 이상 내가 정 붙이고 살 곳이 아니기 때문에, 빨리 이 세상을 끝장 내고, 우리들을 빨리 저 천국으로 인도해 주셔서, 우리가 저 천국에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악이 지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에, 주님께서 친히 오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만드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역이 하나씩 둘씩 더 늘어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은 누구입니까? 성도는 누구입니까? 성도는 이 세상에서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이사 갈 것, 옛날 집에 미련을 두고, 무엇인가를 투자할 것이 아니라, 그냥 내 팽개쳐 버리고, 새로 이사 가는 집만이 소중하기 때문에, 이 세상의 집에 대해서 전혀 신경 안 쓰는 그런, 그런 세입자와 같은 자가 크리스천이 아니라? 천국을 향해서 빨리 도망가 버리는 것이 가장 큰 목적으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사명을 가지고 보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인식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종종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씀을 많이 하셔요. 우리 권사님들 중에서도, 우리 장로님이나 집사님들 중에서도 종종 만나서 대화를 하다 보면, “목사님, 이제는 살만큼 살았어요. 내 나이가 여든몇이고, 내 나이가 몇인데, 이제는 그만 살고, 하나님께서 내 목숨을 빨리 거두어 가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런 분들을 종종 만납니다. 도대체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그 말은 3대 거짓말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요. 3대 거짓말 중에 하나라고 하는데, 도대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것은 우리 어르신들이 자신감을 많이 잃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요. 예전에 젊었을 때는 힘도 있었고, 예전에는 돈도 있었고,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했었는데,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면서 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돈도 없고,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다 사라져 가는 이 상황 가운데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이제 아무 쓸모가 없는 인생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나는 쓸모없는 인생인지, 여전히 가치가 있는 인생인지를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나 그만 천국 가고 싶다”라고 하는 그 이야기는 천국 가고 싶어서, 믿음이 좋아서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직도 가치가 있는 사람이고, 나는 아직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그분들에게 이야기를 해야 되는 거죠. “아니에요. 어머니. 아니에요. 아버지. 천국에 가버릴 나이가 아니라, 지금 계시고 있는 그 상황만으로도 너무 우리들에게 좋고, 엄마가 있기 때문에 내가 행복하고, 우리 자식들도 할머니가 있으니까 너무 기쁘고 행복”하다고 하는 그 인생의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돌려서 빨리 천국에 나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인생을 이 땅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 아니라, 사실 저와 여러분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명으로 이 세상에 보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에 돈이 있고 힘이 있어야만 쓸모가 있는 것이고, 그래서 내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고, 돈이 있어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쓸모가 있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그 생각은 결코 성경적인 생각도 아니고, 그 생각은 사탄이 우리들의 마음에 주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치 돈이 우상이고 물질이 우상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우리들에게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내가 힘도 없고 돈도 없다고 한다면, 아무 가치가 없는 인생이라고 그렇게 우리를 속이고, 우리에게 그렇게 그런 생각을 주입해 주고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는 관점은 완전히 다른 것이죠.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가? 귀하게 보셔요.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계셔요. 마치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의 자녀를 보듯이, 우리의 자녀들이 태어났을 때, 그 아이들이 왜 사랑스럽고 왜 소중했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돈을 많이 벌어오기 때문에, 무엇인가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능력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 아이들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자체로 소중한 거예요. 그 자체로. 돈을 버느냐, 무슨 이득을 끼치느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나도 소중하기 때문에, 우리를 도무지 버릴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거예요.

사람마다 단계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의 그 단계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일들이 다를 겁니다. 젊었을 때는 돈도 벌고 여러 가지 능력을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아기였을 때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하지만 그 아기가 있는 그 자체로 부모들에게 행복이잖아요? 그 아이의 웃음 하나가 모든 시름을 다 잊어버리게 만드는 것이잖아요?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역시 마찬가지예요. 내가 무엇으로 할 수 있느냐 없느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은혜가 되는 것이고, 소중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맡겨주신 우리가 하나님께서 부르실 날이 언제인지 모르지만, 우리가 있는 그 단계 단계는 설사 우리가 아무것도 못하고 식물인간이 되어서 누워 있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은 아무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라, 정말 소중하고 귀한 인생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발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을 찾으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다섯 달란트를 맡기실 수도 있고, 두 달란트를 맡길 수도 있고, 한 달란트만 맡길 수도 있는데, 하나님께서 맡기지 아니한 것을 우리에게 달라고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순종했는가 살았는가를 보시고,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것이죠. 만일 내 옆에 강도 만난 자가 지나간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었는가를 보시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우리를 평가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그 사명들이 있는 힘과 능력이 없어도 손 하나 잡아줄 수 있고, 따뜻한 말 한마디 해줄 수 있고 웃어줄 수 있는,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삶은 아무 가치가 없기 때문에 빨리 청산해버리고 빨리 천국에 가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신 이유가 무엇이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84세 아니 100세 110세를 살게 하신다고 한다면, 그렇게 살게 하신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그 순간순간마다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바라보며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사도 요한이 고백한 것은 빨리 이 세상을 끝장 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 빨리 이루어져 버리고, 그래서 이 세상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되고,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겠다고 하는 그런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지금 우리들의 삶 가운데 오셔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능력을 주옵소서”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넘어지며 삽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종종 솟아오르는 악한 생각들 앞에 굴복할 때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때 우리의 기도의 제목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저희들의 심령 가운데 오셔서, 악한 생각들을 억누르게 해 주옵소서. 우리 가정 가운데 하나님 오시옵소서. 주님께서 오시옵소서.” 우리의 가정의 여러 가지 사악한 생각들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께서 우리 가정 가운데 오셔서, 서로 사랑하며, 이해하며 돌볼 수 있는 그런 사랑의 가정이 되게 해 주옵소서. 이 교회에 주님께서 오셔서, 이 교회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겸손하게 주님을 찬양하고 사랑의 손을 서로 내밀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가운데 이 험난한 세상 가운데 같이 걸어갈 수 있게 하옵소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는 이 기도의 제목은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여정마다, 주님께서 정말 우리를 부르시는 그 순간이 될 때까지 매 순간순간마다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기도의 제목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예수 비전 교회가 7년간 지나오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셨는데 앞으로 우리가 나아가야 될 그 방향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마라나타, 주여 오시옵소서.” 이곳에 악한 생각들이 판을 치고, 이곳에 악한 세력들이 주도를 잡게 하지 마시고,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 개인의 삶과 가정과 교회와 이 나라와 민족 가운데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믿음의 고백을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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