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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문 강좌 6 –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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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채무와 죄

주기도문 강좌 여섯 번째 시간이 됐습니다.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우리가 사해준 것처럼, 내게 못되게 굴고, 내게 나쁘게 했고, 나에게 원수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내가 용서를 해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죄도 용서해 달라고 하는 청원이 제5청원이 되겠습니다. 그렇죠? 제5청원입니다. 아무튼 제5청원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에도 있고,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도 있는데, 그 마태복음에 있는 것과 누가복음에 있는 것 사이에 표현상의 차이가 약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차이가 있는지, 헬라어 원문 한번 들여다 봐야 되겠죠? 한번 들여다 봅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카이 아페스 헤민 타 오페일레마타 헤몬.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멘 토이스 오페일레타이스 헤몬.”이라고 하는 말은 마태복음에 있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표현은 노란색으로 되어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냐면, 파란색으로 되어 있습니다. “카이 아페스 헤민 타스 하마르티아스 헤몬. 카이 가르 아우토이 아피오멘 판티 오페일론티 헤몬.”이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헬라어로 제가 읽었지만, 뜻은 다 이해가 되시죠? 그리고 밑에 정답이 쓰여 있어요. 영어로 쓰여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용서해 주세요. 우리들을 채무들을 용서해 주세요. 어떤 채무? 우리들의 채무들을 용서해 주세요. 마치 우리가 우리들의 채무자들을 용서한 것처럼. 우리들의 채무를 용서해 주세요.”가 마태복음의 표현입니다. 누가복음의 표현은 어떻게 되어 있냐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우리들에게 채무를 지고 있는 모든 자들을 용서하오니, 용서하고 있으니, 우리들의 채무를 용서해, 우리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하는 표현으로 되어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마태복음의 표현과 누가 복음의 표현이 비슷하기는 하지만, 표현상의 차이가 약간 있는데요. 어떤 차이가 있냐면, 첫 번째 마태복음에서는 “오페일레마타”라고 표현해서, 채무들을 용서해 달라고 되어 있는 반면에, 누가복음에서는 “하마르티아스”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말로 돼 있습니다. 그 마태복음은 채무를 용서해 달라, 누가복음은 죄를 용서해 달라로 되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물론 우리가 용서할 때는 둘 다 다 채무를 진 자들을 용서하고, 채무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용서할 때는 채무자들 채무를 지고 있는 자들을 용서하는 걸로 그렇게 돼 있지만, 아무튼 하나님께 간청할 때는 죄를 용서해 주세요. 누가복음 표현, 채무를 용서해 주세요. 마태복음의 표현이 되겠습니다. 채무로도 표현되어 있고, 죄로도 표현되어 있지만, 이렇게 표현이 서로 이렇게 번갈아 나오는 것은, 그것은 죄와 채무 사이의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그렇겠죠.

채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채무를 갚아야만, 그 채무 관계가 끝나게 되는 것처럼, 우리의 죄도 그 죄의 대가를 치러야만, 그 죄가 없어진다고 하는 의미에서, 죄와 채무 사이에는 유사점이 있기 때문에, 죄를 채무라고 하는 비유로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채무를 갚을 만한 능력이 없어요. 우리가 우리의 채무들을 죄의 채무들을 완전히 다 없애버리고 완벽하게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거룩하게 살려고 하더라도,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할지라도, 늘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아니, 그 이상으로 늘 죄를 짓고 늘 넘어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완전히 청산해버리고 완벽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는 것이죠.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 우리의 죄의 채무들을 제거해 달라고 용서를 구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에 보면 죄를 채무로 이렇게 표현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예수님께서 해주신 일만 달란트의 비율을 보면 거기서도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그 채무를 탕감받고 자기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향해서 죄 채무를 다 갚으라고 이렇게 윽박지르는 걸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었는가라고 하는 것을 말해주는 비유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첫 번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사이에 죄와 채무라고 하는 것으로 이렇게 서로 바꾸어서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상 그 의미가 마태와 누가가 서로 다른 게 아니라 같은 거라고 볼 수가 있겠죠.

2. 과거와 현재

그다음에 두 번째 차이점이 있다고 한다면, 마태복음에서는 “아페카멘”이라고 해서,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그 비교표를 한번 보죠. “호스 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멘”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용서 했으니” 제가 영어를 잘못 적었네요. forgive가 아니라 forgave로 그렇게 영어를 적었어야 되는데, 잘못 적었습니다. 과거형으로 돼 있습니다. “아페카멘”은 과거형으로 되어 있고, “아피오멘”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에서는, “하나님,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채무를 다 용서했습니다. 우리가 이미 과거에 다 용서했으니까, 우리가 용서해준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표현이고, 누가복음에서는 “우리가 지금 용서하고 있습니다. 용서 중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용서해 주세요.”라고 하는 말로 되어 있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사이에 시제 상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 문제가 나올 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고, 아무튼 이런 시제상의 차이가 있다고 하는 것, 그것이 있겠지만 아무튼 전체적으로 보면 표현상 표현을 좀 약간 다르게 했지만, 그 의미는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의미라고 그렇게 보시면 되겠습니다.

3. 용서를 구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당연하죠. 우리가 실제적으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쩌면 영적인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인데요. 영적인 전투를 하면서 사탄과 싸워서 내 마음속에 나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그런 사탄의 유혹과 싸워서, 그래서 우리가 영적으로 승리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되는데, 우리 크리스천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영적인 전투에서 늘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지죠?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죠? 우리가 죄를 짓죠? 나쁜 짓을 한다 이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실제적으로 우리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간구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이걸 마치 전쟁으로 치자고 한다면, 전쟁을 하다가 우리가 적군과 싸워서 전투를 벌이는데, 내가 총을 잘 쏴가지고 상대방을 쓰러뜨릴 때도 있지만, 그러나 상대방의 총에 의해서 내가 부상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단 말이에요.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후송을 가야죠. 후송을 가서 의무대에 가서 치료를 받고, 다시 회복시켜서 다시 건강하게 되면, 다시 전투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인 전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전투를 할 때 우리는 결국은 이길 수밖에 없는 전투를 하는 거예요. 우리의 영적인 전투는 싸우다가 어쩌다가 질 수도 있는 그런 전쟁이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이기게끔 되어 있는 전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 우리가 반드시 이길 수밖에 없는 전쟁을 하는 거죠? 이미 예수님께서 사탄의 권세를 물리치고 승리하셨기 때문에 그래요. 완전히 사탄의 권세를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그 주님께서 이루신 그 승리에 근거해서 우리는 결국 전쟁에서 영적인 전투에서 싸워서 이겨서, 결국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와 함께하는 주님과 함께하는 그 목적을 향해서 가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천성을 향해서 가는 그 길에, 결국은 지옥에 떨어지지 않고 천국을 향해서 가게 되는데, 그 사이에 우리가 때대로 국지전(局地戰)에서 자꾸만 지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죠. 한번 그림을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요 근래 몇 번 계속해서 이런 그림을 제가 보여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구원을 받은 우리의 상태가 지금 우리의 상태인데, 지금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 것이냐면, 아직 완성이 안 돼 있어요. 언제 완성이 되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최후의 심판이 있을 때, 그때는 우리가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서, 완벽하게 완전한 구원을 이루는 최후의 승리의 날이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신 그 구원의 사건과 그리고 재림을 통해서 완벽하게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실 그 중간 상태에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이런 상태에서는 우리가 어떤 상태냐면 이미(already) 구원을 받았으나 그러나 아직(not yet)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지 아니한, 그런 이중적인 상태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이 말입니다. 법적으로는 우리가 의인이지만, de jure 라틴어로 de jure 법적으로는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이지만, 실제적으로는 de facto 실제적으로는 여전히 우리가 죄의 몸을 지니고 있는, 그런 이중적인 상태가 언제냐면, 바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가 이 날이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우리들의 상태를 가리켜서 “이미와 아직 사이”라고 합니다. already와 not yet. 완전히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전(前)인, 아직 완성되지 않은, not yet. already와 not yet 사이에 “중간기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라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것을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이라고 하는 신약학자는 뭐라고 이야기를 했냐면, 이것은 마치 우리가 D-Day와 V-Day 사이에 살아가는 것과 같다 그랬습니다.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이 전쟁을 하는데요. 독일군이 전 세계를 장악했다가 연합군이 모여서 그래서 독일군을 무찌르게 되는데, 그 독일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그런 어마어마한 작전이 펼쳐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혹시 아십니까? 무슨 작전으로 독일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렸죠?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에요.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서, 그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영화가 뭐죠? 라이언 일병 구하기? 그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가지고, 이제 독일군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버린 거죠. 그때부터 독일군이 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독일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벌인 날을 가리켜서, 노르망디 상륙작전 하는 날을 가리켜서 무슨 날이라고 그래요? D-Day라고 하죠. D-Day. 우리가 늘 흔히 하는 말이 D-Day 결정적인 날. 바로 D-Day, D-Day하는 그 날이 노릇망디 상륙작전에서 나온 얘기 니다.

D-Day를 통해서 독일군의 콧대를 완전히 꺾어버렸는데, 그때부터는 독일군이 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지만 독일이 완전히 항복했나요? 아직 완전히 항복하지 않았어요. 물러가면서, 물러가면서 국지전(局地戰)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국지전을 하다가, 결국 마지막에 독일의 나치가 항복문서에 사인을 한 날이 승리의 날이죠. 승리의 날이 뭡니까? V-Day. 빅토리 데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영적으로 보면 그런 D-Day와 V-Day 사이에 있는 겁니다. D-Day와 V-Day 사이에 있는데, D-Day와 V-Day 사이에 있는 우리로서는, 늘 승리하느냐면, 승리하지 않아요. 중간에 뭐가 있어요? 지는 경우도 있단 말이에요.

마치 독일군과 연합군이 싸우기는 싸우는데, 이제는 독일군이 패퇴하면서 도망가지만, 그렇다고 연합군이 항상 이깁니까? 아니죠. 국지전에서는 독일군한테 당하기도 하고, 또 지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있듯이,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지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게 되는데, 아까 그림에서 보게 되면, 그 그림이 그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상태지만, 그러나 그래서 영적인 D-Day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우리의 구원이 아직 V-Day까지는 안 됐다 이 말이 이 V-Day 이 V-Day까지 아직 안 갔다는 거에요. 그 사이에 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어떻게 됩니까?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고, 영적인 개인적인 영적인 전투에서 자꾸 부상을 많이 당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죄를 사탄의 유혹에, 유혹 때문에 져서 그래서 죄를 많이 짓게도 되는데, 마치 전쟁 중에 상처를 당하면, 부상을 당하면, 의무대로 가서 치료를 받듯이, 우리는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나가서, 죄를 용서해 달라. 우리의 부상을 치료해 달라. 그래서 자꾸만 우리가 다시 회복을 받아야 될 그런 상황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4. 구원파의 오류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파라고 하는 집단이 있습니다. 구원파라고 하는 집단에 대해서 종종 들어보셨죠. 그 구원파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우리는 의인이지 이제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라고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더 이상 회개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우리가 회개한다고 하는 것은 아주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하는 증거이기 때문에, 그건 가짜 신자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라고 그렇게 극단적인 구원파에서는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런 주장이 잘못된 것이겠죠. 주기도문의 정신과는 정반대의 입장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파가 계열이 많아요. 유병연 계열, 권신찬 계열, 박옥수 계열, 등등 많이 있는데, 지금 현재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는 집단은 박옥수 계열이긴 하지만,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 해가지고, 막 차에다 붙이고, 음악회 한다고 불러 모으고 해서, 막 하는 열정적으로 하는 그 박옥수 계열이 가장 많이 맹위를 떨치고 있고, 그 박옥수 계열의 교회들 이름이 뭐냐 하면, 항상 “기쁜소식”이 붙어 있어요. 그래서 기쁜소식 대구교회, 기쁜소식 전주교회, 기쁜소식 부산교회, 뭐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써 있는 교회들이 박옥수 계열 그런 구원파라고 할 수 있겠는데, 그 구원파에서는 극단적으로 어떻게 가르치냐면은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는 순간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인이 아니고, 우리는 회개할 필요도 없고, 우리는 죄를 용서해야 될, 용서해달라고 기도할 필요도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은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무엇이냐면, 우리가 죄를 항상 고백해야 돼요. 죄를 용서해달라고 해야 돼요. 우리의 죄를 알고, 용서를 해달라고 해야 하는데 요한일서 1장 8절에서부터 9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건 제가 안 알려줬었나 보죠?) 요한일서 1장 8절 9절, 요한일서 1장 8절,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신실하시다는 얘기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지만, 늘 우리가 잘못할 때마다 그 죄를 고백해야 되고,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비는 것이 당연한 것이죠. 성경적인 가르침이죠. 야고보서 5장 15절 16절 말씀에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5절 16절 말씀,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라고 말씀하셔서 우리가 죄를 짓고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은 인정하고 있고,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어야 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시는 말씀이라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따라서 우리 크리스찬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완성이 됐어요? 아직 안 됐어요? 아직 안됐어요. 우리가 개인적인 종말을 맞이하든, 우주적인 종말을 맞이하든 그런 걸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는 아직 우리가 아직 그 연약한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졌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은 거지만, 한편으로 말하자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가야 될 필요가 있어요? 없어요? 이루어 가야 돼요. 오늘 오전의 설교 말씀처럼 우리가 주 안에서 의롭게 살면서, 영생을 얻는 그런 길을 걸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계속해서 죄악의 길로 가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도 항상 복종하여” 어떻게 하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어떻게 하라? “이루라.” 이미 구원받았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얘기하고 있어요? 아니란 말이에요.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구원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우리가 죽는 그날까지 계속해서 이루어 나가는 것이 맞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죠.

5. 천국 입장권

하지만 구원파에서는 왜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가? 천국을 마치, 구원을 마치 천국 입장권을 획득하는 것인 양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디 입장권을 사놓으면, 더 이상 그 입장권을 구하기 위해서 애쓸 필요가 없잖아요? 축구 입장권 사놓으면, 음악회 입장권을 사놓으면, 또 음악회 입장권을 얻기 위해서 더 이상의 노력을 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냥 막 살아도 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천국 들어가는 거, 구원을 마치 천국 입장권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오해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천국 입장권을 이렇게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주님과 신부의 관계가 되어서 주님과 결혼하는 거예요. 그렇다고 한다면 그리스와 연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있는 과제가 뭐예요? 이제는 그 사랑의 관계를 누리며 살아야죠. 주님과 함께 좋은 관계 속에서 같이 잘 살아가야, 그게 그게 진짜지. 결혼식은 올려놓고 딴 남자랑 가서 산다? 결혼식을 올려놓고 딴 여자랑 산다? 말이 안 되는 거잖아요.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결혼하는 것인데, 하나님과 결혼했다고 한다면, 하나님과 같이 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면서 살아야 그게 진짜지. 하나님과 결혼해놓고 그러나 실제로는 우리가 사탄이 시키는 대로 사탄과 짝하여서 산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겠고, 우리는 영적인 연합을 더욱 이루어 나가야 하며 영적인 성숙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구원파는 잘못된 이단적인 집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왜 구원파는 이렇게 오해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온전하게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고, 성경 중에서도 일부 구절만에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별히 구원파에서 의지하는 성경 구절이 어느 구절이냐면, 요한일서 5장 18절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구절에 의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의로운 자, 구원받은 자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성경에 되어 있으니까, “아, 이제는 예수 믿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가 되었으면, 죄 짓는 거 하나도 없어. 이제는 죄 하나도 안 짓는 거야.”라고 그런 결론을 내리는 겁니다. 요한일서 5장 18절을 보니까 그런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 같아요. 하나님의 자녀가 됐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됐으면, 더 이상 죄를 안 짓는다. 죄를 짓는 일이 없다라고 되어 있는 것 같아요.

요한일서 3장 9절도 마찬가지죠. 요한일서 3장 9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일서 3장이나 5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예수님을 믿은 자, 구원을 받은 자, 그런 사람들은 “죄를 하나도 안 짓는다. 죄를 지을 수가 없다.”라고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더 이상 죄를 짓는 법이 없고, 우리는 늘 예수님을 한번 믿으면 그때부터는 죄가 죄를 짓는 일이 전혀 없다. 이 요한일서 3장과 9장의 5장을 말씀을 보면서 그렇게 결론을 내려야 할까요?

아니요. 왜? 실제적으로 죄를 짓고 있잖아요. 자기들이 또 죄를 짓고 있어요. 실제로 죄를 짓고 있다고 한다면, 아니 다른 사람 볼 게 아니고, 자기 자신을 보면 알 거 아니에요? 자기 자신을 보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게 살고 있는 게 보이잖아요. 미워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하고 교만하기도 하고 탐욕스럽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된 생각들이 늘 끊임없이 생각나는 그런 나쁜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한다면, 내가 죄를 안 짓는다고, 나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이기 때문에 죄를 성경에 안 진다고 그랬어. 그러니까 “나 죄 짓는 거 하나도 없어.”라고 말해야 되겠어요? 자기 자신을 보면 죄를 짓는 걸 보면은 그렇게 쉽게 결론을 내리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질문을 던져야죠. “성경 말씀이 왜 내 실제 모습하고 왜 다른가?”라고 질문을 던져서, 도대체 이 말씀이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가?”라고 한번 질문을 던져봐야 되는 것이죠. 질문을 던져보고, 이 말씀의 의미가 정말 그런 의미인가? 내가 한 번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그다음부터는 죄를 하나도 안 짓는다는 얘기인가?”라고 하는 것을 한번 의문을 가지고 질문을 던져봐야 되는 것이죠. 왜냐면 우리가 현실적으로 죄를 짓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도대체 요한일서 5장 18절과 요한일서 3장 9절에서 하나님께로 난 자는 죄를 하나도 안 짓는다고 하는 말,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모를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원문이 어떻게 돼 있는가를 봐야죠. 그래서 원문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파스 호 게게메노스 에크 투 떼우. 우크 하마르타네이” 또는 “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 5장 18절은 “우크 하마르타네이”로 돼 있고 3장 19절은 “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로 되어 있습니다. 헬라어로 말씀을 드렸는데, 해석이 금방금방 되시죠? 밑에 다 답이 있습니다. “파스” 모든 사람, “호 게게메노스” 태어난 모든 사람. “에크 투 떼우”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모든 사람은 “우크 하마르타네이” 죄를 짓지 않는다 “하마르티안 우 포이에이” 죄를 만들지 않는다. 죄를 행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어 있는데, “하마르타네이”나 “포이에이”나 모두 다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뉘앙스가 들어 있냐면, “계속해서”라고 하는 의미가 그 동사의 의미 가운데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요?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는 없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계속” 죄를 지을 수가 없다. 그 말은 죄를 상습적으로 짓는 자일 수 없다 이 말이에요. 죄를 하나도 안 짓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계속해서 죄를 지을 리는 없다. 그렇잖아요? 하나님께로부터 나지 아니한 사람은 계속해서 죄악을 저지르게 될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많이 노력을 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지만 때에 따라서 우리는 간혹 넘어지기도 하고 쓰러지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을 저지르는 겁니다. 하지만 그때 계속해서 죄를 끝까지 짓는 것이 아니라, 다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고, 다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고 자꾸만 돌아와서, 우리가 마치 죄인들처럼 그냥 막무가내로 계속해서 죄를 상습적으로 짓는 그런 죄인들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인 것이죠.

그래서 한국말 성경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면, 원어를 보든가. 원어를 안 보면, 못 보면, 영어 성경이라도 보든가. 영어 성경에는 keep on sinning으로 번역이 돼 있어요. 영어 성경은 왜냐하면 그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영어성경을 읽을 수 없으면, 읽을 수 있는 사람한테 물어라도 보든가. 그냥 한국말 성경을 가지고, 자기들의 현실과는 정반대의 해석을 내리면서, “성경에 이렇게 돼 있지 않느냐?” 하면서 엉터리 해석을 내리는 그런 구원파적 사람들처럼 행동하면 안 되겠죠.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해야 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에 그래요. 늘 영적인 부상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의 군사로서 내가 영적인 전투에서 이렇게 부상을 당했으니 내 부상을 치료해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싸매어 주시고, 치료해 주시고, 온전케 해주셔서, 다시 한 번 이 세상에서 영적인 전쟁을 하며 승리해 나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우리를 치료해달라고 하는 기도가 제5청원이 되겠습니다.

6. 죄 용서의 근거

그다음 문제로 넘어가겠는데요. 그런데 오늘 이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좀 다른 관점의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마치 주기도문은 우리가 죄를 용서한 것에 근거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까 우리가 마태복음의 변과 누가복음의 변의 차이를 보면서 마태복음에서는 우리의 채무자들을 우리가 용서했기 때문에, 그 용서한 것에 근거해서 그것과 똑같이, 우리들의 채무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마태복음의 표현이라고 한다면, 누가복음의 표현은 어떤 표현입니까? 우리가 지금 우리들에게 빚진 자들에게 용서하고 있으니, 현재 진행형으로 현재형으로 우리가 지금 계속해서 용서하고 있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주님 우리를 용서해달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아무튼 뭐 과거형으로 말하든 현재형으로 말하든, 아무튼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을 수 있는 이유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고 하는 점이 누가복음 주기도문의 아주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은총에 따른 무조건적인 그런 은혜입니까? 우리가 용서한 만큼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우리의 공로에 근거한 죄 용서입니까? 무엇입니까? 우리 교리에, 우리 교리에 칼빈주의 신앙 교리의 가장 큰 틀은 무엇이냐면,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죄 용서라고 하는 것은 우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라고 하는 게 칼빈주의의 교리의 가르침이죠. 내가 무엇인가, 하나님, 내가 그래도 저 사람보다 내가 다른 사람 더 용서 많이 했으니까, “용서해 주세요.”라고 내가 내세울 게 없고, “하나님, 내가 이래 봬도 내가 신앙생활 다른 사람보다 더 잘했으니까 나를 해주세요.”라고 그렇게 뻐길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이, 나는 오로지 죄인이지만 그러나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우리 칼빈주의적인 신앙 고백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주기도문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죄 우리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공로에 달린 것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아니죠. 왜?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니까 아니라는 거예요. 주기도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그렇게 우리를 가르쳐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은 무엇이에요? 아무 공로 없는 우리가 하나님의 죄 용서를 받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그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우리가 용서해 준 거에 따라서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겁니다.

두 번째로 아닌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것은 이 기도문이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이 누구에게 제시됐어요? 아무 사람한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면서, 너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려면 너희도 이 주기도문처럼 해. 그래서 너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면 그 용서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용서받아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이 주 기도문은 누구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문이에요?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이미 죄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의 일만 달란트 용서해 준 것과 같은 그런 은혜를 이미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가르침이란 말에 주님의 가르침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을 보면서 우리의 칼빈주의 구원론이 틀려 먹었다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죠. 이미 우리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엄청난 용서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우리 주님께서 이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겁니다. 이미 용서를 받았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이미 받았어요. 그런데 이 기도문을 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받았어요. 그런데 매 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마다 저희도 죄인들을 용서합니다. 저희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주님의 뜻에 따라서 죄인들을 용서하오니, 우리들을 용서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 오늘 아침에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이미 구원받은 자이지만, 율법 안에 있는 자가 아니고,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이지만, 그런데 우리가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의의 종이 되어서 영생을 이루어 나가야 될 과제가 놓여져 있는 것처럼, 우리가 이미 용서를 받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지만, 죄를 계속 짓고 그래서 죄의 종이 되어서 사망의 길로 가면 안 되는 것처럼, 이미 우리가 용서를 받은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용서를 받았는데, 그런데 그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면서, 그러면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죠.

마태복음 18장 21절에서부터 35절 말씀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가 나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임금님이 1만 달란트를 탕감해줬어요. 1만 달란트가 얼마예요? 어느 정도 돈이에요? 우리 최민호 장로님 가진 재산 정도 되죠? 그게 아니에요. 당시에 이스라엘 그 유역에서 거둔 세금의 총액이 몇 100 달란트 정도였어요. 그렇다고 하면 일만 달란트는 얼마예요? 어마어마한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큰 돈이에요. 정말 전 세계의 모든 재화를 다 합쳐도 1만 달란트가 안 될, 그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의 액수가 일만 달란트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놓고, 길을 가다가 누구를 봤냐면, 자기한테 100 데나리온을 빌려간 사람을 본 거에요. 100 데나리온이면 얼마예요? 100일치 일당이에요. 100일치 일당. 100일치 일당이면은 한 어떻게 되는 거에요? 5개월, 5개월 정도의 월급이라고 할 수가 있겠네요. 그러니까 1만 달란트에 비하면, 5개월치 일당, 월급이라고 하면 큰 거예요? 작은 거예요? 정말 작은 거죠.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근데 그 100 데나리온을 빌려간 사람의 목을 붙잡은 거예요. “돈 갚아. 돈 갚아.” 그리고 이 사람을 데리고 어디로 갔어요? 돈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서 못 나오게 집어넣어 버린 거에요.

그것을 본 사람들이 임금님에게 말을 합니다. 임금님은 그 은혜를 모르는 그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고, 일만 달란트 다 갚을 때까지, “넌 나올 수 없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 정말 작은 잘못들이에요. 내게는 커 보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죠. 그런데 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고 있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스스로 자기모순인 것이고,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 자신을 감옥에 가두는 일이죠. 이 종이 결국 용서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이 종이 어디로 갔어요? 감옥으로 가요. 용서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감옥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손해는 자기만 보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용서를 해야 되는 거에요. 용서를. 용서를.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되는 것인데, 용서를 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해방의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용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영적인 감옥에서부터 꺼내주는 일이에요. 내가 해방되는 일이에요. 그게 내가 정말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에요.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가진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는 영원히 감옥 속에 갇혀져 있는 거죠.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일인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오기 전에 무엇을 먼저 해야 됩니까? 내 이웃들에게 우리들의 이웃들에게 원망들을 만한 것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가서 먼저 해결해야 되는 거에요. 마태복음 5장 23절에서부터 26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박시킬 수 있고, 우리 자신을 꺼낼 수가 있는 겁니다.

7. 참 종교와 거짓 종교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할 때 그냥 기도할 게 아니고, 우리가 제일 먼저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원망 들을 만한 것이 뭐 없는지, 혹시 마음에 담을 쌓아버린 것은 없는지, 자꾸만 그런 것들을 해결해야 돼요. 해결하지 않으면 기도에 응답이 되기가 어려워요. 자기 자신을 감옥 속에 집어넣어버리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먼저 해결해야 되는 것인데, 이게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의 특징이죠.

이 세상 모든 거짓 종교는 그런 거 신경 안 씁니다. 이 세상 모든 거짓 종교는 무엇을 신경 쓰나요? 얼마나 많은 것을 드렸느냐? 얼마가 치성을 가지고 드렸느냐? 얼마나 열정을 다했는가만 봅니다. 신에게 어떻게 했는가만 봅니다. 그게 이 세상의 모든 거짓 종교의 모습인 거죠. 참 편해요. 왜냐면 신한테만 잘하면 되니까. 이 세상에서 그냥 악을 마음대로 행해도, 그냥 팔공산 가서 열심히 빌기만 하면 합격시켜준다니까, 너무 좋아요. 근데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그런 거에 눈이 먼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무것도 못 보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을 꿰뚫어보고 계시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얼마나 정성을 드리는가보다도,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서 있는가를 바라보시는 것이죠.

우리가 나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나에게 못되게 군 사람들, 나에게 힘들게 했던 그 사람들, 나를 죽이려고 달려들었던 그런 사람들, 다 용서하지 않은 채, 하나님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괜찮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이웃들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셔야 하는 것입니다.

8. 우리가 죄 짓는 것에 민감해야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기도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죄를 짓는 것에 둔감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반복되는 죄는 우리를 무디게 만들고, 그리고 더 큰 범죄로 인도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빨리 회개해야 되는 것이고, 우리의 문제들을 수정해야 되는 겁니다. 우리가 상처를 입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빨리 치료를 해야 돼요. 그래야 다시 건강해져서 전투에 나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의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는 일들이 있을 때, 그냥 방치해 둘 게 아니라,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에 어쩌면 제일 큰 부분으로 있어야 할 차지해야 할 그런 기도의 제목일 거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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