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데스다 게임

1. 베데스다로의 초대장

넷플릭스 한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요즘 전 세계적으로 뜨겁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야기이고, 그리고 경쟁자들을 죽여야만 내가 살 수 있는 내용으로, 때로는 잔혹하기도 하고 사이코패스적 경향마저 보이는 이 드라마가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코로나 시대에 영화관보다는 방에서 즐길거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도 맞물렸을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가 성공한 비결은 그 <오징어 게임>이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아주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겠지만, <오징어 게임>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둥거리고 있고, 그러면서 남을 제껴 내야만 내가 살아남는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탈락해버릴 수도 있는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매일을 <오징어 게임> 속에서 산다.

그런데 2천 년 전 베데스다라는 작은 연못에서도 일종의 <오징어 게임>이 있었다. 그 베데스다 연못으로 모여든 참가자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참가하였다. 모두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맹인, 어떤 사람은 다리 저는 사람, 어떤 사람은 혈기 마른 사람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서 부단히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용하다는 의사들을 찾아가 보았지만, 결국 그 의사에게 가진 돈을 강탈당하기만 했을 뿐,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일도 할 수 없었고, 가족들에게도 짐이 되는 인생은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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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들에게 어느 날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선생님, 저와 함께 게임 한번 하시겠습니까?”라는 말과 함께 시작된 <오징어 게임>으로의 초대장처럼, 그들에게 <베데스다 게임>으로의 초대장이 발부되었다. 베데스다라는 연못에 가면,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이 움직이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누구든지 그 물속으로 제일 먼저 들어가면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게 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은 것이다. 이 세상에서 채무에 시달려 신체 포기각서까지 써야 했던 사람들에게 <오징어 게임>이 유일한 소망이었듯이, 2천 년 전 환자들에게 베데스다로의 초대장은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런데 베데스다에서의 게임의 룰은 <오징어 게임>의 규칙만큼이나 잔인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베데스다 연못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목적이 정해지면,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법이다. 속임수를 써서 외국인 노동자 알리의 구슬을 훔쳐버린 서울대 출신 조상우처럼, 베데스다에도 그런 사람들로 넘쳤을 것이 분명하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물속에 먼저 들어가려는 것이야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연못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쉽지만 네가 들어가지 않아야, 내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달려가려는 길 앞에 웅덩이를 파서 넘어지게 만들거나, 장애물을 슬며시 가져다 놓을 것이다. 친구들이 달려가는 사람의 발을 걸어 넘어지게 만드는 것이 예사였을 것이다. 그곳은 공평과 사랑이 있는 곳이 아니라, 음모와 술수가 넘치는 곳이었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만든다는 말은 사실이었을까? 그럴 리가 없다. 그것은 그냥 뜬 소문일 뿐이다. 아니 누군가 벼룩의 간을 빼먹기 위해 악의적으로 만들어낸 소문일 수도 있다. <베데스다 게임>의 설계자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병이 나을 수 있는지 아닌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미 그들은 아무런 소망을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소문이 사실이어야만 했다. 그래야만 소망을 가질 수 있고, 그래야만 살 수 있는 이유가 있기에, 그들은 그 소문을 사실로 믿고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사실을 믿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소망하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2. 베데스다 게임의 함정

사람들이 베데스다로 모여드는 이유는 거기에서 소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점이다. 주인공이 분명히 있고, 그 주인공이 456억을 받게 된다는 데,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그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오징어 게임>의 함정이다. 내가 주인공이라면, 그게 <오징어 게임>이든 <베데스다 게임>이든 무슨 상관인가? 하지만 나는 주인공이 아니다. 우리는 희생만 당하고 들러리만 서게 될 뿐, 행운의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그 사람은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환자들 중에서 1등으로 연못에 들어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는 그 연못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데, 자신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그게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수억 년을 그 자리에 있어도, 38년 된 병자가 1등으로 연못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은 그 자리에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가?

그것은 소망 때문이다. 소망은 누구든지 1등으로 들어가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이다. 그런데 전혀 그 사람은 1등으로 들어갈 수 없음에도, 그 소문을 의지한다. 그런 소망마저 없어진다면, 그의 삶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이룰 수 없어도, 그 소문이 진실일 것이라고 강하게 믿는다. 마치 사법고시에 합격할 실력이 되지 않지만, 사법고시를 없앤다고 하면 불만이 폭발해버리는 고시족과 비슷하다. 우리 사회가 부동산 불로소득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불로소득의 기회를 없애버리자는 정강 정책을 사실은 지지하지 않는 데, 그런 이유와 비슷하다. 나 자신이 그런 횡재할 가능성이 전혀 없지만, 그런 횡재의 가능성마저 없애버린다면 더 절망적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런 과정에서 더 힘들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이다. 베데스다 연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을 보면서 절망하고, 다른 사람들이 성공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에 불평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이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이런 모습으로 보내셨는지, 내게는 어떠한 사명이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는 456번이 결국 456억을 얻는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오징어 게임>에서는 우리는 늘 실패자일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다. 나도 제일 먼저 베데스다 연못 안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지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고, 나는 놈 위에 붙어가는 놈이 있다. 재수만 하면 일류 대학에 합격할 줄 알았는데, 성적은 오히려 더 초라하다.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면, 삶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병만 얻는다. 누군가는 7년만 일하고도 50억을 받는다는데, 나는 열심히 일해도 늘 손해다.

심지어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부처가 될 수 있는가? 누가 열반할 수 있는가? 누가 득도할 수 있는가? 출가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데 성공해야만 한다. 그런데 아무리 도를 닦아도 10년 수행 도로아미타불이다. 그런데도 정진을 열심히 하면 당신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소리에, 사람들은 절간으로 모여든다. 정작 자신의 소유를 버리고 싶지 않으면서도,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은 열정적으로 읽는다. 가족과의 인연도 끊어버리고, 모든 미련을 버리고, 수행하는 길로 들어서건만 정작 부처가 된 사람은 없다. 그냥 옆에서 추앙하는 일들은 있지만 말이다. 대부분 종교의 길도 어쩌면 또 다른 <오징어 게임>이다. “조금만 욕심을 품으면 탈락입니다.” 그런 룰 속에서 고통스럽게 수행하지만, 늘 탈락자들만 양산될 뿐이다.

3. 왜곡된 신앙

<오징어 게임>에는 “기독교”를 희화화 하면서 조롱하는 장면들이 여러 군데 등장한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한국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조롱하는 내용이다. 첫째, 기도 아저씨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중얼거리며 기도한다. 그리고 줄다리기 게임에서 이겼다는 이겼다고 하나님께 감사한다. 상대를 죽였다는 죄책감은 없다. 지극히 이기적인 모습의 삶을 사는 한국 기독교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이다.

둘째, 지영이라는 인물을 통해 묘사되는 목사는 위선자이며 인간 말종이다. 자신을 성폭행해 놓고도 매번 회개 기도했다는 아버지 목사의 이야기는 왜 거기서 그런 과거사를 말해야 했는지 극에서의 적절성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게 일반사람들이 기독교인들에 대해서 느끼는 감정의 표출일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회개했으니 다 용서받았다고 하는 그 철면피적 뻔번함에 질색한다.

마지막으로, 456번이 결박당한 채 거리에 버렸을 때, 피켓을 들고 전도하는 전도자가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람은 결박을 풀어주자 마자 뜬금없이 “예수 믿으세요”라고 말한다. 지금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무시하고, 당면한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그저 피안의 세계에 대해서만 말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사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기독교는 가짜 기독교이다. 복음에서부터 멀리 벗어나 있는 왜곡된 신앙일 뿐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돈이나 성공이라는 우상을 섬기는 우상종교인일 뿐이다. 기도 아저씨에게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안위를 위해 필요한 하나님일 뿐이다. 지영의 아버지 목사는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죄악을 합리화하는 거짓 종교인일 뿐이다. 거리 전도자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그저 같은 편을 많이 확대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그런 모습은 사실 2천 년 전에도 있었다. 그들은 38년 된 병자가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런 사람을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오직 안식일날 왜 침상을 들고 걸어가는가가 문제였다. 낙타는 걸러내고 하루살이만을 삼키는 바리새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외면한 채, 문자주의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원하시는데, 그러한 요소들은 다 생략한 채 형식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늘 있어왔고, 그런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이 <오징어 게임>에 나온다.

<오징어 게임>에서의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한 비판은 참된 메시야 좀 보여달라는 절규이다. 자신의 구슬을 떨어뜨리고 “너는 꼭 살아서 나가. 그래서 엄마도 만나고”라고 말한 지영과 같은 메시야가 있으면 보여달라는 절규이다. 안타깝게도 2천 년 전 베데스다에서도 참된 메시야는 보이지 않았다. 38년 된 병자를 향해서 율법의 잣대로 비난만 하는 가짜 종교인들만 넘쳐났을 뿐이다.

4. 예수님의 색다른 초대

그런데 그렇게 아무런 소망이 없는 38년 된 병자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를 고쳐 주셨다. 그가 병에서 나은 것은 가장 먼저 물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은혜가 그에게로 임했기 때문이다. 그가 찾지도 않았고 부르지도 않았는데, 어느 날 예수님께서 그에게로 다가오셨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를 고쳐주셨다. 우리의 소망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말이다.

38년 된 병자에게 다가오셨던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로 다가오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초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8-30) 참된 ○△□(예수님) 초대장은 <오징어 게임>의 초대장과는 다르다. <오징어 게임>의 초대장은 남이 죽어야만 내가 성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내가 죽게 되어 있는 죽음의 초대장일 뿐이다. 모두가 다 456억을 바라보고 참가하지만, 모두가 다 죽는다. 내건 것은 행운인데, 실제 결과는 죽임뿐인 초대장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대장은 우리 대신 예수님이 죽어주신 초대장이다. 그리고 참된 깐부(니꺼 내꺼 할 것 없이 같이 공유하는 단짝 친구) 되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셨다. 마치 일남 할아버지가 456번에게 자신의 구슬을 넘겨준 것처럼 말이다. 마치 지영이가 자신의 구슬을 포기하고 강새벽에게 다 내어준 것처럼 말이다. 오일남이나 지영과 같은 모습은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선 찾기 어렵다. 종교인이라는 게 위선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래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나 그런 사람들을 등장시킨다. 제발 우리들의 삶에서도 그런 메시야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 말이다. 어디 구슬을 양보한 지영과 같은 사람 없나요? 어디 구슬을 넘겨준 오일남과 같은 사람 없나요? 절규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양보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생명까지 내어주셨다. 그러기에 우리가 산다. <오징어 게임>을 보면서, 사람들은 지영이나 깐부 오일남처럼 나를 위해 희생해줄 메시야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 대해서 악의적인 묘사를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진짜 메시야가 있으면 좀 나와달라고 애원하는 셈이다. 삶이 더 절망적일수록 우리는 메시야가 더욱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짓 그리스도만을 추종한다. 때로는 돈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메시야일 것이라고 희망을 건다. 하지만 돈은 우리의 진짜 메시야가 아니다. 그것은 거짓 그리스도일 뿐이다. 그리고 그 돈을 추종하며 따라가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의 노예로 전락해버릴 뿐이다. 돈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고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착취해버리는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때로는 정치 지도자가 우리의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메시야일 것이라고 희망을 건다. 그래서 기꺼이 정치 지도자의 노예가 되길 자처한다. 카톡 뉴스를 퍼나르고, 만나는 사람들마다 정치 지도자를 드높인다. 지금까지 수없이 그런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서 속아왔으면서도,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고 확신한다. 놀랍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목회자들이 정치 지도자를 전하는 데 열정적인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정치지도자도 우리의 참된 메시야일 수 없다. 그들은 거짓 그리스도일 뿐이다. 정치인들은 교회를 이용해먹기 좋은 수단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데, 그러한 그들의 전략에 말려들어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우리는 참된 메시야이신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주님만을 전해야 한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하고, 희생과 봉사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감사함으로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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