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 (삼하 24:18-25)

누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가?(삼하 24:1-17)

매주 수요일 저녁마다 사무엘서의 말씀을 가지고 계속해서 살펴보았는데, 장장 4년이 넘는 그 기간 동안에 우리가 사무엘상 그리고 사무엘 하의 말씀을 쭉 살펴보면서 은혜를 받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은혜가 좀 됐습니까? 예.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도 제가 많은 은혜를 체험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깊이 묵상하는 계기가 되어서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

사무엘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다윗의 이야기가 이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열왕기상에서도 열왕기서에서도 다윗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연결이 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새로운 이야기가 그곳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아무튼 사무엘서의 말씀은 사무엘서 24장의 말씀으로, 이야기가 대단원의 막을 마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볼 때는 처음도 중요하고, 중간도 중요하고, 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부분이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더욱더 중요한 부분이 어디냐 하면, 마지막 부분이 정말 중요합니다. 마지막을 어떻게 맺고 있는가? 마지막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는가?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있는가가 사실은 그 책 전체를 파악하게 해주는 아주 굉장한 단서가 될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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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를 보거나 혹은 드라마를 보거나, 혹은 저 미국 드라마를 본다든지 하게 되면, 이야기의 흐름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주인공이 있고, 또 주인공을 아주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고, 주인공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드라마를 보면 영화를 보면, 그 주인공을 도와주는 사람이 정말 도와주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속이는 사람이었고, 주인공에게 나쁘게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알고 보면 그 사람이 나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렇게 하면서 사실은 그 주인공을 제대로 도와주려고 하는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있는데, 예전에 제가 본 미국 드라마 중에 어떤 한 드라마는 계속 그것을 꼬아놔가지고 보다 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대체 이 사람이 우리 편인지 나쁜 편인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영화를 아주 꼬아놓아 가지고, 그 영화를 보면서, 그 드라마를 보면서, “아, 저 사람이 정말 잘해주면 잘해주나 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속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저러다가 어떻게 배반할까? 또 나쁜 사람이 보면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저 사람이 좋은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면서 드라마를 보게 되는 것인데, 그런데 맨 마지막에 가면 모든 것이 다 정리가 되는 것이, 중간에 있었던 그 모든 일들이 사실은 이러한 큰 목적을 향해서 가고 있었구나!

욥기서의 말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주시고, 욥에게 아픔을 주시고, 고통을 주시는 것 같은데,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욥을 단련하시고 그리고 정금같이 나아오도록 빚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그 마지막을 보면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어쩌면 매몰찬 말씀을 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주인의 상에서 주인에게서 자녀의 떡을 빼앗아서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그 말씀을 들을 때, 정말 충격적인 그런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결국에는 그 여인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병을 치료해 주시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제대로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가 사무엘서의 말씀을 읽는 것도 사무엘서뿐만 아니라 모든 책들을 볼 때는 그 마지막 장면이 어떠한 장면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다윗의 범죄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은 말년에 인구 조사를 하게 되었는데요. 인구 조사를 하는 것은 어쩌면 나쁜 일이 아니라, 왕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성경에는 인구조사를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괜찮을 것만 같은 그런 인구 조사를 했는데, 어쩌면 죄 같지도 않은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주 심각하게 다루신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는데요. 그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서 7만 명이나 되는 그런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하는 그 사실을 보면서, 정말 이것이 그냥 우리가 지나치는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큰 죄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죠. 우리가 보기에 괜찮으면 괜찮고, 우리가 보기에 나쁘면 괜찮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하시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기준에 맞지 아니하면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사람들은 죄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관점으로 죄를 규정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자신의 죄를 숨기려고 하고, 죄가 아닌 것으로 그렇게 숨기기 위해서 그렇게 하게 되는데요. 사람들은 어떻게 죄를 정해야 합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 이것은 죄가 아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마음으로 죄를 지었으니, 이것은 마음속으로만 한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 나는 아무런 잘못을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면서, 이것은 내가 개인적인 취미요, 개인적인 삶의 스타일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기 때문에 죄가 아닌 것이라고 그렇게 자기 자신을 변명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 나는 10원도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다고 하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죠. 하지만 성경에서는 죄의 기준은 우리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시는 것이고 그래서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죄 같지도 않았던 죄를 하나님께서는 심각하게 다루시는 예를 우리는 사무엘서를 살펴보면서 웃사의 경우에서 살펴볼 수가 있었습니다. 법궤를 이동시키려고 했을 때에, 그 법궤가 땅에 떨어질 것만 같은 그 상황 가운데서, 법궤를 지금까지 지키고 보호했던 웃사가 그 법궤를 손으로 만지고 보호하려고 했던 그 행동이 사실은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법궤를 보호하려고 하는 그런 동기에서 진행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웃사를 향해서 진노하시며 치셨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살펴본 적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 웃사의 마음 가운데 교만함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을 보호할 수 있는 종교의 수호자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세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교만한 자세로 나아가는 웃사를 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다윗이 했던 그 인구 조사의 죄는 사실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린다고 하는 가장 중요한 그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이 세상의 것을 의지하고 군대를 의지하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내가 교만해지고 지극히 만족하게 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였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를 했고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였는데요. 이 사무엘서의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이야기가 사무엘서의 마지막 부분에 기록돼 있습니다.

사무엘서의 마지막 부분을 무엇으로 장식할 수 있을까요? 사무엘서의 마지막 부분의 이야기를 다윗이 얼마나 전쟁을 잘해가지고, 이웃 주변의 나라들을 다 정복해 버리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아주 아주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식으로 끝내려고 한다면 그렇게 끝낼 수 있었을 겁니다. 그게 대부분의 동화책에서 나오는 그런 표현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행복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되었습니다. 아주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고 “이제는 태평성대가 이루어졌습니다”하는 것이 동화책에서 나오는 끝나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서를 기록하면서 마지막에 기록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하나님께서 그 다윗을 용납하여 주셔서 그 재앙을 멈추게 하셨다고 하는 이야기로 오늘 이 사무엘서의 마지막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는 갓이라고 하는 선지자를 보내어 주셔서, 이제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리라고 하는 것은 제사라고 하는 것 자체가 어떤 효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회개하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것인데요. 실제적으로 내가 회개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인데요. 그래서 다윗은 그 이야기를 듣고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가서, 그 타작마당을 사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그런데 아라우나와 다윗 왕이 주고받은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있는데, 이 본문의 말씀을 보면, 어떤 이야기가 진행이 되냐면 맨 처음에 아라우나는 다윗왕에게 다윗의 그 목적을 알고, 내가 땅도 드리고 소도 드리고 그리고 번제를 다 태울 수 있는 목재도 다 드리니까, 왕께서 마음껏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라고 제안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무엘 하 24장 22절부터 23절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합니다. “아라우나가 다윗에게 아뢰되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좋게 여기시는 대로 취하여 드리소서 번제에 대하여는 소가 있고 땔 나무에 대하여는 마당질하는 도구와 소의 멍에가 있나이다. 왕이여 아라우나가 이것을 다 왕께 드리나이다 하고 또 왕께 아뢰되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을 기쁘게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공짜로 준다는 얘깁니까? 돈을 받고 주겠다는 얘기입니까? 공짜로 주겠다고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자 다윗왕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24절 말씀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다윗이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라우나가 공짜로 주겠다고, 이렇게 다 왕께 드립니다. 여기 소도 있고, 땔 나무도 있고, 있으니까, 다 드릴 테니까, 왕께서 마음껏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자고 했을 때, 다윗은 아니다고, 내가 값을 다 지불하겠다고 해서 은 50세겔을 주는데요. 우리가 보면은 공짜로 주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그리고 그것을 거절하고 돈을 지불한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이런 방식이 당시에 거래하는 방식이었다고 합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어디에 나오냐면, 아브라함이 막벨라 굴을 살려고 할 때 했었던, 그 대화 가운데도 역시 나옵니다. 사라를 매장할 땅을 사기 위해서 아브라함과 그리고 그 땅 사람들이 서로 흥정을 하는데요. 창세기 23장 11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 주여 그리 마시고 내 말을 들으소서. 내가 그 밭을 당신에게 드리고 그 속의 굴도 내가 당신에게 드리되 내가 내 동족 앞에서 당신에게 드리오니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13절 말씀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그 땅의 백성이 듣는 데서 에브론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합당히 여기면 청하건대 내 말을 들으시오. 내가 그 밭 값을 당신에게 주리니 당신은 내게서 받으시오. 내가 나의 죽은 자를 거기 장사하겠노라.” 그러니까 에브론은 그냥 공짜로 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아브라함은 아니다고 내가 돈 주고 사겠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죠.

그럴 때 이 이 에브론이 무슨 대답을 합니까? 15절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내 주여 내 말을 들으소서. 땅 값은 은 사백 세겔이나, 그것이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문제가 되리이까?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공짜로 준다는 얘기입니까? 400세겔을 받겠다는 얘기입니까? 공짜로 주는 것 같은데, 값이 얼마라는 걸 얘기를 해요. 그러니까 16절의 말씀에서 아브라함이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아브라함이 에브론의 말을 따라 에브론이 헷 족속이 듣는 데서 말한 대로 상인이 통용하는 은 사백 세겔을 달아 에브론에게 주었더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마치 공짜로 주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이 땅이 400세겔 일인데, 뭐 이 땅을 제가 어떻게 팔겠습니까? 그냥 가지세요.” 그러면 내가 그걸 어떻게 공짜로 받겠습니까? 400 세겔은 못 드리고, 300세겔을 드릴게요 그러면 무슨 300세겔을 받습니까? 그냥 보통 값은 350 세겔 정도 될 텐데, 그냥 가지세요. 그러면 좋습니다. 그러면 내가 350세겔을 드릴게요 그래서 서로 거래가 성사되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하고 목회하려고 하면 힘들 것 같아요. 아무튼 다윗은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을 매입하게 됩니다. 만일 이 아라우나라고 하는 사람이 다윗에게 땅을 팔고 싶지를 않았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팔고 싶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옛날 아합 왕에게 땅을 팔기를 거절했던 사람처럼 그렇게 대답을 했을 것이지만, 자신의 땅을 선한 목적을 위해서 쓰겠다고 했을 때 기꺼이 팔게 된 것이고, 다윗은 그 땅을 사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게 됐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보통 많은 목사님들께서 초점을 맞추는 내용이 무엇이냐면 24절의 말씀에 초점을 많이 맞춥니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값을 주고 내게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데 그냥 공짜로 내 희생과 내 헌신이 없이 그냥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 그 이상으로, 우리가 정말 주님 앞에 온전히 헌신하며 나의 것을 희생하면서 드려야 된다고 하는 그 점에 많이 착안하게 되는데요.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이 가져야 될 자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한다면,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무엇을, 내가 무엇을 드릴 수 있을까? 주님께 어떻게 하면 헌신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감사할 수 있을까? 항상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것이 바른 태도일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우리가 더욱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사무엘서의 마지막을 기록하면서 이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들의 구세주가 아니라, 다윗이 우리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그런 우리들의 슈퍼맨, 우리들의 영웅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우리가 이 마지막을 보면서 주목해 보면 좋겠습니다.

다윗이 누구냐면 다윗은 메시아입니다. 다윗은 그리스도입니다. 왜 메시아이고, 왜 그리스도인가요?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용한 사람이 누구냐면, 사무엘을 보내서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으므로, 그 기름 부은 받은 자가 누구냐면, 바로 헬라어로는 그리스도고,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기 때문에, 다윗이 누구냐면 메시아요. 다윗이 누구냐면 바로 그리스도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는데, 그 메시아가 우리들에게 진정한 메시아가 될 수 있었는가?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의 말씀 다윗은 누군가 메시아가 되어서, 우리를 구원해내고 한때 그렇게 했어요. 골리앗을 무찌르기도 하고, 블레셋을 지르기도 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여러 가지 어려움 가운데서 건져내는 그런 구원자의 역할들을 실제로 다윗이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다윗이야말로 우리들의 영웅이오 우리들의 진짜 메시아라고 생각하기 쉽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이 사무엘서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보여주는 다윗의 모습이 무엇이냐 하면, 다윗이 우리들의 참된 메시아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다윗은 누구냐?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참된 메시아가 아니라, 다윗도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했던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주목해 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은총을 간구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용서해 주시고, 재앙이 그치도록 만들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하였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살펴봐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는가? 사무엘서를 읽다 보면 사울과 다윗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됩니다. 사울은 늘 실패한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울에 비해서, 다윗의 모습은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었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의 모습이었고, 정말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사람이 다윗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도 그 자체로 완벽한 인간이 아니라, 다윗도 부족한 사람이었고 죄를 짓는 사람이었고, 결국 이 다윗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이었다고 하는 점을 살펴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신앙의 위인이라고 할 수 있는 다윗의 삶 가운데 드려진 주홍글씨, 죄인이라고 하는 그 딱지, 이스라엘을 구해내기도 했고 블렛의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기도 했지만, 다윗의 이름 앞에 새겨진 그 빨간 글씨가 있어, 이러이러한 파렴치한 죄를 지은 그 모습 그리고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그 모습 그 모습들이 자격 미달이라고 하는 그 딱지가 다윗에게 쫙 그려져 있고, 그리고 그 다윗에게도 하나님이 필요했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했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메시아 참된 그리스도로서 다윗이 이루지 못한 우리를 구원하지 못했던 그것을 온전히 이루시고, 우리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는 참된 메시아가 되시는 겁니다. 다윗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실 다윗처럼 부족한 것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돈도 명예도 그리고 건강도, 우리들의 친구나 가족이나 그리고 내가 믿고 의지하는 어떤 목사님이나 그 어떤 정말 위대한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은 다 부족한 것 밖에 안 되는 것이고, 진정한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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