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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가? (삼하 24:1-17)

다윗의 또 다른 용사들(삼하 23:18-39) +++ 재앙 (삼하 24:18-25)

할렐루야. 다윗이 말년에 인구 조사를 한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요. 이 인구조사를 한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책망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전염병을 보내어 주셔서, 7만 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말씀을 우리가 읽으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그런 것들이 이 본문 안에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당장 질문들이 우리들에게서 떠오르게 되는데요. 1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진노하셨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고,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심판하시려고 하는 그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도대체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그 이유가 무엇일까? 하나님이 그렇게 진노하셔야만 했던 구체적인 죄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던지게 되는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종종 우리가 그렇게 황당한 일을 겪을 때가 있죠. 우리 아이들이 갑자기 부모님이 화를 내시고, 갑자기 선생님이 화를 내시는데, 나는 아무런 잘못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부모님이 화를 내고, 선생님이 화를 내게 되면, 도대체 왜 화를 내는지 모르는 경우가 있고, 그럴 때면 정말 당황스럽게 되는 것처럼, 오늘 24장의 말씀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진노하셨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왜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럽게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진노하고 계시는지, 우리가 이 성경 말씀을 통해서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것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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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서 이스라엘 민족을 숫자를 셌던 것, 인구 조사를 했던 것이 왜 하나님 앞에 범죄 행위가 되는가라고 하는 것도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인구조사를 하라고 명령을 받았을 때, 요압은 다윗 왕을 향해서 간언을 합니다. “왕이시여, 왜 이런 일을 하시려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일을 왜 하시려고 합니까?” 하면서, 요압은 그 인구 조사를 하라고 하는 다윗의 말을 들었을 때, 이것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이라고 하는 사실을 요압이 분명하게 깨닫고, 그렇게 간언을 드리고 있는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로서는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왕이 백성들의 숫자를 세고, 그래서 그 인구조사를 해한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정당한 통치행위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가 있을 텐데, 왜 이것이 죄악이 되는가라고 하는 질문을 우리가 던져볼 수가 있겠습니다.

10절에 보면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후에, 갑자기 다윗은 “내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구나”라고 자책하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도 이 인구조사가 잘못됐다고 말씀하시는 것이고, 요압도 이 인구조사가 잘못됐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았던 것이고, 또한 다윗도 “이것은 잘못된 일이었구나. 내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구나.”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는데, 도대체 인구 조사가 왜 하나님 앞에서 죄인 것인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수많은 율법을 주셨는데요. 그 율법 가운데는 여러 가지 계명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켜야 할 그런 법칙들이 모세 오경 가운데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모세 오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율법들을 아무리 읽어봐도, 인구 조사를 하지 마라라고 하는 그런 계명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구 조사를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는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요. 더 나아가서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향해서 명령하시기를 “이스라엘의 그 군대들의 숫자를 세워보라.” 인구 조사를 하라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셔서, 그래서 민수기에 보면 각 지파에 몇 명씩 출애굽 하게 되었는지, 그 인구 조사를 한 결과가 민수기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왜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한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세 번째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게 만든 분이 하나님이라고 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 조사를 하게, 누가 만들었느냐? 하나님께서 다윗으로 하여금 그렇게 인구 조사를 하도록 만들어주셨다고 하는 겁니다. 다윗은 인구 조사를 할 생각이 없는데, 그냥 다윗은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 가운데 인구 조사를 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마음을 하나님께서 불어넣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시켜서 그 마음을 들게 해서 그렇게 인구 조사를 하게 했는데, 하나님께서 시켜놓고 다윗에 대하여 심판을 벌이고 있다고 하는 것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일로 인해서 이것이 죄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 다윗의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책망하시는데,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7만 명이라고 하는 무고한 백성들이, 죄는 다윗이 지었는데, 이스라엘 민족 7만 명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고 하는 것도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죄를 지은 죄질에 비해서 그 책망이 형벌이 너무나도 큰 것도 문제지만, 범죄 한 자는 그냥 가만히 있고 범죄 하지 아니한 아무 죄가 없는 무고한 이스라엘 민족들이 7만 명이나 죽어야만 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더 나아가서 다섯 번째로 무엇을 또 이해하기가 어렵습니까? 16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7만 명이 죽게 된 이후에, 하나님께서는 갑작스럽게 후회하시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이 재앙을 내리신 것을 뉘우치셨고, 그래서 “이제는 족하다. 이제는 내 손을 거두리다.” 하면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린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뉘우치고, 하나님이 후회하시고 그 일을 중단하셨다고 하는 그 표현도 우리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더 나가서 여섯 번째로 이 이야기가 사무엘하 24장에만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역대상 21장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는데, 두 이야기를 비교해보면 그 두 이야기 사이에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그 기록 내용 자체가 상이한 점이 있다고 하는 것이 좀처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충동질해서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게 만들었다고 되어 있는 반면에, 역대상 21장에서는 사탄이 다윗의 마음을 충동질해서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게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인구 조사의 그 숫자의 구체적인 내용도 다르고, 사람 이름도 다르게 나오고, 그리고 다윗이 회개한 시점도 좀 다르게 나와 있어서, 사무엘하 24장의 말씀은 여러 가지 질문들로 가득 차 있는 본문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그 모든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하나씩 하나씩 한다고 하면, 시간이 너무 많이 흐를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 대답할 수는 없겠고, 몇 가지만 대답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1절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셨다고 하는 그 표현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래서 다윗으로 하여금 인구조사를 하게 만들었다고 하는 식으로 번역은 되어 있으나, 아마도 그 의미는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한 것에 대하여서 진노하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히브리 언어의 그 특징상 그 표현 자체가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어서, 그래서 이 다윗이 인구 조사를 해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범죄 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이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뉘우치셨다고 하는 그 표현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그냥 될 대로, 닥치는 대로 행동하다가 이게 아니구나 하면서, 내가 잘못했구나 하면서 뉘우치고 회개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여기서 뉘우쳤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행하시던 것을 중단하셨다. 하나님께서 지금 재앙을 내리시던 것을 이제는 그만 내리시기로 결정하셨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우리 사람들이 행동하는 방식으로 표현한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을 겁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어놓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죄를 많이 지었지, 내가 괜히 사람을 지었나 하면서 하나님께서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으로서 만들어 놓고 후회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의 죄악을 저지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워하고 정말 정말 슬퍼하셨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한탄하셨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시고, 이 전염병을 내리셔서 7만 명이 죽게 하신 다음에 그때 뉘우쳤다고 하는 이야기는,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지금까지 재앙을 내리는 것을 이제는 그만하고 이제는 더 이상 재앙을 내리지 않겠다고 그 행동을 바꾸셨다고 하는 그런 표현을 구약적인 표현에서 뉘우쳤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제일 가장 중요하게 살펴봐야 될 문제가 있다고 한다면, 다른 문제들도 생각해 봐야 될 아주 중요한 이슈 중요한 신학적 주제들을 담고 있는 질문들이지만, 그 질문들을 다 살펴보기는 어렵고, 그래도 이 본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질문이 있다고 한다면, 왜 인구조사가 죄가 되었는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왕이라고 한다면, 어느 왕이든지 자신의 나라를 잘 다스리고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인구 조사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세금을 거두기 위해서나, 혹은 전쟁에 대비해서 군사들을 모집하기 위해서나, 아무튼 국가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인구조사라고 하는 것은 가장 기초적인 첫 번째 단계가 바로 인구 조사이기 때문에, 따라서 인구 조사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악한 일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무엘하 24장의 말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 행위를 악하다고 보시고, 요압도 그 행위를 보면서 악하다고 생각했고, 다윗도 자신이 인구조사를 한 다음에, “아, 내가 이거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질렀구나.”라고 깨닫게 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그 인구조사를 하게 만든 동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구조 모든 행동에 있어서는, 모든 행동에 있어서는, 다 똑같은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그 동기는 각각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똑같은 행동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하는 동기가 다르면 죄가 될 수도 있고, 거룩한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이죠.

아주 쉽게 얘기한다고 한다면, 구제하는 것, 그리고 기도하는 것, 그리고 금식하는 것에 대해서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요소를 꼽으라고 한다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항상 기도와 금식과 구제라고 하는 이 세 가지를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꼽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를 힘썼고, 그리고 금식하기를 힘썼고, 그리고 구제하기를 힘썼습니다. 시간만 되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겁니다. 하루에 시간을 정해놓고,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기도문을 암송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것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서,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것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금식을 통해서 그 신앙생활을 잘하려고 그렇게 노력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제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정말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들에게 그냥 외면하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어서, 그 가난한 자를 도와주는 그런 구제의 일들을 아주 열심히 한 것이 바리새인들의 행동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정말 신앙생활 잘하고 있구나.” 정말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예수님께서 칭찬해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책망하셨는데요. 너희가 이미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하여서 기도하고, 사람들로부터 박수받기 위해서 금식하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을 위해서 그렇게 구제한다고 한다면, 너희들이 이미 이 땅에서 받을 상을 다 받은 것이고 저 하늘에서는 아무런 상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똑같은 금식과 똑같은 기도와 똑같은 그런 구제를 한다고 할지라도, 정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진실하게 신령과 진정으로 참된 예배의 모습으로 나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이 행위를 통해서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보고 사람들이 나에게 박수를 쳐주는 것이 그것이 너무나도 좋아서 사람들로부터 “저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정말 믿음의 사람이야.”라고 하는 그런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한다고 한다면, 똑같은 행위라도 잘못된 행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 사무엘하 24장의 말씀을 보면 본문만 가지고는 다윗이 어떤 마음으로 인구 조사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그 다윗의 동기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다윗이 과연 어떠한 동기에서부터 이런 인구조사를 했는지, 그 마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해 주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첫 번째는 내가 왕으로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다스리라고 하는, 이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하면 잘 섬겨서 우리 백성들을 잘 도와주어서 행복하게 잘 살게 만들고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그들을 잘 보호해 주고, 그리고 어떻게 하면 우리 시민들이 우리 국민들이 정말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그러한 정말 그 순수한 마음 때문에, 그래서 이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국민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면서, 그래서 이 인구조사를 실시했다고 한다면, 그러면 그 인구조사는 거룩한 인구 조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똑같은 인구조사라고 할지라도, 이 인구조사를 통해서 “아, 내가 지금 왕으로서 얼마나 우리나라의 국력이 컸는가. 우리가 전쟁을 한다고 한다면 저 군인들이 얼마나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내가 이 군대의 힘을 믿고 의지하겠다고 하는 그런 마음으로 그리고 교만한 마음으로 인구조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인구조사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인구조사가 될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는 어떤 동기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를 안다고 한다면, 우리가 분명하게 생각할 수 있을 텐데요. 이 이스라엘 나라는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나라이고 하나님께서 친히 백성으로 삼으신 나라입니다. 원래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 땅에서 종살이하면서, 고통 가운데 살아가던 그런 민족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는 독수리가 그 새끼를 업음과 같이, 독수리의 날개로 데리고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 땅에서부터 건져내셨고, 그리고 그 백성들을 친히 인도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심어 놓으시고, “이제부터는 내가 하나님이니까 너희는 내가 다스린다. 너희는 다른 왕들을 믿지 말 것이고, 이 세상에 그 어떤 신에게도 의존하지 말고,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라.”라고 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왕이 되어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려주시는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가나안 땅에 만들어 놓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이 가나안 땅에 살면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애굽 땅에서 서바이벌(survival) 하기 위해서는 애굽 왕의 법칙에 따라서 살아야만 합니다. 애굽 땅에서는 바로 왕의 명령을 들으면서 바로 왕이 일을 시키면 일을 해야 하고, 바로 왕이 만들어놓은 그 동전을 가지고, 서로 경제생활을 해야 했으며, 바로 왕의 법칙에 따라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때로는 바로 왕이 만들어놓은 그 나쁜 법까지도 다 지켜가면서, 그래서 그곳에서 살아 움직여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에 넣어놓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뭡니까? “이제는 너희는 내 말씀대로 살아라. 내 계명대로 살아라. 너희는 땅을 경작하면서 추수하다가, 그래서 농사를 다 짓고 추수하게 될 때에는, 그 추수한 것을 다 걷지 말고, 고아와 나그네와 과부가 먹을 수 있도록 남겨놓고, 너희는 자비를 베풀며 살라. 내가 너희를 먹이는 하나님이니까, 너희는 너희 이웃들을 향해서 사랑을 베풀며 살라.”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 하나님께서 다스린 나라에서 살기 위해서는 서로 고리대금 하지 말고, 서로 돈 빌려주면서 그렇게 남을 착취하면서 살지 말고, 너희들이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뿐만 아니라 너희 집에 노예가 있다고 할지라도, 일주일에 한 번을 쉬게 해 주어서, 안식일을 지켜 이제는 그들이 거룩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너무나도 착취를 당하며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며 살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살라고 그렇게 말씀해 주신 것이죠.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이 그 가나안 땅에서 살면서 가지게 되는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주변에 다른 나라가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를 보니까, 다른 나라는 왕이 있어요. 왕이 있으면서 그 왕의 제도 하에서 군대를 만들고, 강대국이 되어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 이웃나라에게 마음이 뺏겨버리는 겁니다. 우리도 이웃 나라들처럼 우상을 섬기면서 행복하게 살아보고 싶고 풍성하게 살아보고 싶고 하는 그런 마음들도 생기면서, 이스라엘 민족의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이 드냐면, 우리도 왕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않고, 사람 왕을 세워달라고 하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행위였다고 사무엘상 8장 7절 말씀 가운데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오.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왕의 제도를 싫어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왕의 제도를 허락해 주셨어요.

안 된다고 하면서 그것은 잘못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왕을 세워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왕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왕을 섬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산다고 한다면, 왕의 제도 하에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왕을 세워주셨는데, 그 첫 번째 왕은 실패해버리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그 과정 가운데, 이 사울 왕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번제를 드리는 것이,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번제를 드린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싶어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라, 사울 왕의 마음 가운데 이스라엘의 군대들이 많이 있어야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이 군인들이 자꾸만 흩어져 버리니까, 이 흩어져버린, 약하고 약해 빠져 버린 그 군인들을 가지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기 때문에, 이스라엘 군대가 더 이상 흩어지지 않게 그들을 모아 두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 먹은 겁니다.

우리 전쟁에서의 승리는 어디에 달려 있는가? 하나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군인들에게 달려 있는데, 그 군인들이 흩어지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한 것이죠. 이용한 것이죠.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 세상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해 먹었을 때,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 왕을 하나님께서 인정치 아니하시고, 이제는 새로운 왕을 허락해 주시겠다고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사울의 죄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을 경배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그래서 인격적으로 대하지 아니하고, 그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군사들이 다 흩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그리고 전쟁이 하나님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숫자에 달린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 가운데서 그의 마음이 달라졌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이 지은 범죄가 무엇이냐면, 사실은 그때 사울이 범했던 죄와 똑같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도 지금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지금 이스라엘 군대들이 흩어지는 것을 막아야만, 이스라엘 군대가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만,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생각하고, 그 숫자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걸 통해서, 그 숫자를 모아두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의지하려고 하는, 그런 죄악을 저질렀는데, 지금 다윗의 인구 조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신다고 하는 그 시편의 고백들과는 달리, 이제는 왕이 되고 배가 부르고, 나에게 돈이 있고, 내게 군대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내게 필요하지 않고, 더 필요한 것은 얼마나 내가 더 큰 군대를 가지고 있느냐? 얼마나 내가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느냐에 다윗의 마음이 뺏겨 버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남의 것을 훔쳐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살인을 하고 간음을 해야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어디에 있는가? 죄는 우리의 모든 삶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로 향하지 않고, 그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거예요. 성경을 읽으면서도, 기도하면서도, 찬양을 하면서도, 그 어떤 것을 하면서도, 사실은 사울이 제사를 드리면서 범죄 했던 것처럼, 우리가 하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우리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 그 모든 것 가운데서, 죄의 가능성들이 다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 23절의 말씀에 로마서 14장 23절의 말씀에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내가 지금 밥을 먹어도, 내가 지금 쉬고 있어도, 우리가 하는 그 어떤 것 가운데서, 우리의 믿음에서 나오는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마음이 동기가 되고 교만한 마음이 동기가 되어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그런 욕구가 동기가 되어서 하는 그 모든 일들이 다 죄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이 아주 심각한 이 사실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인구조사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왕 자체도 나쁜 것이 아니고, 돈 자체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마음에서 사용하느냐, 무엇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것이 죄가 될 수도 있는데, 그 죄가 그냥 가벼운 죄가 아니라, 엄청나게 무서운 죄라고 하는 것을 오늘 성경 말씀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님의 일을 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 사실은 그 마음속에서 가지고 있는 잘못된 동기들 잘못된 행동들이 우리들에게 괜찮은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심각한 죄가 된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의 죄를 심각하게 다루셔서 7만 명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죽이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좀처럼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죄는 다윗이 저질렀는데, 왜 그 피해를 아무 죄가 없는 이스라엘 민족의 백성이 희생을 당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그런 형태의 질문은 아닙니다. 제가 추측하기로는 이때 죽었던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따지지는 못할 것이라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 나는 왜 억울하게 죽어야 했습니까? 내가 죄지은 것이 아닌데, 왜 나를 죽이셨습니까? 죄는 다윗이 지었는데, 왜 나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셨습니까라고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서 항의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추측해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해서 해주셨던 바로 그 약속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을 가나안 땅으로 들여보내신 것이 맞지만,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그들의 죄가 너무나도 꽉 차 버려서 이제는 심판하실 때가 되었다고 하는, 그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셨다가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그들을 심판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그 얄팍한 머리로서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그 섭리를 다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얘들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아마 무고하게 죽은 것 같은 그런 7만 명이라고 할지라도, 사실은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 나는 괜히 억울하게 이런 일을 당했다”라고 그렇게 말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는 있습니다.

다 완전하게 설명은 해드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그런 채찍을 내리시고 심판을 내리셨는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받게 됩니다. 이것이 아주 놀라운 일인데요. 조금 전에 제가 설명드렸던 것처럼, 다윗의 죄는 어떤 죄였느냐? 사울이 지었던 죄와 똑같은 죄입니다.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사울은 나쁜 왕, 다윗은 좋은 왕. 사울은 나쁜 사람, 다윗은 좋은 사람이라고 그렇게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마는, 그러나 그 다윗의 행위들을 하나씩 하나씩 분석해 보면, 사울이 지었던 죄를 똑같이 짓는 것이고, 사울이 지었던 죄보다 더 큰 죄를 짓는 모습이 다윗의 모습 가운데서 나타나는 것이죠, 그 옛날 사울이 전투를 앞에 두고 하나님의 제사를 정말 망령되이 사용해서,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으려고 했던 그런 사울의 죄나 인구 조사를 했던 다윗의 죄나 똑같은 종류의 죄라고 할 수가 있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울을 향해서는 폐위하시고, 이제는 그 사후를 더 이상 왕이 되지 못하게 하신 반면에, 놀랍게도 다윗은 또 용서를 받습니다. 밧세바와의 그런 아주 파렴치한 죄를 지은 이후에도 용서를 받았는데, 다윗은 또 용서를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다윗은 뭐가 있어서 그렇죠? 아무것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봐주신 거예요.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서 다윗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들을 통해서 한 아들을 주어서 그 아들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기도 하시고, 뿐만 아니라 다윗의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어요.

사무엘하 7장 15절의 말씀 사무엘하 7장 15절의 말씀에 “내가 내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오로지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설명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근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놀랍게도 그 사랑이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사, 그리고 그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깨끗하게 살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신앙적인 열정을 냈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면이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는 것이 아니라, 나는 공로 없어도 영접하실 터이니,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여 주시는 그 하나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밖에는 설명할 것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는 소망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입니까? 우리들에게 소망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더 많은 돈을 가졌다고 하는데 소망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없어져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더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건강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눕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소망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나와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그 아들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에게 소망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 다윗의 죄악을 다스리시면서도, 그 다윗을 영원히 물리치지 아니하신 그 하나님께서 사실은 우리도 사랑하고 계시고,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계시다고 하는 그 사실을 바라보며, 늘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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