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국진
여행을 떠나는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서 맡겼다. 그 주인은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맡길 때, 어떤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맡겼지만, 어떤 종에게는 두 달란틀 맡겼고, 또 어떤 종에게는 한 달란트를 맡겼다. 주인의 처사가 결코 잘못된 것은 없다. 주인은 자신의 재산에 대하여 자신의 마음에 따라 나누어 맡길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지 않을 자유도 있다. 내가 만일 주인이라 해도, 종들에게 재산을 맡긴다면, 공평하게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비유를 통해서 묘사되고 있는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인가?
송명희 시인은 “나”라고 하는 시(詩)에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갖게 하셨네.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는 이 시가 더욱 더 감동적인 것은 이 시를 쓴 시인이 뇌성마비 중증 장애인이라는 사실에 있다.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해도 온 몸을 비틀며 한 마디씩 해야만 하는 그 시인의 입에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이라 노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 세상은 공평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평하신가? 송명희 시인은 자신에게는 지식도, 재물도, 건강도 없지만, “하나님을 알게 된 것” 바로 그것 때문에 공평하다고 외치고 있지만, 만일 하나님을 알면서 지식도 있고 건강과 재물도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하나님은 공평하다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사람이 너무 많다.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잘생긴 외모에 큰 키, 그리고 운동이라면 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최고 학문을 공부했을 뿐만 아니라, 부드럽고 인상적인 매너의 소유에, 노래도 잘하고 유머와 재치가 넘치고, 게다가 신앙도 참 좋다. 반면 내가 아는 또 다른 어떤 사람은 학식도 변변치 않은데다가 늘 병을 달고 살아가면서 성질도 고약하고 가진 것도 하나도 없이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정말 하나님을 공평하신 하나님이라 할 수 있겠는가?
실제적으로 공평하지 못한 현상에 답을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인간이 모두 공평하게 태어났지만, 나태했던 사람은 힘들게 사는 것이고, 열심히 수고한 사람은 모든 것을 누리게 된 것일 뿐이다”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첫 출발은 같았지만, 베짱이처럼 놀기만 한 사람은 고생하게 되는 것이고, 개미와 같이 열심히 노력한 사람은 나중에 영화를 누리게 된다는 설명이 그럴 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처음부터 장애인으로 태어나고 처음부터 가난한 가정에 태어난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처음부터 부잣집의 아들로 태어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 누리면서 시작한 사람들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가?
1984에 나왔던 밀로스 포만(Milos Forman) 감독의 아마데우스(Amadeus)라는 영화가 있었다. 이 영화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모차르트와 당시 궁정의 악장이었던 살리에리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다. 이 영화에서 살리에리는 왜 하나님이 모차르트와 같은 난봉꾼에게는 정말 뛰어난 음악을 만들어내는 재주를 주시고, 자신과 같은 성실한 자에게는 그런 재능을 주지 않았는지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공평하심과 정의로우심에 관한 질문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족함을 느낄 때마다 과연 하나님이 공평한가 질문을 던질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별 노력 없이도 풍부함을 누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이런 질문이 우리들을 괴롭힐 것이다.
패륜아의 비유에 나오는 형은 아버지를 향해서 외친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눅 15:29-30). 패륜아의 형이 아버지에게 제기한 문제도 공평함의 문제이다.
사실 나도 두 딸을 기르는 아버지로서, 그리고 여러 성도들을 목회하는 목사로서 공평의 문제가 쉽지 않은 문제임을 느낀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딸들이 어렸을 때 서로 엄마를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일이 많았다. 잠자리에 누워 엄마가 큰 딸을 바라보고 누우면, 작은 딸이 불만이고, 엄마가 작은 딸을 바라보고 누우면 큰 딸이 불만이었다. 이럴 때 아빠가 하나 딸을 맡으면 좋겠는데, 섭섭하게도 아이들은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야누스가 아닌 이상, 하나의 얼굴을 가진 엄마가 산술적으로 공평하게 딸들을 바라보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까 산술적으로 모든 인간들에게 공평하게 대우하시고자 한다면 하시겠지만, 사람들은 결코 그 하나님의 공평함을 실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각각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그 사랑의 표현들을 표준 점수화시킬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고 항상 남의 떡이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으로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달란트 비유에서 각각 다른 양의 달란트를 종들에게 맡겼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주인은 종들에게 각각 다르게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각각 다르게 대우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공평하시다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크기가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의 크기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수천억원씩 유산을 나누어 받았는데, 형이 1원을 더 가진다고 하면 그 차이가 느껴지지 않듯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너무나도 커서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바울 사도가 세상 사람들이 바라보는 관점에서의 장점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겼던 것처럼(빌 3:8),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장점은 아무런 무게가 나가지 않는다. 그렇기에 돈이 많고 적음, 건강하고 병약함, 학식의 많음과 일천함, 신분의 고귀함과 비천함, 남녀의 차이, 노소의 차이, 장애의 유무여부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평하게 대우하신다는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는 송명희 시인의 고백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남이 모르는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지식을 얻은 자는 하나님이 공평하시다고 큰 소리로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배설물로 여겨지는 이 세상의 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거나 적게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무런 차이를 내지 못한다. 아직도 하나님이 공평하지 못한 것 같다 생각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일 것이고, 이 세상의 욕심에 매여 있는 사람일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공평함이란 산술적인 공평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가지고 계시는 마음의 크기의 공평함을 의미한다.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할 때, 모든 것을 산술적으로 똑같이 해줄 수 없고, 목회자가 모든 성도들을 산술적으로 똑같이 심방하거나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자녀들을 한 결같이 사랑하는 그 부모의 마음의 크기는 공평할 것이다. 어느 날 우리 가정에서 큰 딸이 부모의 공평함의 문제를 제기했다.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왜 자신에게는 동생에게 해주는 것처럼 해주지 않았느냐?”는 것이 질문이었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너를 사랑하는 방식은 우리가 네 동생을 사랑하는 방식과 같지 않을 것이다. 너에게 맞는 사랑의 방식이 있고, 네 동생에 맞는 사랑의 표현이 있다. 하지만, 아느냐? 우리가 너와 네 동생을 사랑하는 그 크기는 똑같다. 그것은 너희를 살릴 수 있다면, 우리는 너희에게 우리의 심장을 빼어내 줄 만큼 너희를 사랑한다.”
다섯 아들을 훌륭하게 잘 키워낸 어떤 어머니에게 기자가 이렇게 질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다섯 아들을 훌륭하게 잘 키워내셨는데, 이 아들들 가운데 그래도 가장 마음에 가고, 더 사랑이 가는 아들이 있었습니까?” 그때 그 어머니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예.. 있었습니다. 집을 떠나 여행하는 아이가 있으면, 그 아이가 돌아올 때까지 그 아이에 대해서 가장 마음이 갔고, 염려를 그칠 수 없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어 방황하는 아들이 있었을 때에는, 그 아이에게 가장 마음이 쓰였습니다. 감기에 걸려 밤새도록 기침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들이 있었을 때에는, 그 아이를 가장 많이 사랑하며 그 아이를 위해 밤을 해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늘 하면서 산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까? 하나님이 왜 나에게는 행복한 가정과는 거리가 멀게 하셨을까? 왜 나에게는 건강이 없는가? 하지만 기억하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크기는 너무나도 크며, 그 크기는 똑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모두 사랑하시기 위하여,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불공평하셨다.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외치는 그 외침을 하나님은 무시하셨다. 아무 공로 없는 나를 살리시기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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