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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달란트 비유

탁월함보다 신실함

– 이국진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 때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한 사람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할 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는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가지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이르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하니라. (마 25:14-30)

3.5.1 하나님의 은혜

비유는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설명하는 기법이기는 하지만, 종종 비유는 듣는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설정으로 듣는 이의 이목(耳目)을 집중시킨다. 그래서 상식적으로라면 일어날 수 없는 희한한 장면이 비유 속에서 종종 등장하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들은 그 비유에 좀 더 호기심을 갖게 될 것이다. 마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처럼 말이다.

주인이 종들에게 어마어마한 달란트를 맡긴 채 멀리 떠났다는 이야기는 좀처럼 기대하기 어려운 장면이다. “달란트”라는 것은 원래 무게를 나타내는 단위인데, 1세기에는 금이나 은의 무게(주로 은의 무게)를 가리키면서 화폐의 가치로 통용되었다. 1달란트는 아마도 30 킬로그램 정도의 무게에 해당한다고 한다. 은으로 한 달란트의 무게이면 당시에 6천 데나리온에 맞먹는다고 한다. 한 데나리온은 남자 장정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것이므로(마 20:1-15 참조), 한 달란트의 가치는 약 20년의 연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경제규모와 오늘날의 경제규모가 달랐다고 하는 점 등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지 않은 채, 이것을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여 얼마정도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사이먼 키스트메이커는 한 달란트가 1년 치 연봉에 해당한다고 계산한다. 1 어쨌든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의 화폐가치는 종으로서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는 어마어마한 가치의 금액이라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데 주인이 종들에게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홀연히 떠나버렸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마 21:33-44)에서 보듯이, 포도원 농부들은 기회를 타서 포도원이란 부동산마저 자신들의 것으로 삼아버리려 했다. 부동산마저도 주인에게서 탈취하여 취하려는 농부들이 가능하다면, 주인이 떠나버린 상태에서 현찰로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이면, 충분히 종들이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갈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맡기고 여행을 다녀온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다. 2

달란트 비유는 이런 비상식적인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가를 보여주는 의도적인 설정이다. 달란트 비유의 이해는 우리가 얼마나 큰 은혜를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는가를 발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야 한다. 우리는 한 순간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이다. 패륜아의 비유(눅 15:11-32)에서 그려주고 있는 것처럼,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떠나 창기와 함께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주는 것에 견줄 수 있다. 옷과 반지는 여전히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상속자임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런 대우는 과분하기 그지없다. 이러한 모습이 달란트의 비유에서 처음부터 보여지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옳은 관점의 신앙은 우리가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구원이라는 것을 쟁취해내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신앙적인 열심을 보임으로써, 그에 적합한 상급으로서의 구원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관점은 미신적인 관점이고, 더 나아가 모든 비성경적인 종교의 관점이다.

성경적 관점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은 우리가 그러한 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을 쌓았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먼저 하나님께서 사랑을 보여 주셨다.

이렇게 과분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우리가 아무것도 내세울만한 공로가 없었다는 점을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는 신앙의 고백이 예정론(豫定論, predestination)이다. 이것은 딱딱한 책상 위에서 사색의 결과로 만들어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크심과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음에 대한 깊은 묵상에서부터 나온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신 그 이유를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고백이다.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의 영원한 형벌 가운데로 처분을 받아야 하는 사람과 내가 아무런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셨다는 것이 성경적인 관점이다.

그래서 신앙의 출발점은 나의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하나님의 과분한 용서를 받은 자이기에 원수도 사랑하도록 요구받는 것이고,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을 받는 자이기에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미 받은 자이기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주인이 먼저 그 종들에게 각각 달란트를 맡기셨다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달란트의 비유를 읽으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노력한 결과에 따라 결국 하나님의 종말의 심판대 앞에서 판단을 받을 것이며, 결국 그 심판대 앞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하기 위해서 지금은 힘들더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해낸다면, 이것은 달란트의 비유를 처음부터 잘못 이해한 것이다.

주인이 종들에게 어마어마한 금액의 재산을 맡기지만, 이 비유에서는 그렇게 달란트를 맡기는 이유를 분명하게 무엇이라고 밝히지 않는다. 비유의 이야기 속에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비유 전체의 흐름을 통해서 독자들은 종들이 그 달란트를 가지고 무엇을 했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종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하든 무엇을 하든 이익을 창출해내야 했다. 하지만 그 목적은 달란트 비유의 초두에서 숨겨져 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존재 목적을 잊고 산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이 달란트를 주는 목적을 밝히지 않고 여행을 떠난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달란트를 준 목적은 있었다. 실제 상황이라면 분명 주인이 종들에게 무엇인가를 지시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비유에서는 그 목적이 감추어져 있다. 종들은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주인이 왜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겼는지를.

우리가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했던(고전 15:10) 바울 사도의 고백처럼,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이다. 뛰어난 외모도, 건강한 육체도, 번뜩이는 지혜도, 경건을 소망하는 마음도,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단점과 약점도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약한 것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여 지는 것이고, 하나님은 그 약함마저도 사용하시기에 그렇다(고후 12:9).

만일 나의 모든 것이 주님께로부터 말미암았다면(롬 11:36), 나의 나 됨 자체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달란트이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런 모습의 나를 허락하신 이유를 알지 못할 때가 많다. 특히 그 달란트가 단점이고 약점일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그 약점은 없애야 하는 것이고, 수치거리라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종종 우리의 약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최고의 달란트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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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사이먼 J. 키스트메이커,『예수님의 비유』(기독교 문서 선교회, 2002), 185.[]
  2. 학자들은 이 시대에 종들은 단순한 노예가 아니라 사업 파트너였다고 한다. 예를 들면, J. Duncan M. Derrett, “Law in the New Testament: The Parable of the Talents and Two Logia,” ZNW 56 (1965), 1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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