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 (눅 15:25-32)

성실하게 살아온 아들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집을 뛰쳐나가고 패륜을 저지른 아들에게는 잔치를 베풀어주는 게 과연 공평한 일일까? 하나님도 그렇게 불공평한 정의롭지 못한 하나님일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아주 유명한 탕자의 비유의 일부분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는데요. 탕자가 집을 나간 것은 그냥 우리가 생각하는 가출 정도가 아닙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아주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그 살아 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요구하는 것, 이것은 정말 충격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유산을 가지고 먼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해가며 다 써버리고 낭비하는 것, 정말 그 이야기를 유대 사회에서 들었다고 한다면, ‘정말 이런 몹쓸 자식이 있는가?’ 하면서 다같이 분노하고 다같이 치를 떨면서 충격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만한 아주 끔찍한 사건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만일 이 탕자의 비유를 오늘날 우리 현대에 맞는 21세기 상황에 맞는 이야기로 재구성하자면, 어느 날 어떤 아들이 엄마가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로 엄마를 죽여버리고, 그리고 돈을 빼앗아 유흥업소에 가서 마음껏 써버렸다고 하는 그런 패륜아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 패륜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고 하면, ‘아무리 도덕이 땅에 떨어졌기로 서니도 그렇지, 어떻게 엄마를 죽이고 그렇게 허랑방탕할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충격에 빠질 만큼,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이 탕자가 한 일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바로 그런 행동과 똑같은 것이라고 이해해도 그렇게 과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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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유대 사회에 이런 탕자가 있다고 한다면 동네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었을까요?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동네 사람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그 탕자를 잡아다가 재판을 하고 그리고 그 아이를 가운데 세워놓고 돌을 던져서 그 아이를 죽이는 일이 발생해도 아무 할 말 없을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설마 그렇기로서니, 그 아들을 돌에 던져 죽일 수 있을까?’ 아마 의심하시는 성도님들이 있을 수가 있겠는데요. 그러한 일들이 ‘설마, 그럴 리가?’ 하는 일들이 오늘날에도 얼마나 잘 일어나고 있습니까? 저 탈레반이 집권한 아프가니스탄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가 여성들이 온몸을 가리지 않았다고 하는 이유로 즉결 심판을 당하는 일이 21세기에 벌어지고 있는 것이고, 가족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자신의 딸을 죽여버리는 그런 끔찍한 이야기가 인도나 파키스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유대 사회도 그와 비슷한 현상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탕자가 있었다고 한다고 하면 예수님께서 이 탕자의 이야기를 해줄 때 그 이야기를 듣는 수많은 청중들은 분노하면서 반응했을 겁니다. ‘세상에 그렇게 못된 놈이 있는가? 그런 나쁜 자식이 있는가?’ 하면서 모두가 다 그 탕자를 향해서 분노하고 욕을 해낼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바로 탕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쫄딱 망하고 돌아온 그 탕자를 아빠는 받아 주었습니다.

아들이 돌아오는 그 모습을 멀리서 아버지가 바라보고 뛰어가서 아들을 맞이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점잖은 어른은 결코 뛰는 법이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저 멀리 아들의 모습을 희미하게 바라보고서 뛰어나가는 겁니다. 체통이고 뭐고 상관 없이 뛰어나가는데, 뛰어나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동네 사람들이 그 아이를 잡아다가 죽일까 봐. 그 아이를 쫓아낼까 봐. 그 동네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에 먼저 뛰어가서 그 아이를 안고 데리고 와서 그 아이를 씻기고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워주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웠다고 하는 얘기는 이 아이의 옷이 더러우니까 그냥 옷을 새로 새 옷으로 갈아입혀 주었다고 하는 그런 의미 정도가 아닙니다. 유대 사회에서 옷을 입힌다고 하는 것은 이 사람이 바로 나의 정당한 상속자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야곱이 12 아들들 가운데서 요셉에게 채색 옷을 입힘으로 말미암아 나의 상속자는 요셉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른 형제들에게 알리게 만들었던 것처럼 내 옷을 입히고 그 아이에게 멋진 옷을 입히고 또한 가락지를 끼운다고 하는 것은 ‘네가 우리 집안의 모든 창고의 권리를 가지고 그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이 집안을 통치할 수 있는 정당한 유산 상속자’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사건이었는데요. 아버지는 이 둘째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정당한 자식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고,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송아지를 잡으면서 잔치를 벌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탕자의 비유인데, 언제 들어도 또다시 들어도 감동적이고 또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이야기 이후에 일어나는 두 번째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2막에서는 탕자의 형이 등장합니다. 그 형은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형이 밭에 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고 밭에 일을 하러 간 겁니다. 매일매일을 아버지의 뜻 따라 성실하게 일하는 너무나도 모범생인 아들이 큰 아들인 것이고, 그날 또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밭에 가서 하루 종일 수고하고 했으며,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일한 그 아들이 돌아오는 길에 집에서부터 들려오는 풍악 소리를 듣게 된 것이고 집에서부터 흘러나오는 그 향기로운 고기 냄새를 맡게 된 것이죠. 그래서 그 큰 아들은 종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 우리 집에서 단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는 가운데 이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는데 도대체 무슨 풍악 소리가 들리는 것이고, 맛있는 고기 냄새가, 이게 무슨 냄새인가?” 종에게 묻는데 종이 대답을 합니다.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동생이 돌아온 것을 너무나도 기뻐해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형은 화가 끝까지 치밀어 솟아오릅니다. 동생이 돌아왔다고 하는 소식에 그리고 아버지가 그 동생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소식에 이 형이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공평의 문제였습니다. 29절에서부터 30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거니와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빠가 공평하지 않다는 겁니다. 공평하게 행동해야 되는데 공평하지 않게 행동하는 겁니다. 탕자가 누굽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가져가 버린 사람입니다. 허비해 버린 사람입니다. 그것도 장기와 함께 놀아놨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켜 버렸는데, 그 탕자가 받아야 될 당연한 대우가 있다고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해야 되는 것이고, 유대 사회라고 한다면 그런 아들은 죽여버릴 수도 있는 것이 그에게 마땅한 대우라고 할 수 있겠는데, 더군다나 자기 큰 아들을 향해서는, 나를 향해서는 대우가 불공평한 겁니다.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 열심히 순종하면서 매일매일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종했는데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보상도 없는데, 나에게는 잘했다고 하는 아무런 칭찬도 없는데, 저 몹쓸 놈이 돌아오니까 보상을 해주는 거예요. 저 나쁜 놈이 돌아오니까, 송아지를 잡는 거예요. 이게 무슨 억울한 일이, 이런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우리 집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까? 이러한 큰 아들의 불평에 대해서 여러분들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어쩌면 일리 있는 불평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많이 가졌느냐 적게 가졌느냐 때문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지 못한 대접을 받으면 불만이 생겨나는 겁니다. 공평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공평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해주는 것이 공평이 아닙니다. 이 사람도 한 달란트, 이 사람도 한 달란트, 이 사람도 한 한 달란트, 모든 사람들에게 다 똑같이 주는 것이 공평이 아니라, 이 사람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것이 공평인 것이죠. 누군가가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면 누군가가 착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는 상을 주는 게 맞는 것이고, 누군가가 악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처벌을 받는 것이 공평한 것이죠.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싶습니까? 공평한 세상에 살고 싶어요. 착한 사람은 상을 받고 악한 사람은 처벌을 받는 사유에 살고 싶은 것이지, 아무리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해도 아무런 보상이 없는 사회, 그런데 땅땅 놀기만 하고 악한 짓을 한 사람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잘 먹고 잘 사는 그런 사회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사회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지금 아버지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불공평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탕자를 향해서 과도한 사랑을 베풀어 주는 것이고 과도한 영접을 해주고 있는 것이죠. 정당한 대접이라고 한다면 쫓아버리는 것이 당연하고 그리고 그 가져간 돈을 다 회복해서 그렇게 해서 가져와야만 받아주겠다고 하는 것이 정당하고 공평한 대우가 될 텐데요.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는 공평하지 않은 아버지인 겁니다. 수고하고 애쓴 아들을 향해서는 이런 대우를 해준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집을 나간 아들.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켰던 그 아들을 향해서는 정말 환대 중에 큰 환대, 환영 잔치를 하면서 그 아들을 맞이하는 그 아버지를 보면서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고 아버지의 공평함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에 불만을 터뜨리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공평을 무너뜨려버린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사랑 때문에 공평함을 망가뜨려 버린 것이죠. 둘째 아들이 죽은 줄 알았는데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니까, 너무나도 기뻐서 내가 공평하게 아이들을 대해야 되겠다고 하는 그 공평함이 사라져버린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형의 불평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불평입니다. 아버지가 사랑의 눈에 멀어서 정말 아이들에게 공평한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불공평하게 오히려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에게는 별로 대우를 하지 않는 반면에 정말 집을 나간 아들을 향해서는 과도한 대접을 해주고 있다고 하는 것 어쩌면 이 형의 불만은 정당한 불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는 하나님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정말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요. 아니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공평해야만 할 것 같아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세상이 공평하게 돌아가는 것이고 수고한 자에게 선을 행한 자에게는 상을 베풀어주시고 게으른 자에게 악을 행한 자에게는 처벌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이 계신 결과로 나타나야만 당연할 거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그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께서도 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공평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악을 행한 자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죠. 영원히 멸망받을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멸망받게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아무 죄가 없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통해서 우리들을 구원해 주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베풀어주셨는데 이것이 공평한 것이냐면 공평하지가 않은 거예요. 그래서 불신자들이 기독교를 보면 못 믿겠다는 겁니다. 정말 용납할 수 없다는 겁니다. 죄인들은 천국 간다는데, 악한 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다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것인데요.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이 큰 아들이 잊고 있는 것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큰아들이 잊고 있는 중요한 지점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만 과도하게 불공평하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사실은 큰 아들을 향해서도 과도하고 또한 불공평하게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 대답을 합니다. 31절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되.” 아들은 큰 아버지는 큰 아들을 향해서 말을 합니다. ‘내 것이 다 네 거야.’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서 인색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서 큰 아들을 향해서 공정하게만 대우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베풀어주고 있는 거예요. 아버지 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아버지의 수고와 땀으로 얻은 결과란 말이에요. 큰 아들이 만들어낸 게 아니에요. 큰 아들은 조금 도와줬을지 모르지만, 그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형성하는데 아버지의 공로고 아버지의 힘으로 모든 재산을 만들어 놓았는데 그 아버지가 하는 말이 내 재산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큰 아들은 그걸 알지 못하는 거죠. 느끼지 못하는 거죠. 왜냐하면 일상화되어버린 은혜는 은혜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랑이 사실 나에게도 내가 받을 만한 자격이 있어서 아버지가 나에게 사랑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받을 수 있어 있을 만큼의 그런 충분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사랑해 주셔서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그게 마땅히 자신의 권리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아버지가, 어머니가 자녀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돈을 맡겨 놨습니까? 저축을 해놨습니까? 아니요. 아기가 태어나는 그 순간 그냥 일방적으로 사랑을 해주는 거예요. “갓난아기가 태어나서 엄마한테 엄마 1만 원 줄 테니까 나 젖 빨게 해 줘.” 엄마한테 돈 준 적 있어요? 좀 먹겠다고 대가로 지불한 적이 있어요? 없지만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는 거죠. 자녀가 아빠를 위해서 아르바이트를 해준 것이 아니고, 자녀가 하루 8시간 일해서 그만큼 대가를 지불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어머니의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래서 내가 120시간씩 일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세끼 밥을 먹을 권리를 획득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먹이고 입히고 채워주고 돌봐주는 그 불공평한 사랑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과도한 사랑을 우리 모두가 받았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큰 아들이 지금까지 누리고 있었던 그 모든 것들은 다 불공평한 것이고 자기가 힘써서 애써서 획득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누릴 수 없는 것임에도 불고 구하고 지금까지 주어진 것이고 그 과도한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 아빠가 작은 아들에게만 사랑을 베푼 것이 아니라 과도한 배려를 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기에게도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큰 아들은 망각해 버렸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보아야 할 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큰 아들도 작은 아들처럼 아버지를 불순종했다고 하는 점입니다. 큰 아들은 탕자를 바라보면서 집을 나간 자식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먹은 자식이고, 그 탕자의 온갖 비난할 거리만을 바라보았지만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세요. 그 아들이 지금 말하고 있는 자리가 어디입니까? 어디서 지금 그런 말을 하고 있죠? 집 밖에서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집을 나간 게, 둘째 아들만 나간 게 아니고 첫째 아들도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를 거부하면서 안 들어가면서 아버지의 명을 거부하면서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둘째 아들만 나쁜 짓을 한 것이 아니라, 큰아들도 지금 아버지의 명을 어기면서 집에 들어갈 수 없다고, 나는 그 아버지의 품에 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인데요.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잘 보지만 자기 자신의 허물을 잘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작은 아들만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니라, 큰 아들도 잘못한 것이고, 큰 아들도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탕자의 형과 같이 큰 아들과 같이 생각하며 살 때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을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의 허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사람의 허물을 먼저 보고 그리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신실하게 살았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정직하게 살았고. 저 사람보다는 내가 더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았는데, 하나님, 그런데 왜 나한테는 돈을 안 주세요? 하나님, 그런데 왜 나한테는 건강을 안 주세요? 하나님, 왜 내 기도는 안 들어줍니까? 왜 저 사람한테는 과도하게 축복을 주는데 왜 나한테는 안 주는 겁니까?

우리 주변을 바라보면서 감사가 사라지고 교만한 마음이 솟아오르고 때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아야 하는 것인데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에게 불공평하게 억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사랑해 주셔서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을 기억하며 날마다 날마다 감사와 찬송으로 기뻐함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잭 캔필드라고 하는 사람이 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의 이야기>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한때 굉장히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인데요. 그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 에피소드들 가운데 어떤 한 에피소드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사람은 여러 사람들에게 글을 받아 가지고 엮어서 낸 책인데요. 어떤 한 사람이 보낸 글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린 아들이 부엌으로 와서 쪽지를 내밀었습니다. 저녁 준비를 하던 그 엄마는 앞치마로 손에 있는 물기를 닦아 닦은 후 그 아이가 준 쪽지를 받아서 읽었는데요. 그 쪽지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청구서. 잔디 깎은 값 5불. 이번 주에 내 방 청소한 값 1불. 가게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50전. 엄마가 시장 간 사이에 동생 돌보아 준 값, 25전. 쓰레기 내다 버린 값, 1불. 숙제를 잘한 값 5불. 마당을 청소하고 빗자루질 한 값 2불. 전부 합쳐서 14불 75전”짜리 청구서를 꼬마 아이가 엄마에게 내밀었습니다.

그 청구서를 바라보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기대에 차서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그 아들의 얼굴을, 엄마는 쳐다보고 그리고 연필을 가지고 와서 아들이 쓴 종이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너를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다닌 값, 무료. 내가 아플 때 밤을 세워가며 간호하고 널 위해 기도한 값, 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힘들어하고 눈물 흘린 값, 완전 무료. 너 때문에 불안으로 지새운 수많은 밤과 끝없이 염려해야 했던 시간들, 모두 무료. 장난감 음식 옷 그리고 심지어 네 코를 풀어준 것까지도, 몽땅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진정한 사랑은 모두 무료.”

아들은 엄마가 쓴 글을 다 읽고 나더니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했습니다. “Mom. I love you. 엄마 사랑해요.” 그러더니, 아들은 연필을 들어서 큰 글씨로 이렇게 썼습니다. “Paid in full. 다 지불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평하게 대하셔야만 한다면, 그것은 우리를 사형의 현장에 내어 보내는 거예요. 우리는 거룩하고 완벽하고 깨끗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 아니에요. 발각되지 않아서 그렇지 검사 250명과 압수수색 70회를 하지 않아서 그렇지, 탈탈 털지 않아서 그렇지, 탈탈 우리를 털면 얼굴이 부끄러워서 전혀 다닐 수 없는 인생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옥불에 처넣은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안아주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시고 너희가 내 상속자라 말씀하시고 계시며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구원을 저와 여러분들에게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그 사랑이 불공평하게, 하나님의 그 공평을 내어버리시면서까지 예수님에게는 과도한 십자가를 주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속에 기억하면서 매 순간순간마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게 우리 왔는지를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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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사건 – 달란트 비유

김재수 교수의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에 대해 글을 좀 썼더니, 당장 문자가 왔다. 사실 이 글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은 <달란트 비유>였다나. 그래서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 더 살펴보기로 했다. 한 박자 늦으면 결국 못하는 법이니까. 물론 그분의 글을 읽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지 예상이 되었다. 이미 신약학계에서 달란트 비유에 대한 도발적인 해석들이 많이 나왔었기 때문이다. 김재수 교수는 학문의 세계에서만 회자되던 이야기를 대중 속에 던진 셈일 것이다. 실제로 읽어보니 정말 그랬다.

1. 우선 김재수 교수가 말하려는 바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교훈임에 틀림없다.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부당하다면 그 부당함에 맞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한다. 소수라고 해서 다수의 힘에 굴복하지 마라. 정말 우리 사회에 필요한 메시지이고, 특히 우리 청소년들에게 나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이다.

2. 하지만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를 해석한 것이 아니라, 그저 화두로 삼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던 것처럼, <달란트 비유>도 정당한 해석을 한 것이 아니라 화두로 삼은 것일 뿐이다. 맥락에서 벗어난 인용이랄까? 우리가 흔히 증오하는, 어떤 덩치만 컸지 사실상 쓰레기인 언론이 늘 하는 작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마태복음이 이 비유를 제시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콘텍스트 속에서이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것이라는 19:30과 20:16을 <달란트 비유> 앞뒤에 배치해 마태복음이 수미쌍관(首尾雙關) 구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무시한 해석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은 제 아내가 아니었었습니다. 그건 제 어머니였었습니다.”라고 누군가 말했는데, 뒤를 빼고 앞 구절만 인용하면서 불륜에 빠진 남성이라고 비난하는 행태랑 크게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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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비유를 해석할 때에는 무엇이 닮은 점(類似點, tertium comparationis)인지, 무엇이 닮지 않은 점(對照點, tertium contrarietatis)인지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그 대조점 때문에 비유 해석을 망쳐버려서는 안 된다. 김재수 교수는 주인이 하나님일 리 없다고 질문을 던져본다. “달란트 비유 속의 주인은 갖지 못한 사람에게서 빼앗아서 가진 사람에게 주는 사람입니다. 쓸모없다고 판단하면 어두운 곳으로 내쫓는 사람이구요. 과연 하나님이 이런 분일까요?” 그래서 기존의 해석보다는 새로운 해석을 내어놓는다. 주인이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당시 포악한 대지주를 가리키는 것이고, 나쁜 사람인 것이고, 그렇다면 결국 체제(status quo)에 순응한 사람들이 아닌 오히려 시스템에 항거한 한 달란트 받은 자가 더 위대한 것이고, 그를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비유라는 것 자체가 닮은 점이 있기 때문에 비유가 성립되지만, 전혀 닮지 않은 점이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재판관을 닮았다. 과부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재판관의 무자비한 면을 닮지 않으셨다. 또한 하나님은 밭의 주인을 닮았다. 씨를 뿌리고 나중에 추수를 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 인류를 심판하실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기 밭에 가라지가 뿌려지는지도 몰랐고, 알곡을 다치지 않으면서 가라지를 뽑을 재간도 없는 그런 무능한 주인과는 닮지 않았다. 닮지 않은 면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섣불리 결론을 내릴 게 아니다. 사실 비유의 해석은 대조점과 유사점을 성공적으로 분석하는 데 달려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웹버전 <땅의 이야기로 들려주신 하늘 이야기, http://bit.ly/예수님의비유>에서 충분히 설명될 것이다.

4. 김재수 교수가 하고 싶은 말에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귀한 메시지가 있다. 그리고 그 메시지는 크게 보아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비유의 해석이라고 내어놓을 때 벌어진다. 사실 해석을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비슷한 비유에 빗대어 설명한 것뿐이다. 그건 <매일성경>이 지향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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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사건 –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

성서 유니온에서 발행하는 <매일성경> 청소년 판에 나온 비유 해석을 두고 시끌벅적하다. 결국 독자들의 반발에 밀려, 성서 유니온은 저자와의 계약을 파기하고 연재를 중단하는 결정을 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논란이 되는 것일까 궁금하던 차에, 그 해석을 입수하게 되었다.

그 글은 재미 경제학자 김재수 교수가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에 대해 쓴 글이었다. 그의 요점은 이렇다. (1) 주인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전통적인 해석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임을 말하는 비유가 될 수 있다. (2) 하지만 품꾼의 입장에서 이 비유를 읽는다면, 공평한 계약을 맺을 수 없었던 품꾼들이 불공평한 계약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을 드러내는 이야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필요한 것을 모두에게 주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이러한 비유 해석이 이미 신약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러한 해석에 충격을 받지는 않았다. 물론 청소년들을 위한 말씀 묵상집에 아직 타당한 해석으로 인정받지 못한 해석이 여과 없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선,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에 익숙했던 한국 교회 성도들, 특히 매일성경을 통해 전통적인 말씀 해석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 없다.

이 일에 대해서 약간의 논평이 필요할 듯 하다. 적어도 비유를 연구하는 사람으로서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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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재수 교수의 주장은 새겨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경제학자로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살고 있으면서 또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제의 문제, 그리고 분배의 문제, 공평함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스템에 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서 애쓰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시스템 속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그러한 노력은 그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시스템을 통째로 흔들어버린다면 그 누구도 좋아할 리 없다.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될 것이다. 그 시스템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고, 너무나도 사악한 시스템이라 할지라도, 그 시스템을 고쳐보려고 한다면 거의 대부분이 반발할 것이다. 사실 시스템과 우리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이기 때문이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의 시민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비록 우리가 이 세상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삶의 방식, 이 세상의 시스템에 그대로 순응하며 살아가는 게 옳지 않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과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질문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김재수 교수의 문제 제기는 크리스천들에게 고민할 거리를 준다. 도대체 공정함이란 무엇일까? 일한 만큼 보상을 받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필요한 것을 모두에게 주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한편으로는 일한 만큼 보상을 받아야 한다.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셨다는 점에서 그렇다. 더 많이 수고한 자가 더 많이 받는 것은 공평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충분히 일할 수 없었고 그렇게 일하지 못했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삶이 불가하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단순히 일한 만큼만 보상을 해주는 게 옳지 않다. 긍휼을 베푸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이 세상의 관점과는 다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2. 하지만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는 김재수 교수는 많은 허점을 보였다. 과연 1세기 품꾼이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받은 것은 불공정한 일이었을까? 물론 포도원에서 나오는 대부분의 이익을 주인이 독차지하면서, 일꾼들에게는 한 데나리온의 품삯만을 준다는 것은 불합리할 수 있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1세기 상황에서, 그는 아주 자비로운 주인이었음에 틀림 없다. 1 데나리온은 결코 부당한 액수가 아니었다. 더 나아가 그 주인은 한 시간만 일한 사람에게도 1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는 자비로운 사람이었다. 품꾼은 을의 입장이었지만, 결코 을처럼 대접받지 않았다.

김재수 교수의 실수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에 투영하였다는 데 있다. 물론 이런 식의 해석이 오늘날 유행하는 트렌드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바른 해석은 아니다. 신천지의 비유 해석이 작위적인 만큼, 김재수 교수의 해석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포도원과 품꾼의 비유>를 화두로 삼아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대로 할 수도 있다. 꼭 원래의 목적대로만 사용하란 법은 없다. 하지만 그것은 화두로 사용한 것뿐이지, 그 비유에 대한 바른 해석은 아니다. 화두를 해석이라고 우기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3. 비유에는 두 가지 접근법이 가능하다. 첫 번째 접근법은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귀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무슨 목적으로 하셨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 복음서에서는 왜 이 비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것이다. 두 번째 접근법은 본문을 읽고 오늘날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에 비춰줄 수 있는 교훈을 찾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후자의 접근법은 결국 전자의 방법을 외면한다. 후자의 접근법은 김재수 교수의 접근법이고, <매일성경>에서 기대하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이 불편한 것이다.

4. 김재수 교수에 대한 마녀사냥식 비난이 이루어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적어도 그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성경적인 관점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세상이라는 낯선 곳에서 하나님의 시민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성경을 읽어놓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했을 뿐이다. 물론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성경의 큰 그림과 일치하는 면이 많다. 그리고 우리들이 많이 놓치고 있었던 것이기에 새겨 들어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만 그의 해석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구원의 이야기를 말하려고 했던 초대교회 교부들의 억지스런 해석과 닮았을 뿐이다.

비유에 대한 책을 써놓고 천천히 웹버전 <땅의 이야기로 들려주신 하늘이야기, http://bit.ly/예수님의비유>로 올리고 있는 중인데, 마음이 더 급해졌다. 빨리 완성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더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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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6 상급

– 이국진

하나님 앞에 충성한 자들에게 상급이 주어진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사상이다. 십계명 가운데 제2계명은 이렇게 기록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3-6)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있을 것은 성경 처음부터 주어진 원리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그 결과로 비참한 상태로 떨어지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비참한 상태를 기록한다. 또한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받는 복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다. 복되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자들이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이고,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갈 때 패륜아가 아버지를 떠난 결과로 결국 돼지들이 먹는 쥐엄열매나 먹으며 비참한 상태에 떨어진 것과 같은 상태로 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 때문에 복을 받는 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고 가르치면, 그것은 율법주의 또는 공로주의가 된다. 달란트의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이 비유를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오로지 충성한 자들만이 상급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그러기 때문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은 단순히 복을 받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버리게 되고 율법주의로 전락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배용덕 교수는 달란트의 비유를 해석하면서, 이러한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달란트 비유에 등장하는 상급에서 “상응성”과 “은혜성”을 동시에 주목한다. 1 충성한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이 있다는 면에서의 상응성이고, 그 상급이 우리의 공로를 훨씬 뛰어넘는 과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은혜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부모가 자식이 사랑스러워서 아주 조그마한 칭찬할 거리가 있더라도 과분한 사랑으로 격려하는 장면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자식은 공로를 통해서 부모의 사랑과 돌봄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부모는 아이가 잘 하면 칭찬을 할 것이고 나쁜 길로 가면 책망하기도 하겠지만, 아이는 자신의 행동으로 부모의 사랑을 획득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부모는 그 자녀를 사랑한다. 따라서 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의 비유에서 주인이 신실했던 종들에게 보상하고 나태했던 종들에게는 책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것을 온전히 드러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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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배용덕,『예수님의 비유』(서울신학교), 2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