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

온유한 자

참된 축복을 찾아서 (팔복강해 3)

온유한 것은 사람을 온화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자세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온화하게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드럽게 대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공격적으로 대하거나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온유한 마음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우리 모두 죄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여지라는 말씀에 따라, 우리는 온유한 마음을 품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우리가 조금이라도 허점이 보이거나 유약해 보인다면, 손해를 당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온유하게 산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일까? 정말 주님께서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일까?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재세례파 사람들은 무저항주의를 실천하면서 산상수훈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정말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내 돈을 갚지 않고 있는데도, 도둑이 들었는데도, 내 것을 빼앗아가는데도 그냥 아무런 방어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일까?

물론 우리는 때때로 손해 보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선택을 할 때, 놀라운 감동을 주기도 한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사람에게 분노하며 다가가지 않고,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긍휼을 베푼 것처럼. 하지만 우리가 모두 그렇게 살 수는 없다. 성경은 정의를 이루는 것을 정죄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 손해를 입혔다면 그 손해를 보상해주어서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장로(오늘날로 치면 재판관) 앞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것을 규정하였다. 손해를 본 게 있다면 바로 잡을 수도 있고, 사고가 생겼다면 적절한 방법을 통해 그 처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둑이 든다면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재정적인 손해나 명예의 훼손이 발생한다면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런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런 정의를 추구함에 있어서 온유한 태도가 요구된다. 우리는 두 가지 극단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다. 한편으로는 정의를 추구한다고 하면서 분노하거나, 정반대로 온유함을 추구하면서 무기력하게 살거나 한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정의를 추구하면서도 온유한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싸움닭이 되어가고 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악마가 될 수 있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향해서는 폭력을 써도 괜찮고 무례하게 행해도 괜찮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온유함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 엎드려야 한다. 죄성으로 가득한 우리를 구원해주실 것을 간구해야 한다. 그리고 온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해야 한다. 자꾸만 분노하는 자신이 온유해질 수 있도록 주변의 친구들에게 가족들에게 동료들에게 도움을 구해야 한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온유하게 살면 땅 부자가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의 축복에 참여한다는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온유한 삶을 살면 다 빼앗겨버리고 손해만 볼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을 교정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보상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과분하게도 하나님의 온유하심에 따라 (반면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에게는 온유하지 않으심에 따라) 구원을 받았다. 그렇다면 우리도 온유해져야 할 것이다. 온유한 삶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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