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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하는 자

참된 축복을 찾아서 (팔복강해 2)

참된 축복을 찾아서 팔복 강의 두 번째 시간이 됐습니다. 오늘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크리스마스 캐럴 가운데 우리가 잘 아는 캐럴이 하나 있는데요.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들에게는 선물을 주지 않는다고 하는 그런 노래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우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캐럴의 가사가 있는 것이고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울면서 사는 것은 별로 좋은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팔복에 보면 애통하는 자, 다시 말하자면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표현하고 있어서 혼란스럽습니다. 도대체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늘 살아가는 동안에 징징 짜고, 울면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일까요? 매일매일 울면서 살아가는 것이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하는 그런 의미이겠습니까?

우리가 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는 것일 겁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정말 속상한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만족스럽지 않을 때, 우리는 울게 되는 겁니다. 자기가 정말 많은 공을 들였고, 정말 열심히 피땀 흘리며 쌓아온 그 금자탑이 있는데, 어떤 노력들이 있는데, 그것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릴 때, 화재로 인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 버리게 될 때, 홍수로 인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물에 잠겨 버리게 될 때, 사람들은 그 앞에서 망연자실하면서 펑펑 우는 그 모습들을 우리는 뉴스에서 종종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너무나도 슬퍼서 그 앞에서 울게 되는 것이죠. 어쩌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울기 시작하면 하다가, 울면서 살다가, 그리고 죽을 때에는 또한 다른 사람들을 울게 만들면서 죽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울면서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일까요?

우는 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으니까, 우리는 우리 크리스천들은 웃으면서 사는 것보다는, 울면서 사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이 말씀과 오늘 읽은 이 말씀과 짝을 이루고 있는 말씀이 하나 더 있는데요. 마태복음에서는 복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데, 똑같은 말씀인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말씀이 누가복음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누가복음 6장 25절 말씀에 보면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라고 하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웃으면 화가 있는 것이고, 울면 복이 있는 것이기에, 우리가 울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을 때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에 있는 어느 한 구절, 성경에 있는 어느 한 표현만을 꼬집어 내서, 그게 마치 전부인 것처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과연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우리가 연구할 때,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우리에게 바라고 계시는지를 성경을 통해서 묵상하게 될 때, 어느 한 구절 어느 한 표현에만 우리가 이렇게 집중해서, 그것에만 따라 행동하다가는 잘못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특별히 이단들이 그렇게 많이 하는데요.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보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 구절만 떼어내게 된다면, 특별히 그것이 문맥과 상관없이 떨어지게 된다고 하면, 우리들에게 바른 교훈이 되기보다는, 잘못된 교훈, 일그러진 이단적인 교훈으로 빠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묵상할 때, 어느 한 구절만을 볼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해주고 있는지 깊이 묵상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가 있다고 하면, 무엇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세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기뻐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항상 기뻐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라고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좋고 행복한 일들을 만날 때만 웃을 것이 아니라,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정말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정말 힘든 일이 내게 닥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괴로워하거나 절망하거나, 불평하거나 원망하며 살아갈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결국 하나님께서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좋은 목적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은 우리들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어떠한 좋은 것을 주실지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절망할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이 옳은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 가운데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날 때 울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12명의 정탐꾼을 모세가 파송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모세가 12명의 사람들을 뽑아서 그 사람들을 보내어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고 했을 때, 12명의 정탐꾼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명의 정탐꾼들이 그 땅에 대해서 악평하면서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는 그 땅을 차지할 수가 없다. 그 민족들은 너무나도 장대한 민족인데, 우리는 그 앞에 서면 마치 메뚜기처럼 보이는 것이라서, 우리는 결코 그 땅을 차지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서서 그게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신 땅이니까 우리가 가서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10명의 정탐꾼의 이야기를 들었던 이스라엘 민족들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날 통곡하면서 울었습니다. 밤새도록 이스라엘 민족들은 통곡하면서 울었는데, 그게 복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순간에는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했었고, 그 순간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면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팔복의 말씀 가운데서는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니까, 혼란스러운 겁니다. 왜 이 팔복에서는 우는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해석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이 말씀이 달랑 이 구절만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일 어떤 이야기가 전개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면, 그 이야기의 흐름을 전후 문맥들을 살펴보면서, 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추측할 수가 있겠지만, 이 팔복의 말씀이 어려운 것은 이 말씀들, 간단간단한 격언과 같은 말씀들을 모아놓은 것이기 때문에, 그 문맥이 없이 모아놓은 말씀이어서 해석하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됩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비추어 보아서 이 말씀을 이해해야 되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관점으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시는가? 성경 전체에서 우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인가라고 하는 것을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대부분의 경우는 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절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운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서 우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는 옳지 않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울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외적으로 울어야 할 때가 있는 것인데, 그것이 언제 언제 울어야 되는가? 우리 성경 말씀 가운데서 울라고 권유하신, 울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말씀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한 번은 울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여인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러 가는 그 길 가운데서 울고 있을 때 해 주셨던 예수님의 응답입니다.

누가복음 23장 28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에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올라.” 그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을 위해서 울라.” “너희들의 자녀들을 위해서 울라.”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여기서 우는 것은 절망적이기 때문에 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절망과 낙담 가운데 우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울어야 한다고 할 때 사용된 이 말씀은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울음인 것이죠. 사랑에서부터 나오는 울음. 우리 자녀들을 볼 때, 이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죄악의 길로 가다가 결국 멸망할지도 모르는 그런 상황 앞에서, 이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되겠다고 하는 그런 애통한 마음 때문에 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이 아이가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서 정말 잘 됐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죄악의 길로 가고, 악한 길로 가다가 결국에 멸망하겠구나. 그러한 상황 앞에서 우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는 것이 대부분의 경우는 잘못된 것이지만, 우는 것이 괜찮은 경우, 정당한 경우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바로 우리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다가 멸망할 것을 염려하면서, 사랑하는 마음에서부터 우는 것은 그것은 바로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일 우리들이 우리들의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고, 그리고 그 잘못된 길로 가다가는 결국은 멸망할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무덤덤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옳지 않은 것이죠. 마치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제사를 무시하고, 악한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서 너희 가정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서 대책을 세우지 아니하고 무덤덤했던 그런 엘리 제사장처럼, 지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데,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아니하면서, 무덤덤하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은, 그러니까 이런 상황 가운데서 죄에 대한 염려 때문에 “저러다가 망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런 사랑의 마음에서부터 우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서, 우리가 죄악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본다고 하면,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고,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처럼 이웃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내밀면서 살아야 하는데, 내 옹졸한 마음이 그렇게 하지 못해요. 내 마음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내 그 본능이 그것을 막고 있어서,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지 못하는 모습이 보인다고 한다면, 그때 우리가 애통해하며 회개해야 하는 것인데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말씀은 바로 그런 경우를 가리켜서 하는 말씀입니다.

자신의 죄악을 보면서 울었던 사람을 성경에서 살펴본다고 하면, 다윗 왕을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하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숨기기 위해서, 다윗은 자신의 신복이었던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어 결국 적군에 화살에 맞아 죽게 만드는 그런 파렴치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들이 다 완벽하게 해결된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는 과부가 되어 버렸던 그 바세바를 정당하게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고, 이제는 더 이상의 괴로울 일도 마음 조마조마할 일도 없이 완벽하게 모든 일들을 다 성공적으로 다 이루어냈다고 생각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그 행위를 악하게 보셨고, 그리고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주셨습니다. 나단 선지자는 그 다윗 왕 앞에 와서 거울을 들었습니다. 다윗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을 들면서, 다윗에게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에 어떤 부자가 있습니다. 그 부자는 모든 것을 다 가졌고 양도 너무나도 많고 정말 부족함이 없는 부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어떤 손님이 찾아오게 되었을 때, 그 부자는 자신의 집에서 양을 잡아 손님을 대접한 것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아주 아주 가난한 여인의 과부의 한 하나밖에 없는 그 어린양 애지중지하면서 마치 자식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그 양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거울로서 다윗의 모습을 보게 해 준 것인데, 다윗은 그 거울을 보면서도, 자신의 죄를 보지 않았으며, 그 순간에 다윗은 분노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당장 그 사람을 잡아다가 죽여야 된다고 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들은 우리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 분노하는 겁니다. 악한 사람의 이야기를 볼 때, 우리 크리스천들이 가져야 될 가장 당연한 자세가 있다고 한다면, 그 악한 모습을 보면서 그 거울에 비추어 자신의 죄를 발견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바른 삶의 태도입니다. 우리가 무슨 악을 보게 된다고 하면, 그 악 속에 들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봐야 되는 것이고, 내가 똑같은 죄를 짓고는 있지 않는지, 나 자신의 죄악을 바라보면서, 애통해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그 거울 속에서 자신의 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반사해버리고 분노하기 시작합니다. 분노하는 그 모습 속에서 자신의 죄악을 꽁꽁 숨기는 것이죠. 나는 저런 죄를 안 지은 것인 양, 내 죄를 꽁꽁 숨겨버리고 분노하면서, 그 사람을 향해서 저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 순간에 나단 선지자가 KO 펀치를 날렸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당신이오.” 그 악한 사람이 바로 당신이라고 하는 그 이야기 앞에서, 다윗은 엄청난 충격을 먹고 거기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어요. 자신의 더러운 죄악을 가리고 있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완전히 벗겨져 버리고, 벌거벗은 것처럼 서버린 그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서 울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악한 인간이구나.” 하는 그 사실을 보면서 통곡하면서 하나님 앞에 울었는데요.

그렇게 울었던 다윗의 그 회계가 시편 51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그 내용 가운데 시편 51편 11절의 말씀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다윗은 이 순간에 너무나도 두려웠습니다. 자기가 왕 위에서 쫓겨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돼 버리고, 이제는 내가 하나님에게서 버림을 받을 수도 있겠다고 하는 그런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 앞에 울부짖는 거예요. “하나님, 저를 쫓아내지 마십시오.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어 가지 마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가장 무서워했던 그 다윗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엉엉 울게 될 때,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그 다윗을 용서해 주셨고, 그를 품어 주셨습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시고 은혜가 풍성하셔서,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용서해 주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윗처럼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헤롯 왕처럼 반응을 합니다. 헤롯 왕의 잘못에 대해서 세례 요한이 그것은 잘못된 행위라고 지적을 하자, 헤롯은 그 귀를 막아버리고, 세례 요한을 가두었을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아합 왕을 향해서 하나님께서는 미가야 선지자를 보내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선 이스라엘 민족을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전쟁에서 패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해 주었을 때, 결국 그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를 감옥 속에 가두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의 죄악 가운데서 우리의 귀를 막아버리거나 무덤덤하거나 오히려 죽이려고 달려드는 자에게는 은혜가 있을 수가 없는 것이고,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바라보면서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에,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것에 대한 반대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웃는 자라고 하기보다는 뻔뻔한 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죄를 짓고서도 두려움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뻔뻔함으로 일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라멕과 같은 사람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라멕은 가인의 후손이었는데요. 그 라멕이라고 하는 사람은 아다와 실라라고 하는 두 사람의 부인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아마 최초의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데요. 그 라맥이라고 하는 사람은 사람을 죽여놓고도 뻔뻔하게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창세기 4장 23절에서부터 24절까지에 기록돼 있습니다.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실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나의 상처를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 일지인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라멕은 사람을 죽여놓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라멕의 모습이 어디서 나타나냐면, 바로 21세기 우리 대한민국을 살고 있는 한국 크리스천들의 모습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거예요. 죄를 지어놓고도 하는 말이, “나는 예수 믿어.” 악을 행하면서도 나는 예수 믿으니 천국 간다고 하는 그런 뻔뻔한 그런 모습 속에서, 잘못된 확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하는 것이에요. 그걸 바라보면서 이 세상 사람들은 싫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에게, 눈물을 흘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을 괴로워하고 회개하며, 용서를 바라며 하나님 앞에 울면서 나아가는 자,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무정한 재판관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는 아버지와 같은 모습으로,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오는 자들마다 주님께서는 품으시고 외면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으면서, 우리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앞에 울면서 나아가는 매 순간순간마다 주님 앞에 다시 한번 또 나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10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근심에도 두 가지 종류의 근심이 있는데요. 하나의 근심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라고 하는 이 세상의 근심인데, 그러한 근심은 다 쓸데없는 근심이고, 결국 사망으로 인도할 수밖에 없는 근심입니다. 하지만 근심에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는데, 죄를 회개하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동행할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까라고 하는 근심은 결국 구원으로 인도하는 근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도 늘 넘어지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뻔뻔하게 나는 예수 믿는다고 하는 그런 것으로 무감각하게 살아간다고 하면, 그것은 화가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태도일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사랑이 많으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 오늘 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또 이기적으로 또 옹졸하게 미워하며, 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내가 먼저 사랑하지 못하고 악을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럴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해야 할 것이고, 그런 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위로로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 앞에 보좌 앞에 나아가는 자마다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가 있을 것임을 믿고, 담대하게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둘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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