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일을 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도대체 그 심리는 무엇일까요?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다윗과 바르실래 (삼하 19:31-39) +++ 세바의 반역 (삼하 20:1-13)
다윗왕이 복권돼서 다시 돌아가게 될 때 나타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남쪽 유다 지파와 그리고 나머지 북쪽 이스라엘 지파로 크게 둘로 나눌 수가 있겠는데요. 남쪽 유다 지파 사람들이, 그리고 북쪽의 이스라엘 지파의 반절 정도가 다윗 왕을 모셔오는 일에 함께 동행하고, 그래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그 일에 약간 소외를 당했던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 유다 사람들을 향해서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가 우리와 상의하지 않았느냐? 왜 우리에게 알리지 않았느냐?” 섭섭한 마음을 가지고 시비를 거는 그 장면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질병이 무엇이죠? 섭섭병이죠. 섭섭병이 신앙생활하는 데 있어서, 또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쩌면 가장 큰 영적인 질병일 수가 있겠는데,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로 그 섭섭병에 걸린 겁니다. 이스라엘 왕 다윗 왕을 다시 모셔오는 일에 뒤처지게 되었고, 소외를 당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그 북쪽 이스라엘 민족들은 이 다윗 왕을 모셔오는 데 앞장서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유다 사람들을 향해서 시비를 걸면서, “왜 우리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왜 우리와 의논하지 않고 일을 진행했느냐? 왜 우리를 제쳐두고, 너희들만 다윗 왕을 모시고 왔느냐?”라고 시비를 걸은 것입니다.
이러한 말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도 다윗 왕을 모셔오는 일에 반드시 참가했어야 했었는데, 그 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섭섭하다고 하는 것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정말 선한 일 좋은 일을 하게 되면, 그 결과가 너무나도 좋고 정말 그 사역의 의미가 너무나도 좋고 다 좋은 것 같은데, 그래서 모두가 기뻐하고 모두가 감사해야 될 그 사역을 한 이후에도, 으레 나타나는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왜 나를 빼놓고 이런 일을 했느냐?”라고 섭섭한 마음을 표출하는 경우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종종 만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유다 사람이 다윗 왕을 모셔오는 일에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자기들끼리 다윗 왕을 모셔온 것은 실수한 것일까요? 정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살펴보지 못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을 배려하지 못한 실수였다고 말하려면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보기에 좋고 정당하면 실천해 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정당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리 옳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혹시 소외당하는 사람이 없을는지, 이 일을 함에 있어서 오히려 섭섭한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는지, 배려하는 것이야말로 어쩌면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그런 자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말 좋아서 모두가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정말 멋있는 일들을 해냈는데, 그것이 너무나도 좋고 너무나도 참 완벽하게 일을 해낸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일 가운데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섭섭한 겁니다. “왜 나한테는 저 좋은 일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왜 이 중요한 일에 나에게는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나를 무시하는 것인가? 나에게는 관심이 없는 것인가?” 하면서, 섭섭한 마음을 가지는 그런 사람들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우리가 무슨 일을 한다고 하면, 좋은 일, 옳은 일, 정당한 일이니까 그냥 해버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혹시 이 일을 통해서 섭섭한 사람이 발생하지는 않을는지, 한 번 멈추어 서서, 그런 사람들이 누가 있을는지 주변을 살펴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크리스천들이 늘 실수하는 것이 바로 그런 부분이죠. 정말 좋은 일이기 때문에 하는데, 정말 좋은 일이기 때문에 일을 진행하는데, 그런데 결국 그 일을 하는 과정 가운데서 소외된 사람들이 섭섭한 마음을 느끼게 되고, 하나가 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해 나가든지 간에, 혹시라도 그런 사람들이 없도록 자상하게 배려하고 한 번 더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배려하는 것, 그것이 곧 사랑이고, 배려함으로써 우리가 하나 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갈 수가 있는 것이죠.
아마도 유대인들은 너무나도 기뻤을 겁니다.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서 다윗이 피난을 가야만 했었는데, 그래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 정말 악이 승리하는 것만 같고 악한 짓을 하는 사람들이 떵떵거리면서 사는 그러한 모습을 보는 것처럼 괴로운 일이 없잖아요? 정말 악한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고 휘두르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그렇게 불편한 것이 없는 것인데, 정말 참된 왕이시고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라고 했던 그 다윗이 꺾여 나가고 그리고 그 배은망덕한 압살롬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악한 권력을 쟁취하는, 쿠데타를 일으킨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나도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다 정리가 되고 이제는 그 압살롬의 쿠데타 세력은 진멸되었고, 다윗왕은 다시 복권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유다 지파 사람들은 어서 빨리 가서, 그 다윗왕을 모셔와야 되겠다고 하는 그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걸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서 속히 다윗 왕을 모셔와야 되겠다고 하는 그 열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다윗왕을 모셔올 수가 있었던 것이죠. 이것 재고, 저것 재고, 이러면 어떨까? 저러면 어떨까?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인데, 그런데 열정이 있을 때, 바로 달려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일들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다른 지파들과 함께 하려는 그 마음이 너무나도 지금 다윗 왕을 모셔와야 되겠다고 하는 그 당위성에 밀려버려서, 그래서 지금 다른 것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겁니다. 어서 속히 다윗 왕에게 가서, 그 다윗 왕을 모시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그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죠.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이 항상 실수하는 면이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많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크리스천들은 항상 이러한 점을 조심하면서, 우리가 일에 성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멋있게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온 교우가 하나가 되고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같이 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먼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당했느냐 하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도 정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면, 그들은 다윗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다윗을 왕으로 모셔야 되겠다고 하는 그 생각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빨리 다윗 왕을 모셔와서 제대로 왕으로서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줘야 우리나라를 바로 세워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공의로운 일, 정의로운 일, 마땅한 일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분노하고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관심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관심이었습니다. 그 중요한 일 가운데 우리들이 소외되었다고 하는 것, 우리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기분이 나쁜 것이고, 정말 다윗 왕을 모셔와야 된다고 하는 그 시급성에 대해서 정말 애절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나를 포함시키지 않고 우리를 소외시켰다고 하는 그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에 불편한 것이죠.
따라서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이 정당한 것인가 하고 묻는다고 하면, 결코 정당한 모습이라고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일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리들이라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옳았을까요? 나를 제쳐놓고 나에게 상의하지 않고 나에게 알려주지 않고 남쪽 유다 사람들만 가서 다윗 왕을 모시고 오는 그런 일들을 목격하게 되어서 나를 소외시킨 것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것이 가장 정당한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반응해야 되죠? 오늘 이 성경 말씀에 기록되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던 것처럼, 왜 우리와 의논하지 아니하였느냐? 왜 우리를 빼먹었느냐라고 시비 걸고 항의하는 것이 정당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감사하고, 이 귀중한 일을 솔선에서 희생하면서 먼저 그 일을 했다고 하는 사실에 감사하고 박수를 쳐주는 것이 그것이 훨씬 더 옳은 자세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게 바른 자세 맞죠? 맞아요? 안 맞아요? 맞아요. 왜 나를 껴주지 않았느냐고 섭섭병에 걸리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니라, 누군가 정말 정당한 일을 했다고 한다면, 나를 빼놓았다고 할지라도, 나에게 알려주지 않고, 상의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를 무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일을 하다 보면 급하게 하다 보면 잊어버릴 수도 있겠고, 일을 하다 보면 너무나도 급한 나머지 맨발로 뛰어나가는 나머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신경 쓰지 못해서, 그래서 그 다윗왕을 모셔오는 일에 가장 열정적으로 이 유다 백성들이 나섰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형제여, 내가 가서 도와줘야 되는데, 도와주지 못하고 당신들이 그렇게 정말 중요하고 아주 멋진 일을 해냈으니까, 너무나도 고맙고 너무나도 감사하고” 박수 쳐주는 그런 자세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섭섭병이 걸리지 않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섭섭병이 걸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들이 자기중심의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오로지 나 중심으로 생활하는 그런 잘못된 모습 때문에 섭섭병에 걸리는 거예요. 만일 다윗을 사랑했다고 한다면, 다윗이 돌아오는 것을 정말 고대했다고 한다면, 왜 섭섭병에 걸리겠어요? 섭섭병에 걸릴 것이 아니라, 다윗왕이 돌아왔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너무나도 기뻐하고 너무나도 감사하고, 내가 저 다윗 왕을 모셔와야 되는데, 내가 못 보셨는데 너희들이 그렇게 모셔왔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고맙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그렇게 인정하면서, 칭찬하고 격려할 수 있는 마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과 감사의 마음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섭섭함과 불평의 마음이 있는 것인지 우리들의 마음을 한 번씩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불평과 원망과 섭섭병에 걸리는 그런 마음들이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우리가 엎드려야 되는 거예요. 주님 앞에 엎드려서, “하나님, 내 마음을 바꾸어 주옵소서.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해 주옵소서. 내가 중심이야.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나오는 것인데, 나를 사랑하는 것을 넘어서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내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일이 되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난과 이렇게 따지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사실 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동안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가 이제야 반응을 보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윗 왕이 압살롬의 쿠데타로 인해서 피난 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 왕이 피난을 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애통해하고 괴로워하고 정말 안타까워하는 마음도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었느냐? 이 말이에요. 므비보셋은 왕이 피난 가는 그 상황을 바라보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그 옷을 맵시 내지 아니하고, 그가 정말로 다윗이 돌아오기까지 애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던 그 간절한 마음이 므비보셋에게 있었는데,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가? 아무런.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대해서 성경이 기록하고 있지 않아요.
다윗이 쫓겨나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그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 다윗이 피난 갈 때, 나타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므비보셋은 애통해하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고, 그리고 피난 갈 때 그 다윗의 일행을 돕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서 다윗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들, 그 이야기를 작전을 전달하기 위해서 압살롬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면, 죽을 수도 있는 그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다윗왕에게 압살롬의 전략을 전달하기 위해서 노력한 그 수많은 사람들과 제사장들과 모든 그 신하들, 그리고 다윗이 피해 나갔을 때 음식들을 가지고 와서 음식을 공궤하고, 힘을 북돋우어주고 사랑을 베풀어주었던 진짜 충신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습니까?
충신은 어디서 나타나는가? 힘들고 어려울 때, 고통을 당할 때, 참된 충신이 진짜 충신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까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성경의 기록에 보면, 아무런 기록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냥 가만히 있다가 다윗이 피난 가는 그 상황 가운데서는 조용히 있다가, 이제 다윗이 왕으로 복권되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이제 다윗이 왕권을 다시 회복했다고 하는 것이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자 그때 나타나서 우리도 왕을 모시려고 했는데, 왜 우리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항의하고 있는 것이죠. 그 말이 진심이 아닐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미루어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유다 사람들이 다윗왕을 모시러 간다고 했을 때, 그들은 다윗 왕을 모시러 가는 일에 생각조차 없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 사람들이 다윗 왕을 모시러 간다고 하는 소문이 왜 안 퍼졌겠어요? 다윗 왕이 이제 복권되었다. 압살롬이 죽었다고 하는 소문이 전 이스라엘 민족에게 퍼졌을 것이고, 그리고 온 유다 사람들이 마을의 장로들이 다윗 왕을 찾아가서 그 다윗 왕을 데려온다고 하는 소식들이,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하는 말처럼, 그 소문들이 이스라엘 전역에 다 퍼졌을 텐데,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아무런 반응이 없이 그냥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보니까, 정말 다윗 왕이 왕으로 복권되는 그 모습을 보게 된 거예요.
이러다가 우리는 다윗 왕에게 미움을 받는 게 아닐까? 이러다가 우리는 관직에 올라가지도 못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다가 우리는 다윗왕의 미움을 받으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 때문에 나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왜 말 안 했느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자기들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면피하기 위한 시도로 분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분노는 정의를 가장해서 분노하지만, 사실은 정의를 가장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분노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숨기고, 자신의 더러움을 숨기는 방편으로 사용된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압니다. 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서, 우리들이 다윗 왕을 모시고 싶지 않아서 모시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도 다윗왕을 왕으로 모시고 싶었지만, 이 작자들이 우리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고, 이 작자들이 우리와 의논하지 않았고, 우리들을 소외시키고 우리들을 버려두었기 때문에, 우리가 못 간 것이지, 우리들이 다윗 왕을 섬기는 일에 뒤처진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면피 시도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하면 그 사람의 말이 진짜인 것 같고, 분노하면 그 사람의 정당성이 증명되는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지만, 그러나 그 분노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다른 사람들은 그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저 사람이 분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정말 다윗 왕을 사랑하기 때문에, 모셔오고 싶어서 안달이 났었는데, 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하는 것에 그것이 섭섭해서 이렇게 화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관심이 없었고 사실은 헌신적이지 못했다고 하는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거짓으로 분노하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고 하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것이죠.
자신이 분노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 속는 줄 알고, 자신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믿어줄 줄 알고, 분노하고 불평하고 섭섭한 이야기를 하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들이 다윗 왕을 모시는 일에 뒤처진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다윗 왕을 모셔오는 일에 빠지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다 사람들이 알려 주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유다 사람들은 왜 다윗 왕을 모시러 갔을까요? 유다 사람들은 왜 다윗 왕을 모셔오는 일에 열정을 냈을까요? 누가 알려주고 너희들이 가서 데려와야 된다고 이야기를 해주고 강권했기 때문에 그래서 갔나요? 그게 아니에요. 유다 사람들은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서, 지금이야말로 다윗 왕을 모셔올 절호의 찬스이고, 지금 데려와야 되겠다고 하는 간절한 마음이 유다 사람들의 마음에 있어서 간 겁니다. 누가 알려줘서 간 게 아니에요. 그런데 이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못 갔다. 자신들이 잘못해놓고 자신들이 잘못한 그 이유를 다른 사람 탓으로 돌려버리는,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 사사기서에서는 에브라임 사람들이라고 종종 표현이 되었는데요. 이 에브라임 사람들은 국가적인 아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뒤처졌습니다. 함께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미디안 민족과 더불어 싸우려고 했던 그 전쟁 가운데서, 기드온이 용사들을 모으고, 그리고 그 용사들 가운데서 300명을 모아서 미디안과 싸워서 승리하고 돌아왔을 때, 북쪽 이스라엘, 즉 에브라임 사람들은 기드온을 향해서 항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미디안과 전쟁하는 그 전쟁 가운데 왜 우리를 부르지 않았느냐? 따지고, 왜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왜 우리를 제쳐두고 우리를 소외시키고, 너희들만 가서 너희들만 영광을 차지하느냐고 따져 든 것이죠. 사사기 8장에 기록돼 있습니다.
사사기 12장에 가보면 입다가 암몬 족속과 싸워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되었을 때, 역시 북쪽 이스라엘 사람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시 한번 입다에게 와서 또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왜 전쟁하러 갈 때 너만 갔느냐? 왜 너희들만 갔느냐? 우리를 왜 안 불렀느냐? “이 엄청난 중요한 일에 왜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항의하고 있었던 것이죠. 벌써 성경에 기록된 것만 해도 사사기에 두 번, 지금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19장에서 또 한 번, 자꾸만 북쪽 이스라엘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계속해서 참여는 하지 아니하면서, 항의만 하는.
어쩌면, 그래요. 꼭. 보면 감사하는 사람은 늘 감사하고, 늘 불평하는 사람은 늘 불평하고, 헌신하지 않으면서, 그냥 다른 사람들 열심히 하는 것 오히려 해방 놓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 주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오히려 마음 아프게 만들고, 헌신하는 것을 못하게 만든 그런 그런 섭섭한 이야기를 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고 계속 반복하는 거예요.
그때마다 어떻게 해결을 했습니까?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에게 겸손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다는 말이 있지 않느냐? 내가 한 일보다 당신들이 한 일이 더 위대하다.”라고 말함으로써, 분쟁을 그치고, 그냥 그렇게 따져 드는 에브라임 사람들의 마음을 무마하는 것으로 기드온은 그 일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어쩌면 그게 우리가 가져야 될 자세일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입다의 경우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왜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항의하자, 이제 입다는 에브라임 사람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입다와 에브라임 사람과의 전쟁이 일어나서, 결국 입다에 의해서 에브라임 사람들을 죽이게 됐는데요. 요단강 나루터에 자리를 잡아놓고 그 나루터를 지나는 사람들마다 한 사람씩 붙들고, 말을 시키는 겁니다. 너 “쉽볼렛”이라고 해봐 그런데 “쉽볼렛”이라고 말하면 “쉽볼렛”이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쉽볼렛”이라고 말 안 하고 “십볼렛” 그러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어떻게 경상도 사람인가 아닌가 확인하죠? “너, 쌀 해봐” 그러면 “살” 그럼 너 경상도 사람이구나 아는 것처럼, 에브라임 사람들이 “쉬” 이 “쉬” 발음을 잘 못해요. “십” 그렇게 발음해요. 그러니까 “너 쉽볼렛” 해봐, 그랬더니 “십볼렛” 그 사람들을 다 죽여버려요.
공동체 분열을 가져오게 된 것이고, 오늘 본문에 말씀에 보면 남쪽 유다 사람들과 북쪽 이스라엘 사람들이 서로 다투었다. 서로 논쟁했다. 싸웠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는데, 나중에 가면 결국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갈라지게 되는 원인도 아마 오래된 이런 역사 가운데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르호보암 왕 시대의 여로보암 왕을 중심으로 한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이스라엘이 서로 나누어지게 되는 이유가 한 나라가 함께 힘을 합치고 함께 형제요 자매요 그렇게 같이 마음을 합한다고 한다면 큰 왕국이 될 수가 있었는데, 어마어마한 능력을 발휘하고 위대한 강대국이 될 수도 있고 정말 큰 힘을 발휘할 수가 있지 않습니까? 그게 바로 누구의 시절에 그랬습니까? 다윗왕의 시절에 솔로몬 왕의 시절에, 이 민족은 강대국이 되어서 그 주변의 나라들을 다 제압하고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아주 강대국으로서 다윗왕 시절에 솔로몬 왕 시절에 그렇게 함께 큰 강성한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는데, 결국 르호보암 시대 때 가서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가 나뉘어 버리는 겁니다.
하나여야 될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뉘어서 서로 싸우게 되어 버린 결과, 서로 나누게 된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북쪽은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남쪽은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서로 피차 물고 먹으면 서로 멸망할까, 서로 망할까 조심하라.”라고 하신 그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적이 아니라 누굽니까? 서로 함께 사랑하고 아끼고 힘을 모아서 같이 협력해야 될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게 우리의 모습이 돼야 돼요. 나를 빼놓았다고 섭섭한 이야기를 할 게 아니고, 나를 빼놓고 그렇게 열심히 했다고 한다면, 나 대신에 그렇게 열심히 한 것이 너무나도 고맙고, 그렇게 일을 했다는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정말 고맙다고 박수 치는 것이 그게 하나가 되는 길이에요. 그리고 누군가가 섭섭병에 걸리면, 그렇지 않고 내가 한 일보다 당신이 한 일이 더 크다고 격려하면서 함께 하나 되는 모습을 지켜나가는 우리 교회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발 이스라엘 민족처럼 행동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결국은 두 진영으로 갈라져서, 서로 싸우고 다투고 하나가 되지 못한 보여주는 것은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의 행동 원칙은 무엇인가? 먼저 손 내밀고, 먼저 참여하고, 누가 불러주기를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불러주세요. 왜 나는 안 불러주나가 아니라, 내가 먼저 불러주세요. 나를 부를 때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서 불러주세요. 누가 나에게 악수를 청할까? 내 손을 꼭 집어넣고, 누가 나에게 아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는가 하고 그렇게 눈치만 보고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서 안녕하세요. 오셨네요.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내가 먼저 인사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맞죠? 맞습니다.
마스크를 쓰고 있고 가까이 갈 수 없어도 눈으로 보고 인사하면서, 우리 형제님 오셔서 너무나도 반갑습니다. 우리 자매님을 만나게 돼서 너무나도 기쁩니다. 예배 시간에 볼 수 있어서 너무나도 감사합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서로 인사하고 아끼고 돌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제일 어리석은 사람, 제일 바보스러운 사람이 누구입니까? 사탄에 의해서 지금 미혹을 받고 있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왜 나는 안 불렀느냐라고 말하는 사람이에요. 내가 불림을 당할 게 아니라, 내가 불러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 같이 갑시다. 우리 같이 갑시다. 내가 나서서 내가 먼저 손 내밀어서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 크게 성령의 사람인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처럼 늦장만 부리고 있다가, 일하는 사람들을 보고 비난하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될 것이고, 유다처럼 자기만 좋다고 일을 해 놓고, 함께 가자고 제안하지 못하고 사랑의 손길을 내밀지 못하는 유다처럼 될 것도 아니고,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함께 믿음의 길을 걸어가면 행복해요. 우리 교우들은 내가 사랑을 베풀 때, 내가 고맙다고 표현할 때,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 때 느낄 수 있는 그 기쁨들을 느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화를 내면 내가 슬퍼지는 거예요. 내가 괴로운 거예요. 내가 사랑을 하면, 내 마음이 행복해지는 거예요. 고맙다고 말하면, 내가 행복해지는 거예요. 결국 두 진영 간에 다툼이 많아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절에서부터 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이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시면, 하나 되는 일에 우리가 힘써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이 세상에 유다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로만 가득 찬다면, 참 삭막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반응하지 아니하셨고, 유다 사람처럼 반응하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우리가 잘못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왜 그렇게 했느냐? 비난하고 욕해버리고 끝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저 높고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 위에 아기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런 권세를 주시는 죽음을 죽어 주셨다고 한다면, 이제는 우리는 더욱더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키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