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오리 바람 (잠 10:22-32)

말이 많으면 (잠 10:13-21) +++ 공평한 추는 모두가 기뻐합니다 (잠 11:1)

오늘 본문의 말씀도 한 가지 주제가 아니라, 여러 가지의 주제들이 섞여져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의 말씀을 한 주제씩 한 주제씩 분석해 가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 22절의 말씀을 살펴보려고 하는데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을 부하게 하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아주 매혹적인 말씀입니다. 부하게 되는 것만 해도 매혹적인 말씀인데, 부하게 되는 것이, 부가 따라오는 것이 아무런 근심이 없는, 그런 부가 오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니까, 정말 매력적인 것이죠.

항상 좋은 게 있으면, 나쁜 것도 같이 따라오게 되고, 항상 모든 게 다 완벽하게 100% 다 좋은 게 아니라, 어느 정도 좋고 또 그 가운데는 나쁜 것까지 같이 따라오는 그런 일들을 우리가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데, 오늘 22절 말씀에서 하시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시냐 하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을 부하게 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근심이 겸하여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어떤 복입니까? 완벽한 복이죠. 80점짜리 복이 아니라, 100점짜리 복이다. 이 말입니다. 그런 것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가졌으면 좋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온전히 좋을 수만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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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렇게 100점짜리 복, 80점은 좋지만 20점이 안 좋은, 70점은 좋지만 30점이 안 좋은, 그런 불완전한 복이 아니라, 그런 나쁜 것이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완전 무결한, 정말 아무런 흠도 없는, 그런 완벽한 복이 우리들에게 주어진다고 한다면, 너무나도 좋을 것인데, 오늘 22절 말씀에서 해 주시는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런 복은 어떻게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복은 누가 주신다고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그런 복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자, 그러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어떤 복을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도대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무슨 복을 가리켜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만일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있다고 한다면,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그런 복도 있습니까?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그런 복도 있다는 말입니까?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은 완전한데, 여호와께서 주시지 않는 다른 복들은 불완전하다고 하는 그런 말이라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가 받는 복이 하나님에게서 받는 복도 있는 반면에, 하나님이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받는 그런 복, 예를 들면 사탄에게서 받는 그런 복도 있다고 하는 말입니까? 도대체 여호와께 받는 복이 무엇이고, 여호와께로부터 받지 않는 복이라고 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냥 지나치고 넘어갈 게 아니고,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을 가르키고 있는지, 도대체 어떤 의미인지 질문을 한번 던져보아야 하는 것이죠. 도대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게, 도대체 어떤 복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무엇입니까? 사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모든 것이 그냥 저절로 우리들에게 굴러 들어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서 우리들에게 오는 것입니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통해서 본다고 한다면, 어느 것이 우리에게 오든, 그 무엇이 우리에게 오든 그 모든 것들이 다 누구로부터 온다고 고백할 수가 있나요? 하나님께로부터 올 수 있다고, 온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시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야, 그래야 우리들의 이 삶 가운데서 모든 것들이 일어난다고 한다면, 사실은 우리가 가지는 그 모든 것들이 다 누가 주신 거예요? 하나님이 주신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에게서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이 다 누가 주신 거예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는 말씀이 무슨 말씀을 하냐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음 부를 주시고, 부하게 하시고, 그리고 근심을 겸하여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까, 이 말씀이 조금 어려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좋아 보이는 것이든, 나빠 보이는 것이든,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 가운데,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도대체 여기서 그렇다고 한다면 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런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도대체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단순히 출처를 의미하는 표현이 아닐 수 있겠구나 라고 하는 사실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그 출처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허용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얻게 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우리가 가지는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이 표현이 복의 출처를 의미하는 표현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얻게 되는 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습니다. 한 가지 방법은 의로운 방법이고, 또 하나의 방법은 악한 방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의로운 방법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가운데 얻게 되는 것, 그러한 것을 가리켜서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복을 구하는데, 우리가 정말 좋은 것을 구하고 있는데, 우리가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대로 따라가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삶을 살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방법이 아니라, 의롭지 않은 악한 방법을 통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악한 방법을 쓰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도둑질하거나 속여 빼앗거나 여러 가지 악한 방법으로, 그래서 그것을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을 베풀어주실 것을 의지하면서 얻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내가 내 힘으로 내 악날한 방법을 통해서 나의 사악한 방법을 통해서 내가 원하고자 하는 그것을 얻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여호와께서 오시는 복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 아니라, 내가 내 마음대로 얻는 복, 내가 악한 방법으로 얻는 복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라고 하는 것은 출처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무슨 방법을 사용해서 복을 얻느냐의 차이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악한 방법으로 얻는 복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겠습니까?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이지만 결국은 파멸로 결국은 근심으로 갈 수밖에 없는 소득이 되는 것이죠. 의로운 방법, 하나님께서 정하신 법칙대로 순종하며 땀을 흘리며 노력하고 신실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대로 열심히 노력해서 우리가 부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 부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복이고, 그 여호와께서 주시는 부에는, 근심과 걱정이 따라오지 않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속이고 빼고 악한 방법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법칙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가면서, 내가 내 능력으로, 내가 마음대로 갈취하는 그런 사악한 재물들은 지금 당장은 힘이 있어 보이고, 지금 당장은 좋아 보이게 되겠지만, 결국에는 그 물질로 인해서 우리가 파멸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결국 그 물질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근심하는 결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점을, 오늘 이 22절의 말씀 가운데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은 무엇입니까? 버킹검이죠. 결론이 뭐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면서 부를 축적하라라고 하는 것이, 결론의 말씀인 거죠. 정직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가운데, 신실한 방법으로 얻을 모든 부를 축적해 나가고 재물을 축적해 나갈 수 있다고 한다면, 근심이 없을 것이지만 정직하지 못한 방법, 불의한 방법으로 많은 것을 얻게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결국은 근심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 성도들이 깊이 기 기억하고, 매 순간순간마다 우리들에게 결단의 순간들이 오게 될 텐데, 그 결단의 순간에서 믿음의 결단들을 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22절의 말씀이, 오늘 읽은 성경 다른 구절들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구절의 말씀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23절부터 계속해서 의인과 악인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는데요. 23절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는 것 같이, 명철한 자는 지혜로 낙을 삶느니라.” 24절의 말씀에, “악인에게는 그의 두려워하는 것이 임하거니와, 의인은 그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느니라.” 25절의 말씀에, “회오리 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28절의 말씀에, “의인의 소망은 즐거움을 이루어도, 악인의 소망은 끊어지느니라.” 29절의 말씀에,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자 행악하는 자에게는 멸망이니라.” 30절 말씀에, “의인은 영영히 이동되지 아니하여도, 악인은 땅에 거하지 못하게 되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자입니까? 지혜로운 자는, 어떤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자가 아니고,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인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사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자는, 의로운 사람이고, 의롭게 행하는 자인 것이고, 그렇게 의롭게 행동한다고 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두려울 일이 없을 것이고, 그 의로운 자에게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소망이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이 금방 읽은 말씀의 그런 의미입니다.

반대로 누가 어리석은 자인가? 누가 미련한 자인가?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미련한 자요. 어리석은 자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며, 악을 따라 행하다 보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두려워하는 그것이 임하게 될 것이고,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이 있는데, 그 길이 완전히 다르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은 의인의 길이나, 지금은 악인의 길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여요. 이것이 우리들을 늘 유혹하는 것이죠. 의롭게 살아보았자 별거 없네. 악하게 살아도 괜찮네. 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겁니다. 의롭게 살아도 별 볼 일 없는 것 같이 보이고, 악하게 살아도 괜찮은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가운데서, 우리는 의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악인의 길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길로 미련한 길로 가게 될 터인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지금 당장 괜찮아 보인다고 해서 괜찮은 게 아니라, 결국 무엇이 다가올 수 있습니까? 회오리 바람이 다가오면, 어떻게 돼요? 악인은 어떻게 된다? 없어져 버린다 이거예요.

회오리 바람이 불지 않으니까, 괜찮은 것 같은데,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치면, 결국 산성이 아닌, 그 산성이 아닌 그 집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는 거예요. 기초가 튼실하지 못하면, 결국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인데, 바로 이 잠언서의 말씀을 읽다 보니까, 예수님께서 해 주신 말씀이 기억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24절에서부터 27절의 말씀에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주를 반석 위에 지어놓은 까닭이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리라.” 예수님께서도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 집을 지었는데, 그 두 집이 똑같아요.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요. 지혜로운 사람이 지은 집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집이나 괜찮아요. 때로는 때로는 이 어리석은 사람이 지은 집이 훨씬 더 크고 훨씬 더 아름답고 훨씬 더 매력적으로 보일 수가 있어요.

그런데 언제 문제가 되는 겁니까? 우기가 되어 창수가 나기 시작하면, 비가 내려서 물길이 쫙 다가오게 되면, 모래 위에 세운 집은 무너져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악인의 길은 곧 쓰러질 수밖에 없으니까, 결론은 뭡니까? 결론은 악인의 길을 걸어갈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의 길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믿습니까?

오늘 이 말씀들을 살펴보는 가운데 우리가 하나 좀 깊이 생각해 보아야 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27절의 말씀입니다. 27절의 말씀에 뭐라고 표현하고 있냐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어떻게 된다고요? 짧아지느니라. 정말 그렇습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정말 오랫동안 장수하는 것 맞습니까? 악인의 수명이 짧은 것 맞습니까? 정말 그래요? 안 그래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는데, 안 그런 것 같아요. 우리 주변에 보면, 정말 믿음의 사람인데, 하나님이 일찍 데려가시는 그런 안타까운 그런 경우를 보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보면 어떤 사람도 있어요? 귀신은 저 사람 안 잡아가고 뭐 하나 싶을 정도의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성경 말씀이 틀린 겁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장수할 것이다. 이야기하고 있고, 악인은 단명할 것이라고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우리가 만나는 현실에서는 그런 것 같이 보이지 않아 보이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물어보니까, 고개를 다들 절레절레 흔드셨는데, 성경이 틀렸습니까? 우리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요? 악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생명과의 관계가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건가요? 아예 없는 것인가요? 도대체 무엇일까요?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장수하는 것이 의인이냐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어 보인다고 하는 것이 오늘 우리의 문제입니다.

정말 단명한 사람들은 악인들이어서 단명했을까요? 정말 지금도 오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기 때문에 오래 살고 있는 것일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 한다면 성경 말씀이 잘못된 것일까요? 성경이 오류가 있는 것일까요? 왜 성경은 이런 별로 납득이 안 되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요? 그런데 이 말씀에만 여기에 이렇게 써 있는 것이 아니라, 십계명 가운데 제5계명에도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부모를 공경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땅에서 너희의 생명이 길리라라고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을 신약 성경인 에베소서 6장에서도 반복해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외갓집 식구들은 다 90세, 100세 막 이렇게 사시는데, 부모를 공경해서 그런 건가요? 왜 그렇죠? 실제로 우리가 느끼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과 생명의 길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이 틀렸나요? 그럼 어떻게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저는 이 말씀이 저는 담배와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담배가 뭐냐? 담배라고 하는 것은 건강에 좋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담배를 피면 건강이 나빠지게 돼 있고, 담배를 피면 암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심각한 질병을 걸릴 수가 있겠고, 더 나아가서 수명이 단축될 수 있습니다. 담배가 그런 좋지 않은 역할을 한다는 것 다 동의하십니까? 동의하지 않습니까? 다 동의할 거라고 생각이 들어요. 과학적인 사실이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실제적으로 우리 주변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 예외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예외가 많아요. 골초들이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골초들이 건강한 사람들이 많아요. 희한하단 말이에요. 담배 하나도 안 피운 사람들이 암에 걸리고, 질병에 걸리고 그러는데, 담배 핀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요. 그런 예외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런데 그러니까 담배와 건강은 상관이 없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옳을까요? 옳지 않을까요? 옳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담배곽에다가 심각한 경고 문구를 적어놓는 겁니다. 흡연을 하게 되면 이런 이런 질병에 걸릴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경고 문구를 적어놓기도 하고, 환자의 그 아주 끔찍한 사진을 그 담배곽에다가 사진을 붙여놓기도 하고, 그래서 피우지 말라고 경고를 하는 겁니다. 담배 피우지 않는 게 좋으니까요. 담배 피우는 분 계시면 끊으십시오.

하지만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 주변에 장수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내 주변에 담배 피워도 괜찮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괜찮겠지 하면서 피우는 겁니다. 천편일률적으로 담배와 담배를 피우느냐 피우지 않느냐가 사람의 수명을 완벽하게 결정하는 요인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는 건강에 좋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피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 것처럼, 오늘 성경 말씀은 어쩌면 우리들에게 실감이 되지 않는 말씀처럼 느껴질 거예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장수하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으며, 부모를 공경하는 것과 장수와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 주변에 보면 반대되는 얘를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이건 아무 상관이 없는 거라고 그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시키면서 하나님 안 믿어도 괜찮아, 의롭게 살지 않아도 괜찮아,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아무 문제가 없어. 괜찮아, 오래 살 수 있어. 그렇게 해봤자 소용 없어라고 우리 자신을 설득시키려고 하는 그런 악한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있지만,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실제적으로 개인의 생명이 길고 짧은 것은 개인의 여러 가지 복잡한 요인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사람의 생명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단순히 이 사람이 부모를 공격했느냐의 한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이 하나님을 경외하느냐, 이 한 요인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명에 미치는 그 영향이라고 하는 것은 다양한, 정말 천차만별의 이유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단명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장수할 수도 있고, 다양하게 나타나고, 아무튼 그 요인들이 많기 때문에 무엇이 이것이 정답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이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경외하지 않는 것보다, 그것이 훨씬 더 바른 길이고,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그런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담배가 우리의 건강을 해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말씀이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렇게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되겠구나. 뿐만 아니라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며 사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것이 장수의 그런 약속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며 믿음으로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잠언서 10장 31절과 3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배임을 당할 것이니라.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알거늘, 악인의 입은 배역을 말하느니라.” 의인의 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혜 있는 자인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자는 그 입술도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들을 하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은, 패역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결국은 패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입술에도 주님께서 파수꾼을 세워주셔서, 정말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스스로 제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의인의 혀를 가지고 있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또한 악인의 혀를 가지고 함부로 말하는 것이 그것이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우리들의 입술 가운데서 선하고 의로운 말들이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늘 넘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살 수 있다고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나 이런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늘 넘어지고 또 넘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주님 앞에 다시 회개하고 나아가야 될 것이고, 또한 주님의 성령을 의지하고 간구하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해달라고 날마다 날마다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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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없다 (롬 3:9-18)

성도 됨의 유익 (롬 3:1-8) +++ 자랑할 데가 어디냐? (롬 3:19-31)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착한 것일까요? 아니면 악한 것일까요? 사람이 태어날 때 착하게 태어나는 것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게 태어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선하게도 악하게도 아니고, 그냥 중립적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에 살던, 순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임순자 권사님 말고. 공자 맹자 등과 더불어서 유교의 사상가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 순자라고 하는 사람이 주장한 바에 의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게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악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것이고, 선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순자의 그 주장은 성악설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고 하는 그런 주장인 것이죠.

하지만 그에 반해서 맹자라고 하는 사상가는, 맹자는 많이 들어보셨죠? 맹자라고 하는 사람은 주장하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 선하게 태어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선하게 태어나지만 ,점점 자라면서 주변의 환경 때문에 악하게 물들고, 주변의 여러 가지 영향 때문에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 맹자의 주장에 의하면, 그러니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 주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맹모삼천지교라고 하는 것이 나온 것 같아요. 맹자의 부모님이 맹자를 교육하기 위해서, 좋은 환경을 찾아 다니려고 했던 그런 이야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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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정말 사람은 그 본성이 원래 선한 것일까요? 악한 것일까요? 만일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선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만일 사람이 착하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디서 그렇게 악한 것을 배우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런 일들이 생기게 되었을까?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번 의견을 한번 물어볼까요? 사람이 태어날 때 악하게 태어난다. 한번 손 들어보실까요? 틀려도 괜찮습니다. 이거 정답이 없습니다. 예, 사람이 태어날 때 선하게 태어난다. 네. 선하게 태어난 자가 조금 더 많은 것 같은 것 같은데요. 정답은 모릅니다. 정답은 잘 모릅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사람이 정말 악해 보입니다. 정말 악한 것이 사람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아이들이 정말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악한 모습들이 나오는 경우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겁니다. 사실 아기들이 우는 이유가 뭐겠어요? 이기적이니까, 우는 거잖아요? 엄마가 힘든데도, 엄마 생각 전혀 하지 아니하고 우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녀들이 셋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아이들한테 말을 했습니다. 집안을 어지르지 말고, 깨끗하게 잘 해라. 놀 때 집안을 어지럽히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잠깐 한눈 팔고 돌아왔더니, 집안이 엉망징창이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물었습니다. 집안을 좀 깨끗하게 유지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다니, 왜 이렇게 엉망진창을 만들었느냐고 말하면서, 도대체 누가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큰 아이 두 아이가 서로 짜고 말한 것도 아닌데, 동시에 막내를 가리키면서 “쟤가 그랬어요.” 여러분 큰 아이도 막내를 가르치며, 둘째 아이도 막내를 가르치면서, “쟤가 어질렀어요. 쟤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요.”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막내가 누구냐? 아직 돌도 지나는 간난아기 그 아이를 가리키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그런 악한 마음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아이들의 모습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정말 성악설이 맞다라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또 정반대의 예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정말 착한 품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어 있고요 선을 행하며 마음속의 기쁨이 솟아오르게 되는 것인데요. 그런 마음이 누구에게서 보이는가? 어린 아이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이죠. 특별히 조그마한 꼬마 아이들이 정말 부모를 위한다고 부모를 배려해서 행동하는 그런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여러분은 그런 깊은 감동을 받아보셨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엄마가 아빠가 자녀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주는데,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하나가 부모의 마음을 정말 감동시킨 그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 꼬마의 입에서 엄마를 생각하는 말이 나올까? 어떻게 저 꼬마의 입에서 아빠를 생각하는 말이 나올까? 정말 감동을 받을 때가 있는 겁니다.

저도 예전에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우리 아이, 큰 아이가 3살도 안 됐을 때였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부부 싸움을 저희가 한참 많이 했습니다. 제가 막 화를 내면서 막 싸우고 있을 그때에, 세 살도 안 된 그 꼬마 아이가 저를 향해서 하는 말이, “아빠, 엄마에게 화내지 마. 차라리 나한테 화내.” 제가 거기서 충격을 먹어가지고, 그 앞에서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정말 안절부절하지 못한 그런 때가 있었고, 그 아이를 보면서 어떻게 이 아이의 마음 가운데 이런 마음이 이런 착한 마음이 있을 수 있을까?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 성경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보면 “의인은 없다”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사악하고 독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열린 무덤과 같고, 모든 사람들이 다 타락해 버렸다고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악한 사람들이오. 다 나쁜 사람들이고 죄인들이라고 하는 말씀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어느 한 구절만 볼 것이 아니라 다른 구절들도 봐야 하는데요.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지만, 또 다른 말씀도 기록돼 있습니다.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을 어떻게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태어나게 해 주셨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도 두 가지가 다 등장하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요, 선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 것처럼 이야기해 주는 부분도 있고, 또 반대로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한 것처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다 타락해 버리고, 다 저주와 악이 가득하고, 정말 악한 모습,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그런 말씀도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3장 9절에서부터 18절의 말씀은 구약 성경 시편 14편과 또 여러 성경 구절들을 묶어서 그래서 전달해 주고 있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의인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죄인뿐이고, 이 세상에 타락한 인생들뿐이라,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인간이 전적으로 악하기만 할 뿐, 선한 모습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느냐? 사람이 전부 의인이 없고, 전부가 다 죄인이라고 선언해 주고 있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그러니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냐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선한 일을 하기도 하고, 의로운 일을 할 수가 있고, 그래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 성경에 보면 수많은 의인들이 등장합니다. 실제적으로 수많은 의인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을 꼽을 수가 있을까요? 노아를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노아에 대해서 창세기 6장 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어떤 자라?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고 창세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노아 시대 때의 사람들은 전부 다 타락해버려서, 그래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지만, 그런데 노아라고 하는 사람은 그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였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욥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욥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냐면, 동방의 의인이라고 기록합니다. 욥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온전한 사람이었고, 정직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악에서부터 떠나 있는 자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사람의 행동이 의의 길을 걸어갔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간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요.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어, 그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잊지 않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에 대해서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에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뛰어난 정말 인자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로마서 3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모두 다 나쁜 놈들만 있다고 하는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의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이고,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이고, 선한 일을 행하는 모습들을 성경에서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 주변에도 많아요. 많지 않습니까? 많아요.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볼 때마다, 늘 고개가 숙여지고 늘 감동을 받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로구나!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구나!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로구나! 정말 주를 위해서 헌신하려고 하고, 주를 위해서 정말 봉사하려고 하고 정말 믿음을 보여주는 그 모습 볼 때마다, 제가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오늘 로마서 3장 9절에서부터 18절의 말씀에서,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실제적으로 성경에 의인들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우리 실제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의로운 사람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그런데 의인이 하나도 없다라고 부정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의를 하나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모습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정도로 완벽한 자리에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의로운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드러나지 아니한 많은 부분들에 더러운 모습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죠. 깨끗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뒷면에 추한 모습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가 의인입니다” 하면서, 자신의 의의와 공로를 내세워서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너무나도 창피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만 해도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구약 성경에 나온 여러 의인들 정말 완전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몇몇 사람들을 열거했었는데요. 그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모세만 해도 그렇습니다. 모세는 완벽한 사람이었는가 했을 때 완벽한 사람이 아닌 겁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서 반석을 명하여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물을 마시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세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다음에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 같아요. 이스라엘 민족이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 모습에 너무나도 실증이 나고 짜증이 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서서 분노하면서 말을 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면서 반석을 두 번 내리쳤는데요. 그 일을 보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해 주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민수기 20장 12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내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모세가 합격이라는 얘기입니까? 불합격이란 얘기입니까? 불합격이라고, 그 훌륭한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불합격이었다 말씀하시는 거에요.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파렴치범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죠.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아내의 남편을 전쟁터 최전방에 보내서 교살하는 정말 파렴치범 중에 정말 악한 파렴치범이었던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었던 그 다윗이었지만, 그가 완벽한 사람이었는가? 완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범이었고 그는 너무나도 자격 부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역대상 22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내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 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한마디로 넌 불합격이다. 이 말씀이에요.

우리가 의롭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끼리 서로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아 시대 때 살던 그 수많은 악한 사람들에 비하면,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던 겁니다. 사울 왕에 비하면 다윗은 그런 대로 깨끗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부족한, 한참 흠이 많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조금만 잘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 아이들은 저를 보면서 마치 아빠가 슈퍼맨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에 비해서 제가 다 잘하거든요. 뭘 해도 다 잘하니까, 우리 아이들이 봤을 때는, 아빠가 정말 뭐든지 다 잘 해내는 것 같아요. 아마 성도님들 가운데는 저를 생각하면서, 자꾸 우리 목사님은 컴퓨터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조금 하긴 해요. 하긴 하는데 그래서 컴퓨터를 못 하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형편없는 실력이거든요. 그런데 정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대단해 보여요.

우리 자녀들이 휴대폰을 가지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는 걸 보면, 우리 아이들 우리 손주들이 정말 휴대폰 박사처럼 생각이 되지만 사실은 별거 아닙니다. 우리들보다 하나 더 알고 있는 것뿐이죠. 누군가 성경을 조금 알고 있고 조금만 암송한다고 하면, 굉장히 많이 아는 것처럼 생각이 들고, 아마 구약 성경을 통통 전부 다 외우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정말 우리가 우리끼리 서로 비교하다 보니까, 거룩해 보이고 좀 더 나아 보이고,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저 사람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 보면 더러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종종 우리 성도님들은 목사님들을 바라보면서, 목사님은 정말 대단한 그런 신앙을 가진 아주 거룩한 분이라고, 그렇게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제가 이곳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저의 더러운 모습을 못 봐서 그래요 안 들켜서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것들이 드러나지 않고 숨겨졌기 때문에 서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된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런 대로 깨끗한 것처럼 보이지만, 왜 우리에게는 깨끗한 것처럼 보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뇌물죄를 지으신 분 계십니까? 손 들어보세요. 아마 대부분 안 지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 앉지었을까요? 뇌물죄를 왜 지었을까요? 아무도 나에게 뇌물을 갖다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뇌물을 내가 받게 되는 위치에 서게 되면, 우리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다윗처럼 간음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간음을 하게 되는 것이죠. 자신의 더러운 죄를 숨기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이는 일에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타락한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제가 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래서 그나마 조심하는 편입니다. 성적인 문제로 인해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상황들을 피하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어떤 여인과 함께, 제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단둘이 차를 타고 간다든지, 식사를 둘이서만 한다든지, 아니면 둘이만 상담을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무던히 조심합니다. 젊은 청년이라고 할지라도, 그 여자 형제를 단둘이 제가 만나는 시간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해 받는 것도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해를 넘어서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지, 죄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다윗이 무너졌는데 우리가 왜 안 넘어지겠어요? 가롯 유다 같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무너졌는데, 왜 우리가 안 넘어지겠어요?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돈을 맡기면 제가 맡지 않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결국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는 탐욕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들인가? 늘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늘 숨겨져 있지만 우리 마음 가운데 그런 사악한 심성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오늘 성경은 단호하게 네 설명하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한 번은 예수님 앞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에 의하면 그 여인은 돌을 들어 던져서 쳐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죽이기 위해서 의기양양하게 예수님 앞에 물었습니다. 예수님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율법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들 앞에서, 살기 등등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아니하시고 땅에 엎드려서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뭘 적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추측하기를, 예수님께서는 그 땅에 엎드려서, 거기 왔던 사람들의 죄를 하나씩 하나씩 땅에 적었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건 그분의 추측이지 무엇을 적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를 적고 계실 때 사람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님,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 말씀을 듣자마자,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양심이 찔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자기 자신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나도 똑같은 죄인이구나. 저 여인만 죽일 죄인인 줄 알았는데, 나도 똑같은 죄인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마치 어두운 방 안에 한 줄기 빛이 비치면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먼지가 다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빛이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 비추게 되니까,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죄가 환하게 드러나고, 나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나도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다 흩어져 버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그런 귀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나는 거룩한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기도하고, 나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나는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오. 나의 능력으로는, 내 공로로는 아무런 가망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는 누구를 찾으셨는가? 죄가 많은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는 의사가 쓸 데가 없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 데가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가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지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나의 장점들을 보이면서 삽니다. 깨끗한 옷, 화려한 옷 그리고 멋지게 단장해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며 삽니다. 하지만 그런 보이는 것과는 달리, 우리들이 말하지 않고 감추었던 그 부분에는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더러운 모습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소망은 예수님께서 그런 더러운 모습, 실패자의 모습, 아빠로서의 실패자, 엄마로서의 실패자,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실패자, 하나의 성도로서의 실패자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너 같은 놈 쓸 데 없다 하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내가 너의 아픔 때문에, 내가 너의 고통 때문에, 너희들의 실수 때문에, 너희들이 쓰러진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이 더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던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저와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그 주님의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회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혼자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그 더러운 모습 실패한 모습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이 연약한 모습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내 힘과 노력으로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나, 주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믿음으로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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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으면 (잠 10:13-21)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6-12) +++ 회오리 바람 (잠 10:22-32)

오늘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읽었는데, 오늘 읽은 잠언서의 말씀은 주제가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두 마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요약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떤 주제들이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본다고 한다면, 우선은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13, 14절 그리고 18, 19, 20, 21절에서, 지혜롭게 말하는 것과 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두 번째 주제는 무엇이냐면, 15절에 나오는 “재물과 궁핍”에 관한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의인과 악인”을 대비시킨 이야기가 16절과 17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주제들이 하나로 일관적으로 쭉 흐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 가지 주제들이, 좀 더 나눈다고 한다면 더 많은 주제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 세 가지 주제들이 여기저기 섞여서,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 가지 주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악인과 의인”에 대한 대비의 말씀을 살펴보고 싶은데요.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소득이 죄에 이른다고 하는 그 말씀은 의인의 수고가 생명에 이른다는 것에 반대의 말씀이니까, 죄에 이른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곧 죽음에 이른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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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한다면 의인의 수고가 생명에 이른다고 했는데, 그러면 의인의 수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반대로 악인의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종종 생각할 때, 늘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동화를 많이 읽었기 때문이고,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동화책이나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악인이 있고 의인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대체로 의인이고, 그리고 그 의인에 반대되는 역할을 하는 악인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죠. 왜냐하면,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를 사랑해야 될 것인가가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한 겁니다.

콩쥐 팥쥐의 이야기에서 누가 착한 사람이죠? 콩쥐가 착한가요? 팥쥐가 착한가요? 콩쥐입니까? 아무튼 둘 중에 하나가 착하고, 둘 중에 하나는 나쁜 겁니다. 신데렐라와 그의 다른 배다른 언니들이 있다고 한다면, 신데렐라는 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악한 겁니다.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우리가 늘 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인공이 있고, 그 악역이 있고, 의인이 있고, 그리고 나쁜 사람이 등장하는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다윗은 의인이고, 사울은 악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주에 이르느니라. 즉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생각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어떤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 의인은 생명의 길로 가게 될 것이지만, 어떤 악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악인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늘 우리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을 바라볼 때도,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좋은 정치인이지만,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아주 나쁜 정치인이라고, 아주 사악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같이 좋게 지나다가도, 그 사람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잘못하게 되면, 저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구나라고, 낙인 찍어버리고, 더 이상 그 사람은 의인이 될 수가 없는, 나쁜 사람의 범죄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이분법적인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라고 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은 이 사람이 의인이냐? 악인이냐?를 생각하고, 그렇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좋은 결과를 맺게 될 것이지만, 저 사람은 나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인 관점은 정당한 관점이 아닙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되면, 다윗이 항상 의로웠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한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다윗이 사울보다도 더 사악하게 행동한 적도 있는 것이죠. 사울왕도 나쁜 왕이지만, 그 사울이 항상 나빴던 것만은 아닌 것이죠. 사람은 누군가? 사람은 우리가 쉽게 이 사람은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쉽게 레이블을 붙여서, 색깔을 칠해서,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저 사람은 아주 더러운 사람, 이 사람은 아주 거룩한 사람, 그렇게 레이블링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우리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쉽게 어떤 한 사람을 색깔을 칠해버리는 것이죠. 저 사람은 빨간색, 저 사람은 파란색이 돼버리고, 그래서 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해 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겁니다. 그건 아주 유치한 일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인의 수고라고 하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들의 수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법대로 따라서 얻는 수고를 의미하는 것이고요. 악인의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어떤 사람들, 나쁜 사람들의 소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악한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악한 소득이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16절의 말씀을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다면, 그것이 곧 생명의 길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악한 길로 간다면, 그 길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은,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수고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절의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훈계를 잘 듣고, 지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는 자가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채찍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끝끝내 저버리고 악한 길로 간다면, 그 길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15절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15절 말씀에서는 “재물과 궁핍”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이 재물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좀 잠깐 당혹스러움을 느끼신 분들이 계십니까?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마 불편하게 느꼈을 분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재물에 관련된 성경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로 듣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를 듣냐면, 재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성경에서 성경에서 우리가 종종 듣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재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듣습니다.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 너의 소유를 의지하지 말라. 등등 재물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표현들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는데,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재물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메시지를 전해 주냐면,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아마 예상치 못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부자의 재물이 무엇이냐? 견고한 성과 같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그런데 가난한 자가 궁핍한 것은 무엇인가? 멸망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재물이 좋다는 얘기입니까? 나쁘다는 얘기입니까? 좋다는 얘기예요.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잠언서에서 읽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재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을 찾아왔던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젊은 관원을 향해서, 그 정도 신앙생활 가지고는 안 되니까, 어떻게 하라는 얘기예요? 가지고 있는 재물들 다 갖다 내버리라고 말씀해 주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마태복음 6장 24절의 말씀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기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재물은 버려라.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다 잡을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다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선택하려면 재물을 버려야, 하나님이 선택이 되는 것이지, 재물을 가진 채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들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의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신앙인들이라고 한다면,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던 최영 장군의 그 말씀처럼,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재물은 내가 그냥 내버리고 오로지 주님만을 선택해야, 불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무소유의 삶을 목표로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정말 가난한 삶, 정말 지족하는 삶, 정말 내가 이 세상에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말씀들입니다.

실제로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모든 재물들을 다 내버리고, 그저 청빈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한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불교처럼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그게 진짜 신앙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도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분들도 있기는 있으나, 사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본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교훈을 보자고 한다면,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시는 재물에 대한 관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우리가 누리면서 하나님을 만끽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즐기는 방법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깨닫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이 세상에 그 아름다움과 그 위대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그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방편이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그래서 선한 열매들을 많이 거두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섬기는 가운데 열심히 수고하며 애쓴 자에게는 재물이 따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삶을 윤택하게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견고한 성처럼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된다는 게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아가고 게으르게 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가난이 따르게 되고, 결국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편에서는 재물에 대해서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처럼 재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반면에, 또 한편에서는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견고한 성이 되기 때문에, 이 견고한 성이 되는 이 제물을, 그것으로 그냥 재물의 위치를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그 재물의 위치에서부터 높여서, 우상의 위치로 올려버릴 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재물이 견고한 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그런 견고한 성과 같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제대로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고, 수고하지도 않고,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대로 열심히 일할 수 없으니까, 일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궁핍이 오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제물은 갖고 싶으니까, 어떠한 방법을 쓰는 겁니까? 잘못된 방법을 쓰는 것이죠. 사기와 도둑질과 빼앗는 것과 또는 우상숭배와 요행 등을 통해서, 그러한 재물들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왜 그런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시도하게 됩니까? 재물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리면, 그런 잘못된 방법을 시도하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재물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재물들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데, 사랑을 베풀지 못하며 사는 겁니다.

주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야 되는데, 주를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 물질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갑질을 해대며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기적으로 탐욕적으로 그래서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 하는 잘못된 방법을 쓰게 되는 것인데요. 그것이 바로 재물이 우리들의 우상으로 변해버리는 잘못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너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질문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재물이 하나님이냐? 너의 신이 누구냐를 물어보는 것인데요.

오늘 15절의 말씀에서는 그런 잘못된 방식의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 가운데 내가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노력하고 바른 방법을 통해서 재물을 얻고 부자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견고한 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서, 이러한 견고한 성을 얻기 위한 정당한 노력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악한 사람은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견고한 성이 되니까, 재물이 견고한 성이 되니까, 속여서라도 내가 더 많이 가져야 되겠다. 공금을 내가 횡령해서라도, 내가 이 재물을 가져야 되겠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내가 이것을 가져야 되겠다. 당연히 사랑해야 될 이웃을 향해서 베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될 것까지도 내가 내 것으로 쓰면서, 나의 욕심을 채워야 되겠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제는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3, 14절과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3절 14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13절 14절의 말씀을 요약한다고 하면, 우리가 말할 때 어떻게 말해야 된다는 건가요? 지혜롭게 말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리석게 말하고 미련하게 말하면, 결국 고통스러울 것이고 멸망을 맛보게 될 것이니까, 지혜롭게 말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13절 1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18절에서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니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 미움을 말하지 않고, 그 미움을 감추고 있으면, 그 입이 어떤 입술이라고요? 거짓된 입술이다라고 말씀해 주면서, 그런데 미워하고 중상 모략하고 비난하고 하는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다? 미련한 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을 하라는 얘기입니까?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말을 안 하면 거짓된 입술을 가지는 자가 되는 것이고, 말을 하면 미련한 자가 되는 것인데, 말을 해야 됩니까? 말을 하지 말아야 됩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아예 미움을 품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아예 나쁜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잠언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혜롭게 말을 하려고 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미워하는 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할 거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18절에서 해 주는 말씀이 뭐냐면, 미워하는 말을 감추고 있으면, 거짓 입술이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미워하는 말 중상하는 말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미련한 자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러니까 사실은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하는 의미입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거죠.

미워하는 말을 안 하면 좋겠지만, 안 하면 좋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아예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죠. 지혜롭게 말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는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은 선에서부터 선한 말을 하게 되고, 우리가 쌓은 악에서부터 악한 말을 하게 되어 있는데(마 12:35), 만일 우리가 악한 것을 마음속에 쌓은 상태에서 그 악한 것을 쌓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악한 미움의 말이 입으로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는데, 말을 한다면 미련한 자가 되는 것이고,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한다면 그 입술은 거짓된 입술이 되는 것이니까, 사실은 18절에서 우리들에게 권면해 주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말을 나쁜 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전에 나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러니까 말을 많이 하라는 얘기입니까? 말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말을 하지 말라는 얘깁니까? 침묵이 금입니까? 아니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가 지에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19절의 말씀은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어라가 아니에요. 말하지 않는 게 최고다가 아니에요. 침묵이 금이다가 아니에요. 여기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까? 나쁜 말이죠. 미움의 말이죠.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이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말이고, 중상 모략 불평하는 말, 지적하는 말,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는 말,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말, 그런 말들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된다? 허물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을 안 해야 된다고 결론을 내리시면 성경을 잘못 읽으신 겁니다. 말을 안 하는 게 좋은가요? 아니요. 입은 말하라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입을 만들어주신 이유는 말하라고 입을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런데 어떤 말을 해야 되는 겁니까? 무슨 말? 사랑의 말을 해야죠! 사랑의 말을 침묵하고 있는 게 금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하는 게 금이에요. 침묵이 금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하는 것이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 것이죠. 여기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얘기는, 나쁜 말, 불평하는 말, 비난하는 말, 상처 주는 말, 그런 말을 하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이지, 좋은 말도 안 하는 것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좋은 말은 어떻게 해야 돼요? 해야 돼요! 해야 돼!

좋은 말이 없어서 사람들이 쓸쓸하게 있는 겁니다. 좋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기운이 축 쳐져 있는 겁니다. 칭찬하는 말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돼요? 좋은 말을 해야 되는 거에요. 좋은 말을, 칭찬하며 격려하고 감사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해야 되는 거예요. 말을 많이 해야 되는 거예요. 말을 안 하는 게 대수가 아니라, 나쁜 말은 하지 않아야 되지만, 좋은 말은 자꾸 자꾸 이야기를 해줘야 된다. 왜? 잠언서 25장 11절의 말씀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돌아봐야 되죠. 과연 이 말이 칭찬과 격려와 감사와 기쁨의 말인가? 아니면 좌절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고, 용기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그런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 말을 하면 우리 며느리의 마음에 못을 칠 말인가? 생각해보세요. 생각해봐요. 이 말을 하면 우리 아이가 좋아할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생각해 봐요. 내 마음속에 있는 그 말을 그냥 내뱉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했을 때 이 말을 내 며느리가 듣는다면 이 말을 내 친구가 듣는다면 기분이 좋을 말인가? 기뻐서 행복해야 할 말인가? 힘이 날 말인가? 아니면 무너뜨리고 쓰러지게 만드는 말인가를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말이 경우에 합당하지 않아서 썩은 사과와 같은 그런 말들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가장 사랑하고 돌보고 아껴줘야 될 우리 가족들을 향해서 왜 그런 나쁜 말을 해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말하기 전에 직접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내 말이 그 사람한테 안 들어갑니까? 반드시 들어가게 돼 있어요. 반드시. 반드시.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이 사람의 귀에 대고 이야기 안 하고, 이 사람한테만 얘기하면 안 들어가는 게 아니고, 반드시 돌고 돌고 돌아서 들어가서 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꽉 내버리면, 비수를 꽂아버리는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데 그게 누구예요? 우리 권사님들이 그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사랑의 말을 해야지, 사랑의 말을, 내 말을 듣고 행복해야 할 말, 정말 지쳤던 아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말 용기를 줄 수 있는 말, 열심히 달리는 사람, 힘이 쫙 빠지게 하는 말이 아닌, 힘들어서 지친 자가 그래 다시 한 번 일어서서 “한번 해보자” 라고 하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랑의 말들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침묵이 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 입술로 사람들을 세워내는 귀하고 복된 생명의 삶을 만들어내는 그런 입술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말하기 전에 생각해봐요. 말하기 전에 생각해 봐요. 20절 말씀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인의 혀는 좋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혀가 아니라, 감사의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사랑의 말이 의인의 혀인 것이고, 의인의 혀가 아닌 것은 중상과 비방과 모략과 불평과 비난의 말이에요. 그런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악인의 말은 가치가 적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1절 말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 의인혜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겁니다. 지쳐 있는 자에게 용기를 북돋어주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이 가장 사랑해야 될 그런 우리 대상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중상과 비방과 불평과 모략과 비난의 말들을 해대다가 결국 가정이 깨어지고 맙니다.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엄청난 상처들을 주고 맙니다.

그런 지혜롭지 못한 인생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가야 할 겁니다. 주님 제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놓는 말이 아니라, 정말 살릴 수 있는 회복시켜줄 수 있는 내 말을 듣고, 기뻐할 수 있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말을 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사랑의 말을 하시고, 믿음의 말을 해주시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신 그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입술도 주님을 닮아가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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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롬 1:16-17)

영적인 선물 (롬 1:8-15) +++ 하나님의 진노 (롬 1:18-23)

로마서 강해 세 번째 시간이 되었는데요.

지난 시간에 우리는, 바울 사도가 로마에까지 건너가서 거기서도 복음을 전하기를 소원한다고 하는, 그 내용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그 복음이 무엇인가? 그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는, 아주 간단한 두 개의 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먼저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16절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요. 바울 사도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나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않는다? 이런 말을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지금 로마 교회에 성도들이 당하고 있는 그 현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멸시를 당하고, 비방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너, 예수 믿어? 저런 바보 같은 놈!’ ‘너, 교회 다녀? 머저리 같은 놈!’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저 예수 믿는 놈들, 저 더러운 놈들’ 하는 그런 비난을 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로마의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그런 로마의 성도들을 향해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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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런 말을 하지 않겠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사람이 ‘나는 금메달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겠습니까? 학교에서 전교 1등한 사람이, ‘나는 전교 1등 한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죠.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 자식들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하고 있는데요. ‘우리 자식이 이런 애예요. 저런 애예요’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만큼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대견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두가 다 부러워하고, 모두가 다 인정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을 해야 될 때가 언제이냐면,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멸실을 당하고 있을 때, 여러분들은 그렇게 무시하고 비난하지만, 그러나 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크리스천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으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고 한다면, 조롱을 당하게 되는 것이고,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한다면 사람들로부터 핍박을 당하게 되기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실을 당당하게 드러내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의 상황이 그렇다고 해요. 학교에 가면 교회 다니는 아이들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3% 이하라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학교에 가면 전부 다 다 불신자들이고, 교회를 비방하고 조롱하는 아이들이 대다수인 그 학교 내에서, 아이들이 말하기를, ‘너, 아직도 교회 다녀?’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래, 나, 교회 다녀’라고 말했다가는 왕따를 당하기 쉽고, 그리고 그 반 아이들로부터 조롱을 당하고 무시를 당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말을 말하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요즘 한참 핫한 것이 넷플릭스에서 나온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는 드라마입니다. 보신 분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 못 보신 분도 있을 것이겠지만, 뉴스로서는 아마 많이 들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미국에 갔더니, 커다란 미국 백화점 안에 오징어 게임 상품을 파는 그런 것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을 했는데요. 그 오징어 게임이라고 하는 드라마를 보면, 그 드라마에서 나오는 기독교인의 모습은 너무나도 한심합니다. 오징어 게임 속에 그려져 있는 기독교인들이란 어떤 모습인가? 뻔뻔하고 위선적인 그런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공감 능력이 없는 사람들로 묘사되고 있고, 그 상황 가운데서도 아주 이기적인 모습의 사람으로, 정말 싫은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는, 그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드라마에서 이렇게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아주 나쁜 모습으로 그려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작가가 안티 크리스천이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 있겠죠.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같은 것은 거울과 같은 거예요. 거울과 같은 것이어서, 우리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그렇게 보고 있구나. ‘저 더러운 놈들, 저, 위선자들, 저 나쁜 놈들, 저 더러운 더럽고 뻔뻔한 사람들’이라고 하는 그런 시각이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 중고등부 아이들이 신앙생활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고 어려운 상황인데,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사랑스러워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교회에 나오는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도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감사할 정도인데요. 부모님들이, 우리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을 보면 혼내기보다는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금 바울 사도가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 교회 상황이 어쩌면 우리 한국의 지금의 상황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박해를 당하며, 사회적으로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이 말씀을 읽은 로마 교회 성도들은 아마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무시하고 멸시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그렇게 나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비난받을 사람들이 아니라, ‘여러분들은 바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이 메시지가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아주 큰 위로의 메세지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에는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 사도를 16절 말씀에서 그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스러워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놀라운 소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정말 감사한 일이고, 이것은 정말 흥분되는 일이고,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죠.

이 세상에 그 어느 것도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돈이 우리를 살릴 수가 없는 것이죠. 돈이 있으면 물론 편리합니다. 돈이 많이 있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점 줄어들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죽음에서부터 건져낼 수는 없는 것이고,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할지라도 영원한 형벌 가운데서 우리를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서 주님께서 해주셨던 말씀이 누가복음 12장 20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데요. 많은 곡식을 쌓아놓은 그 부자를 향해서 주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내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라고 말씀해 주셔요. 돈을 아무리 모은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살릴 수 없고, 하나님께서 부르신다고 한다면, 오늘 밤에라도 그냥 모든 것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를 살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권력이 우리를 살릴 수가 없습니다. 물론 권력이 있다고 한다면 좋은 면이 많이 있습니다. 편리한 것이고, 그동안 잘 안 되었던 것들도 맡겼던 것들도 다 해결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지만 아무리 세계 최고의 권력을 지녔다고 할지라도,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부터 살려낼 방법은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들에게 뛰어난 정치인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정치인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구세주는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얻고자 하다가, 오히려 망해버리고 마는데요.

오히려 우리들에게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복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오히려 자랑 스러운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주 고전적인 예화이기 때문에, 아마 신앙생활하면서 수도 없이 많이 들은 예화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떤 꼬마 아이가 엄마가 있는데, 그 엄마의 얼굴이 화상으로 인해서 일그러져 있었습니다. 흉칙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 엄마가 이 꼬마 아이에게는 너무나도 큰 상처가 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학교에서 학부모님들을 오라고, 학부모 면담을 하라고 해서 오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의 어머니는 너무나도 예쁜 모습을 하고 있고, 그리고 멋진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래서 자기 엄마라고 자신 있게 소개를 하는데, 자기의 엄마는 얼굴이 일그러져 있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엄마를 학교에, 엄마가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우리 엄마는 학교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 아이에게, 어느 날 자기 어머니가 왜 그런 상처를 화상을 입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네가 어렸을 때, 그때 갓난아기였을 때 우리 집에 불이 났을 그 상황 가운데서 내가 너를 살리기 위해서, 너를 그 화마에서부터 살려내기 위해서, 그 아이를 안고 나오다가 너는 가슴에 꼭 안아서 아무 흠집 없이 내가 살려냈지만, 그러나 내가 그 불로 인해서 얼굴이 다 화상을 입어버리고, 내 몸이 망가져 버려서 화상을 입게 되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그 아이는 어머니를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복음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위해서 죽으셨어요. 나 같은 죄인을, 내 생각하는 것이 악하고, 늘 행동하는 것이 악하고,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멀리 떠난 우리를, 영원한 죽음의 형벌 가운데서부터 건져내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저 높은 곳에서부터, 낮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건져내신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이 있기에,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를 조롱하고 멸시한다고 할지라도,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는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될 것이고, 사랑해야 될 복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에 우리 기독교는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참된 지폐가 있다고 한다면, 그 지폐를 오용하기 위한 위조 지폐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고, 그 위조지폐 때문에, 그래서 비난을 받게 되듯이, 기독교가 개독교가 되어 버렸고, 목사는 먹사가 되어 버렸고, 오징어 게임을 보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부끄러운 모습의 기독교인들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들의 치욕을 지고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서, 부끄러워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불신자들 앞에 가서 막 윽박지르면서, ‘나는 복음을 안 부끄러워해’ 하면서 윽박지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막무가내식 행동을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 핍박을 당하면, 오히려 겸손하고, 핍박받는 것으로 인해서 주님께서 주신 말씀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고난을 받고,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면, 오히려 기뻐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겸손하게, 온유하게, 이 세상 앞에서 믿음을 드러내야 한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17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여러분. 하나님의 “의”라고 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의”라고 하는 한자를 생각하며. 그것은 공의, 정의 이런 말들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났나?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났나? 도대체 정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말이 무슨 뜻일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라고 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점으로 본다고 한다면, 그것은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서로 약속을 하게 되고 그런데, 그 약속을 잘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의가 없는 사람이라고, 의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으면, ‘아, 이 사람은 참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유대인들의 개념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약속을 잘 지키시는 분이라고 하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의로운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그 말씀은 여러 가지로 이해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오늘 17절의 말씀을 이해할 때에, 그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은 약속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이다’라고 하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약속을 잘 지키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이 나타났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잘 지킨다고 하는 것, 잘 지키셨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약속이 체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어디에서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에 약속이 체결되어 있는 것이 나타나냐면, 출애굽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서부터 출발한, 해방된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습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약속을 맺게 될 때, 그 약속이 무엇이냐 하면, ‘이스라엘 민족아, 너희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겨라.’ ‘다른 신을 섬길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만 섬겨라’고 하는 그 명령이고, 만일 너희가 그렇게 나를 나만을 섬긴다고 한다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서, 그래서 너희를 보호하시겠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이 체결되어 있는데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 섬기기로 약속한 것,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보호해 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의 관계가 시내산에서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결혼 약속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결혼할 때 어떻게 결혼합니까? 결혼에 서약을 하는 것이죠. 약속을 하는 것이죠.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오로지 당신만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서로 하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는 ‘오로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하는 그런 약속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약속이 체결된 것입니다. 그 계약을 맺게 되면 계약서를 작성하게 되는데요. 그 계약서가 무엇이죠? 바로 10계명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10계명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는데,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 주겠다’고 말을 말씀하시면서 그렇기 위해서는 너희가 이 10계명의 말씀을 지키라고, 옛 계명의 약속을 주시는 것인데, 계약서를 쓸 때 몇 장을 쓰죠? 2부 작성하기 때문에, 두 개의 돌판에 계약서를 써서 10계명을 써서, 그렇게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약속이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그 약속을 잘 지켰냐면, 지키지 못했습니다. 사사기에서 보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만을 섬긴 것이 아니라, 이방 신상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약속을 맺었지만, 그 약속이 깨어져 버린 것입니다. 약속을 맺었는데, 계약 당사자 가운데 한쪽이 그 계약을 파기해 버리면, 그 계약이 어떻게 되는 것이죠? 계속 계약이 성립이 됩니까? 계약이 파기가 되는 겁니까? 파기가 되는 것이죠. ‘이제는 계약 끝났다.’ ‘계약이 이제 완전 파기됐다’라고 선언해도 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 편에서는 계약을 파기했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그 계약을 파괴하지 않으셨다고 하는 것이죠. ‘너희들이 약속을 못 지켰으니까, 이 계약은 끝난 거야’ 하면서 그 계약을 찢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고, 그리고 그 계약을 다 지키도록 너희가 지키지 못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셔서,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주시고, 그 대표 되신, 그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 사람 대신에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시고, 우리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복종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복종을, 그 순종을 다 하셔서, 결국 우리를, 하나님의, 그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는 이야기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깨버리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지키셨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나타내주는 이야기가 호세아의 이야기입니다. 구약 성경 호세아서의 말씀에 보면,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저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해라.’ 그래서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편인 호세아와 사랑을 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금세 바람이 나버리고 외도를 해 버립니다. 결혼 관계가 깨어져버리고, 파괴되어 버리고,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은 남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면 결혼 관계가 깨지는 것이 정상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호세아야, 너는 그 고멜을 버리지 말고, 다시 데리고 와라.’ 고멜을 다시 데려오라고 말씀하시 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호세아가 그 고멜이라고 하는 여인을 다시 데려와서 다시 아내를 삼습니다. 또 집을 나갑니다. 그런데 그 집을 나간 고멜이 어디에 가 있는가? 사창가에 가 있는 거예요. 사창가에 가 있는 그 여인에게, 여인을 되찾기 위해서 돈을 싸들고 가서, 그 여인을 사서 데리고 오는 거예요. 결국 그 호세아 선지자는 아내를 버리지 않고, 결국 그 아내를 끝까지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러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해 주셨고, 하나님께서 그 어떻게 그 서약을 깨지 아니하셨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 인간 편에서 죄악을 저지르며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탐욕의 길로 나가서, 하나님과의 그 약속을 깨어버렸을 때, 하나님께서 ‘이제 계약 끝났다’ ‘더 이상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면서 계약을 박차버리고 도망가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그 약속을 버리지 않고 우리를 하나님의 신부로, 하나님의 자녀로, 계속해서 맞이해 주셨다고 하는 것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깨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복음은 아주 놀라운 소식입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은총인데요. 이 은총을 어떻게 우리가 누릴 수 있겠는가? 그것은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입니다. 아무리 좋은 선물이 주어진다고 할지라도, 내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 선물이 우리의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죠. 따라서 이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하는 이 선물은 어떻게 우리가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그 선물을 받아들일 때, 우리에게 구원이 되는 것이고, 우리가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다고 한다면, 누구든지 구원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참으로 믿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우리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기 보다는 믿을 수 없는 사람들에 둘러 싸여 있습니다. 오히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는 시대가 바로 이 시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오징의 게임의 드라마를 보면, 거기엔 아주 감동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우라고 하는 사람과 그리고 알리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 상우라고 하는 사람은 알리라고 하는 외국인 노동자에게 선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차비가 없을 때 상우는 자신의 돈을 꺼내서 알리에게 돈을 줍니다. 그리고 그 알리의 가족을 걱정해 줍니다. 한국에서 만나기 어려운 정말 친절한 사람을 알리는 만나게 된 것이죠. 그래서 이 알리는 상우를 형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르게 됩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의 한 에피소드 가운데 구슬 따먹기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짝이 되어서 서로 구슬을 따내면 승리한 사람은 살아남는 것이고, 구슬을 다 빼앗긴 사람은 죽게 되는 사느냐 죽느냐 그 게임에서 상우와 알리가 한 편 한 편이 되어서 서로 경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상우가 구슬 따먹기를 하는데, 다 지는 거예요. 다 빼앗기는 거예요. 그런 상황에서 다 빼앗기면, 자기가 죽을 것 같으니까 알리에게 제안을 합니다. 우리 서로 이렇게 하지 말고, 한 사람은 살고, 한 사람은 죽는 방법 쓰지 말고, ‘우리가 같이 사는 방법을 연구해 보자’ 제안을 하면서 네가 가지고 있는 그 구슬을 함부로 갖고 다니다가 빼앗길 수 있으니까, ‘내가 안전하게 보관해 줄게’ 제안을 하는데, 알리는 그 상우를 믿어요. 나에게, 내가 힘들었을 때, 나에게 지폐를 건네준 사람, 내 가족을 걱정해 준 그 상우를 믿으면서, ‘그래, 형, 내 구슬을 보관해 달라’고,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을 해달라고 이야기하면서, 그 구슬을 맡겼는데, 상우는 그 구슬을 돌과 바꿔치기 해버리고, 가짜 구슬을 알리에게 주고, 그 알리의 구슬을 다 차지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관리자에게 가서 말하는 거죠. ‘봐요. 내가 저 친구의 구슬을 다 차지해서 가지고 왔습니다.’ 결국 알리는 자기가 믿었던 상우 때문에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오징어 게임이 센세에이션을 일으키는 이유는 그 일이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늘 만나는 현실인 거에요.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배신당하고, 믿었는데 나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들을 만나는 그 현실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그 모습을 보는 상황 가운데서, 늘 배신당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합니까? 정 주었지만, 배신당하고, 표를 주었지만 정치인들로부터 배신을 당하는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누굴 믿고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그 오징어 게임에 보면 또 다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지영이라고 하는 사람과 새벽이라고 하는 사람이 구슬을 서로 두 사람이 서로 경쟁을 해야 하는데, 지영이가 구슬을 따는 게임을 설계합니다. 설계하는데, 어떻게 하냐면 우리 구슬을 그렇게 쩨쩨하게 하나씩 둘씩 따먹지 말고, ‘한 번에 끝내버리자.’ 누가 저 벽에 제일 가까이 던지는가? 구슬을 던져서 제일 가까이 던지는 사람이 구슬을 다 빼앗는 것으로 하자 약속하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새벽은 구슬을 던져서 어느 정도 가까이 붙였습니다. 근데 그 지영은 그 구슬을 어떻게 이길까를 설계했던, 그 구슬을, 지영은 구슬을 잘 던져서 벽에 가까이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땅에 떨어뜨립니다. “내 구슬 네가 다 가져.” “너는 살아. 나는 살 이유가 없지만, 너는 살아. 그래서 엄마도 만나.” 이 오징어 게임에서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가 바로 그 얘기예요. 그런 엉터리 같은 크리스천들 말고, 정말 참된 복음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십니까? 바로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구슬을 다 내어준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신 그 주님께서 우리들의 모든 고통과 우리들의 모든 슬픔을 다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인 것이고, 그러기에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할 것이 아니라, 늘 감사하고 자랑하며 복음을 전하며 믿음으로 승리하며 살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살면서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실 때문에 부끄러워지는 세상으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아니 벌써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너, 교회 갔다 왔느냐?’라고 하는 말이 우리로 하여금 대답하기 힘든 말이 되는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그런 믿음의 고백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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