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은 없다 (롬 3:9-18)

성도 됨의 유익 (롬 3:1-8) +++ 자랑할 데가 어디냐? (롬 3:19-31)

한번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착한 것일까요? 아니면 악한 것일까요? 사람이 태어날 때 착하게 태어나는 것일까요?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게 태어나는 것일까요? 아니면 선하게도 악하게도 아니고, 그냥 중립적으로 태어나는 것일까요?

지금으로부터 2,300년 전에 살던, 순자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임순자 권사님 말고. 공자 맹자 등과 더불어서 유교의 사상가라고 널리 알려져 있는 순자라고 하는 사람이 주장한 바에 의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게 태어난다고 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본성적으로 악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것이고, 선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순자의 그 주장은 성악설이라고 부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난다고 하는 그런 주장인 것이죠.

하지만 그에 반해서 맹자라고 하는 사상가는, 맹자는 많이 들어보셨죠? 맹자라고 하는 사람은 주장하기를 사람이 태어날 때 선하게 태어난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선하게 태어나지만 ,점점 자라면서 주변의 환경 때문에 악하게 물들고, 주변의 여러 가지 영향 때문에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이니까, 맹자의 주장에 의하면, 그러니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하고,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해 주어야만 한다고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마 맹모삼천지교라고 하는 것이 나온 것 같아요. 맹자의 부모님이 맹자를 교육하기 위해서, 좋은 환경을 찾아 다니려고 했던 그런 이야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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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이 사람이 맞는 것 같고, 저 사람의 말을 들어보면 저 사람의 말이 맞는 것 같은데, 정말 사람은 그 본성이 원래 선한 것일까요? 악한 것일까요? 만일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악하게 태어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선한 마음을 갖게 되었을까? 만일 사람이 착하게 태어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디서 그렇게 악한 것을 배우게 되었을까? 어떻게 그런 일들이 생기게 되었을까? 쉽지 않은 문제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번 의견을 한번 물어볼까요? 사람이 태어날 때 악하게 태어난다. 한번 손 들어보실까요? 틀려도 괜찮습니다. 이거 정답이 없습니다. 예, 사람이 태어날 때 선하게 태어난다. 네. 선하게 태어난 자가 조금 더 많은 것 같은 것 같은데요. 정답은 모릅니다. 정답은 잘 모릅니다. 둘 다 일리가 있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사람이 정말 악해 보입니다. 정말 악한 것이 사람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심지어 아이들이라고 할지라도, 아이들이 정말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본능적으로 악한 모습들이 나오는 경우를 우리는 보게 되는 겁니다. 사실 아기들이 우는 이유가 뭐겠어요? 이기적이니까, 우는 거잖아요? 엄마가 힘든데도, 엄마 생각 전혀 하지 아니하고 우는 겁니다.

어떤 목사님이 자녀들이 셋이 있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아이들한테 말을 했습니다. 집안을 어지르지 말고, 깨끗하게 잘 해라. 놀 때 집안을 어지럽히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고 잠깐 한눈 팔고 돌아왔더니, 집안이 엉망징창이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한테 물었습니다. 집안을 좀 깨끗하게 유지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엉망진창을 만들어 놓다니, 왜 이렇게 엉망진창을 만들었느냐고 말하면서, 도대체 누가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큰 아이 두 아이가 서로 짜고 말한 것도 아닌데, 동시에 막내를 가리키면서 “쟤가 그랬어요.” 여러분 큰 아이도 막내를 가르치며, 둘째 아이도 막내를 가르치면서, “쟤가 어질렀어요. 쟤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어요.”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막내가 누구냐? 아직 돌도 지나는 간난아기 그 아이를 가리키면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그런 악한 마음이,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아이들의 모습에서부터 자연스럽게 나오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한 품성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정말 성악설이 맞다라고 하는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또 정반대의 예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는 정말 착한 품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불쌍한 사람들을 바라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어 있고요 선을 행하며 마음속의 기쁨이 솟아오르게 되는 것인데요. 그런 마음이 누구에게서 보이는가? 어린 아이들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이죠. 특별히 조그마한 꼬마 아이들이 정말 부모를 위한다고 부모를 배려해서 행동하는 그런 모습을 볼 때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여러분은 그런 깊은 감동을 받아보셨을 거라고 생각을 해요. 엄마가 아빠가 자녀들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 주는데,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하나가 부모의 마음을 정말 감동시킨 그런 적이 있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 꼬마의 입에서 엄마를 생각하는 말이 나올까? 어떻게 저 꼬마의 입에서 아빠를 생각하는 말이 나올까? 정말 감동을 받을 때가 있는 겁니다.

저도 예전에 한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우리 아이, 큰 아이가 3살도 안 됐을 때였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부부 싸움을 저희가 한참 많이 했습니다. 제가 막 화를 내면서 막 싸우고 있을 그때에, 세 살도 안 된 그 꼬마 아이가 저를 향해서 하는 말이, “아빠, 엄마에게 화내지 마. 차라리 나한테 화내.” 제가 거기서 충격을 먹어가지고, 그 앞에서 너무나도 부끄러워서 정말 안절부절하지 못한 그런 때가 있었고, 그 아이를 보면서 어떻게 이 아이의 마음 가운데 이런 마음이 이런 착한 마음이 있을 수 있을까? 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럼 성경에서는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 보면 “의인은 없다”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들이 다 사악하고 독을 가지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열린 무덤과 같고, 모든 사람들이 다 타락해 버렸다고 하시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다 악한 사람들이오. 다 나쁜 사람들이고 죄인들이라고 하는 말씀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성경에는 이런 말씀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어느 한 구절만 볼 것이 아니라 다른 구절들도 봐야 하는데요. 성경에 보면 이런 말씀도 있지만, 또 다른 말씀도 기록돼 있습니다. 어떤 말씀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들을 어떻게 지으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다고 하는 것,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서 하나님의 거룩함, 하나님의 의,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태어나게 해 주셨다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에도 두 가지가 다 등장하는 것이죠.

한편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요, 선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인 것처럼 이야기해 주는 부분도 있고, 또 반대로 오늘 본문의 말씀에 기록한 것처럼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다 타락해 버리고, 다 저주와 악이 가득하고, 정말 악한 모습, 의인이 한 사람도 없다고 하는 그런 말씀도 동시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3장 9절에서부터 18절의 말씀은 구약 성경 시편 14편과 또 여러 성경 구절들을 묶어서 그래서 전달해 주고 있는 말씀인데요. 이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다고 하면 의인이 없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죄인뿐이고, 이 세상에 타락한 인생들뿐이라,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말씀을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인간이 전적으로 악하기만 할 뿐, 선한 모습이 하나도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느냐? 사람이 전부 의인이 없고, 전부가 다 죄인이라고 선언해 주고 있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될 것은, 그러니까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냐라고 질문을 던진다고 한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선한 일을 하기도 하고, 의로운 일을 할 수가 있고, 그래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지, 성경에 보면 수많은 의인들이 등장합니다. 실제적으로 수많은 의인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들을 꼽을 수가 있을까요? 노아를 꼽을 수가 있겠습니다. 노아에 대해서 창세기 6장 9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의” 어떤 자라?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이었다고 창세기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노아 시대 때의 사람들은 전부 다 타락해버려서, 그래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들이었지만, 그런데 노아라고 하는 사람은 그 당시 사람들과는 달리 의인이었고, 완전한 자였고 하나님과 동행한 자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욥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욥에 대해서 성경은 뭐라고 기록하냐면, 동방의 의인이라고 기록합니다. 욥이 어떤 사람이었는가? 온전한 사람이었고, 정직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고, 악에서부터 떠나 있는 자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요? 이 사람의 행동이 의의 길을 걸어갔다는 이야기에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어간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요.

에녹이라고 하는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생토록 하나님과 동행해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어, 그가 이 세상에 더 이상 잊지 않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에 대해서는 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까? 모세는 그 온유함이 지면에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더 뛰어난 정말 인자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로마서 3장의 말씀을 읽으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그러니까 이 세상에 모두 다 나쁜 놈들만 있다고 하는 그런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의로운 사람들이 있는 것이고, 선을 행하고 있는 것이고, 선한 일을 행하는 모습들을 성경에서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실 우리 주변에도 많아요. 많지 않습니까? 많아요.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을 볼 때마다, 늘 고개가 숙여지고 늘 감동을 받습니다. 참 믿음의 사람이로구나! 정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구나!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로구나! 정말 주를 위해서 헌신하려고 하고, 주를 위해서 정말 봉사하려고 하고 정말 믿음을 보여주는 그 모습 볼 때마다, 제가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는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오늘 로마서 3장 9절에서부터 18절의 말씀에서,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실제적으로 성경에 의인들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고 우리 실제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의로운 사람들 정말 선한 사람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그런데 의인이 하나도 없다라고 부정적으로 말씀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의를 하나도 행할 수 없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 모습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정도로 완벽한 자리에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의로운 것처럼 보였는데, 사실 드러나지 아니한 많은 부분들에 더러운 모습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죠. 깨끗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뒷면에 추한 모습들이 숨겨져 있는 것이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내가 의인입니다” 하면서, 자신의 의의와 공로를 내세워서 하나님 앞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면, 너무나도 창피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의미에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모세만 해도 그렇습니다. 조금 전에 제가 구약 성경에 나온 여러 의인들 정말 완전하게 행동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몇몇 사람들을 열거했었는데요. 그중에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모세만 해도 그렇습니다. 모세는 완벽한 사람이었는가 했을 때 완벽한 사람이 아닌 겁니다. 한 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야, 너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서 반석을 명하여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해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물을 마시게 하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세는 그 하나님의 명령을 들은 다음에 마음속에 화가 치밀어 올랐던 것 같아요. 이스라엘 민족이 늘 불평하고 원망하는 그 모습에 너무나도 실증이 나고 짜증이 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 앞에 서서 분노하면서 말을 했습니다.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하면서 반석을 두 번 내리쳤는데요. 그 일을 보신 우리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해 주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민수기 20장 12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내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모세가 합격이라는 얘기입니까? 불합격이란 얘기입니까? 불합격이라고, 그 훌륭한 모세가 하나님 앞에 불합격이었다 말씀하시는 거에요.

다윗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파렴치범이었습니다. 너무나도 잘 아는 것이죠.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아내의 남편을 전쟁터 최전방에 보내서 교살하는 정말 파렴치범 중에 정말 악한 파렴치범이었던 것입니다. 한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있었던 그 다윗이었지만, 그가 완벽한 사람이었는가? 완벽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파렴치범이었고 그는 너무나도 자격 부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마음 가운데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짓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역대상 22장 8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피를 심히 많이 흘렸고 크게 전쟁하였느니라. 내가 내 앞에서 땅에 피를 많이 흘렸은 즉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한마디로 넌 불합격이다. 이 말씀이에요.

우리가 의롭게 보이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 사람들끼리 서로 비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노아 시대 때 살던 그 수많은 악한 사람들에 비하면,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던 겁니다. 사울 왕에 비하면 다윗은 그런 대로 깨끗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부족한, 한참 흠이 많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뭔가 조금만 잘하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대단해 보입니다. 어렸을 때 우리 아이들은 저를 보면서 마치 아빠가 슈퍼맨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아이들에 비해서 제가 다 잘하거든요. 뭘 해도 다 잘하니까, 우리 아이들이 봤을 때는, 아빠가 정말 뭐든지 다 잘 해내는 것 같아요. 아마 성도님들 가운데는 저를 생각하면서, 자꾸 우리 목사님은 컴퓨터를 기가 막히게 잘한다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실제로 제가 조금 하긴 해요. 하긴 하는데 그래서 컴퓨터를 못 하는 사람들이 보면 정말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정말 형편없는 실력이거든요. 그런데 정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대단해 보여요.

우리 자녀들이 휴대폰을 가지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하는 걸 보면, 우리 아이들 우리 손주들이 정말 휴대폰 박사처럼 생각이 되지만 사실은 별거 아닙니다. 우리들보다 하나 더 알고 있는 것뿐이죠. 누군가 성경을 조금 알고 있고 조금만 암송한다고 하면, 굉장히 많이 아는 것처럼 생각이 들고, 아마 구약 성경을 통통 전부 다 외우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정말 우리가 우리끼리 서로 비교하다 보니까, 거룩해 보이고 좀 더 나아 보이고, 저 사람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저 사람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 앞에 보면 더러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죠.

종종 우리 성도님들은 목사님들을 바라보면서, 목사님은 정말 대단한 그런 신앙을 가진 아주 거룩한 분이라고, 그렇게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는데요.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곳에 서 있는 이유는 제가 이곳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저의 더러운 모습을 못 봐서 그래요 안 들켜서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기적이고 탐욕적인 것들이 드러나지 않고 숨겨졌기 때문에 서 있는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된다고 한다면, 그 누구도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지금 죄를 짓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그런 대로 깨끗한 것처럼 보이지만, 왜 우리에게는 깨끗한 것처럼 보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뇌물죄를 지으신 분 계십니까? 손 들어보세요. 아마 대부분 안 지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왜 앉지었을까요? 뇌물죄를 왜 지었을까요? 아무도 나에게 뇌물을 갖다 주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뇌물을 내가 받게 되는 위치에 서게 되면, 우리는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다윗처럼 간음할 수 있는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간음을 하게 되는 것이죠. 자신의 더러운 죄를 숨기기 위해서 충성스러운 부하를 죽이는 일에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타락한 인생이기 때문에, 우리가 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저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든지 제가 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전제하고, 그래서 그나마 조심하는 편입니다. 성적인 문제로 인해서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그런 상황들을 피하려고 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어떤 여인과 함께, 제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단둘이 차를 타고 간다든지, 식사를 둘이서만 한다든지, 아니면 둘이만 상담을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불편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고 무던히 조심합니다. 젊은 청년이라고 할지라도, 그 여자 형제를 단둘이 제가 만나는 시간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오해 받는 것도 문제일 뿐만 아니라, 오해를 넘어서 우리에게 기회가 주어지면, 죄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 것이지, 죄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면, 다윗이 무너졌는데 우리가 왜 안 넘어지겠어요? 가롯 유다 같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가 무너졌는데, 왜 우리가 안 넘어지겠어요?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누군가 저에게 돈을 맡기면 제가 맡지 않으려고 해요. 왜냐하면 결국 기회가 주어지면, 언제든지 쓰러질 수 있는 탐욕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존재들인가? 늘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고, 늘 숨겨져 있지만 우리 마음 가운데 그런 사악한 심성들이 들어있기 때문에, 오늘 성경은 단호하게 네 설명하는 겁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한 번은 예수님 앞에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끌고 왔습니다. 당시 유대 율법에 의하면 그 여인은 돌을 들어 던져서 쳐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여인을 죽이기 위해서 의기양양하게 예수님 앞에 물었습니다. 예수님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율법에는 돌로 쳐서 죽이라고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런 질문들 앞에서, 살기 등등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아니하시고 땅에 엎드려서 무엇인가를 적기 시작했습니다. 뭘 적었는지 성경은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목사님들은 추측하기를, 예수님께서는 그 땅에 엎드려서, 거기 왔던 사람들의 죄를 하나씩 하나씩 땅에 적었지 않았을까라고 추측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건 그분의 추측이지 무엇을 적었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땅에 무엇인가를 적고 계실 때 사람들이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님, 이 여인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 말씀을 듣자마자,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양심이 찔렸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순간, 자기 자신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놓았던 죄가 드러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나도 똑같은 죄인이구나. 저 여인만 죽일 죄인인 줄 알았는데, 나도 똑같은 죄인이로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죠. 마치 어두운 방 안에 한 줄기 빛이 비치면 그 안에 가득 들어있는 먼지가 다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 빛이 사람들의 심령 가운데 비추게 되니까,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죄가 환하게 드러나고, 나는 괜찮은 줄 알았는데, 나도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사람들이 하나씩 둘씩 다 흩어져 버리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8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그런 귀한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내가 이 자리에 앉아서 예배 드리는 것으로 나는 거룩한 사람이고, 나는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기도하고, 나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하는 것 때문에 나는 그런 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으셨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오. 나의 능력으로는, 내 공로로는 아무런 가망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는 누구를 찾으셨는가? 죄가 많은 사람들을 부르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의인에게는 의사가 쓸 데가 없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쓸 데가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죄가 많은 사람들을 불러서 우리 주님께서 그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지심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들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나의 장점들을 보이면서 삽니다. 깨끗한 옷, 화려한 옷 그리고 멋지게 단장해서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며 삽니다. 하지만 그런 보이는 것과는 달리, 우리들이 말하지 않고 감추었던 그 부분에는 우리의 실패와 우리의 죄악과 우리의 더러운 모습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소망은 예수님께서 그런 더러운 모습, 실패자의 모습, 아빠로서의 실패자, 엄마로서의 실패자,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실패자, 하나의 성도로서의 실패자들을 우리 주님께서는 너 같은 놈 쓸 데 없다 하고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내가 너의 아픔 때문에, 내가 너의 고통 때문에, 너희들의 실수 때문에, 너희들이 쓰러진 바로 그것을 주님께서 치유하기 위해서, 우리들의 연약함을 다시 회복시키시고 이 더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던 우리의 인생을 회복시키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고 저와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주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기만 하면 그 주님의 은혜로 저와 여러분들이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회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혼자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그 더러운 모습 실패한 모습 때문에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나의 이 연약한 모습을 주님 앞에 내어놓고 내 힘과 노력으로는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나, 주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믿음으로서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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