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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많으면 (잠 10:13-21)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잠 10:6-12) +++ 회오리 바람 (잠 10:22-32)

오늘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읽었는데, 오늘 읽은 잠언서의 말씀은 주제가 하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두 마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요약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아요.

어떤 주제들이 있는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본다고 한다면, 우선은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13, 14절 그리고 18, 19, 20, 21절에서, 지혜롭게 말하는 것과 지혜롭지 못한 방법으로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요. 두 번째 주제는 무엇이냐면, 15절에 나오는 “재물과 궁핍”에 관한 주제입니다. 세 번째 주제는 “의인과 악인”을 대비시킨 이야기가 16절과 17절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주제들이 하나로 일관적으로 쭉 흐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이 세 가지 주제들이, 좀 더 나눈다고 한다면 더 많은 주제들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이 세 가지 주제들이 여기저기 섞여서,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 가지 주제들을 중심으로 해서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악인과 의인”에 대한 대비의 말씀을 살펴보고 싶은데요. 16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죄 이르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소득이 죄에 이른다고 하는 그 말씀은 의인의 수고가 생명에 이른다는 것에 반대의 말씀이니까, 죄에 이른다고 하는 말의 의미는 곧 죽음에 이른다고 하는 의미로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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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한다면 의인의 수고가 생명에 이른다고 했는데, 그러면 의인의 수고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반대로 악인의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종종 생각할 때, 늘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동화를 많이 읽었기 때문이고,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들을 많이 보아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런 동화책이나 소설이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악인이 있고 의인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대체로 의인이고, 그리고 그 의인에 반대되는 역할을 하는 악인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죠. 왜냐하면, 누구를 미워해야 하고, 누구를 사랑해야 될 것인가가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마음이 편한 겁니다.

콩쥐 팥쥐의 이야기에서 누가 착한 사람이죠? 콩쥐가 착한가요? 팥쥐가 착한가요? 콩쥐입니까? 아무튼 둘 중에 하나가 착하고, 둘 중에 하나는 나쁜 겁니다. 신데렐라와 그의 다른 배다른 언니들이 있다고 한다면, 신데렐라는 착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악한 겁니다. 드라마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우리가 늘 보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주인공이 있고, 그 악역이 있고, 의인이 있고, 그리고 나쁜 사람이 등장하는 그런 이분법적인 사고에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늘 생각하기를 의인이 따로 있고 악인이 따로 있다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다윗은 의인이고, 사울은 악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르고, 악인의 소득은 주에 이르느니라. 즉 멸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이 말씀을 읽을 때, 우리의 생각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어떤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결국 그 의인은 생명의 길로 가게 될 것이지만, 어떤 악인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악인은 결국 망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늘 우리가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을 바라볼 때도,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들은 좋은 정치인이지만, 내가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아주 나쁜 정치인이라고, 아주 사악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같이 좋게 지나다가도, 그 사람이 정말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에 잘못하게 되면, 저 사람이 의인이 아니라 악인이구나라고, 낙인 찍어버리고, 더 이상 그 사람은 의인이 될 수가 없는, 나쁜 사람의 범죄 속으로 집어넣어 버리면, 그 사람이 무슨 짓을 해도, 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그런 이분법적인 경향들이 우리들에게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으면서, 의인의 수고는 생명에 이른다.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른다라고 하는 말을 할 때, 그것은 이 사람이 의인이냐? 악인이냐?를 생각하고, 그렇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좋은 결과를 맺게 될 것이지만, 저 사람은 나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식으로 이해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인 관점은 정당한 관점이 아닙니다.

다윗이라고 하는 사람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게 되면, 다윗이 항상 의로웠느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한때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다윗이 사울보다도 더 사악하게 행동한 적도 있는 것이죠. 사울왕도 나쁜 왕이지만, 그 사울이 항상 나빴던 것만은 아닌 것이죠. 사람은 누군가? 사람은 우리가 쉽게 이 사람은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고,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쉽게 레이블을 붙여서, 색깔을 칠해서,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이 사람은 나쁜 사람, 저 사람은 아주 더러운 사람, 이 사람은 아주 거룩한 사람, 그렇게 레이블링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죠.

우리가 정말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면, 쉽게 어떤 한 사람을 색깔을 칠해버리는 것이죠. 저 사람은 빨간색, 저 사람은 파란색이 돼버리고, 그래서 그 사람을 그렇게 판단해 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겁니다. 그건 아주 유치한 일이 되고야 말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의인의 수고라고 하는 것은,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들의 수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법대로 따라서 얻는 수고를 의미하는 것이고요. 악인의 소득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어떤 사람들, 나쁜 사람들의 소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서 악한 방법으로 무엇인가를 얻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악한 소득이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16절의 말씀을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한다면, 그것이 곧 생명의 길이겠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악한 길로 간다면, 그 길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으로 이해하고,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은,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된다는 말씀입니까?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하면서 수고해야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절의 말씀도 역시 같은 의미의 말씀입니다. “훈계를 지키는 자는 생명길로 행하여도, 징계를 버리는 자는 그릇 가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훈계를 잘 듣고, 지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걸어가는 자가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채찍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끝끝내 저버리고 악한 길로 간다면, 그 길은 망하는 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주제는 15절 말씀 가운데 있습니다. 15절 말씀에서는 “재물과 궁핍”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요.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이 재물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좀 잠깐 당혹스러움을 느끼신 분들이 계십니까? 어떤 분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아마 불편하게 느꼈을 분들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재물에 관련된 성경의 말씀에서 우리가 주로 듣는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를 듣냐면, 재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부정적인 이야기를 합니까? 성경에서 성경에서 우리가 종종 듣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면, 재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듣습니다.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 너의 소유를 의지하지 말라. 등등 재물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표현들이 성경에 많이 나와 있는데, 오늘 잠언서의 말씀은 재물에 대해서 어떤 종류의 메시지를 전해 주냐면,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아마 예상치 못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부자의 재물이 무엇이냐? 견고한 성과 같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그런데 가난한 자가 궁핍한 것은 무엇인가? 멸망을 당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재물이 좋다는 얘기입니까? 나쁘다는 얘기입니까? 좋다는 얘기예요.

좋다고 하는 이야기를 잠언서에서 읽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당혹스러워 할 수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재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을 찾아왔던 젊은 관원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21절의 말씀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온전하고자 할진데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렇게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 젊은 관원을 향해서, 그 정도 신앙생활 가지고는 안 되니까, 어떻게 하라는 얘기예요? 가지고 있는 재물들 다 갖다 내버리라고 말씀해 주신 겁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는데요. 마태복음 6장 24절의 말씀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기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재물은 버려라.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다 잡을 수 없고, 하나님과 재물을 둘 다 다 섬길 수 없고, 하나님을 선택하려면 재물을 버려야, 하나님이 선택이 되는 것이지, 재물을 가진 채로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말씀들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냐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신앙의 거추장스러운 것이고, 신앙인들이라고 한다면,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던 최영 장군의 그 말씀처럼, 우리가 물질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재물은 내가 그냥 내버리고 오로지 주님만을 선택해야, 불교에서 말하는 식으로 무소유의 삶을 목표로 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목표가 아니겠는가? 정말 가난한 삶, 정말 지족하는 삶, 정말 내가 이 세상에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난하게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상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말씀들입니다.

실제로 우리 기독교 역사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그래서 모든 재물들을 다 내버리고, 그저 청빈의 삶을 사는 것이 가장 고상한 것이라고 생각한 경우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불교처럼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그게 진짜 신앙이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도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분들도 있기는 있으나, 사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본다고 한다면 그런 의미의 가르침이 성경적인 가르침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의 교훈을 보자고 한다면, 성경 전체에서 가르쳐주시는 재물에 대한 관점이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으로, 이 세상의 것들을 우리가 누리면서 하나님을 만끽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즐기는 방법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깨닫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허락해 주신 것을 마음껏 누리면서, 이 세상에 그 아름다움과 그 위대한 것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그 삶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방편이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해서 그래서 선한 열매들을 많이 거두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내 힘과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섬기는 가운데 열심히 수고하며 애쓴 자에게는 재물이 따르게 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삶을 윤택하게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견고한 성처럼 우리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된다는 게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고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며 살아가고 게으르게 살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가난이 따르게 되고, 결국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한편에서는 재물에 대해서 잠언서 10장 15절의 말씀처럼 재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반면에, 또 한편에서는 재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이야기를 동시에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들에게 견고한 성이 되기 때문에, 이 견고한 성이 되는 이 제물을, 그것으로 그냥 재물의 위치를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그 재물을 그 재물의 위치에서부터 높여서, 우상의 위치로 올려버릴 때 문제가 되는 것이죠. 재물이 견고한 성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그런 견고한 성과 같은 재물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못하는 겁니다. 제대로 열심히 노력하지도 않고, 수고하지도 않고, 내가 정말 하나님께서 주신 방법대로 열심히 일할 수 없으니까, 일하지 못하니까, 결국은 궁핍이 오게 되어 있는데, 그런데 제물은 갖고 싶으니까, 어떠한 방법을 쓰는 겁니까? 잘못된 방법을 쓰는 것이죠. 사기와 도둑질과 빼앗는 것과 또는 우상숭배와 요행 등을 통해서, 그러한 재물들을 얻으려고 하는 시도를 하게 되는데, 그것은 왜 그런 잘못된 방법을 통해서 시도하게 됩니까? 재물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리면, 그런 잘못된 방법을 시도하게 되는 것 뿐만 아니라, 재물이 나에게 우상이 되어 버리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그 재물들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며 살아야 하는데, 사랑을 베풀지 못하며 사는 겁니다.

주를 위하여 헌신하며 살아야 되는데, 주를 위해서 사용할 수 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 물질을 더 많이 얻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착취하고,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갑질을 해대며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이기적으로 탐욕적으로 그래서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 하는 잘못된 방법을 쓰게 되는 것인데요. 그것이 바로 재물이 우리들의 우상으로 변해버리는 잘못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너의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다시 한 번 질문해보라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냐? 아니면 재물이 하나님이냐? 너의 신이 누구냐를 물어보는 것인데요.

오늘 15절의 말씀에서는 그런 잘못된 방식의 재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 가운데 내가 성실하게 일하고 성실하게 노력하고 바른 방법을 통해서 재물을 얻고 부자가 된다고 한다면, 그것이 곧 견고한 성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부자의 재물은 그의 견고한 성이요. 가난한 자의 궁핍은 그의 멸망이니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결론을 내려야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해서, 이러한 견고한 성을 얻기 위한 정당한 노력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결심을 해야 되는 거에요. 그런데 악한 사람은 어떤 결론을 내립니까? 견고한 성이 되니까, 재물이 견고한 성이 되니까, 속여서라도 내가 더 많이 가져야 되겠다. 공금을 내가 횡령해서라도, 내가 이 재물을 가져야 되겠다.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내가 이것을 가져야 되겠다. 당연히 사랑해야 될 이웃을 향해서 베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될 것까지도 내가 내 것으로 쓰면서, 나의 욕심을 채워야 되겠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어져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주제는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3, 14절과 18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입니다. 13절 14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명철한 자의 입술에는 지혜가 있어도,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13절 14절의 말씀을 요약한다고 하면, 우리가 말할 때 어떻게 말해야 된다는 건가요? 지혜롭게 말해야 된다는 겁니다. 어리석게 말하고 미련하게 말하면, 결국 고통스러울 것이고 멸망을 맛보게 될 것이니까, 지혜롭게 말해야 된다고 하는 것이 13절 14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일까요? 18절에서 그 대답을 해주고 있습니다.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니라”라고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자, 미움을 말하지 않고, 그 미움을 감추고 있으면, 그 입이 어떤 입술이라고요? 거짓된 입술이다라고 말씀해 주면서, 그런데 미워하고 중상 모략하고 비난하고 하는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어떤 사람이다? 미련한 자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을 하라는 얘기입니까?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까? 말을 안 하면 거짓된 입술을 가지는 자가 되는 것이고, 말을 하면 미련한 자가 되는 것인데, 말을 해야 됩니까? 말을 하지 말아야 됩니까? 무슨 얘기냐 하면, 아예 미움을 품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아예 나쁜 마음을 품지 말라는 것이죠.

문제는 우리가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아니라, 지금 지혜롭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오늘 잠언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혜롭게 말을 하려고 해야 되기 때문에, 내가 미워하는 말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중요할 거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을 향해서 18절에서 해 주는 말씀이 뭐냐면, 미워하는 말을 감추고 있으면, 거짓 입술이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미워하는 말 중상하는 말을 해버리면 그 사람은 미련한 자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러니까 사실은 말보다도 더 중요한 게 무엇이라고 하는 의미입니까? 우리들의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있는 거죠.

미워하는 말을 안 하면 좋겠지만, 안 하면 좋겠지만, 그러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무엇입니까? 아예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죠. 지혜롭게 말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갖는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쌓은 선에서부터 선한 말을 하게 되고, 우리가 쌓은 악에서부터 악한 말을 하게 되어 있는데(마 12:35), 만일 우리가 악한 것을 마음속에 쌓은 상태에서 그 악한 것을 쌓았기 때문에 결국은 그 악한 미움의 말이 입으로 나올 수도 있고 안 나올 수도 있는데, 말을 한다면 미련한 자가 되는 것이고, 말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는다고 한다면 그 입술은 거짓된 입술이 되는 것이니까, 사실은 18절에서 우리들에게 권면해 주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말을 나쁜 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전에 나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그러니까 말을 많이 하라는 얘기입니까? 말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까? 말을 하지 말라는 얘깁니까? 침묵이 금입니까? 아니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가 지에 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19절의 말씀은 그러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어라가 아니에요. 말하지 않는 게 최고다가 아니에요. 침묵이 금이다가 아니에요. 여기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이야기는 무슨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입니까? 나쁜 말이죠. 미움의 말이죠.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이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말이고, 중상 모략 불평하는 말, 지적하는 말, 상대방의 약점을 드러내는 말,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말, 그런 말들을 많이 하면 어떻게 된다? 허물을 면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을 안 해야 된다고 결론을 내리시면 성경을 잘못 읽으신 겁니다. 말을 안 하는 게 좋은가요? 아니요. 입은 말하라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입을 만들어주신 이유는 말하라고 입을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런데 어떤 말을 해야 되는 겁니까? 무슨 말? 사랑의 말을 해야죠! 사랑의 말을 침묵하고 있는 게 금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하는 게 금이에요. 침묵이 금이 아니라, 사랑의 말을 하는 것이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 것이죠. 여기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고 하는 얘기는, 나쁜 말, 불평하는 말, 비난하는 말, 상처 주는 말, 그런 말을 하면, 허물을 면하기 어렵다는 말이지, 좋은 말도 안 하는 것도 좋다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좋은 말은 어떻게 해야 돼요? 해야 돼요! 해야 돼!

좋은 말이 없어서 사람들이 쓸쓸하게 있는 겁니다. 좋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들이 기운이 축 쳐져 있는 겁니다. 칭찬하는 말이 사라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돼요? 좋은 말을 해야 되는 거에요. 좋은 말을, 칭찬하며 격려하고 감사하는 말,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해야 되는 거예요. 말을 많이 해야 되는 거예요. 말을 안 하는 게 대수가 아니라, 나쁜 말은 하지 않아야 되지만, 좋은 말은 자꾸 자꾸 이야기를 해줘야 된다. 왜? 잠언서 25장 11절의 말씀에,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믿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와 같은 말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을 할 때 돌아봐야 되죠. 과연 이 말이 칭찬과 격려와 감사와 기쁨의 말인가? 아니면 좌절하게 만들고, 우울하게 만들고, 용기를 잃어버리게 만들고, 분노하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을 쓰러뜨리는 그런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내가 이 말을 하면 우리 며느리의 마음에 못을 칠 말인가? 생각해보세요. 생각해봐요. 이 말을 하면 우리 아이가 좋아할 말인가 생각해 보세요. 생각해 봐요. 내 마음속에 있는 그 말을 그냥 내뱉어버리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말을 했을 때 이 말을 내 며느리가 듣는다면 이 말을 내 친구가 듣는다면 기분이 좋을 말인가? 기뻐서 행복해야 할 말인가? 힘이 날 말인가? 아니면 무너뜨리고 쓰러지게 만드는 말인가를 생각해 보란 말이에요.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말이 경우에 합당하지 않아서 썩은 사과와 같은 그런 말들을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가장 사랑하고 돌보고 아껴줘야 될 우리 가족들을 향해서 왜 그런 나쁜 말을 해요?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에게는 지혜가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말하기 전에 직접 내 말을, 안 듣는다고 해서 내 말이 그 사람한테 안 들어갑니까? 반드시 들어가게 돼 있어요. 반드시. 반드시. 내가 이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이 사람의 귀에 대고 이야기 안 하고, 이 사람한테만 얘기하면 안 들어가는 게 아니고, 반드시 돌고 돌고 돌아서 들어가서 그 사람의 가슴에 상처를 꽉 내버리면, 비수를 꽂아버리는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데 그게 누구예요? 우리 권사님들이 그러면 안 된단 말이에요.

사랑의 말을 해야지, 사랑의 말을, 내 말을 듣고 행복해야 할 말, 정말 지쳤던 아이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말 용기를 줄 수 있는 말, 열심히 달리는 사람, 힘이 쫙 빠지게 하는 말이 아닌, 힘들어서 지친 자가 그래 다시 한 번 일어서서 “한번 해보자” 라고 하는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랑의 말들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침묵이 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이 입술로 사람들을 세워내는 귀하고 복된 생명의 삶을 만들어내는 그런 입술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말하기 전에 생각해봐요. 말하기 전에 생각해 봐요. 20절 말씀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 의인의 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인의 혀는 좋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혀가 아니라, 감사의 말, 칭찬의 말, 격려의 말, 위로의 말, 사랑의 말이 의인의 혀인 것이고, 의인의 혀가 아닌 것은 중상과 비방과 모략과 불평과 비난의 말이에요. 그런 의인의 혀는 순은과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악인의 말은 가치가 적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1절 말씀 “의인의 입술은 여러 사람을 교육하나 미련한 자는 지식이 없어 죽느니라.” 의인혜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겁니다. 지쳐 있는 자에게 용기를 북돋어주는 겁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그리고 부모님과 자식들이 가장 사랑해야 될 그런 우리 대상들이 서로가 서로를 향해서 중상과 비방과 불평과 모략과 비난의 말들을 해대다가 결국 가정이 깨어지고 맙니다. 되돌릴 수 없는 그런 엄청난 상처들을 주고 맙니다.

그런 지혜롭지 못한 인생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가야 할 겁니다. 주님 제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을 찢어놓는 말이 아니라, 정말 살릴 수 있는 회복시켜줄 수 있는 내 말을 듣고, 기뻐할 수 있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말을 하게 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됩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 66권을 통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씀해 주셨어요. 사랑의 말을 하시고, 믿음의 말을 해주시고,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신 그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입술도 주님을 닮아가서,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의 말을 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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