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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 (잠 12:20-21)

20절 말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꾀하는 자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 속임이 있다고 하는 것인데요. 사람들이 악을 꾀하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우리는 선이 아닌 악을 꾀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생각에서 일 겁니다. 정당하게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이득을 얻기 위해서 악을 꾀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재물이나 권력이나 이런 것들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렸을 때,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죠. 재물이라고 하는 것, 그리고 권력이라고 하는 것, 우리에게 유용한 그 모든 것들은 사실은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일 뿐이고, 그것은 많이 있든 적게 있든, 그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을 가지고 사용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수단에 불과한 것이 재물이오. 또한 권력이고, 힘이고, 그 모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너무나도 유용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은 그 재물이나 권력이나 이런 것들을 갈망하게 되는 단계까지 올라가게 되는 것이죠. 이런 재물이나 권력이나 이런 좋은 것들을 우상의 수준에 놓고, 그것을 얻기 위해서 갈망하는데, 그것을 정당한 방법으로 얻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우니까, 악을 행하면서까지 얻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악을 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 근본적인 동기가 무엇인가를 분석해 본다고 한다면, 그 마음 가운데 이 재물이라고 하는 것이 우상화되어 버렸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동기가 아니더라도, 사악한 생각으로 이웃에게 해를 끼치려고 할 때도, 이런 일들이 일어나죠. 악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부당한 이득을 얻기 위한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미워하는 마음, 시기하는 마음, 질투하는 마음, 멸시하는 마음, 이런 악한 마음들이 있을 때에, 우리 이웃들을 향해서 악을 끼치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면서, 악을 행한다고 하면, 그게 결코 우리들에게 유익하지 않아요. 미움과 시기와 질투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행동들은 우리에게 유익이 끼쳐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손해가 끼쳐지는 것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라도, 이웃에게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인데요. 그리고 그런 악을 행하면서 속임수를 쓰게 되는 것인데, 역시 이것도 우상숭배와 우상숭배와 같은 것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우상이 되고, 쾌락이 우상이 되고, 이기적인 마음이 우상이 되어 버릴 때, 그럴 때 결국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죠.

그럼 누가 악을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상을 섬기지 않는 자가 악을 행하지 않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참되신 하나님을 나의 주로 모시고 섬기는 자는 악을 꾀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고 한다면, 선을 베푸는 것이 당연하고,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이웃을 향해서 사랑하는 게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종종 사탄의 유혹에 넘어갈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권고한 사람이로다.”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우리 모두는 다 죄성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이 아닌 것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품으면서, 악한 이익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미워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증오하고 멸시하는 마음 때문에, 이웃들에게 악을 행하는 일들이 많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결국 그렇게 이웃에게 악을 행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모습이 무엇이냐면, 속임수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우리들이 행하는 입술의 그 표현들을 스스로 진단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내가 지금 나의 입술을 통해서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거짓과 속임수가 내 입에서 나오는지, 우리 자신의 입술을 진단해 보아야 되고, 그러한 진단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서 거짓이 있고 속임수가 나오고 하는 그런 모습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서부터 떨어져 있고, 멀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자각하고, 회개하며, 하나님 앞에 다시 돌아오게 되는 그런 놀라운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절 하반절에서는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희락이 있는가?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 희락이 있다고 표현해 주고 있는데요. 도대체 화평을 “의논”한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일까요?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 기쁨이 있다. 희락이 있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화평을 의논하는 것일까요? 화평에 대해서 “토론”한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우리나라 한국말 번역이 조금 약간 아쉬운 번역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왜냐하면 화평을 의논하는 자라고 하는 그 번역 자체가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우리들에게 쉽게 그 의미를 전달해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한번 히브리어 원문을 한번 바라보죠.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가면서 읽는 것인데요. “레 요아체 샬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레 요아체 샬롬”이라고 하는 말은 명사로, “평화의 의논자에게는”이라고 하는 표현이죠. 그런데 이 “요에츠”라고 하는 명사는 여러 가지로 번역이 가능한데, 의논하는 자, 모의하는 자, 혹은 토기장이, 조언하는 자 등등으로 번역이 가능한 겁니다. 그러니까 “평화의 의논자”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평화를 의논하는 자에게 희락이 있을 것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그렇게 번역하기보다는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평화를 도모하는 자는”이라고 번역을 해야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쉬운 것이죠.

평화를 도모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을 것이다. 의논이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평화를 도모하는 자, 평화를 추구하는 자, 평화를 구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을 것이다.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바른 번역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20절 전반부와 20절 후반부를 비교해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전반부는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라고 하는 말이고, 바로 그다음 문장이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라고 했는데, 여기서 “의논하는 자에게”라고 번역하는 것보다 “꾀하는 자”와 대비되어서, “화평을 꾀하는 자, 화평을 도모하는 자, 화평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느니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번역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악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어떤 일이 있는가? 그 마음에 속임수가 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그런데 악이 아닌 화평을 도모하는 자, 화평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무엇이 있을 것이다? “희락이 있을 것이다. 기쁨이 있을 것이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 문장이 대조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악이 뭐겠어요? 악이 무엇을 의미하는 거겠습니까? 나쁜 것인데, 화평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게 악이 악한 것이죠. 선과 악이 무엇인가? 악의 반대말이 선인데, 악은 무엇이고 선은 무엇인가? 사람들과 평화를, 샬롬이죠. 화평은 샬롬입니다. 샬롬, 평화를 누리려고 하는 자, 평화를 추구하는 자는 선한 자이고, 그 평화를 화평을 거부하고, 분쟁을 일으키고, 싸움을 일으키고, 나쁜 짓을 하는 자가 악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의 말씀 가운데서 해주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화평을 추구하는 자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화평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웃과 함께, 악하게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친절하게 대하는 것이죠. 어떤 일이 있을 때, 이웃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선하게 대응하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다 보면, 화를 내고 소리를 질러야, 그래야 내 권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만일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말하면, 우리의 권리들을 다 빼앗겨 버릴 것 같은 위기감 속에서 우리들은 살아갑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주로 화를 내는 이유가 뭐예요? 소리를 지르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소리를 지르면, 내 말에 귀를 기울여주고, 분노하면 벌벌 떨면서 우리에게 잘 대해주는데, 좋은 말로 하면 안 들어요. 친절하게 대화를 하면, 무시해버려요. 그러는 모습을 우리가 너무나도 많이 겪었기 때문에, 나의 권리와 내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는 악하게 대하고, 싸우고 분노하고 소리 지르고 갑질을 해야만, 그래야만 우리의 우리가 손해 보지 않고, 우리의 권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많이 들어있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우리 크리스천들은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웃들에게 악을 행하며 분노하고 갑질하고 소리 지르고, 그렇게 악하게 해서 내 권리를 찾는 것에는 기쁨이 없지만, 친절하게 대하고, 평화롭게 말하며 여유 있고 배려하는 그 모습이 오히려 기쁨이 넘치고 희락이 있을 수 있다고 하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였습니다. 처음 미국에 도착했을 때, 너무나도 신기했어요. 무엇이 신기했냐면, 모든 사람들이 운전을 하는데, 어쩜 그렇게 친절하게 양보를 잘해주는지, 문화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운전할 때는 늘 경쟁적으로 운전을 했고, 누가 내 앞에 끼어들면, 끼어들지 못하게 내가 먼저 머리를 집어넣으면서, 도무지 차 한 대도 끼어들지 못하게, 그렇게 바짝 붙여서 운전해서, 아무도 못 끼어들게 해서 승리하는 것이 그게 운전을 잘하는 거라고 생각을 하면서 운전을 해 왔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 들어갔는데요. 나한테 양보를 해주는 거예요. 좌회전 깜빡이를 켜고 서 있으면, 직진하던 차가 오다가 서고 손짓을 해요. 먼저 좌회전하라고 손짓을 해주는 거예요. 차들이, 계속 직진하는 차가 오면, 신호등이 없는 거리에서, 내가 좌회전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찾지 못해서 어떡할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지금 좌회전하려고 깜빡이를 켜고 있는데, 직진 우선권을 가진 직진차가 저 앞에서 멈춰 서면서 먼저 좌회전하세요. 그래 주는 거예요. 한 번 더 그런 대접을 받아 보지 못했던 제가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참 이상한 사람이로구나 했는데, 그 사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러는 거예요. 서로 먼저 가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끼어들려고 하면, 멈추어 서서 “먼저 들어가세요.” 양보를 해주는 거예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번 양보를 해봤어요. 양보를 해 봤는데, 놀라운 것은 내가 경쟁해서, 내가 아무도 양보 안 하고 끼어들지 못하게 하고, 운전을 기가 막히게 잘했을 때보다, 양보했을 때 느끼는 기쁨이 얼마나 얼마나 행복한지, 그 행복을 모르고 살았었는데, 양보하고 나니까,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너무나도 좋았어요. 어린아이들에게 양보하고, 장애인들에게 양보하고, 여성들에게 양보하고, 배려하고, 먼저 가라고 이야기하고, 문을 잡아주고, 그리고 식당에서 봉사하고 있는 웨이터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배려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줄 때, 오히려 내 마음 가운데 기쁨이 더 많이 솟아오르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윽박지르고 혼내고 싸움하면서 호통치던 것에 익숙해져 있던 제가, 그래서 승리했고, 내 권리를 찾아서, 내 권리를 찾았기 때문에 기뻤었는데, 그런데 그 기쁨을 능가해 버리는, 양보하고 친절하고 남들에게 배려해주고 도움의 손길을 내니, 밀어주고 사랑을 베풀어주는 데서 오는 그 기쁨과 즐거움은 그 어느 것에도 비할 데가 없는 기쁨이었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 거예요. 이게 너무나도 좋구나. 그런데 오늘 잠언서 12장 20절의 말씀이 바로 그런 말씀입니다. 화평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무엇이 있으리라? 희락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평화로 대하면,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고 배려하게 되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생기고 샬롬 평화가 생기는 것이죠.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렇게 샬롬으로 대하지 않고, 악하게 대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20절 말씀에서는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샬롬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악을 꾀하는 자에게는 어떤 결과가 올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그냥 마음속에 속임이 있다고만 말하고 있는데요. 그것은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속에 속임수와 거짓을 말하는 게 있다라고 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 아무것도 뭐 악을 행하는 자는 아무런 결과가 없나 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이 대구를 본다고 한다면, 악을 행하는 자에게는 그런 기쁨이 없다는 거예요. 악하게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조금만의 이득을 얻을 수도 있고, 조금만의 어떤 승리를 거둘 수는 있겠지만, 선을 행하는 자,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갖는 그런 기쁨 같은 것은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이고, 뿐만 아니라 속임이 있다고 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도 의미하지만, 사실은 그런 “속임의 결과를” 결과를 내가 받게 되어서, 고통스러움이 우리 마음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현은 속임이 그 마음 가운데 있다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을 풀어서 설명한다면, 사람들이 나를 도리어 속이게 되고, 그래서 그 속이게 된 결과로 인해서 슬픔과 고통과 분노 같은 것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않는 것이죠. 아담과 하와를 향해서 유혹을 하는 겁니다.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네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하와는 그 말을 듣고 선악과를 먹는 것을 갈망하기 시작했고, 그 선악과가 그 하와에게 우상이 되어 버렸고, 그래서 그 선악과를 먹기만 하면, 내가 하나님처럼 높아질 거라고 하는 기대감으로 선악과를 먹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우상은 우리들에게 약속한 것을 주지 않습니다. 눈이 밝아지는 것 같아서 약속한 것을 주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러나 눈이 밝아짐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벌거벗은 것만 알게 되었을 뿐, 하나님과 같이 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쫓겨나게 되고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악을 행하는 자는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악을 행하는 것인데 그들의 마음 가운데 우리가 악을 행하고 사람들에게 강하게 이야기하고 갑질을 하고 분노하고 화를 내면, 그러면 내 권리를 찾을 수 있어 있을 것이고, 내가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는 그런 우상의 속임 때문에, 그런 일을 하게 되지만, 그러나 그 마음 가운데 아무런 만족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고, 기쁨을 얻을 수 없다고 하는 점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따라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하나님 샬롬 화평을 추구하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서, 우리들의 삶이 나보다 연약한 자들을 향해서 갑질을 하고, 시비를 걸고 분쟁을 일으키는 그런 모습이라고 한다면, 회개하며 주님 앞에 돌아오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1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임하지 아니하려니와 악인에게는 앙화가 가득하리라.” 악인이 누굽니까? 악을 도모하는 자가 악인이죠. 그런데 그런 악인에게는 어떤 일이 생긴다고요? 앙화가 가득하리라. 앙화가 뭡니까? 재앙, 화, 이런 거잖아요? 재앙 같은 것들이, 화가 악인에게 가득하게 될 것이지만, 의인은 누굽니까? 의를 추구하는 자겠죠. 화평을 추구하는 자겠죠. 그런 화평을 추구하고 의를 추구하는 자에게는 어떻게 된다고요? 재앙이 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재앙이 임하지 않을 건데, 어떻게 임하지 않는다고요? 어떠한 재앙도 임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읽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연스럽게 질문이 떠오릅니다. 정말이에요? 아닌 것 같은데, 정말입니까? 아닌 것 같습니까? 의인에게 재앙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잖아요? 있잖아요? 의인이 고난을 당하고, 의인이 어려움을 당하는 일들이 실제로 우리들 가운데 있잖아요? 그런데 왜 잠언서에서는 의인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임하지 아니할 거라고 말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00퍼센트 완벽한 의인이라고 한다면 재앙이 없을 것이지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100퍼센트 완벽한 의인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재앙이 넘치는 거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우리가 더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성경에 보면 수많은 의인들이 있었는데, 그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의인들은 다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이라고 하는 사람은 동방의 의인이었는데, 그 욥은 정말 엄청난 고통 가운데 있었죠. 자식들도 잃어버리고, 재산도 잃어버리고, 그리고 온몸에 질병이 있어서 정말 고통 가운 데 지내서, 차라리 내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아니, 내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렇게 고통스러웠던 것이 욥의 모습이었습니다. 동방의 의인이었지만, 그에게는 엄청난 고통 엄청난 재앙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요. 다윗도 늘 사울의 칼날을 비하여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 했었던 것이고요. 요셉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요셉은 아무런 죄를 지은 것이 없지만, 그러나 그는 노예로 팔려가야만 했었고,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혀야만 했습니다. 의인에게 고난이 없는 게 아니라, 고난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시편 34편 19절의 말씀에 보면 “의인은 고난이 많다”라고 설명하고 있어요. 잠언에서는 “의인에게는 재앙이 없다”라고 얘기했는데, 시편 34편에서는 의인은 고난이 많다고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전서 4장 12절 13절 말씀에 보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냐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불 시험이 온다고 한다면, 불 시험이라고 하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엄청난 시험인데, 그런 시험이 왔을 때, 안 올 게 왔구나. 왜 이런 게 왔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고난이 오면, 올 게 왔구나. 안 올 게 온 게 아니라, 와야 할 게 왔구나. 당연히 올 게 왔구나라고 생각할 것이지, “이게 안 와야 되는데”라고 생각할 게 아니라고, 베드로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전체의 교훈으로 본다면,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많고, 의인이 재앙을 만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고,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의로운 자가 더 고난을 받는 일들이 훨씬 더 많은데, 왜 잠언 12장 21절 말씀에서는 “의인에게는 어떠한 재앙도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잠언이 잘못된 것인가요? 왜 사실과 다른 것 같은 말씀을 잠언서에서는 하고 있는 것일까요?

원문을 한번 또 봅시다 잠언서 12장 21절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건데요. “로 예운네 라 차디크 콜 아벤”이라고 하는 문장입니다. 그것은 “모든 해로움이 의인에게 미치지 않는다”라고 번역할 수 있어요. 히브리어는 참 편한 게,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데, 그 밑에 한국말을 적어 놓으면, 그냥 자연스럽게 번역이 돼요. 모든 해로움이 의인에게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모든 해로움이라고 말할 때, “콜”은 “모든”이라고 하는 말이고, “아벤”이라고 하는 말이 재앙, 해로움이라고 하는 말인데, 도대체 “아벤”이 의인에게 미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이것은 재앙이라고 번역하기보다는 해로움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자연스럽게 이해될 만하다 하겠습니다.

의인에게 질병이 없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의인이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의인이 실패할 리가 없다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의인에게 아픔이나 슬픔이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들에게는 그런 아픔들 고통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무엇이 없을 것이다? 해로움이 없을 것이다. 우리를 망하게 만드는 일은, 고통이 있지만 아픔이 있지만 그게 너를 해하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는 거예요. 의인에게는 고난이 있어요. 그게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에요. 하지만 그 고난이 우리를 박살 내버리고, 우리를 망가뜨려버리고, 우리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도록,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한 재난과 고난이 아니라, 그 고난도 우리에게 유익이다 말씀하시는 거예요.

시편 119편 71절의 말씀.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그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고난을 줘요. 우리들 가운데 너무나도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시련들을 줘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고난들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박살 내버리고, 우리를 망가뜨려버려서, 우리를 완전히 파멸시키고 우리를 없애버리기 위해서, 우리를 해롭게 만들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유익을 주시고, 아픔을 통해서 성장케 해주시고, 아픔을 통해서 감사를 발견케 하시고, 영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의 말씀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심지어 내가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질병에 빠지기도 하고, 심지어 죽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로마서 8장 38절에서 39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례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기쁨이나 그 어떤 다른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신 자들에게는 의인에게는 어떠한 해로움도 임하지 아니할 거라고 하는 이 말씀을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끝까지 붙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조그마한 어려움이 있다고 해서, 절망하고 좌절할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내 인생이 힘들고 어려운가라고 말할 게 아니라, 그러나 그 고통을 통해서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붙들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고, 그리고 그 안에서 믿음으로 계속해서 의로움을 지켜나가며 믿음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아무런 죄가 없으신 의인이셨습니다. 하지만 그 의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쥐고 십자가 위에서 그 모든 고통과 아픔을 우리가 당해야 될 그 모든 고통을 홀로 지시고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시고 우리를 건져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의 능력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그 능력이 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믿음으로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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