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은 욕을 부릅니다 (잠 11:2)

공평한 추는 모두가 기뻐합니다 (잠 11:1) +++ 정직이 인도하는 길은 안전합니다 (잠 11:3)

교만과 겸손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오늘 잠언서 11장 2절 말씀 가운데서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이 한국말로 번역된 잠언서 11장 2절의 말씀을 보면, 그냥 밋밋하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좀 더, 참 멋있게 이 표현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공부를 한번 해볼까요? 한번 보겠습니다.

어떻게 읽느냐 하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어 나가는 것이 히브리어입니다. 그래서 지금 가운데에 있는 것이 히브리어인데요. 어떻게 읽냐면 “바 자돈 봐야보 칼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입니다. “바”라고 하는 것은 온다는 얘기고, “자돈”이라고 하는 것은 교만이라고 하는 말이고, “봐야보”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온다라고 하는 말이고, “칼론”이라고 하는 것은 수치, 욕, 이런 의미입니다. 교만이 오면 수치가 온다라고 하는 말인데요. 제가 핑크빛으로 표현을 했습니다마는, 교만이라고 나타내는, 교만이라고 하는 말을 나타내는 “자돈”이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와 수치를 의미하는 “칼론”이라고 하는 단어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슨 공통점이 있죠? 운이 같아요. 운이. 우리 한시 공부하다 보면, 한시는 뒤에 운율이 같은 운으로 해서, 이렇게 한시를 만들어 가듯이, 이 히브리어 언어에서도 시를 표현할 때, 어떤 문장을 표현할 때 운율을 맞추어서 표현하는 겁니다. 그래서 “바 자돈 봐야보 칼론”이라고 얘기해서, “자돈” “칼론”이라고 하는 교만과 수치를 같은 운율로 해가지고, 기억에 팍팍 남도록, “자돈” “칼론” “자돈”하면 “칼론”이 생각나도록. 교만하면 수치라고 하는 말이 생각나도록 이렇게 연결시켜 놓은 것이 히브리어 표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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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제는 치워줘도 괜찮겠습니다. 그러니까, 교만이 오면 욕도 온다고 하는 우리 한국말 번역보다는 히브리어 표현이 훨씬 더 운율이 있어서, “아, 그렇구나” “자돈” 교만이 생기면, “칼론” 수치가 오는구나라고 하는 것이 생생하게 우리들의 마음에 박히도록 표현되어 있는 것이 바로 잠언서 11장 2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만한 자는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지만, 겸손한 자에게는 그런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겸손한 자야말로 정말 지혜로운 자라고 하는 것이 오늘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성도들은 교만하지 아니하고 겸손한 모습을 가지는 것이 정말 중요한데요. 도대체 그러면 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을 가리켜서 교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 교만을 우리가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이 찾아오면, 그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고, 정말 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 교만인데, 우리가 그러므로 경계해야 할 것이 교만이라고 하는 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싹트지 아니하도록 조심해야 될 것인데, 도대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교만이 무엇일까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선을 행한 다음에, 뭔가 열심히 수고한 다음에, 무엇인가 좋은 일을 한 다음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생겨나게 되는 자연스러운 만족감, 혹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겨나게 되는 기쁨, 그런 것을 가리켜서 교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구분해야 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품성이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있는데요. 그래서 하나님의 그 특성들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도 그대로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선을 행하면 기쁘고, 악을 행하면 정말 고통스럽고 슬픈 그런 마음이 우리들에게 자연스럽게 있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 선을 행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다른 사람을 도와주고, 긍휼을 베풀어주고, 용서를 베풀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자연스럽게 어떠한 것이 나타나냐면, 기쁨이 생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만족감이 생겨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그 수고의 대가로 어떤 열매를 가지게 된다고 한다면, 기쁨과 만족감이 생겨나게 되어 있는데요. 이런 것들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기쁨이 생겨나는 것, 아, 정말 대단한 자부심이 생겨나고,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만족감이 생겨나고, 자부심이 생겨나는 것은 교만한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기쁨이야말로,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생겨나는 그런 만족감 자부심 이런 거야말로 우리가 선을 행하도록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동력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건전한 감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불교나 유교적인 관점에서는, 특히 불교에서는 우리들의 마음을 자꾸만 비워야 한다고 하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그래서 우리들의 기쁨도 슬픔도 만족함도 궁핍함도 그 어떤 종류의 감정이라도 다 나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아예 그런 것 자체를 다 없애버려서, 그냥 아무런 느낌도, 아무런 생각도 없는, 그런 평온함, 어떤 거 하나에 따라서 기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만족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고, 그냥 이 세상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냥 내 마음 가운데 잔잔한 고요함,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이 그게 불교적 영성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래서 불교적인 관점에서는 기쁨도 별로 좋은 게 아니에요. 별로 그게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만족함도 바람직한 게 아니에요. 아마 유교적인 관점에서도 어떤 그런 관점들이 조금씩 들어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적인 관점으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까지 지내왔던 유교적인 배경에서 성경을 읽기도 하고, 불교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경을 읽기도 하기 때문에, 성경을 오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요. 성경 전체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 선을 행할 가운데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쳐나고 선을 행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만족함을 느끼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 자체를 성경은 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쁨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거예요. 선을 행할 때,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정말 즐거움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그것을 정죄시 해야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애쓴 다음에,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다음에 수많은 수확을 거두게 될 때, 기쁨이 넘치게 되고 즐거움을 얻게 되고 성취감을 누리게 되는 것이야말로 그것은 건전한 감정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오늘 잠언서 11장 2절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처럼, 교만이 오면 수치가 따라올 것이라고 했을 때, 그러므로 이것은 별로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그런 교만이 무엇일까? 도대체 이 교만이 무엇이고, 교만이 아닌 만족 교만이 아닌 기쁨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좋지 못한 교만, 결국은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자부심이나 정당한 기쁨 정당한 행복한 마음을 넘어서서, 그래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되는 왜곡된 기쁨, 왜곡된 만족, 왜곡된 성취감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정당한 기쁨 괜찮은데요. 정당한 성취감 정당한 자부심 이런 것들은 괜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조금 잘못되어서 왜곡되어 나타나는 기쁨 왜곡되어 나타나는 만족감 왜곡되어 나타나는 성취감들은 그것은 바로 교만으로 연결되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무엇이냐면, 그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는 마음이 동반된 감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교만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통해서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뛰어나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고 더 낫다고 하는 그 사실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과도한 평가를 내리고, 뿐만 아니라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경멸하고 무시하는 그런 악한 마음이 수반되는 것이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교만은 단순한 정당한 기쁨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무시와 모독, 멸시가 수반되는 것으로서, 이것은 아주 사악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만일 어떤 학생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합시다. 공부를 열심히 해가지고, 정말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이 수고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고 정말 성실하게 살아서 그리고 정말 시험 공부를 잘해가지고 그래서 전교에서 1등하는 그런 결과를 얻게 되었을 때, 그래서 자기가 지금까지 수고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나타났기 때문에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까지는 괜찮아요. 그것은 정당한 거고 괜찮은 생각입니다. 기뻐하고 만족해하고 행복해하는 것은 괜찮은 일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순식간에 어떤 마음으로 변하게 되냐면, 다른 사람을 향한 경멸과 무시, 그리고 다른 사람을 아주 깔보는 그런 마음의 태도가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나타날 수가 있는 것이죠. “저 공부도 지지리도 못하는 놈들” 그러면서 비난하고, 무시하고, 깔보는 그런 악한 마음들이 우리들에게로 나타날 수가 있겠는데요. 이러한 모습, 그러니까 기쁨이 정당한 기쁨이 아니라, 그 경계선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깻잎 한 장 차이와 같아서, 김 한 장 차이와 같아서, 순식간에 그런 정당한 기쁨에서부터 교만으로 쉽게 변해버릴 수가 있겠는데요. 아무튼 그러나 차이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겁니다. 정당한 기쁨이 있는가 하면, 그 정당한 기쁨을 넘어서서, 내 마음에 대한 그런 교만한 마음이 들어오게 될 때,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는 그런 단계로 나가게 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를 성경에서 찾는다고 하면 누가 있죠?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했어요. 여러분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겁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할 때 기쁘지 않습니까? 내가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할 때, 마음 가운데 기쁨이 넘치지 않습니까? 정말 좋은 것이고, 내가 신앙생활 잘한다고 하는 것이 행복해지게 되는 그런 요소가 되는 것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에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고, 나와 견주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로 쉽게 나타나는 겁니다. 아니, 목사라고 하면 이 정도는 돼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 장로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지 않아? 권사라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집사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앞에서 찬양 인도를 하는 사람이면, 이 정도는 해야 되고, 그렇게 기준을 세워놓고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는데요. 누가복음 18장 11절에서 12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바리새인들이 기도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요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에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바리새인이 행한 것은 다 잘한 거예요. 못한 게 없어요. 십일조 드려야죠. 금식해야죠.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아야죠. 다 해야 될 일들이에요. 그런데 그 일들을 하는 가운데, 나와 다른 사람을 비교하면서 경멸하는 마음이 나타나는 것이죠. 가장 사악한 형태의 교만함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겠습니다.

다른 사람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태도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만의 형태를 가지고 있는 예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헤롯 왕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왕은 연설을 하는데, 사람들이 환호하면서 박수를 치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 교만함이 솟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안아무인이고, 그리고 자기가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된 것이냥, 마치 자기가 신이라도 된 것인냥, 자신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셨다고 사도행전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있는데요. 그 느브갓네살은 전 세계를 통일한 통일왕국의 군주였습니다. 어느 날 왕궁 위에 올라가서 자기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보면서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 밑에 굴복해버렸고,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이 세상을 얻어냈다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서, 결국 하나님께서 그 느브갓네살을 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다니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 왕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는데요. 다윗 왕은 하나님 앞에 참 겸손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왕 위에 오르고 난 다음에, 자기가 이룬 업적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인구 조사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악한 동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모세도 역시 마찬가지인데요. 모세는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가운데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화를 내면서 분노하면서 말을 내기 시작했는데요. 교만한 마음이 들 때는 분노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마음이 있으면 상대방을 깔보게 되는 것이고, 무시하게 되는 것이고, 결국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서 분노가 솟아오르게 되어 있는 것이죠. 민수기 20장 10절 말씀에 보면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을 그 반석 앞에 모으고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서 모세와 아론은 더 이상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판결을 받게 되는데요. 도대체 모세가 잘못한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아니하였다 등등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겠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모세의 말이 달라졌습니다. 모세가 처음 사역할 때에는 늘 했던 말이 무엇이냐면, “하나님께서 너희를 향해서 하시는 일을 보라”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못하리라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고 이야기했던 사람이 모세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사용된 그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기적이 나타나게 하고, 모세를 통해서 여러 가지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가운데, 모세의 마음 가운데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자기가 기적을 베푸는 것인냥 착각하고, 그리고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것이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모세와 아론이 물을 내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내시는 것인데, 마치 자기들이 내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고, 교만해져 버린 모습이 민수기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사무엘하 6장에 보면 웃사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웃사는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그 길 가운데 그 법궤가 흔들리는 그 순간에 달려가서 그 법궤를 만지고 그 법궤를 보존하려고 하는 노력을 했는데요. 어쩌면 거룩한 동기처럼 보이고, 법궤를 보존하려고 하는 선한 동기처럼 보였는데, 하나님께서 그 웃사를 쳐 죽이셨습니다. 그 사건을 해석하면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이 웃사의 마음 가운데 들어있는 교만한 마음을 이야기했어요. 웃사는 지금까지 이 법궤를 지키고 관리하면서, 내가 이 법궤를 관리하는 사람이다. 가 이 법궤를 보존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으로 법궤를 대했고, 그 위기의 순간 가운데 마치 자기가 무슨 신이나 된 것처럼 교만한 마음으로 돼서, 결국 그렇게 되었다고 평가를 내렸는데, 아마 의미 있는 해석이 될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에게 질문이 생깁니다. 정당한 기쁨과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는 교만과의 차이는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점에서 차이점이 있을까? 정당한 자부심은 무엇이고, 그 정당한 자부심을 넘어선 나쁜 교만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 차이가 무엇일까라고 하는 질문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솟아오릅니다.

이것은 바른 해석이라기보다는 그냥 어떤 분이 써놓은 글인데, 그나마 참 많은 울림이 있는 글이어서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영자라고 하시는 분이 쓴 <자부심과 교만>이라고 하는 그런 글입니다. 들꽃은 김형자 씨의 아마 호 같아요.

“자부심과 교만”

그대는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를 아시는지요?

내가 하나님의 소중한 자녀라는 생각은 자부심이요

하나님은 나 만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교만입니다

겸손히 낮추어 남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은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요

결코 남에게 허리를 굽힐 수 없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안정감이 있어 누구든 기댈 수 있지만

교만한 사람은 갈대와 같아서 아무도 그에게 기대지 않습니다

저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받는 딸이라는 자부심은 갖지만

하나님이 누구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교만한 사람은 아니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교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무척 사랑하신다는 자부심은 있지만

우리교회 만큼 좋은 교회가 어디 있느냐는 교만한 교회는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부심은 있어도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언제나 하나님 의식속에서 살고 자기 도취 속에서 살지않는 것입니다

아 정확한 신학적인 논설의 글은 아니고, 시적인 글이기 때문에 우리가 참조할 수 있는, 그리고 깊이 묵상할 수 있는 그런 시가 될 거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도대체 자부심과 교만 사이의 그 경계가 무엇일까? 이걸 깊이 좀 생각해 봤어요. 무엇보다도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계산에 넣었느냐? 넣지 않았느냐의 차이가 될 것 같습니다. 자부심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것이 자부심이라고 한다면,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셨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교만일 수 있겠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모든 것을 했다고 하는 그런 나의 공로를 강조하는 것이 교만일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감사가 나타나는 반면에, 교만한 사람은 불평만 나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자부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에 감사하면서, 그리고 그런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내가 이것을 이루어냈다고 하는 그런 감사의 마음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교만한 사람은 내가 이것을 이루는 데 있어서 아무도 돕지 않고, 내가 자수성가했고 아무런 상황이 없는 아무런 도움이 없는 가운데 내가 이것을 해냈다고 하는 불평이 나오는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 번째로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면, 자부심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긍휼의 마음으로 바라보게 되는 반면에, 교만의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사명감을 잃어버리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들을 보면,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 어, 자부심과 교만의 차이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교만이라고 하는 것을 불교적 개념이나 혹은 유교적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들이 많이 있어서, 그래서 교만하지 않으려면 무조건 다 드러내지 않아야만 한다고 하는 그런 고정관념이라고 할까요. 자꾸만 숨겨야만, 그게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관점들이 우리나라 성도들에게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교적인 관점이거든요. 유교적인 관점은 드러내지 않고, 아닌 척하고, 숨기고 그냥 조용히 있고 드러내지 않는, 그것이 마치 가장 겸손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제가 미국에 가서 미국 교회 성도님들을 보니까, 그 미국 교회 성도님들은 정말 겸손하신 분들이에요. 정말 이분들을 볼 때, 참 신앙의 연륜이 있구나! 정말 영적인 훈련이 참 잘 되어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제가 미국 교회 성도님들을 만나면서 많은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미국 교회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이나 이런 분들을 만나게 될 때, 이분들이 정말 자기를 교만한 마음을 드러내면서 막 사역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겸손하게 성실하게 사역을 잘하는 모습을 봤는데요. 그런데 우리 한국 교회 성도님들하고 다른 점이 하나 있는데, 이분들은 자신의 이름을 당당하게 드러내놓으면서도 겸손할 수가 있었다고 하는 거죠.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다 무명으로만 해야 되잖아요? 뭘 해도 교회에 무슨 비품 하나 바쳐도, 목사님 무명으로 해주세요. 제가 한 걸로 밝혀주지 말아주세요. 자꾸만 그렇게 많이 하는데, 대부분 다 이게 다 유교적인 관점에서 나온 겁니다. 자꾸 제가 미국 교회 얘기해서 좀 죄송합니다마는, 제가 갔던 미국 교회를 가보니까요. 교회 모든 것에 헌금자의 이름이 다 적혀 있어요. 교회에 비치해 놓은 성경책에도 누가 누구를 기념해서 교회 성경책 한권 비치용 성경책 한권 바칩니다. 적어놨어요. 의자에도 이 의자는 누가 누구를 기념해서 바친 의자입니다. 다 의자마다 다 적혀져 있습니다. 방마다 이 방은 아무개가 헌금을 한 돈으로 만든 방입니다. 다 이름이 다 붙여져 있어요. 다 이름을 다 써놨어요. 무명으로 하는 걸 거의 찾아보질 못했어요. 그러면서 기념하고, 정말 우리 어머니를 기억해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억해서, 기념해서, 어머니 기일 날, 내가 교회에 이거 조그마한 비품 하나 선물하고 싶습니다 하면, 어머니의 이름과 자신의 이름 적어서 그렇게 해서 기념으로 이렇게 드리고 하는데, 그런데 보면 겸손해요. 내가 이걸 했다고 그래가지고 막 자랑하고, 막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겸손하고 하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깔보고, 저런 것들은 헌금도 안 하는 사람들 저거 십일조도 제대로 안 하는 사람들 하면서, 신앙이 연약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그런 태도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그런데 하는 일들을 다 이름을 적어놓으면서, 하는 걸 보면서 참 많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장학금을 줄 때도, 우리는 그냥 아무렇게, 그냥 두지만, 아무개 장학금, 누가 누구를 기념한 장학금, 그 사람 이름으로 장학금을 주기도 하고, 모든 걸 할 때 이름을 다 밝혀서, 그렇게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분들을 보면서 교만한 느낌을 받았냐면, 교만한 느낌을 하나도 받지 않았어요. 이분들이 정말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려고 하고 있구나.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제가 엄청나게 많이 느꼈습니다.

근데 우리나라 성도님들은 무명은 하는데, 안 하는 사람들 깔보기도 하고, 그럴 경우가 종종 생길 수가 있어요. 우리 교회는 없어요. 그럴 수가 있단 말이에요. 성경적 관점은 자부심은 강화하되,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신 힘으로 하는 것처럼 겸손하게 낮아진 자세로 하면서, 나보다 연약한 사람들을 미워하거나 경멸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인격을 존중해주는 그런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교만이 싹 트는 가장 위험한 지점이 어디냐면 사람을 바라볼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우리는 늘 내 옆에 사람을 신경 씁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했나? 저 사람은 어떻게 했나? 그래서 저 사람보다 적게 할 수도 없고, 저 사람보다 더 많이 할 수도 없고, 비슷하게 하려고 하는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요. 그런데 다른 사람 신경 쓰지 마세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각각 다르게 창조하셨어요.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만 줬어요. 그런데 어떤 과부에게는 옆전 두닢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두닢밖에 없던 그 과부가 드렸던, 그 작은 예물을 주님께서는 보시고서 정말 기뻐하시고 칭찬하셨어요. 액수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을 보신 것이고, 그 상황 가운데서 드릴 수 있는 그 여인의 마음을 주님께서 보셨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저 사람보다는 내가 많이 했기 때문에 네 그래서 교만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나쁜 교만함일 것이고, 내가 저 사람과 늘 하나님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베풀어주신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마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비교를 통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교만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일 겁니다.

갈라디아서 6장 4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를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않겠다고 하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않아도, 내가 나 자신이 행한 그 일로 인하여 내가 자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은 아주 간단합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을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않고, 사람을 보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이죠. 마태복음 6장 1절 말씀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면,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사람들을 보고서 선한 일을 행하면, 자부심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교만함이 생길 뿐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바라보며, 사역한다고 하면, 자부심이 생기게 될 겁니다.

교만에는 수치가 따른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왜 수치가 따르나요? 거품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거품이 우리들에게 있는데, 그 거품은 마지막 심판날 앞에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우리의 벌거벗은 몸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만할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늘 넘어지는 게 우리들의 모습이에요. 겸손하게 신앙생활해야 되겠다고 하면서도, 늘 자꾸만 솟아오르는 것이 교만의 마음들입니다. 따라서 그 순간순간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가서 다시 한 번 회개하고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다시 한 번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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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객전도 (롬 4:9-12)

하나님을 믿으매 (롬 4:1-8)  +++ 아브라함의 자녀들 (롬 4:13-15)

로마서 강해를 계속 진행하고 있는데요. 로마서 강해를 진행하면서 겪게 되는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같은 주제를 계속해서 반복한다고 하는 데 있습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했던 이야기를 또 이야기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요. 특별히 우리가 구원받은 것이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은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장점이 있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은 다 불합격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인데,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기에 대한, 은총에 대한 반응인 믿음으로써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몇 주간에 걸쳐서 계속 이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는데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로마서 4장 9절에서부터 12절 말씀에서도 다시 한 번 이 이야기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냐 할례냐라고 했을 때, 할례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공로를 나타내는 것이고, 우리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인데, 우리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잘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장점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만한 어떤 무엇이 있기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저 베풀어주시는 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그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에서도 다시 한 번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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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자꾸만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한 마음을 갖지 말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나아갈 수 있는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업적이 있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아갈 수 없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받아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하게 될 때 우리가 교만해질 수가 없는 것이죠.

종종 청와대에서는 아주 뛰어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을 청와대에 초청해서 그 사람들과 대통령이 환담을 하기도 하고 만찬을 하기도 하고 같이 사진을 찍는 그런 일들을 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백악관에서도 정말 위대한 사람들 엄청난 업적을 이루어놓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그래서 그 사람들을 격려하기도 하고 칭찬해 주기도 하는 그런 일들을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인 강영우 박사라고 하시는 분이 시각장애인인데, 그런 분들이 초대되어서 백악관에 가게 된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고 그리고 정말 좋아해 주는 것이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들이 있다고 한다면, 청와대로 초청해서 정말 수고했다고 격려하면서 거기 있는 사람들이 박수를 쳐주면서 그렇게 청와대에 초청되었다고 한다면 정말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초대 안 하잖아요? 혹시 청와대에 다녀오신 분 계십니까? 저는 한 번도 못 가봤습니다. 그 근처는 가보긴 했지만, 그 안, 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고 대통령과 만날 수도 없는 것이죠. 하지만 정말 엄청난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일부러 초대해서 대화도 하고 만찬도 하고, 그리고 사진도 같이 찍게 되기 때문에, 누가 청와대를 다녀왔다고 한다면 엄청난 명예 명예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를 받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그 천국으로 우리가 초대된다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초대하셨는가? 그것은 우리가 영적인 금메달을 딴 금메달리스트이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서 불러주신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지금 로마서에서 계속해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있는 이야기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그 어전 회의에 우리들을 불러주시고 저 천국의 잔치에 우리를 불러주고 계시는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영적으로 거룩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래뵈어도 내가 목사요 장로요 권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 실패자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언감생심, 하나님의 잔치 자리에 그 천국으로 초대될 자격이 없는 사람들인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고 하는 것이 로마서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디에 비유할 수 있냐면 사무엘 하에 나오는 므비보셋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을 기억하십니까? 아마 신앙생활을 좀 오래 하셨던 분들은, 사무엘 하에 나오는 므비보셋의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므비보셋은 누구냐면, 바로 사울왕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왕의 손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새로운 다윗 왕조가 탄생하게 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과 다윗왕은 어떤 관계냐? 사울은 계속해서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끝까지 그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집안의 원수가 사울인 것이고 사울의 원수가 다윗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사울 왕조가 몰락해 버리고, 그리고 다윗 왕조가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고 한다면, 고대 세계에서 자연스러운 일이 무엇이냐 하면, 예전 왕조의 모든 그 왕족들은 다 몰살시켜버리는 것이 고대 왕국의 법칙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울 왕가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다윗 왕조가 탄생하게 되는 그 순간에 다 도망가야 했고, 다 뿔뿔이 흩어져야 했고, 그 다윗 왕조의 그 눈을 피해서 다 숨어 들어가야만 했었던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윗 왕은 사울 왕가에 속한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사울 왕에게 속한 가족들이 혹시 한 명이라도 남아 있느냐라고 수소문하고 수소문했는데, 누가 알려졌냐면 바로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을 알게 된 겁니다. 므비보셋이라고 하는 사람이 사울 왕의 손자인데, 아기 때 유모가 데리고 도망가다가 다리를 다쳐서 다리를 온전히 쓰지 못하는 그런 장애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 왕이 그 사람을 데려오라고 했어요. 그래서 다윗왕의 신하들이 므비보셋의 집 안에 들어와가지고, 므비보셋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다윗왕이 당신을 데려오라고 했을 때, 므비보셋이 느낀 그 공포가 무엇인 줄 여러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죽었구나. 다윗왕에 의해서 나는 이제는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구나 생각되는 그 순간에, 다윗의 신하들이 그를 극진히 모시고 왕궁으로 가서 그리고 다윗왕은 그 므비보셋에게 왕자의 대우를 해주는 거에요. 적의 아들이요. 손자요. 그래서 완전히 몰살시켜야 마땅한, 고대 세계의 법칙으로 보면 완전히 죽을 수밖에 없는, 그 므비보셋을 다윗은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그래서 왕자처럼 대우해 주고, 왕자와 함께 식탁을 갖게 만들고, 그래서 왕자처럼 대우해 주는, 엄청난 놀라운 대우를 해 준 이야기를 사무엘 하에서 읽을 수가 있겠는데요.

바로 우리의 신분이 바로 그러한 것과 같다는,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장치에 천국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사실은 영원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자들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구원해 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그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교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의 고마워, 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이유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꾸만 망각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엄청난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됩니까?

물에서 건져서 살려놓았더니 무슨 반응을 하죠? 내 가방 내놓으라고 하는, 내 물건 내놓으라고 다그치는, 그런 적반하장 안하무인 배은망덕의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요.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만이 스물스물 기어 올라옵니다.

신앙생활하다 보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함이 자꾸만 기어 올라오게 되어 있는데요.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런 교만함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는데요.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불러주셨습니다. 저 갈릴리 바다에서 아무런 삶의 목적도 없이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던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불러주셨을 때, 제자들은 그 예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너무나도 연약한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했는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제자들을 불러주셔서, 내가 너희를 사람 낳는 어부로 만들어주시겠다고 하는 엄청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 사실만 생각한다고 하면 겸손하게 따라가야 할 텐데,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다가 어떤 마음이 들었냐면 예수님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주님, 우리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는데, 우리가 얻을 게 무엇이 있을까요? 우리가 무슨 상을 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어떤 면류관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내가 받을 상, 내가 이만큼 수고하고, 내가 이만큼 노력했고, 이만큼 헌신했는데, 이만큼 반주자로 수고하고, 이만큼 설교자로 수고하고, 내가 이만큼 주를 위해서 헌신했는데, 주님 내가 받을 상이 무엇이냐고 하는 그런 질문들을 던지게 되는 것이죠. 나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도사리고 있는 겁니다. 주님, 제가 목사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장로가 아니었습니까? 권사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이 교회 짓는데, 내가 엄청난 헌신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받을 상이 무엇입니까라고 외치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마음인 거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는 말이, 내가 귀신을 내쫓았는데 내가 받을 상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겁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면서도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인하여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을 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립니다. 내가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자신의 그 장점들을 드러내면서, 하나님 앞에 내가 가진 행위를 가지고 나아가려고 하는 그런 교만함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자꾸만 솟아오르는 겁니다. 이래 뵈어도 내가 40년 신앙생활한 사람인데 주님 나한테는 뭐 없습니까? 이래 뵈어도 나는 교회를 한 번도 빠져보지 않은 사람인데, 나에게는 무슨 상이 없습니까? 내가 헌신을 한 사람인데, 하나님, 나에게 줄 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어떻게 의롭게 함을 받게 되었는가? 공로가 아니라, 나의 행위가 아니라, 나의 순종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되는 이유는 우리들이 자꾸만 그 사실을 망각해 버리고, 교만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뿐만 아니라 이렇게 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았는가를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바른 위치에 놓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 거룩한 일을 하는 것, 거룩해지려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순종, 거룩, 행위, 믿음, 모든 것들이 다 우리 신앙생활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느 위치를 차지하는가? 정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긴 하는데, 그것이 있을 자리가 어딘가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되는 것이죠.

로마서 4장 11절 오늘 읽은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기서 말하는 그는 누구죠? 아브라함이죠. 아브라함이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하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그 믿음과 할례, 그리고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과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면서 이 말씀을 해주고 계시는데요.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의롭게 되었는가?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의롭게 되었던 것인데, 그 의롭게 된 것을 인친 것이 무엇이냐면, 그 표를 인친 것이 무엇이냐면, 할례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할례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제유법적인 표현입니다. 제유법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영어로 synecdoche라고 하는 것인데요. 일부를 사용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표현법이죠. 요람이라고 하는 하나를 통해서 탄생 전체를 가리키고, 무덤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죽음 전체를 가리키는, 펜이라고 하는 하나를 가지고 문학이나 언론을 나타내고, 칼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를 통해서 무력이나 전쟁 같은 것을 나타내는 방법을, 이렇게 일부를 사용해서 전체를 나타내는 방법을 가리켜서 synecdoche라고 합니다. 제유법이라고.

여기서 할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일종의 제유법적인 표현으로서, 우리가 내세울 수 있는 어떤 믿음의 행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일부를 의미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할례가 차지하는 위치, 오늘날은 우리는 할례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결국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순종이라고 하는 것, 행위라고 하는 것으로 대체시켜도 되는 말인데요. 어떻게 우리 할례와 의와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이 할례는 어떻게 받게 되었는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을 할례로 인쳤다.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표시를 할례로 나타나게 되었다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도표로 한번 보시면 이렇게 볼 수가 있을 것 같아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믿음 때문에, 우리가 의롭게 되었고,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표로서 할례를 받는 것이고, 또한 순종하는 모습, 거룩한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아 저 사람이 의롭게 된 사람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어떻게 착각을 하냐면, 내가 할례를 받음으로써, 혹은 내가 순종함으로써, 거룩함으로써, 그래서 내가 의롭게 되는 것을 획득하려고 하는 그런 경향들이 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그렇게 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는 것이 먼저고, 그것에 대한 표시, 그것에 대한 인침, 그것에 대한 증명으로서, 이 할례나 순종이나 거룩하는 것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라고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나중이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먼저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었기 때문에 할례를 받게 된 것이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게 된 것이고,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에서 순종이 나타나고 거룩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비유하면 좋을까요? 이것을 어떻게 비유하면 좋냐면, 제 생각에 이것은 통장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예금하면, 그 통장에 얼마가 예금되었다고 적혀집니다. 그런가요? 안 그런가요? 그렇죠. 통장 써봤죠. 그런데 오늘날에는 굳이 통장이 없어도 거래가 됩니다. 체크카드를 가지고, 현금카드를 가지고 물건을 쓰면, 그러면 내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갑니다. 처음에 100만 원을 예금을 해놓았는데, 그래서 내 통장에 100만 원이라고 찍혀 있어요. 그런데 그 통장에 들어있는 그 돈을 체크카드를 가지고 계속해서 돈을 쓰기를 쓰는데 통장 정리를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통장에는 얼마가 있다고 찍혀져 있습니까? 100만 원이 그대로 찍혀져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저는 체크카드로 돈을 여기저기서 많이 쓰면, 실제로 은행에는 100만 원이 들어 있나요? 쓴 만큼 차감이 되었나요? 쓴 만큼 차감이 되었을 겁니다. 통장에 찍혀 있는 게 중요한가요? 은행에 실제로 돈이 있어야 되는 것인가? 중요한 건 은행에 실제로 돈이 있는 게 중요해요. 거기에 돈이 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이 통장에 찍히는 겁니다. 나중에 그것을 정리하면, 아 이렇게 정리가 되는구나! 이렇게 나중에 통장 정리하게 되면, 이만큼 잔액이 남아 있구나라고 하는 것을 통장은 알게 해주는 것이지, 통장이 돈이 아니란 말이에요.

어쩌면 믿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의 순종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거룩하게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의가 나타나는 것이고, 정말 이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통장에 이렇게 얼마가 찍히는 것처럼, 우리들의 행위로 우리들의 순종으로 우리들의 거룩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실제로 통장에, 실제로 은행에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은행 잔고 증명서를 위조해서 이만큼 나에게 돈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돈이 있는 건가요? 없는 거예요.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건 거짓말이에요. 사기예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우리 성도들이 그걸 혼동한다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그렇게 혼동했어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나아가야 되는데, 하나님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내가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것으로, 거짓 잔고 증명서로 나의 믿음이 있는 것처럼 내가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은 것처럼 그렇게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에요. 하지만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가 믿음으로 반응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종종 성도님들 사이에는 이제 곧 임종하는 분들을 위해서 임종 세례라도 베풀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소망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믿음이 없어도 그냥 군대에서 단체 세례라도 받으면 그러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효과는 없는 게 아니고, 있습니다. 안 받는 것보다야 받는 게 좋을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믿음을 갖게 되기도 하고, 신앙의 길로 들어서기도 하고, 그래서 목사님 되신 분들도 있고, 그렇게 그런 예들이 많이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세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세레라고 하는 것은 내가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친 것이지, 세례만 받았다고,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을 자동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이 로마서에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 우리의 행위로, 우리의 할례로, 우리의 순종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이 우리의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 놓기 위해서,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다 가져다 놔야 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순종이라고 하는 것을 제 위치에 놓지 않고 잘못 생각합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순종하기 때문에 우리가 완벽하게 살아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착각하거나, 또 정반대로 우리가 믿기만 하면 순종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막 인생을 살아도 괜찮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 이 순종에 대해서 오해하는 양극단의 이야기들이 우리 가운데 많이 있는데요.

둘 다 다 다 틀려먹었어요. 순종은 무엇인가? 순종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구원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순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도 아니고, 순종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의 반응으로서 구원을 얻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연스럽게 나와야만 하고, 반드시 따라 나와야만 하는 것이 순종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종종 오해를 받았는데요. 어떤 오해를 받았냐면,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된다고 하는 주장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을 복음을 전하고 다니니까, 유대인들이 그 바울 사도를 보면서 저 바울은 율법을 폐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비난을 받았는데요.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온 분이라고 그렇게 비난을 받았는데, 사실은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제 위치에 집어넣기 위한 것이죠.

바울 사도는 로마서 1장 5절 말씀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아,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하기 위한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순종이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이 필요하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데, 순종의 위치가 어딘가? 믿음의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이 나타나야 되는, 반드시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라고 하는, 제 위치를 찾게 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로마서에서 이 말씀을 자꾸만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항상 기뻐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을 확신하고, 그것 때문에 안심하고, 그리고 감사하고 기뻐하게 만들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은 게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죠. 만일 우리의 구원이 믿음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 우리의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날까요? up and down이 심하죠. 내가 신앙생활을 좀 잘하는 것 같으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 같다라고 느껴지다가도, 어느 날 실수할 때도 있고, 어느 날 분에 못 이겨 화를 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심각한 죄를 지을 때가 있는데, 그때, 아, 이제 나는 망했구나! 나는 구원받지 못하는구나! 하고 심각한 영적인 절망 가운데 빠지게 될 겁니다.

우리들의 기분에 따라서, 어떤 때는 내가 구원받을 것처럼 느껴지다가, 어떤 때는 나는 완전히 절망스럽고, 나는 완전히 구원받지 못할 사람처럼 느껴지는 그 영적인 감정의 기복이 심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의 구원이 어디에 달려있는가?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완벽함에 구원이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데 구원이 달려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구원이 달려 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 있어도, 우리의 구원이 흔들리지 않기에, 담대하게 언제 어디서나 기쁨으로 믿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죠.

제 딸이 바이올린을 했는데요. 학생 때 바이올린을 공부하면서 거치는 과정이 무엇이냐면 콩쿠르에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딸 아이를 데리고, 여러 콩쿠르을 데려다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은 콩쿠르에서 우승을 해가지고, 영예스럽게 그런 상을 받기도 하고 그랬는데, 상을 타면 기분이 좋고 행복한데, 상을 못하게 되는 경우도 훨씬 더 많아요. 한 번은 제가 우리 딸을 데리고 콩쿠르장으로 아침에 일찍 데리고 드라이브를 하면서 데려다 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콩쿠르을 하게 되는 거야! 이제 콩쿠르장 안으로 들어가라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 우리 딸이 제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빠, 나 콩쿠르에서 1등 못해도 괜찮아? 1등하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요? “너 일등 못하면, 집에 들어올 생각을 하지 마”라고 한석봉 엄마처럼 얘기를 했었어야 되는데, 저는 그렇게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손웅정 옹처럼 좀 했어야, 손흥민 같은 사람이 나올 텐데, 그렇게 대답해 주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렇게 불안에 떨고 있는 우리 딸을 보면서, 무슨 이야기를 했냐면, “괜찮아. 네가 바이올린 콩쿠르 대회에서 1등하지 않아도, 너는 내 딸이야. 물론 네가 열심히 수고하고, 열심히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래서 그 결과가 좋게 나타나서, 1등을 한다고 한다면, 정말 기쁠 것이고, 그런데 네가 최선을 다하지 않고, 게으르고 열심히 하지 않고, 그냥 인생을 대충 살아서, 그래서 초라한 성적표를 가져온다고 한다면, 슬플 것이지만, 네가 1등을 하든 꼴등을 하든, 네가 어떤 상태이든, you are my 내 딸이야! my precious daughter. 너는 나의 소중한 딸이야!

대학을 가는 우리 딸을 향해서 해준 말도 그 말이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게 되면, 아예 부모를 거의 떠나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 되는데요. 우리 집에서부터 차로 운전해서 12시간 운전해야 되는 인디아나 대학에 우리 아이를 데려다주고 올 때 그 아이를 향해서 했던 말도 이 말입니다. “예림아, 다른 거” 마지막에 해준 말이 무엇이냐면, “다른 거 기억하지 말고, 이 말만 기억해라. 네가 이 대학 생활을 하다가 무슨 일을 만나도, 넌 내 딸이야. 네가 대학생활 하다가 분에 넘쳐서 화가 나서 사람을 죽여도, 네가 대학 생활하다가, 엉망 진창이 돼서 술에 쪄들고 마약에 쪄들고, 그래서 인생을 망치는 그런 일을 하더라도, 그래도 너는 내 딸이야. no matter what 네가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는 내 딸이야!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엄마 아빠 믿고, 우리에게 연락해. 너를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해주고, 우리 딸아이를 거기다 내려놓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게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들려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 삼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못해서 영원한 죄로 인하여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이 되었을 때, 우리 주님께서는 “너 같은 놈 쓸모 없다. 내 앞에서 얼씬거리지도 마라” 하면서 우리를 쫓아내버리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셨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취소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는 점을 믿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은총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되고, 그리고 그 사실 앞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고 하는 그 사실 앞에서, 담대하게 걱정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하지 말고, 기쁨과 감사로 확신 가운데,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을 더욱더 기쁘시게 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결단들이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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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 (잠 6:12-19)

게으름의 죄 (잠 6:6-11) +++ 불을 품으면 (잠 6:20-35)

잠언서 6장 12절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눈짓을 하며 발로 뜻을 보이며, 손가락질하며,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며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악한 자는, 누가 악한 자인가? 구부러진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구부러진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말을 가리켜서 구부러진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왜곡하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말하는 것이고, 잘못된 것을 퍼뜨리고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고, 그리고 사람들 사이를 이간하고, 그리고 악을 꾀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다툼이 일어나도록 만드는 그런 사람이 바로 악한 자요. 불량한 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불량한 자, 악한 자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15절 말씀에 보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재앙이 갑자기 내려, 당장에 멸망하여, 살릴 길이 없으리라.” 무슨 이야기입니까? 악을 행하는 자, 불량한 자, 구부러진 말을 하는 자, 즉 왜곡하는 말을 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고, 여러 가지 악을 도모하는 그런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에게 재앙이 닥치게 될 것이고, 결국은 파멸의 길로 들어가게 될 텐데, 그러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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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면서는 정반대의 현상을 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며 힘들고 어렵게 사는 반면에, 포악하고 악을 행하고 술수를 부리는 자들은 오히려 잘 나가고 아무 문제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비칠 때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느끼지 않으십니까?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분명하게 기억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국에 모든 것을 심판하셔서 바로 잡으실 것이라고 하는 그 점을 우리가 분명하게 믿고 우리가 확신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는 재앙을 내리실 거라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인데요.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공의대로 판단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악을 행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마음의 양심에,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두드리시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다가는, 내가 이렇게 악한 일을 하다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더 이상 악한 일을 하지 아니하고 중단하게 될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인가? 지혜는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그것이 바로 지혜라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죄와 악을 범하는 자들을 심판하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안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악을 행하는 길을 멈출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악을 행합니다. 나쁜 짓을 하고, 또 잘못된 말을 하고, 거짓을 말하면서 사람들을 대적하고 악을 꾀하면서 이간질하고 다툼을 일으키는 그런 일들을 많이 하게 되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 가운데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셔!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아! 왜? 내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내가 눈으로 하나님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알 수가 없기 때문에 보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내가 죄를 지어도 결코 하나님께서 나를 처벌하지 않을 거라고 하는 그러한 생각 때문에,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찬들도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우리가 매 주일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마치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면, 우리들의 삶이 완전히 달라질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정말 힘들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을 때, 과도하게 절망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과도하게 슬퍼하거나, 모든 일들이 다 막혀버렸을 때 정말 절망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고, 지금도 나와 함께하신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조그마한 어려움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좌절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원수가 있으면 그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 원수를 갚아주실 것이니, 그 원수를 갚는 것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는 그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내 손으로 원수를 갚아버리려고 하는 그런 모습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은밀하게 계속해서 죄를 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안 계시고, 하나님이 내가 이렇게 은밀한 가운데서 죄를 한다고 한다면 나쁜 짓을 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결코 보지 않을 거라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나쁜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분명히 안다고 한다면,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것이죠.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에, 악한 일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면, 내 손으로 원수를 갚지 않아도 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하면, 그러면 더 이상 우리는 괴로워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과도하게 슬퍼할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며, 일어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라고 하는 종교 개혁을 일으킨 분이 계신데요. 이 마틴 루터라고 하는 사람이 종교 개혁의 운동을 하는데, 카톨릭의 박해가 너무나도 심해서, 그래서 그 카톨릭의 박해를 견디기가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운 겁니다. 정말 참된 교회를 만들어보고자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 된 교회를 만들어보고자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데, 그런데 카톨릭의 세력이 너무나도 큰 거예요. 그 교황을 비롯한 추기경이나 그런 종교 권력들이 너무나도 강하게 버티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종교 권력과 결탁하고 있는 세속 정부의 그 강력한 그 권세 밑에서, 너무나도 힘들고 두려워서 종교 개혁을 일으키기가 너무 힘들어서 좌절하고 슬퍼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하루는 그 마틴 루터를 일깨우기 위해서, 이런 퍼포먼스를 했다고 합니다. 하루는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서 묻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어?’ 왜 상복을 입고 앉아 있느냐고 그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그 마틴 루터의 아내가 대답을 했습니다.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돌아가셨습니까?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마틴 루터가 깜짝 놀라서, ‘아니, 이게 무슨 소리오?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하고 이야기를 하니까, 이 마틴 루터의 아내가 마틴 루터를 향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죽었다고 생각하니까, 당신이 그렇게 절망하는 것이지. 왜, 그렇게 절망하는 겁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한다면,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이 겁나며, 무엇이 슬픈 일이 있겠느냐?’고 해서 그래서 이 마틴 루타가 그때 큰 충격을 받고, 다시 종교개혁을 끝까지 밀어붙였다고 하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만일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들의 행동이 완전히 바뀌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자, 불량한 자, 악한 자들이 왜곡된 말을 하며, 또한 여러 가지 잘못을 끝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그러한 사실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악을 행하게 되는데요. 안타깝게도 우리 크리스천들도 하나님을 예배하고, 매번 주님을 찬양하고 기도하고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마치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불신자들은 우리들의 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행동을 보는 것이죠. 우리들의 말로서는 예수님 믿으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크리스찬의 행동을 보니까,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확신하고 행동하는 것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말을 하는데, 행동으로는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외치면서 행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전도가 어려운 것이죠.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악을 행하면서 뻔뻔할 수가 없는 거잖아요?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렇게 잘못을 범하면서도, 그렇게 후안무치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크리스천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마치 하나님이 아무것도 보시지 않는 것인 양, 죄를 지으면서도 전혀 회개할 줄 모르고, 뻔뻔하게 악을 행하면서 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게 될 때, 세상 사람들은 비웃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성도들이 서로 용서하지 못하고, 하나 되지 못하고,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그렇게 서로 싸우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라고 하는 그런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인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확실하게 믿는 가운데, 악한 길에서부터 떠나고 왜곡된 말을 하고 잘못된 일을 행하는 길에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하고 좋은 일들을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절부터 19절 말씀에 보면 이렇게 기록합니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여닐곱 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들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7가지를 열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미워하시는 것이 이러한 것들이라고 설명해 주고 있는데요. 첫 번째는 교만한 눈입니다. 교만한 눈.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교만이라고 하는 죄가 어쩌면 가장 큰 죄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인 양, 교만하게 행동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면서 내가 열심히 수고하고 애쓴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갖거나 그리고 내가 수고하고 애쓴 것의 그 결과를 보면서 기쁨을 누리는 것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만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넘어서서, 마치 그것이 내 힘과 능력으로 된 것인 양, 하나님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이 뛰어나고 내 모든 수고와 내 모든 노력으로 다 된 것인 양 그렇게 마음을 품는 교만한 마음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교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이 그렇게 높은 성과를 이루고 많은 것들을 이루어내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나 기쁨이 넘치는 것까지는 괜찮을지라도, 그것을 넘어서서 자신에 대한 교만한 마음으로 바뀌게 될 뿐만 아니라, 그리고 나와 같은 성과를 내지 못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무시하고 경멸의 태도를 가지게 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다른 이웃들을 본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큰 것을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이 왜 내게 그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주셨겠습니까? 그것은 사명으로 주신 것이거든요. 하나님께서 내게 무엇인가 더 많은 것을 주시고 더 잘하는 것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특별한 재능과 많은 것들을 내게 허락해 주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똑똑하고 내가 열심히 하고 내가 무엇인가를 잘해서 그렇게 얻었다기보다는, 물론 그렇게 해야 되겠지만,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내게 주어진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것들을 가지고 연약한 자들을 섬기고 도와주고 사랑하라고 하는 그런 사명으로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는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해 주셨다고 하는 그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교만하라고 선택해 준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모든 열방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예배하는 민족이 되게 만들도록 자신들을 통해서 모든 온 세상 열방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가 될 수 있도록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선택해 주셨는데, 이스라엘 민족은 그것이 교만함이 되어서 다른 이방 민족에 대한 멸시와 차별로 행동했고, 감사의 마음보다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비난과 멸시로 나아갔던 것이 바로 교만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요.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한 것에 대한 결과가 너무나도 좋아서 기쁨이 생기는 것 그건 자연스러운 것이죠. 그러한 내가 열심히 수고한 것에 대해서 그래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된 것, 거기에 대한 자부심이 생기는 것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넘어서서 이것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경멸의 태도로 바뀌고, 나 자신에 대한 교만의 태도로 바뀌어 버리게 된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바른 신앙의 태도가 아닐 겁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다고 하는 점도 기억해야 될 것인데요. 우리가 아무리 수고하고 애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고 한다면 성을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될 뿐만 아니라, 성을 지키는 자의 수고가 다 헛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는 겸손한 마음과 감사의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것인데, 교만한 눈으로 교만한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더욱더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거짓된 혀를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거짓된 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죠. 거짓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진실을 말하게 될 경우에 내게 손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짓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거짓말을 하는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물질이라든가 이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든가 이 모든 것들이 나의 우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내가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가 계속 지키기 위해서, 그러한 것들을 내가 얻기 위해서, 그래서 거짓말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진실을 말하게 되면 손해가 생기기 때문에 거짓을 말해서라도 그 모든 것들을 지켜내려고 하는 그러한 탐욕의 마음에서부터 거짓말이 나오는 겁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러니까 우리가 적군에 잡혀가서 그래서 적군으로부터 취조를 당하는데, 그 순간에 우리 아군의 모든 정보를 다 상대방에게 다 말해야만 한다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종종 그런 정도까지 정직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합니다마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정상적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거짓을 통해서 우리가 이익을 추구하고, 하나의 이득을 얻으려고 하는 그러한 모든 잘못된 말이 그것이 거짓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자를 미워하시며, 진짜 진실을 말하는 자를 사랑한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말이 “예”면 “예”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진실한 마음, 말들이 우리들의 말 가운데서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이유가 있는데요. 그것은 맹세를 하는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은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 모면, 거짓을 추궁당하는 상황 가운데서 자신이 모면하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 경우가 많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들의 말은 진실을 말해야 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을 주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죄 있는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은 괜찮은 것일까요? 우리가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잠언서의 말씀이 그 당시의 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하는 겁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어떤 법이 있냐면 복수의 법이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복수의 법. 라틴어로 lex talionis라고 하는 그런 법이 있었는데, 그 법은 만일 누군가 우리 친족을 죽인다고 한다면, 친족 중에서 그 살인자를 찾아내어 죽여도 괜찮다고 하는 그런 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가족의 누군가를 죽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끝까지 찾아가서 그 사람에게 원수를 갚는 것은 그 당시에 법으로 보장이 되어 있는 상황인 겁니다. 그러니까 죄 살인자를 찾아가서 그 살인자를 죽이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시대에 이 말씀이 주어진 것인데요. 그런데 그렇게 죄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피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아무 죄가 없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피를 흘리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도 그런 방법을 그대로 하라는 얘기는 아니죠. 오늘날에는 살인자든 살인자가 아니든 우리의 손으로 원수를 사적인 복수를 하면 되지 않는 시대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냐면, 이웃을 행해야 하는 것은 아무런 죄가 없는 이웃에게 상해를 가하고 해를 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고, 오히려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가? 다른 사람들에게 상해를 입힐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를 베풀고 배려를 하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의 가장 회복해야 될 그런 태도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늘 실수하는 것이 무엇이냐하면, 갑질이라고 하는 실수를 많이 합니다. 갑질이라고 하는 실수를 언제 하죠? 내가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리고 내가 어떤 권리가 있다고 생각될 경우에, 그 사람을 향해서 화를 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잘못, 폭력을 쓰기도 하고, 폭언을 하면서 갑질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됩니다. 믿습니까? 누군가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관공서에서 나온 사람이든 아니면 시장에서 만난 사람이든, 어디 거래처에서 만난 사람이든, 내가 식사를 하는 가운데 식당 주인 주인이 나에게 뭐 잘못을 한 것이든, 뭐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화를 내면서 분노하고 이렇게 내 화를 막 내버리는 그런 일들을 하지 않으시기를 제발 부탁드립니다.

안타까운 것은 종종 우리 교회 교회에 찾아와서 요즘 코로나 상황이니까 코로나 상황이 돼서 코로나 확진을 방지 해보겠다고 공무원들이 나와서 교회를 점검하고 돌아가는 케이스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못마땅한 우리 교인들이 그렇게 나온 공무원들을 향해서 소리를 지르며, 삿대질을 하고 욕을 해대면서, 신앙의 자유를 지킨다고 그렇게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전화를 걸어서 욕을 해대고 화를 내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러한 모습을 보면서, ‘야, 저 사람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저렇게 열정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 이렇게 통쾌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절대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과 배려를 해야 돼요. 정말 연약한 사람 나보다 힘이 없는 사람에게도 배려해서 그들을 위하고 이해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줘야지, 우리가 갑질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악을 행하면서, 그래서 그래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은 아닐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전에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우리 교회의 재정을 맡으신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연세가 좀 많이 드신 분인데 은행에 가서 우리가 매주 돈을 현금을 저축하고 저축하고 이렇게 예금하고 예금하고 하는 그 일을 계속하셨는데, 그러니까 은행에 은행으로 보면 우리가 큰 고객이겠습니까?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헌금을 많이 예치하는 것도 아니니까, 큰 고객도 아닌데 아무튼 예치하는 그런 손님은 왕이다라고 하는 생각 때문에, 뭔가 가서 좀 갑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뭐 하나 서비스를 요청했습니다. 우리 한국식으로 하자면 돈, 돈을 묶는 띠를 좀 달라고 얘기를 한 겁니다. 근데 그 띠를, ‘이것은 우리가 제공하는 게 아닌데요’ 하면서 안 주는 거예요. 또 달라고 하니까, 겨우 몇 개 주니까, 기분이 나빠가지고, 그러면서 막 화를 내고 나와버린 거예요. 한국식으로 생각한 거죠. 미국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다 돈 주고 사야 되는 건데, 그런데 한국식으로 생각해가지고 그래 가지고 화를 내면서 그렇게 온 뒤로 제가 은행에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어떤 교회 목사님 담임 목사님이시죠?’ 이런 일이 있었는데 이런 일들이 계속된다고 한다면 우리와 거래를 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은행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안타까운 일이었었는데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나라는 그런 식으로 반응 안 할 겁니다. 아마 우리나라는 ‘너 손님한테 왜 그렇게 친절하지 못하게 했냐?’ 하면서, 아마 직원이 우리나라는 혼날 것 같은데, 그 미국에서는 오히려 그 직원을 두둔하면서 그런 손님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고 이야기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좀 창피하기도 했었고 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어디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좀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갑질의 향기가 나타나는 게 아니라 화내고 성질 부리고 욕하고 하는 그런 포악한 모습의 그런 모습들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랑의 모습들이 연약한 자들을 안아주고 배려해주고 사랑해 주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말씀 보면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을 하나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선을 행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사람들이 미적미적거리는지 몰라요. 누가 이걸 좀 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 누가 좀 선한 일 좀 하게 할 수 있나요? 누가 좀 이 좋은 일에 참여할 수 있나요? 하면 왜 그렇게 미적미적거리는데, 악을 행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열정적인지 몰라요.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파멸시키는 데에는 자기 돈 써가면서 열정적으로 나서서 정말 그 열정이 식어지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끌어내리고 그 사람을 죽이는 일에는 열정을 다해가면서 열심히 하는데, 선한 일을 할 때에는 좀 일해달라고 하면 아무도 나서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과연 어떤 일인가를 질문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인가? 죽이는 일인가? 사람을 돕는 일인가? 사람을 해하는 일인가?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가? 질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향한 악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일에 앞장서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또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언을 주님께서는 싫어하신다고 했는데, 재판에서 거짓 증언을 해서 무죄한 자를 죄로 만들거나, 악한 자를 아무런 죄가 없는 것으로 거짓된 증언을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7번째,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일, 장점을 말하고, 그래서 서로 함께 할 수 있는 일에 도움이 돼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단점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래서 분열을 일으키고 이간질을 시키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이웃들을 볼 때 우리 교우들을 바라볼 때 단점을 보지 마시고 칭찬할 점이 무엇인가를 보시고 그 칭찬할 점들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다 하나가 되고 한 마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한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가 함께 일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일까 하나님께서 미워하실 일일까를 질문, 과연 이것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인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인가? 질문하면서 우리들의 삶의 방향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일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로 바뀌어 나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도 연약해서 그렇게 하기가 어려워요. 늘 넘어집니다. 늘 쓰러집니다. 그 누가 완벽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해보려고 하지만 또 쓰러지고 또 넘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주셨습니다. 넘어질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다시 한번 또 나가고 또 나가서, 하나님 실수했던 모든 죄악들 다시 한번 회계케 하시고 씻어내게 하시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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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업신여긴 골리앗(삼상 17:41-44)

41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골리앗은 다윗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다윗을 비웃었습니다. 다윗이 젊고, 즉 어리고, 붉고, 즉 아직 어린 티를 벗지 못한 애송이 같고, 용모가 아름다웠기, 즉 싸움을 잘하는 우락부락한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의 약점을 바로 파고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가진 무기를 비웃었습니다. 다윗이 들고 있는 것은 막대기였습니다. 그리고 골리앗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다윗을 저주했습니다. 그 신들은 그동안 블레셋을 보호한 것 같았고, 수많은 전쟁에서 블레셋에서 승리를 안겨준 강력한 신들인 것 같았습니다. 다윗을 죽여 그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의 밥으로 주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골리앗은 정확하게 다윗의 약점을 파고들었고, 다윗은 이때 심리적으로 위축될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은 다윗에게 자신의 약점들을 바라보라고 유도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세상이 우리를 넘어뜨리는 방식입니다. 우리들의 한계와 단점에 주목하게 만듭니다. 마치 이 세상에 고아처럼 버려진 인생처럼 느껴지게 만듭니다. 아무도 우리를 도와줄 수 없고, 어마어마한 세상의 위력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만들고 그래서 좌절하게 만듭니다. 그게 골리앗과 같은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 위협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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