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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꾀와 선한 말 (잠 15:25-27)

오늘 우리가 잠언서 15장에 있는 세 구절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먼저 잠언서 15장 25절의 말씀을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의 집을 부서뜨려 버리겠지만, 과부의 땅의 경계는 보존해 주신다. “정하시느니라”라고 번역해 놓았지만,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이냐 하면, “보존해 주신다” “유지하게 해 주신다”라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과부의 땅의 경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땅의, 그 땅의 그 경계를, 지게를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셔서, 유지하게 해 주셔서, 망하지 않게 해 주신다고 하는 게 오늘 잠언서 15장 25절의 말씀이 되겠습니다.

먼저 “교만한 자의 집을 허물어 버린다”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의 집을 허물어 버리신다고 하는 이야기는 집만 허물어 버리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는 아닐 겁니다. 집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비행기도 있고, 한 대씩 가고 계시죠? 다 있으면, 다른 것들은 다 그냥 가만 내버려 두지만, 하나님께서 그 집만 부서뜨린다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의 집을 무너뜨린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의지하고 있는 것, 그 사람이 신뢰하고 있는 바로 그 재산을 무너뜨린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고, 따라서 집을 무너뜨린다고 하는 이야기는 사업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이고, 가족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생각하기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것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향해서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가장 큰 죄악 가운데 하나가 무엇일까?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죄악 가운데 하나가 무엇일까? 우리가 생각해 본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교만의 죄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신다고 성경 전체를 통해서 가르쳐주고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그 교만한 사람을 미워하시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교만하게 된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망하게 되는 것이죠. 집을 무너뜨리시는 것이죠. 패가망신하게 만드신다는 것이죠. 우리가 의지했던 그 모든 것들을 다 부서뜨린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되겠습니다.

잠언서 16장 18절 말씀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우리들에게 위험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생각이 떠오르고, 그래서 교만해진다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우리가 망하는 지름길이 된다고 하는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교만했다가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제일 먼저 느브갓네살 왕을 생각해 볼 수가 있겠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은 천하 만국을 통일한, 정말 전 세계를 통일한 그런 엄청난 왕이었습니다. 엄청나게 큰 바벨론 왕국을 이룩해 놓았을 때, 그 사람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는 바벨론 궁 위에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바벨론 제국을 바라보면서, 교만한 마음이 들었는데, 바로 그 느브갓네살 왕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다니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니엘서 4장 28절에서부터 33절의 말씀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이 다 나 느부갓네살 왕에게 임하였느니라.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바로 그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브갓네살은 자기가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교만해질 대로 교만해져 버렸는데, 그 느브갓네살은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 않았던 겁니다.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 천하 만국을 다스리시며, 이 나라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에게 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기도 하고 빼앗기시기도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들을 다 주관하신다고 하는 사실을 생각한다고 하면, 오로지 겸손한 것이 당연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모두가 다 그렇듯이, 느브갓네살 왕은 그 마음 가운데 교만함이 생겨나게 되었고, 하나님은 안중에도 얻는 겁니다. 교만한 겁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께서 이 느브갓네살을 치셔서 마치 짐승과 같이 풀을 뜯어먹게 만드셨다고 하는 이야기가 다니엘서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보면 헤롯 왕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어느 날 그 헤롯 왕은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하는데, 그 연설을 들은 그 민중들이 헤롯왕의 연설을 듣고 이것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신의 소리라고 열광하기 시작했습니다. 환호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때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가? 사도행전 12장 21절에서부터 23절의 말씀을 보니까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교만하게 된다고 한다면 결국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볼 수가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겸손한 자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요.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이고, 교만하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것이고,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죠. 오로지 하나님을 누가 만날 수 있는가? 겸손하게 내가 무능한 사람이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연약한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자만이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만심을 가지게 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것이고, 마치 우리가 내 인생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게 되어서,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잠언서의 말씀을 살펴보면서 다시 한번 살펴볼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25절, 하반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25절을 다시 한번 봤으면 좋겠는데요. “여호와께는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시며, 과부의 지계를 정하시느니라.” 하나님은 과부의 땅의 경계를 보존해 주신다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왜 갑자기 과부가 여기서 나오는 것이죠? 과부가 왜 거기서 나오는 겁니까? 왜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부순다고 말씀하셨는데, 바로 그 말과 짝 되는 말씀으로 왜 과부의 이야기를 여기서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것은 과부는 자기 자신의 삶을 교만하게 드러낼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지금에는 안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에는 과부로 살아도 혼자 살아도 괜찮아요. 과부로 혼자 살아도 괜찮고, 홀아비로 살아도 괜찮고, 오늘날에는 크게 큰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더 잘 나가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여사장님들 있잖아요? 엄청난 부를 일구어낸 사람들을 보면, 과부로서 혼자 어마어마한 일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을 우리는 흔히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과부 그래봤자, 뭐 그렇게 힘들고 어렵고 그런 거 아닙니다. 충분히 살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고대 시대에는, 성경이 쓰여진 시대에 과부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상황 가운데 살아야만 했었던 것이죠. 그 시대에는 과부 혼자로서 살아가기가 너무나도 어려웠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 시대에는 형사취수 제도가 있어서, 형이 아이가 없이 죽으면, 그러면 그 형수를 동생이 취해서 아이를 낳게 해 주고, 또 생활을 책임져주고 하는 그런 관습이 구약 시대 가운데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그냥 혼자 살기가 어려운 시대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룻과 같은 경우에도 보면 룻도 그가 살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인가 뭔가? 대단한 것을 비즈니스를 하거나, 뭔가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근처 이웃집에 가서 이웃집의 타작마당에 가서 거기서 떨어져 있는 이삭들을 주워다가, 그것을 가지고 연명할 수밖에 없는, 너무나도 비참한 상태의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가 과부였기 때문에 과부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해지려야 교만해질 수 없었던 대표적인 사람들 가운데, 과부와 고아와 나그네와 같은 사람들을 구약시대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이 과부를 하나님께서 그의 땅을 보존해 주신다고 하는 이야기는, 과부니까 보존해 준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앞에 있는 말씀과 연결시켜서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그렇게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존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정말 가진 게 없고, 정말 내놓을 게 없고, 자랑할 것도 없고, 정말 연약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지키시고, 보호해 준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과부의 경계를, 땅의 경계를 보존해 주시는 것이라고, 오늘 성경 말씀 가운데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을 읽으면서, “나는 과부니까, 하나님께서 날 보호해 주실 거야”라고 생각하시면 되나요? 안 되나요?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돼요! 성경에 과부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과부를 보호해 주신다고 했으니까, “나는 과부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겠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된다는 거예요. 여기서 과부는 무슨 과부냐? 교만하지 않는 과부예요. 겸손한 과부예요. 겸손한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말씀해 주신 것이지, 그냥 과부니까, “그래, 나는 과부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해 주실 거야.”라고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것이죠.

결론은 무엇입니까? 25절의 말씀에서 들려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이냐 하면, 교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며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여, 저희들의 마음을 주장해 주셔서,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주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게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내 힘과 내 능력으로 이것을 이루고, 내 지혜로, 내 아이디어로, 내 능력으로 이것을 일구어내고 이만큼의 업적을 이루고 그것이 때로는 그냥 이 세상의 업적만이 아니라 심지어 주의 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예요. 교회를 10주년이나 되게끔 만들어왔고, 내가 이만큼의 교회를 이렇게 멋있는 교회로 내가 만들었고, 내 자신의 그 교만함이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있다고 한다면, 그 교만의 재료가 어떠한 것이든지 간에, 그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고, 오직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엎드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저희들의 마음을 만져주셔서 하나님 앞에 더욱더 겸손하게 엎드릴 수 있게 해 주옵소서.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제일 어려운 일이에요. 교만해지지 않게 겸손하게 자신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cs 루이스라고 하는 사람이 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고 하는 그 책은 모든 성도들이 한 번쯤은 반드시 읽으면 좋을 것 같은 너무 너무나도 좋은 책이에요. 근데 그 책에 보면,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고 하는 책에 보면, 크리스천을 어떻게 무너뜨릴까? 성도를 어떻게 무너뜨릴까? 교만한 마음을 들게 해서 무너뜨리게 만드는 사탄의 방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cs 루이스가 만들어낸 것이죠. 그 대장 마귀가 꼬마 마귀에게, 사탄에게,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비법을 전수해 주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성취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빨리 그의 마음 가운데 교만한 마음을 집어넣어라.”라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내가 이 일을 이루고서, 내가 어떠한 영적인 일을 이루고, 성경을 완독 하고, 내가 기도를 40일간 기도를 하고, 내가 금식을 하고, 내가 이만큼 전도를 하고, 내가 성경을 이만큼 암송을 하고, 내가 이만큼 엄청난 주의 일을 위해서 헌신을 하고, 영적인 결과를 가져오면 가져올수록, 어서 빨리 그 사람을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가? 빨리 그의 마음 가운데 교만함을 심어줘라. 그렇게 알려주는 것이죠. 그래서 교만함이 그 마음 가운데 들어서, “내가 이렇게 엄청난 일을 이루어 냈구나. 내가 신앙적으로 영적으로 이렇게 뛰어났구나.”라고 하는 교만한 마음을 갖게 만들어서, 무너뜨리라고 교훈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만일 그 사람이 그렇게 교만해지려다가, “아, 이렇게 교만하면 안 되지. 내가 이렇게 내가 만든 업적을 놓고 내가 이렇게 교만해지면 큰일 나지”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다독이면서 “큰일 날 뻔했네. 내가 교만할 뻔했네. 교만하지 말아야지.”라고 그렇게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게 된다고 한다면, 너는 그냥 가만히 있지 말고, 바로 그 순간을 딱 잡아가지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넌 참 대단한 사람이야. 큰 업적을 이룬 것도 대단한데, 그것이 교만하지 않게 겸손할 줄 알다니, 너는 참 대단한 사람이야.”라고 또 부추기라는 거예요. “내가 겸손할 수 있었구나.” “다른 사람들은 교만한데, 나는 겸손해질 수 있었지.”라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갖게 만들어서, “그래 나는 다른 사람과는, 교만한 사람들과는 달리, 나는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이야.”라고 하는 그런 “교만한 마음을 심어줘라”라고 훈수를 두는 거죠. 그런데 그 성도가 그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지려고 했다가, 그 겸손이 곧 교만의 재료가 되어서, 또 교만해지려고 하면, 다시 또 정신을 차리고, “아이고, 이것도 교만해지면, 이건 안 되지.” 하면서 또 겸손해지려고 하면, 또다시 그것을 재료로 삼아서, “너는 그 교만을 두 번씩이나 이겨낸 겸손한 사람이야.”라고 하는 교만함을 또 심어주라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우리의 마음이에요. 교만하기 쉬운 게, 우리들의 마음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것이 우리가 늘 넘어지는 문제일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사탄이 우리를 늘 교만하게 만들고, 모든 좋은 영적인 것들을 교만의 재료로 바꾸어 버려서, 우리를 무너지게 할 때, 그때마다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내가 교만했던 바로 그 죄가 우리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그 악한 심성이, 교만한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그 사실을 생각하면서, 겸손하게 다시 한번 십자가의 앞에 엎드리고, 또 엎드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자신을 저 복종케 하는 그런 믿음의 훈련과 결단들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잠언서 15장 26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한 꾀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선한 말은 정결하니라.” 악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꾀, 악한 사람의 계획, 악한 사람의 생각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것이지만, 선한 말은 정결하다고 하는 것인데요. 정결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이다고 하는 이야기이고,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의 반대말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더럽지 않고 정결한 것을 받으시는 것이니까,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가증스럽게 여기시는가? 하나님께서 무엇을 증오하시고 미워하시는가? 악한 꾀를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데, 악한 꾀와 반대되는 것이 무엇이죠? 선한 말, 선한 계획, 선한 마음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받을 만한 것이라고 하는 게 오늘 잠언서 15장 26절의 말씀이겠습니다.

악한 꾀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악한 꾀, 나쁜 꾀가 무엇입니까? 바로 뒤에 나오는 잠언서 15장 27절이 악한 꾀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보입니다. 잠언서 15장 27절 말씀.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하나,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게 되느니라.” 다시 말하자면, 악한 꾀가 무엇입니까? 이익을 탐내는 게 악한 생각인 것이고, 그런 악한 생각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고, 결국 그 이익을 탐내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를 망하게 할 것이니까, 결국 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것이 될 거라고 하는 게, 잠언서 15장 26절, 27절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익을 가지려고 하는 것을 하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그리고 그것이 결국 자기 집을 해롭게 한다는 27절의 말씀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십니까? 이익을 탐내는 것, 이익을 가지려고 하는 것, 이득을 남기려고 하는 것, 그것은 결국 하나님 앞에 나쁜 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결국 우리의 집을 해롭게 한다고 하는 이 말씀 26절, 27절의 말씀을 보면서, 그러니까 우리가 이득을 내면 잘못된 것인가요? 돈을 벌면 그건 하나님 앞에 나쁜 것일까요? 농사를 지어서 많은 수확을 얻거나, 장사를 해서 돈을 벌거나 등등, 여러 가지로 우리가 물질적인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 자체를 나쁜 것이라고 오늘 잠언서에서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어쩌면 27절의 말씀이 이익을 탐하는 자는 자기 집을 해롭게 한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려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아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익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익을 탐하는 게 그렇게 나쁠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이익을 탐하는 게 나쁘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표현이 되어 있으니까, 정말 성경 원문도 그렇게 돼 있는지 한번 살펴봐야 되겠죠. 그래서 성경 본문을 한번 보면 27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부당한 이득을 얻는 자는 자기 집을 곤란하게 하지만, 뇌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살 것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27절의 말씀에 그러니까, 한국말 성경에서는 이득을 탐하는 자, 이득을 얻는 자가 자기 집을 해할 거라고 번역을 해놓았지만, 거기서 말하는 이득이라고 하는 것은 그냥 이득이 아니라, 사실은 부당한 이득이라고 번역을 해주는 것이 훨씬 더 나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성경에서 항상 대구로 되어 있듯이 앞에 부분과 뒤에 부분이 서로 대구로 되어 있는 것이니까 “부당한 이득을 얻는 자”, “뇌물을 싫어하는 자”가 대구로 되어 있는 것이고,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단순한 이익 자체가 나쁘다고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농사지어서 많은 수확을 얻는 것, 장사를 해서 이득을 많이 남기는 것, 모든 그런 수고를 해서, 내가 일을 해가지고 이익을 얻는 것, 그것 자체가 나쁜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듯이, 그냥 “소유 자체가 악한 것이다”라고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게 아니에요.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건 뭐냐 하면, 어떤 이득이 나쁘다는 거예요? 부당한 이득이 나쁘다는 거예요. 뇌물을 싫어하는 자는 살겠지만, 부당한 이득을 얻는 자는 결국은 살지 못하고 집이 망가질 거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해가 잘 안 되면 원문을 한번 들여다보면 좋겠어요. 히브리어를 잘 아시니까, 이제 지금쯤이면 들여다보시면 되겠는데, 아직 히브리어를 잘 모르신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이 이익이 그냥 이익이 아니라, 부당한 이익이라고 하는 것을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27절 자체가 대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앞에서는 “이익을 탐하는 자”라고 얘기해 놓고 뒤에서 무엇을 얘기해요? “뇌물을 싫어하는 자”로 대구 해놨으니까, 여기서 이익이라는 것이 그냥 이익이 아니라 뇌물을 말하는 거구나. 부당한 이익을 말하는구나. 부당한 이익인 뇌물을 싫어하면 살겠지만, “부당한 이익인 뇌물을 좋아하게 되면, 결국에는 집이 망하고 해롭게 될 것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충분히 원어를 몰라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앞뒤 문장을 이렇게 살펴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 모르니까, 우리 같은 모르는 사람들은 신앙생활 어떻게 하란 말이냐? 하나님 성경을 좀 한국말로 써주든지, 데모하지 마시고, 보시면 알아요. 보시면 “아, 이게 이렇구나.” “이렇게 뇌물에 반대되는 이득이구나”라고 하는 것을, “뇌물과 관련된 이득이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악한 꾀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26절에서 말하는 것 그 악한 꾀라고 하는 게 바로 그것이죠. 정당한 꾀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정당하게 수고하고 땀을 흘려서 정당한 이익을 얻는 것은 그런 선한 생각일 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꾀 악한 계획이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방법으로 나쁜 방법을 사용해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악한 꾀고, 부당한 이득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고, 그 악한 꾀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싫어하신다. 그리고 그런 악한 꾀에 따라서 뇌물을 얻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잠시 잠깐은 좋아 보이죠. 뇌물을 받으면 쉽게 돈이 생기니까, 너무나도 좋아 보이죠. 괜찮은 것처럼 보이죠. 그리고 발각되기 전까지는 그것이 문제 되기 전까지는 괜찮아 보일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하는 것이죠. 반드시 해롭다는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림을 하나 봤으면 좋겠는데요. 물고기들이 바다 밑에서 학교를 열어서 우리 물고기 학생들에게 어떤 먹이를 먹을 것인가 훈련을 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 먹이를 봤을 때, 이렇게 일반 조그마한 물고기 저렇게 생긴 자연스러운 물고기는 먹어도 되지만, 물고기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저기 갈고리가 달려 있는 게 있어요. 이것은 사람들이 만든 낚시 바늘이니까, 이거 먹으면 안 됩니다. 이거 먹지 마십시오.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물고기들이 그걸 열심히 지금 배우고 있죠? 배우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눈앞에 나타났을 때, “아, 이게 먹을 수 있는 먹이인가? 먹지 말아야 될 미끼인가? 낚시 바늘인가? 먹을 수 있는 것인가?” 구분을 해야 돼요. 그리고 아무리 휘황찬란하고 먹음직스럽다고 할지라도, 저것은 미끼고, 낚싯바늘이니까, 내가 먹다가는, 어떻게 됩니까? 내가 다 횟감이 돼버리는 거죠. 안타깝게도 물고기들은 멍청해서, 멍청해서 한 번 잡혔다가 죽을 뻔했다가 살아나도, 또 그걸 또 먹어요. 그리고 또 잡히더라고요. 하지만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부당한 이득인지 정당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믿음의 지혜가 있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엘리사의 사환이었던 게하시는 속여 취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서부터 나은 후에, 나병에서 낳은 후에, 예물을 엘리사 선지자에게 주려고 했지만,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도 받지 않고 그냥 거부했습니다. 그것을 본 이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열심히 쫓아가서 나아만 장군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갑자기 선지생도 2명이 우리 선지자 학교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두 학생을 잘 돌봐 주어야 하기 때문에, 재정이 필요한데, 그 재정을 위해서 은 한 달란트와 옷 두 벌만 주시면 너무나도 좋겠다고 하는 이야기에, 나아만 장군은 은 두 달란트와 옷 두 벌을 그 게하시에게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속임수였고 거짓말이었고, 정말 멋진 말로 포장을 했지만, 사실은 잘못된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게하시의 악한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결국 엘리사는 그 사실을 알고 그 게하시를 향해서 심판의 말을 합니다. “네가 그것이 탐났느냐?” 하면서 나만이 가지고 있었던 그 나병도 네가 가지게 될 것이라고 해서, 나병에 걸리게 되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열왕기하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예수님을 팔고 은 30을 취한 가롯유다는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참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거예요. 있으면 편리하고 유용하고, 그래서 우리가 땀을 흘려서 많이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를 무너뜨리는 잘못된 방식으로 우리를 무너뜨리게 할 수 있는, 그런 미끼, 사탄의 미끼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이 말씀을 늘 기억하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늘 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양심을 가리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아요. 심지어 주의 일을 하면서도 그렇게 잘못되는 모습을 보일 때도 있고, 정말 내가 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했던 사람들조차도 이러한 잘못된 이익에 넘어가기가 얼마나 쉬운지 모릅니다. 늘 그러한 위험 가운데 있는 우리의 죄성 모습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인데, 그 주님 앞에 날마다 날마다 엎드리면서 믿음으로 다시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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