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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1:1

1:1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아브라암(아브라함)의 아들, 다위드(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탄생의 계보가 서술된 마태복음 1:1-17을 설명하는 제목의 역할을 한다. 물론 이 표현이 예수님의 탄생(γένεσις) 이야기 전체를 설명하는 제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크게 보아 마태복음 1:1-2:23까지를 포함하는 단락의 제목이 될 수도 있다. 마태복음 1:18에 탄생(γένεσις)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 표현이 마태복음 전체의 제목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보려면 탄생(γενέσεως)이라는 표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메시야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구약 시대에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서 임직하였는데, 구약 시대에 등장하는 그런 메시야들은 한결같이 부족하고 흠이 있는 메시야들이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그런 부족하고 흠이 있는 메시야를 넘어서는 완전한 메시야이기에, 예수님을 부르는 정당한 호칭으로 그리스도가 사용되고 있다. 구약의 메시야들은 언젠가 완벽한 모습으로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소망을 이루며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위드의 아들(υἱοῦ  Δαυὶδ)이었다. “아들”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어느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듯이, 1차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아들을 의미할 수 있지만, 2차적으로는 후손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위드의 몇대 손이지만 아들로 불릴 수 있다. 사실 다위드의 모든 후손들은 모두 다위드의 아들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을 특별하게 다위드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사무엘하 7:12-13에 예언된 다위드를 대신하여 성전을 세울 바로 그 아들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아들이라는 표현 앞에 정관사가 생략되어 있지만, 다위드라는 고유명사와 더불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위드의 한 아들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다위드의 바로 그 아들로 이해할 수 있다. 솔로몬이 나단의 예언에 따라 성전을 짓기는 하였지만, 그 성전은 불완전한 성전이었다. 그 성전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해주지 못했고,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종종 거부되었다(사 1:10-17). 결국 그 성전은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성전을 짓는 것을 소망하게 되었다. 정말로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그런 성전을 오랫동안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을 것이라고 하셨고(마 26:61),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연결시키셨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다위드의 바로 그 아들이다.

아브라암의 아들(υἱοῦ  Ἀβραάμ)은 문법적으로 다위드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다. 둘 다 모두 아브라암의 아들이다. 하지만 후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암의 아들들이지만, 예수님을 특별하게 아브라암의 바로 그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창세기 12:2-3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아브라암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암의 아들은 이삭이었지만, 그 아들을 통해서는 큰 민족을 이룰 수도 없었고, 복된 삶이 되지도 못했다. 그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때까지 소망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약속을 성취할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마태복음 서론 +++ 마 1:2 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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