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5

– 이국진

1:5 Σαλμὼν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Βόες  ἐκ  τῆς  Ῥαχάβ,  Βόες⸃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ωβὴδ  ἐκ  τῆς  Ῥούθ,  Ἰωβὴδ⸃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εσσαί, 살몬은 라캅(라합)에게서 보에스(보아스)를 낳고, 보에스는 룻에게서 요베드(요벳)를 낳고, 요베드는 예사이(이새)를 낳았다.

라캅(라합)은 이스라엘 민족이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도움을 주었던 여리고 여인이었다. 그는 여리고가 망할 때 구원을 받아 이스라엘 민족으로 편입된 여인이었다(수 2:1-21; 6:25). 살몬의 아내가 라캅이었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라캅이 살몬의 아내이며 보에스의 어머니로 언급된 제2 성전기 시대 1의 미드라쉬 문서는 없다. 하지만 미드라쉬 기법 2으로 충분히 누군가가 그렇게 상상해내었을 수 있다. 그런 전승을 마태복음에서 채용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점령할 때로부터 다위드 왕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적 간격이 있으므로, 라캅이 다위드의 고조 할머니일리는 없다. 아마도 이 족보에 생략된 대가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아무튼 메시야의 족보에 이방 여인이었던 라캅의 이름이 포함된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아브라암은 모든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고 하였는데, 실제적으로 이방인들이 편입되는 대표적인 경우로 제시되고 있다. 예수님은 단순히 육체적인 유대인들만을 위한 메시야가 아닌, 모든 민족을 위한 메시아로 오신 것이다. 여기에 모압 여인이었던 의 이름이 포함된 것도 주목할만 하다. 족보에 나오는 다른 두 여인들, 즉 다마르와 우리아의 아내 역시 이방인들이었다.

마 1:4 주해 +++ 마 1:6 주해

--[註]---------------------------
  1. 제2성전기(The Second Temple period)는 대략 주전 516년부터 주후 70년 사이의 기간을 가리키는 것으로, 예루살렘에 포로기 이후 세워진 성전이 존재했던 기간을 가리킨다. 예전에 신약과 구약의 중간을 가리키던 중간기를 대치하는 용어로 요즘 자주 사용되는 용어이다.[]
  2. 미드라쉬 기법은 종종 창의력과 상상력을 발휘하여 구약성경에 없는 내용을 언급하곤 한다.[]

마 1:4

– 이국진

1:4 Ἀρὰμ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Ἀμιναδάβ,  Ἀμιναδὰβ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Ναασσών,  Ναασσὼν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Σαλμών 아람(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다.

이 부분은 역대상 2:10-11과 룻기 4:19-20의 순서를 그대로 차용하여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은 한 세대만의 기간이라기보다는 훨씬 더 긴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1:3에 등장하는 유다, 파레스(베레스), 헤스롬(헤스론), 아람(람)의 계보를 포함하여 400년이 훨씬 넘는 기간일 것이다. 따라서 이 중간에 더 많은 대가 포함되었을 수도 있지만, 생략되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마 1:3 주해 +++ 마 1:5 주해

마 1:3

– 이국진

1:3 Ἰούδας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Φαρὲς  καὶ  τὸν  Ζάρα  ἐκ  τῆς  Θαμάρ,  Φαρὲς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Ἑσρώμ,  Ἑσρὼμ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Ἀράμ 유다스는 다마르(다말)에게서 파레스(베레스)와 자라(세라)를 낳고, 파레스는 헤스롬(헤스론)을 낳고, 헤스롬은 아람(람)을 낳았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 중에 메시야의 계보를 잇는 것은 유다를 통해서이다. 창세기 49:9-12는 야곱의 유언 중에서 유다에 대한 예언을 기록하고 있는데, 왕의 홀(scepter)이 유다를 떠나지 않고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여, 유다의 계보에서 영원한 왕 메시야가 올 것임을 예언한 바 있다. 안타깝게도 다윗은 유다의 후손이었지만 영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고,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우리와 똑같은 존재이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야곱의 예언적 유언은 또 다른 유다의 후손을 기다리게 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바로 예수님이 유다의 후손으로서 오신 메시야이심을 보여준다. 그 유다는 다마르이라는 여인을 통해서 파레스(베레스)와 자라(세라)를 낳았다(Ἰούδας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Φαρὲς  καὶ  τὸν  Ζάρα  ἐκ  τῆς  Θαμάρ).

창세기 38장은 유다가 어떻게 파레스(베레스)와 자라(세라)를 낳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다마르는 유다의 아내가 아니라, 며느리였다. 형이 자식이 없으면 동생이 형수를 취하여 형의 자식을 낳게 하는 형사취수(兄死娶嫂, levirate marriage, 고엘) 제도에 따라 유다는 다마르에게 시동생을 남편으로 주어야 했지만, 그 동생마저도 죽을까봐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에 다마르는 변장을 하여 유다의 자식을 임신하고 결국 자녀들을 낳았다.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막장 드라마같은 이 이야기는 고대 근동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다마르에게 정의가 실현되는 이야기이다. 약자일 수밖에 없고 남편은 둘씩이나 죽어버려서 인생이 비참해진 여인에게, 오히려 당시의 정당한 법적인 권리에 따라 자식을 안을 수 있는 기쁨이 주어지고 삶이 회복되는 이야기이다(cf. 창 38:26). 슬픔에 잠긴 여인에게 구원이 주어진 이야기이다. 삶이 비참해졌었는데, 놀랍게도 아이를 안을 수 있는 기쁨이 주어진 것이고, 그것도 둘 씩이나 안게 된 기쁨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이러한 인생의 역전을 꿈꾼다. 우리들의 이런 비참한 모습에도 소망은 있는 것일까? 내 모습만 살펴보면 전혀 가망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은 계신다. 엉망진창인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을 바라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유다는 의도하지 않은 채 다마르에게 구원자(고엘)가 되었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구원자(고엘)로 직접 이 세상에 오셨다.

족보에 여성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의 족보는 역대상 2:1-15와 룻기 4:18-22에 있는 것을 채용하고 있는데, 이미 역대상 2장에만 14명의 여인들의 이름이 등장하고, 역대상 3:5에서도 솔로몬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파레스가 헤스롬(헤스론)을 낳고, 헤스롬은 아람(람)을 낳은(Φαρὲς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Ἑσρώμ,  Ἑσρὼμ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Ἀράμ)것은 수백년의 기간을 포함한다. 이 기간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기간과 출애굽한 기간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구약에 의하면 이집트에서의 종살이 기간이 400여년이었으므로(cf. 출 12:40; 창 15:16; 행 7:6; 갈 3:17), 이 기간에 헤스롬, 아람, 암미나답의 이름만 기록된 것은 선택적 기록으로 보인다. 낳았다는 단어는 직접 낳은 경우뿐만 아니라 손자나 증손자 또는 고손자를 보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으므로, 이 사이에 몇 대가 더 포함될 수 있다. 이들 사이의 기간이 400여년이 되기 때문이다.

마 1:2 주해 +++ 마 1:4 주해

마 1:2

– 이국진

1:2 Ἀβραὰμ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σαάκ,  Ἰσαὰκ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ακώβ,  Ἰακὼβ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ούδαν  καὶ  τοὺς  ἀδελφοὺς  αὐτοῦ 아브라암(아브라함)은 이사악(이삭)을 낳고, 이사악은 야코브(야곱)을 낳고, 야코브는 유다스(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

영어 단어 bear나 give birth to는 주로 여성이 주어일 때 사용하는 표현이기 때문에, KJV 성경에서는 beget이라는 표현을 써서 번역하였고, NIV 성경에서는 was the father of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 표현 “낳다”는 어버이 모두에게 가능한 표현이기에 그냥 번역할 수 있다.

아브라암은 이사악을 100세에 하나님의 특별한 약속 속에서 낳았고(Ἀβραὰμ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σαάκ), 그의 아들 이사악은 에서와 야코브를 낳았다(Ἰσαὰκ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ακώβ).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미워하셨고 야코브를 사랑하셨다(말 1:2-3; 롬 9:13). 미워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은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았다는 표현을 달리 표현한 어법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이 야크보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사악이 낳은 아들은 에서가 언급되지 않고 야코브만 언급된다.

야코브는 라헬과 레아라는 아내들과 그들의 시녀 빌하와 실바를 통해서 12명의 아들들을, 즉 유다스(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았다(Ἰακὼβ  δὲ  ἐγέννησεν  τὸν  Ἰούδαν  καὶ  τοὺς  ἀδελφοὺς  αὐτοῦ). 그런데 예수님의 족보는 그 가운데 유다스라는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유다스의 이름이 특별하게 언급된다. 유다스 외에도 다른 형제들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들이기 때문이다.

마 1:1 주해 +++ 마 1:3 주해

마 1:1

– 이국진

1:1 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  υἱοῦ  Δαυὶδ  υἱοῦ  Ἀβραάμ. 아브라암(아브라함)의 아들, 다위드(다윗)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Βίβλος  γενέσ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탄생의 계보가 서술된 마태복음 1:1-17을 설명하는 제목의 역할을 한다. 물론 이 표현이 예수님의 탄생(γένεσις) 이야기 전체를 설명하는 제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면 크게 보아 마태복음 1:1-2:23까지를 포함하는 단락의 제목이 될 수도 있다. 마태복음 1:18에 탄생(γένεσις)라는 표현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도 충분히 가능하다. 이 표현이 마태복음 전체의 제목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보려면 탄생(γενέσεως)이라는 표현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Χριστός)라는 표현은 히브리어 메시야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구약 시대에 왕, 제사장, 선지자에게 기름을 부어서 임직하였는데, 구약 시대에 등장하는 그런 메시야들은 한결같이 부족하고 흠이 있는 메시야들이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은 그런 부족하고 흠이 있는 메시야를 넘어서는 완전한 메시야이기에, 예수님을 부르는 정당한 호칭으로 그리스도가 사용되고 있다. 구약의 메시야들은 언젠가 완벽한 모습으로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소망을 이루며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다위드의 아들(υἱοῦ  Δαυὶδ)이었다. “아들”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어느 언어에서도 마찬가지이듯이, 1차적으로는 문자 그대로 아들을 의미할 수 있지만, 2차적으로는 후손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위드의 몇대 손이지만 아들로 불릴 수 있다. 사실 다위드의 모든 후손들은 모두 다위드의 아들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예수님을 특별하게 다위드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사무엘하 7:12-13에 예언된 다위드를 대신하여 성전을 세울 바로 그 아들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아들이라는 표현 앞에 정관사가 생략되어 있지만, 다위드라는 고유명사와 더불어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위드의 한 아들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다위드의 바로 그 아들로 이해할 수 있다. 솔로몬이 나단의 예언에 따라 성전을 짓기는 하였지만, 그 성전은 불완전한 성전이었다. 그 성전은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해주지 못했고, 그곳에서 드려지는 제사는 종종 거부되었다(사 1:10-17). 결국 그 성전은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파괴되는 운명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성전을 짓는 것을 소망하게 되었다. 정말로 죄인인 인간을 하나님께로 연결시켜줄 수 있는 그런 성전을 오랫동안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전을 사흘 동안에 지을 것이라고 하셨고(마 26:61), 결국 우리를 하나님께로 연결시키셨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다위드의 바로 그 아들이다.

아브라암의 아들(υἱοῦ  Ἀβραάμ)은 문법적으로 다위드를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다. 둘 다 모두 아브라암의 아들이다. 하지만 후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아브라암의 아들들이지만, 예수님을 특별하게 아브라암의 바로 그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창세기 12:2-3의 약속을 이루기 위하여 아브라암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 것을 상기시키기 위한 것이다. 아브라암의 아들은 이삭이었지만, 그 아들을 통해서는 큰 민족을 이룰 수도 없었고, 복된 삶이 되지도 못했다. 그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될 때까지 소망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 약속을 성취할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마태복음 서론 +++ 마 1:2 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