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빨리빨리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한국 사람들이기 때문에 빨리빨리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DNA가 우리들에게 있는데요. 왜 이런 습성들이 우리들에게 생겼을까 생각해 보면, 아마도 과거에 조금만 지체하거나 조금만 기다렸다가는 어 내 것이 없었던 그 시절의 경험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먼저 가서 자지 하지 아니하고 먼저 가서 내 것을 확보하지 아니하면, 나중에 갔다가는, 내 것이 없을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불안한 상태에서, 어쩌면 우리가 자라고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은 늘 조급하고 무엇인가 빨리 하지 아니하면 안 되는 그런 불안감이 우리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사실 한국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모든 세계 사람들이 다 기다리는 것은 힘든 것이죠. 기다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잘 기다릴 수 있을까요? 좀 기다리면서 인내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몇 가지 팁이 있을 수 있겠는데요. 첫 번째는 어 기다리는 동안에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기다리는 것이 좀 더 쉬울 겁니다. 어떤 연구팀이 한 가지 실험을 했는데요. 엘리베이터가 작동되는 것을 늦추어서 아주 천천히 작동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살펴보았는데 30초가 지나자 사람들이 한숨을 쉬기 시작했습니다. 40초가 지나자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계단으로 가는 등 조급한 그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사람들이 그런 반응을 안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 해서 엘리베이터에 문의 앞에 앞쪽에 커다란 전신 거울을 달아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자신의 얼굴을 자신의 몸매 무시를 살펴보기도 하고 머리를 만지기도 하면서 그 거울을 보면서 좀 이렇게 그 시간을 때우다 보니까 아 사람들의 그 조급한 반응들이 조금 사라졌다고 하는 연구 실험 결과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기다리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기다리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 아닐 거라 생각이 드는 것이죠.
제가 미국에 갈 때마다 비행기를 타면 15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서 가야 되는데요. 15시간을 타고 가는 건 너무나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그 시간을 잘 기다리고 견딜 수 있는 이유는 텔레비전이 앞에 모니터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니크더에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영화들, 재미있는 영화들을 한 몇 편씩 보면서 아 그러면서 그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아마 기다릴 수 있는 중요한 팁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인가 할 일이 있다고 한다면 기다리는 것이 그만큼 쉬울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로 팁이 있다고 한다면 기다리는 것으로 인해서 내 권리가 사라지고 기다리는 것으로 인해서 손해를 보지 않을 거라고 하는 확신이 있으면 기다리는 것이 좀 더 쉬울 겁니다. 기다려서 늦게 갔더니 먹을 것이 다 사라져 버리고 기다렸다가 늦게 갔더니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그런 결과가 있을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지배적이면 기다리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이죠. 미국에서 살다 보면 미국 사람들이 대체로 기다리는 것을 그렇게 우리 한국 사람들보다는 어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봤더니 기다리면 자기 차례가 온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일들이 생겨서 기다려야만 되는 그런 상황 가운데 우리 한국 사람들 같은 경우는 그 시간에 화를 내기도 하고 온갖 일들이 일어납니다. 제주도에 갔다가 폭우로 인해서 비행기가 뜨지 않고 또는 폭설로 인해서 비행기가 뜨지 않는 그런 상황들이 발생하게 되면 제주에 있는 공항은 아주 아수라장이 되는 것이죠. 빨리 내 표를 해내라고 하면서 싸우고 다투고 고함을 치는 일들이 많이 발생하게 되는데 아마 그런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내가 가만히 있으면 침묵하고 있으면 내 비행기 티켓을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할 거라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특권층이 있을 것이고, 누군가 어떤 손을 쓸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 사람들은 자기보다도 늦게 왔는데, 훨씬 더 빨리 비행기를 타고 갈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 때문에 가만히 있지 못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모든 일들이 공평하게 정의롭게 순서대로 모든 것들이 진행될 거라고 하는 확신이 있다고 한다면 충분히 기다리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기다리면서 서로 농담도 하고 재미있게 즐기면서 기다리는 그런 모습들을 볼 수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것들이 조금 찾기 어려운 이유가 아마도 내가 가만히 있으면 손해를 볼 거다. 가만히 있으면 누군가 특권층이 그 내 자리를 빼앗아 갈 거라고 하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기다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기다렸을 때 손해가 되지 않는다. 공평과 정의가 작동된다고 하는 확신이 주어졌을 때 기다리는 것이 쉬울 거라 생각이 됩니다.
세 번째 기다릴 수 있는 팁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과를 아는 것도 기다리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이 됩니다. 기다림의 결과가 허탕이 아니라 기다리면 결국에는 결과가 있을 거라고 하는 것 때문에 기다리는 것이 가능한 것이죠. 농부가 씨를 뿌리면서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씨를 뿌리고 어느 정도의 기간이 지나면 열매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하는 확신 때문일 겁니다. 씨를 뿌리고 하루 이틀 그리고 일주일, 한 달 두 달 계속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결국에는 씨가 싹이 나고 자라고 결국에는 수많은 열매를 가져다줄 거라고 하는 확신 때문에 농부는 아주 행복하게 기다릴 수 있는 것이죠. 행복하게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결과가 분명하면 기다릴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군대라고 하는 곳에 가서 힘들지만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래도 국방부 시계는 간다라고 하는 믿음 때문이에요. 힘든 하루가 지났는데 그 힘든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결국에는 하루하루 저녁 날짜가 가까워진다고 하는 그 소망 때문에 견뎌 나갈 수가 있는 것이죠. 요즘 무척 더운데요. 더우면서 얼마나 힘드십니까? 너무나도 힘들고 일주일 내내 도대체 우리나라가 왜 이렇게 더운 나라가 되었는지 정말 견디기 힘든 상황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견뎌내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얼마 지나지 않으면 시원하고 아주 선선한 날씨가 올 거라고 하는 그런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추석이 올 것이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이제는 춥다고 할 때가 올 거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알기 때문에 견딜 수가 있는 것이죠.
갈라디아서 6장 9절의 말씀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믿음으로 살면서 선을 행하면서 살면서 그런데 이 세상은 악이 판치는 것 같고 정의는 꺾어진 것 같고, 오히려 악한 사람들은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이런 불합리한 세상 가운데서도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은 가르쳐 주기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기다리며 선을 행한다고 한다면 결국에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실 것이고 결과를 얻게 할 거라고 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가 기다릴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오늘을 기다리다 못해 잘못을 저지른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지난주에 살펴본 적이 있는데요. 모세가 시내산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면하며 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을 때 모세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는 것 자체도 기쁜 일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 십계명을 받아 든 순간 이 모세의 마음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 옛날 저 애굽 땅에서 바로의 그 끔찍한 법어에서 살았던 그 시절이 지나고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베풀어 주시는 그 은혜의 법, 축복의 법,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그 법을 볼 때 얼마나 기쁨과 감사 가운데 그 기간을 시내산 위에서 보냈을까 우리가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모세가 산속으로 들어갔는데 그래서 하나님을 만난다고 하고 그 산 위에는 아무도 올라오지 못하도록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데, 그 산으로 올라간 모세는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겁니다. 하루 이틀 정도가 아니라 40일이라고 하는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 모세가 돌아오지 않는 그 모습을 보게 될 때 이스라엘 민족은 기다리다가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모세가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우리들을 여기까지 인도했던 지도자가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이스라엘 민족들은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다리다가 지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할 일이 없었을 것 같아요. 또 모세가 오지 않으면 망할 수 있을 거라고 하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그들의 마음 가운데 있었을 겁니다.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하는 결과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지쳤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불안한 마음에 아론에게 달려가서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죠. 이러다가 죽는 것이 아닐까 내 인생이 이러다가 끝장 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원하는 이것이 해결되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아무런 결과가 없는 것 같은 그런 상황 가운데 있을 때 이스라엘 민족들이 생각해 낸 것은 우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1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뭔가를 하라는 것이죠.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기다리다가 모세를 기다리다가 돌아오지 않는 그 모세 때문에 이 이스라엘 민족들은 불안한 마음 가운데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모세를 대신할 우리를 인도할 그런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그렇게 아론에게 요청하게 되었는데요.
이러한 요청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잘못된 요청이라 하겠습니다. 바른 판단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지금 이 상황 가운데서 이스라엘 이스라엘 민족이 불안감을 느끼고 모세가 없어졌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공황스러운 그런 상태로 패닉한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당연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런 불안한 마음을 표출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스라엘 민족은 이 순간에 불안해하지 말아야 됐습니까? 왜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지금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있기 때문이에요. 매일매일 이스라엘 민족의 곁에서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하시는 그 하나님의 모습을 그들은 매일매일 보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한 그들과 진영 가운데서 구름 기둥이 있고 불기둥이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오셨다고 하는 그 증거들이 하나님께서 여전히 사랑하신다고 하는 증거들이 바로 눈앞에 보여지고 있기 때문이죠.
지금 사라진 것은 모세 한 사람만 사라진 겁니다. 사라진 것도 아예 없어진 것이 아니라 돌아올 걸로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그 모세가 잠시 자기들의 곁에서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완전히 망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이 순간에 불안감을 느끼고 당황해하면서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내라고 요구한 것은 그것은 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 가운데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서 만나가 매일매일 내리고 있는 겁니다. 광야에서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나가 내리고 있는 겁니다. 만나가 내리는데 매일매일 내리다가 안식일이 되면 내리지 않아요. 그랬다가 다시 일요일이 되면 또 만나가 내리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일을 계속해서 보면서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들에게 만나를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한다고 한다면 그 순간에 불안해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고 돌보시는구나라고 아는 믿음의 확신이 그들 가운데 있어야 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지금 자신들을 이끌던 모세가 보이지 않으니 그래서 모세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당황스럽고 그래서 정말 불안한 마음이 들 수가 있겠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는 구름 기둥을 보면서 불기둥을 보면서 그리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보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민족들이 이 모세가 사라졌을 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 우상을 만들어 달라, 황금 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달라고 한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왜 그들은 보이는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까지 모세와 함께 지내면서 모세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의존했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모세를 바라보면서 모세가 우리의 지도자구나, 모세가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했구나라고 하면서 모세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의지하게 된 것이죠.
모세가 누군가요? 모세는 그야말로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노예로 살아가는 그 이스라엘 민족을 바로와 담판을 지으면서 10가지 재앙을 하면서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낸 사람이 바로 모세였고, 홍해 바다에서 지팡이로 바닷물을 가르며 이스라엘 민족을 그 사이로 지나가게 만들었고, 하늘에서 만나을 내리게 해준 것 같았고, 반석에서 물을 내게 만든 것 같은 그 모든 일들을 행한 사람이 누구였는가 바로 모세였던 것이죠.
하지만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그 모든 일들을 모세가 한 것일까요? 모세의 힘으로 모세의 능력으로 한 것일까요? 아니요. 모세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죠.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셨고 하나님께서 공급하여 주신 것이지 모세가 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의 약속을 기억하시고 그 약속을 이루신 것이지 모세가 이 일을 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모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모세가 대단한 게 아니라 모세를 하나님께서 사용하셔서 그 일을 이루신 것이지, 모세가 없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그런 의미인 것이죠.
모세는 무엇인가? 모세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세는 무엇인가? 그저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신 도구란 말이죠. 모세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모세가 가다가 도중에 죽어요. 어디에 올라가서 죽습니까? 느보산에 올라가서 죽습니다. 가나안 땅을 저 앞에 바라보고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이 바로 저 앞에 있는데 그 가나안 땅에 넘어가지 못하고 누보산에 올라가서 거기서 죽습니다. 제가 이번에 성지순례에 가서 그 노보산 위에 올라갔어요. 모세가 죽었다고 하는 그 산에 올라가서. 그래서 저 서쪽으로 가나안 땅을 보라고 하니까 정말 보여요. 사해 바다가 저 앞에 보이고 사해 바다 건너편으로 가나안 땅이 보이는 그 느보산 그 정상에서 저 멀리 바라보는 저 가나안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저 앞에 보이는데 모세가 거기서 죽고 말아요.
그래서 모세가 죽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의 그 역사가 끝났는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끝났는가? 그게 아니라 모세는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사용하셔서 그 여호수아를 이용하셔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드리신 거죠.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이 누구로부터 말미암았는가? 모세와 아론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하신 것이고 모세는 무엇인가?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이죠.
예전에 우리 교회에서 복화술로 메시지를 전해주었던 안재우 소장이 오신 적이 있습니다. 기억이 나십니까? 그때 나왔던 한변 장면 한번 보실까요? 예. 안재호 소장이 와서 저 인형을 가지고 깡여사 인형을 가지고 재미있게 복화술을 했었는데요. 이 안재호 소장이 그 인형을 가지고 막 하다가 그 안재호 소장이 그 손을 그 인형에서 뺐어요. 그랬더니 어떻게 되던가요? 그 인형이 아무 말도 안 하는 거예요. 아무렇게 움직이지도 않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있는 거예요. 딱 여자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말을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재우 소장이 말을 한 거였고 움직인 거였고 그것에 따라 움직인 것처럼 보였을 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죠.
아무런 생명이 그 안에 없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모세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세는 깡여사와 같은 거야. 하나님께서 잠시 그때에 잠시 붙들어 쓰신 사람이었을 뿐이지 모세가 지금 자신들의 앞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은총이 사라졌는가 그게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망각해 버린 것이죠.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들을 바라보면서 그 도구에 열광할 때가 많습니다. 모세가 사용했던 지팡이에 열광하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셨던 언약교에 열광하기도 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던 장소인 성전이라고 하는 건물에 열광하기도 하고, 바울 사도가 사용했던 그 수건에 열광할 때가 있는 것이죠. 그게 어쩌면 우리 인생들의 약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중세 시대 때 사람들은 성경의 유물들에 대한 관심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성지에 대한 관심, 성물에 대한 관심들이 정말 많았죠. 그래서 중세 시대 때 사람들은 어떻게 했냐면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께서 사용했던 것들을 찾으려고 부단히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 만찬을 하면서 마셨던 그 성배, 그 컵, 그 컵을 찾기 위해서 부단한 노력을 했어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입었던 그 옷, 그 벗었던 그 옷을 찾으려고 부단한 노력을 했어요. 예수님께서 묻혔다고 하는 그 무덤이 어딘가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가졌어요. 왜 이런 관심을 가졌을까요? 중세시대 때 사람들 지금도 그런 것들이 천주교에 많이 남아 있지만 그 사람들의 생각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무엇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더 하나님께서 더 응답을 잘해 주실 것인가 이런 예수님이 입었던 그 옷 앞에서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사용하셨던 그 포도주 잔 잔을 붙들고 기도하고 예수님께서 그 당시 묻혔던 무덤에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더 많이 응답해 주시지 않을까 그런 유물들에 대한 관심들이 굉장히 많아서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성지를 탈환하려고 했었고 그런 운동들이 많이 일어난 것이죠.
성지 순례에 갔더니 지금 이스라엘의 성지 유적마다 유적마다 기념 교회들이 세워져 있고 그 기념 교회 안에서 수많은 종파가 와서 예배를 계속 드리고 있어요. 그 의미가 뭐냐 하면 우리가 다른 곳에서 예배드리거나 다른 곳에서 기도하는 것보다 바로 이 성전의 유물, 예수님께서 직접 밟았던 그 땅 거기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기도에 응답해 주지 않겠느냐라고 하는 잘못된 생각에서 자꾸만 그런 곳에서 예배를 드리려고 하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죠. 거기 와 있던 종파들을 보니까 다 좀 약간 잘못된 그런 종파들이 다 거기에 와서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칼빈 개혁주의 교단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볼 때 그 모든 것들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잠시 사용하셨던 도구에 불과한 것이고, 그 도구들은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에 그런 것이죠.
모세가 무엇인가? 모세가 사라져도 괜찮은 거예요. 안 와도 아무 문제가 없는 거예요. 왜 여전히 하나님은 계시니까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들이 없어질 때마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누렸던 위치, 때로는 돈 때로는 어떤 성공, 이 세상을 살아갈 때 필요한 것들, 그 모든 것들 거기에 우리의 목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 것처럼 보이고,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기쁨을 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들인데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다. 한때 사용되었던 모세의 지팡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그냥 막대기에 불과한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언약궤를 들고 요단강을 가르기도 했고, 그 언약궤를 들고 여리고성을 돌면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렸던 그 언약궤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않으면 그냥 상자에 불과한 것이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스라엘 민족들은 모세를 너무나 많이 의존했던 겁니다. 모세를 통해서 10가지 재앙이 나타났고, 홍해 바다가 갈렸고, 만나가 내려오는 것을 보면서 모세가 자신들을 인도해 냈다고 생각한 것이고, 모세가 사라지자 모세를 대체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그 무엇인가를 요구하게 된 것이죠. 그것이 어리석은 것일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 길에 모세가 사라지는 일들이 반드시 옵니다. 이것이 우리를 살리고, 이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고 생각되었던 것들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내 손에 잡히지 않는 일들이 계속해서 반복해서 나오는 경우들이 있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들의 마음은 너무나도 힘듭니다. 모세가 우리를 내팽개치고 우리를 놔두고 어느 날 사라져 버린 것 같이 우리는 고아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은 나를 돌보시지도 않고, 내 기도는 응답하지 않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사야서 49장 15절 16절의 말씀에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대에서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절대 그럴 리가 없죠. “그러나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손바닥에 새겨서 지워지지 않게 내 이름을 새겼다. 하나님의 손에 내 이름을 기록했다. 말씀해 주고 계시는 거예요. 이 세상의 것들이 사라져도 하나님께서는 그냥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고아와 같이 내버려 내팽개쳐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 말씀에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다 깡여사와 같은 것들이에요. 하나님께서 함께하지 아니하시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불안해하고 당황스러워하면서 우상을 향해 달려갈 것이 아니라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죠. 내가 만들어 놓은 그 우상이 나를 구원하겠습니까? 내가 그 우상의 신이 되면 됐지 그 우상이 나를 살리겠습니까? 이 세상의 헛된 우상에 우리가 나아갈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손길로 인도해 주실 그 하나님이 과연 나를 어떻게 빚으셔서 어떤 길로 인도해 주실지, 어떠한 열매를 맺어가실지 기대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