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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와 메추라기 (출 16:4-8)

지난 시간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바다 앞에서 몰살당할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건져주신 아주 흥미롭고 놀라운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런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홍해의 바다를 가르시고 마른땅으로 지나가게 하시며, 또한 추격해 오던 애굽 군대를 수장시켜 버리는 그런 어마어마한 일을 경험하면서,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모면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어려움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제는 더 이상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산 너머 산이라고 하는 우리들의 인생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가는 그 길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살펴보게 되는 이 이야기는 광야의 길을 가는 동안에 이스라엘 민족에게 먹을 양식이 떨어져 버린 그 상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모두 몇 명이었죠? 60만 명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인데요. 이 60만이라고 하는 사람의 숫자는 남자 어른들만 카운트한 것이기 때문에 12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이나 그리고 여성의 숫자까지 포함한다면 대략 한 200만 명의 인구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200만 명이면 어느 정도의 숫자죠? 잘 모르겠죠. 전라북도의 인구가 몇 명인가 살펴보았더니 173만 명이라고요. 그러니까 전라북도 인구보다도 비슷하거나 아니면 좀 더 많은 인구가 어 한꺼번에 몰려나와서 광야의 길을 걸어가는 동안에 어 이 양식을 구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을 먹는 것은 그저 7일 정도의 짧은 길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면 아무 문제 없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빙 돌아가는 길 광야 길로 가게 되는 그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가져온 그 양식이 다 떨어져 버려서 이제 아무것도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아니한 그런 상황 가운데 내몰리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먹을 것이 다 떨어지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출애굽기 16장 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스라엘 민족은 지금 이런 상황 가운데서 자신들을 인도해 냈던 지도자 모세를 향해서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기 시작한 것이죠. 그런데 이 이스라엘 민족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불과 얼마 전에 홍해 바다를 가르고 그 땅을 마른 땅으로 건너가는 기적을 경험했던 사람들이에요.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신 그 사건을 생생하게 경험했던 이스라엘 민족이 어느 순간에 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은 다 망각해 버리고, 그리고 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고 비난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이 정말 놀라운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쉽게 잊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무엇을 기억하고 있어요? 애굽 땅에서 먹었던 것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선별적으로 기억하는 가 옛날에 있었던 그런 기억들에 대해서 선별적으로 기억하면서, 아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홍해 바다에서 건져내 주신 그 엄청난 놀라운 기억들에 대해서는 다 망각해 버리고, 아니 10가지 재앙을 통해서 구원해 내셨던 그 이야기도 다 잊어버리고, 그냥 이 순간에 먹을 것이 없다고 원망하고 있는 모습이 이스라엘 민족인데 왜 이러는 것일까요?

그런데 바로 이게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누군가 우리들은 너무나도 연약해서 좋았던 기억들, 은혜와 사랑에 대한 기억들은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친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지금까지 좋았던 것이 너무나도 많은데 너무나도 많은 그 좋은 것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요. 친구가 원수가 되어 버리고, 나에게 그렇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사람이 조그마한 잘못 했다고 원수가 되어 버리고, 전혀 그 따뜻했던 그 좋았던 기억들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인생의 연약한 모습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 순간에 먹을 것이 떨어졌다고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은 옳은 일일까요? 옳지 않은 일일까요? 옳지 않은 일입니다. 정당하지 않습니다. 왜 정당하지 않습니까?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잘 살았던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그 애굽 땅에서 고통을 당해서 하나님께 울부짖으면서 정말 살려달라고 울부짖었던 사람들이 바로 이 이스라엘 민족이었고, 그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하나님께서 이끌어내어 주셨는데, 그 과거가 더 좋았다고 말하는 이 말이 옳지 않은 것이고 정당하지 않은 것이죠. 더 나아가서 이렇게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은 유익하지도 않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전혀 유익하지 않습니다. 원망한다고 해결이 됩니까? 비난한다고 해결이 됩니까? 이 순간에 서로 싸우고 다툴 것이 아니라 서로 격려하며 서로 품어주며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같이 머리를 맞대고 함께 노력해야 될, 서로 사랑해야 될 사람들이 서로를 향해서 원망하고 손가락질하고 비난하는 것은 전혀 실익이 없는 이익이 없는 헛된 모습이라 말하지 아니할 수가 없는 것이죠. 지난 시간에 그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요.


오늘 말씀에서는 여기에 더해서 한 가지 더 살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원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불신앙적인 행위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16장 8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오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지금 이스라엘 민족은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의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원망하는 것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요?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해 내신 분이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인도해 주셨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모세와 아론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은 사실은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이고, 그것은 불신앙적인 행위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는 어떤 모습을 보이는 것이 옳겠습니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먹을 것이 다 떨어졌을 때 우리들의 눈앞에 정말 커다란 장벽이 버티고 있을 때, 우리들의 앞에 아무런 소망도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가져야 될 마음의 태도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정답을 찾아낸다면 항상 기뻐하라 주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게 하나님의 뜻이에요. 원망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불평하는 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게 아니고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어떠한 어려움을 만난다고 하든지 그것 때문에 좌절할 것이 아니라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모든 일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언제 기뻐해야 합니까? 우리는 언제 감사해야 됩니까? 좋은 일이 있을 때만이 아니에요. 좋은 일이 있을 때에는 물론 기뻐하고 감사하는 거 당연하겠지만 앞이 꽉 막혀도 수렁 속에 빠져도 원망하고 불평하는 게 정당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게 아니라 그 순간에도 하나님을 생각하며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 그게 우리 성도들이 가져야 될 마음의 태도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쉬운 일이 아니죠. 아마 성도님들이 저한테 그럴 거예요. 목사님도 그렇게 합니까? 저도 못해요. 저도 당장 어려운 일이 생기면 마음이 무너지고 힘든 일이 생기면 저도 불안하고 감사가 나오기보다는 불평이 먼저 나오고 그게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거예요.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려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다 감싸주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그 주님 앞에 나아가서 주님 우리들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주님 우리들의 부족한 것을 감싸주옵소서. 넘어졌어도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절망적인 생각이 떠오를지라도 주님께서 다시 저희들에게 힘을 주셔서 다시 일어나고 기뻐하고 다시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의 능력을 허락해 주옵소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 4장 16절의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우리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너무 힘들어서 주님 앞에 나오면 외면해 버리고 쫓아버리시는 주님이 아니라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등 두드려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도 주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먼저 불평하기에 바빴고 지도자를 향해서 원망하기만 한 거죠. 이렇게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합당한 대우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일까요? 믿음이 없고 원망하고 불평만 하는 이런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당연한 대우일까요? 책망해야 되겠죠. 혼내주셔야 되겠죠. 제 마음도 그래요. 누군가 땡깡 쓰고 어거지 쓰고 불평하면 주고 싶다가도 안 주고 싶은 마음이 우리들의 마음일 거예요.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아주 놀라운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놀랍게도 내가 너희에게 하늘에서 양식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내가 너희에게 양식을 주겠다. 저녁에는 고기로, 아침에는 빵으로 주겠다고 말씀하셔요. 왜 하나님께서 책망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응답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믿음이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는 그 이스라엘 민족 아니 불과 얼마 전에 홍해 바다를 건너는 그런 기적을 체험하고도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런 배은망덕한 이스라엘 민족을 향해서 왜 하나님께서는 또다시 이런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은 우리가 지금까지 생각해 왔던 공식과는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식은 뭔가요?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주시고, 우리가 헌신의 자리로 나갈 때 하나님께서 사랑을 베풀어 주시고, 정말 믿음의 반응을 보여주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는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공식이에요.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게 우리들의 공식인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는 이런 이스라엘 민족에게 그들을 심판해 버리고 끝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만날을 베풀어 주시겠다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염라대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못하면 책망해버리고 끝내버리고, 우리가 잘하면 칭찬해 버리고 끝내버리는 무정한 염라대왕과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의 엄마 같은 하나님, 우리의 아빠 같은 하나님,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라고 한다면 모든 것을 다 내어주기 원하시는 그런 우리들의 부모님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 정말 인간적으로 보면 너무나도 마음에 안 드는 민족이에요. 인간적으로 보면 배신하는 민족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전혀 모르는 민족이에요.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 민족을 내팽개쳐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놀랍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말씀 가운데 기록되어 있는 것이죠.


이번에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다고 하는 뉴스를 이번 주 내내 보게 되면서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뉴스를 보고 있는데 그 뉴스에서 나온 한 장면이 참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홍수가 나서 집 안의 모든 가재도구들 다 다 못 쓰게 되고 완전히 물에 잠기게 되는 그 상황 가운데서 어떤 사람이 그 집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그 장면을 어떤 기자가 찾아가서 인터뷰를 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분이 무엇인가 가방 안을 들고 안고 나오는 거예요. 그래서 물어봤어요. 죄송하지만 무엇을 들고 나오십니까? 그 안에 무엇이 있길래 이것을 들고 그 안에 무엇을 들고 나오셨으니까 마지막에 무엇을 들고 나왔느냐 그 안에 뭐가 있었을까요? 금은 돈이 들어 있었을까요? 땅문서가 들어 있었을까요? 뭐가 들어 있었을까요? 그분이 대답하기를 우리 아들 노트북 들어 있어요. 그리고 아이의 옷까지 챙겨 갖고 나왔대요. 우리 아들 대학생인데 리포트 써야 되는데 그 아이를 위해서 비 오는 순간에 뭘 갖고 나갈 것인가 다른 게 아니라 아들을 위해서 모든 걸 다 그것만 갖고 나온 거예요. 그게 바로 우리 부모님들의 사랑인 것이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오늘 우리가 다시 한번 발견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만나를 주시면서 그 만나를 주시는 방법이 약간은 특이했습니다. 한꺼번에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주신 것이 아니라 조금씩 매일매일 먹을 양식만을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죠. 출애굽기 16장 4절에서부터 5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아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에 갑절이 되리라.” 하나님께서 그 양식을 내려주시는데 매일매일 먹을 양식만 내려주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오늘 것만 받아 가지고 가야지 다음 날을 위해서 그다음 날을 위해서 많이 남겨놓지 말고 그날 것만 가져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그런 게 아니잖아요? 오늘 먹을 것이 있어도 내일 것 모레 것까지 미리미리 쟁여두고 싶은 게 사람들의 마음이잖아요? 내일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고 내일은 하나님께서 안 주실지도 모르고 내일은 아무런 것도 없을 수 있으니까 지금 모아두어야 되겠다고 하는 게 사람들의 마음일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이 그 양식을 좀 며칠 분을 거두어 놓았지만 그다음 날이 지나니까 다 썩어버리고 다 냄새나버리고 벌레 먹어버리고 더 먹을 수 없게 만들면서 하루치만 먹어라 하루치만 가져가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안식일에는 일을 하지 않아야 되니까 안식일 전날 이틀 분을 챙기라고 말씀하셨고, 이틀 분을 챙겼는데도 그다음 날에는 그 만나가 썩지 않는 그런 놀라운 기적들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좀 까다로운 방법으로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한꺼번에 많은 걸 줄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일까요? 그건 아니에요. 하나님이 하신다고 한다면 40일분도 한꺼번에 내려주실 수 있고, 쟁이게 하실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하신다면 주택 복권 맞게 해 주실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한다면 갑자기 일확천금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주실 수도 있는 분인데,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이렇게 하시는가 이유를 생각한다면, 첫째는 그래야 골고루 모두가 다 공평하게 나누어 먹을 수 있기 때문인 것이죠. 출애굽기 16장 18절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오멜로 되어 본 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부족한 사람도 없고 남는 사람도 없고 모두가 다 공평하게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날 그날만 가져갈 수 있도록 하루치만 주신 것이죠.


우리의 욕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200만 명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200만 명의 분을 주면 200만 명이 못 먹어요. 왜요? 서로가 많이 가져가는 400만 명분을 주면 200만 명이 먹을 수 있나요? 아니요. 모질라요. 한 사람이 많이씩 가져가 버리면 400만 명분어치를 줘도 200만 명이 먹을 수가 없어요. 그게 원리인 것이죠. 콩 한 조각도 나누어 먹으면 모든 사람들이 함께 배부르지만, 큰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배고픈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고, 가지지 못한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모두가 다 함께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돌보며 함께 잘 살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 이런 방법으로 주신 것이고요.


두 번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사는 것이 땅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산다고 하는 것을 기억하게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줄이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내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내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무엇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오 떡으로만 사는 게 아니요.” 빵으로 사는 게 아니오 돈으로 사는 게 아니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내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안타깝게도 우리는 늘 착각을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우리가 사는 이유가 뭐예요? 원인이 뭐예요? 하나님 때문에 사는 건데, 공급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사는 것인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빵 때문에 내가 산다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이 준 그 선물 때문에 우리가 산다고 선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래서 빵이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버리면 하나님을 우리가 섬겨야 되는데, 하나님이 아니라 빵을 우상으로 섬기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결국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 먹지 못하게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보다는 서로가 경쟁하며 시기하고 질투하며 그렇게 서로가 하나 되지 못하고 죽어갈 수밖에 없는 것이고, 빵이 우상이 되면 어떻게 됩니까? 빵이 눈앞에서 사라질 때 절망하게 되는 거죠.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다 썩어질 것이고 다 없어질 것이고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거예요. 빵이 우상이 되면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빵이 없어지는 그것을 보면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어떻게 우리가 감사하냐고요? 하나님이 계시니까요. 빵은 없어져도 하나님이 계시니까! 어떻게 우리가 기뻐하냐고요?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우리가 절망하지 않고 힘과 용기를 얻는 거예요. 빵을 우상으로 섬기면, 그 빵 하나에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것이고 결국 망하게 되는 것이죠. 주님께서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돈을 다 갖다 내버리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돈을 우리의 우상으로, 우리의 하나님으로 섬기지 말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어떤 기도가 돼야 됩니까? 잠언서 30장 7절에서 9절에 기록된 것과 같은 아굴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되는 것이죠. 아굴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빵이 우리를 살리는 게 아닙니다. 빵이 없어진다고 해서 절망할 게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하셔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어주신 그 하나님이 우리 옆에 계십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항상 감사하고 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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