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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 (마 6:26-34)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함께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됐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아주 유명한 말씀이죠.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향해서 염려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 염려할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인생이라고 하는 게 쉽지 않아요. 인생 가운데 정말 아무 문제없고, 근심 걱정 없고 참 편안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싶은 게, 우리들의 마음인데 우리의 인생은 늘 어려움이 있습니다. 늘 아픔이 있습니다.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그런 아픔과 근심 걱정거리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 계십니까? 없어요. 나만 걱정하는 것 같고, 나만 힘든 것 같고, 나만 고통스러운 것 같지만, 그리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다 행복해 보이고, 아무 문제없는 것 같고, 다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니에요. 말할 수 없는 그런 아픔들,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근심과 걱정거리들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게,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냐 하면, 염려하지 말라. 염려할 일들이 많고 근심과 걱정이 많지만, 그렇다고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우리를 향해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겁니다. 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할까요? 왜 우리는 근심 걱정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염려해 봤자 소용이 없어서 그래요. 염려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나요? 없어요. 근심 걱정한다고 문제가 사라집니까? 아니에요. 오늘 마태복음 6장 27절의 말씀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염려한다고 해서 키가 1cm 더 자라는 거 아니라는 거예요. 여기서 키로 번역을 했지만, 이 원어의 의미는 키로 번역할 수도 있고 생명의 연수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염려한다고 키가 커지는 것도 아니고, 염려한다고 인생의 길이를 더 길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염려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을, 우리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심과 걱정은 우리를 더 힘들게 만드는 백회 무익한 것이기 때문에, 염려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당연할 줄로 믿습니다. 옆 사람한테 한번 얘기해 주시죠. 염려하지 마세요.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말해요. 염려하지 말아야지.

우리는 안타까운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나면 어떤 반응을 주로 보입니까? 첫 번째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염려와 근심으로 더 힘든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게 우리들의 일반적인 반응인 것이고요. 그뿐만 아니라 우리들이 보여주는 흔한 반응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비난의 대상을 찾아서 비난하는 겁니다. 화풀이 대상을 찾아서 희생양을 찾아서 우리들의 분노를 쏟아버리는 것이죠. 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나요? 아니에요.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다윗과 그 부하들이 다른 곳에 있을 때, 아말렉 민족이 와서 성읍들을 불태우고, 그리고 부녀자들을 다 끌고 가는 그런 엄청난 재난을 당하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멀리 갔다가 돌아온 다윗과 부하들이 그 모습을 보고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죠.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습니다. 모든 재산이 다 불타버렸어요. 부인이 다 끌려갔어요. 자녀들이 다 끌려가 버리고 말았어요. 그때 이스라엘 민족들이 했던 일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다윗을 향해서 돌을 들어 던져 죽이려고 했어요. 다윗이 우리를 지켜주지 못했다. 다윗이 우리의 가정을 지켜주지 못했다고 하면서 지도자를 향해서 돌을 던지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재산이 다시 잦아지게 되죠? 그렇게 하면 다시 끌려갔던 부녀자들을 다시 찾아올 수 있나요?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인생들은 너무나도 죄성이 심해서, 함께 협력하고 위로하고 그래서 “이 어려운 난국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라고 하는 생산적인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화풀이만 하는 대상들을 찾아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는 것이죠.


그건 그 당시 다윗의 시절에만 있었던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어쩌면 바로 오늘 우리들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가정에 문제가 있으면 아이들은 뭐라고 얘기해요? 이게 다 엄마 탓이야. 이게 다 아빠 탓이야. 부모를 원망해요.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향해서 원망합니다. 왜 그때 그렇게 해가지고, 왜 그때 그런 식으로 일을 해가지고, 우리를 힘들게 하느냐고, 서로를 향해서 대못을 박아버리고, 서로 힘들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하는 게, 바로 죄성이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가정을 만들어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서로 분노해 버리고 원망하면서, 그렇게 반응을 보이라고, 우리 가정을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 힘들고 어려울 때 서로 손 잡아주라고 엮어주신 거예요.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남편을 비난하고 욕할 게 아니고 아내를 향해서 분노를 쏟아버릴 게 아니고, 우리 부모님들을 향해서 자녀들을 향해서 욕을 할 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서로 손 잡아주고 힘내자고, 다른 거 다 없어져도 괜찮다고, 우리가 함께 이겨내자고, 서로 가정을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이유가 있다고 한다면 힘들 때 서로 손 잡아주라고 만들어 주신 거예요. 우리 자녀들이 힘들 때 부모님을 통해서 부모님들을 통해서 우리 자녀들이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만들어 준 거예요. 부모가 자녀들을 향해서 비난하고, 욕하고, 왜 그딴 식으로 밖에 못했느냐고 비난하라고 부모님을 만들어 준 게 아니라, 자녀들이 힘이 빠졌을 때, 괜찮아. 다 괜찮아. 우리가 끝까지 도와줄게 하라고, 부모님을 만들어준 것이고, 정말 성격도 맞지 않고 마음도 맞지 않는, 정말 도무지 같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남편과 아내를 서로 묶어준 이유가 뭐예요? 힘들고 어려울 때 같이 손 잡아주라고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아무 유익이 되지 않은 염려 근심으로 더 힘들어하고, 그리고 서로를 향해서 원망하고 비난하면서 가정이 깨어지는 그런 안타까운 결과를 맞이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예수님께서 해주신 이 말씀을 우리가 늘 마음속에 기억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아주 잘 기억하도록 예수님께서 비유를 통해서 말씀해 주신 거예요.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고 오늘 할 일만 하고 내 일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 주님께서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요.


이 말씀을 우리가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고 계획도 세우지 말고 그냥 될 대로 돼라 하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고 말씀해 주시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4장 28절에서부터 32절의 말씀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할진대, 자기의 가진 것이 준공하기까지에 족할는지 먼저 앉아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렇게 아니하여 그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하면, 보는 자가 다 비웃어 이르되 이 사람이 공사를 시작하고 능이 이루지 못하였다 하리라. 또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갈 때 먼저 앉아, 1만 명으로서 저 2만 명을 거느리고 오는 자를 대적할 수 있을까? 헤아리지 않게 아니하겠느냐? 만일 못할 터이면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할지니라.” 모든 일을 할 때 어떻게 해야 된다는 얘기예요? 계산해 봐야 된다는 거예요. 계획해 봐야 되는 거예요. 미래에 대해서 준비해야 된다는 거예요. 미래에 대해서 계획해 보고 따져보고, 그래서 승산이 있는지 없는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닌 것인지, 철저한 계산 가운데 잘 준비해서 모든 일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일 될 대로 돼라. 어떤 식으로 되든지 하나님께서 해주시겠지 하면서, 아무렇게나 인생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무계획적으로 사는 것이 괜찮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아무런 계획이 없이 대책이 없이, 그냥 무대포로 그냥 믿음만을 가지고 무작정 달려 나가는 게 그게 바른 믿음이라고 가르쳐주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 걱정하지 말라 말씀하시는 그 말씀의 의미는 계획적인 삶을 살지 말고 미래에 대한 계획 같은 거 세울 필요가 없다고 말씀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과도한 근심과 염려 때문에 두려워서 불안해하고 걱정하면서 그렇게 정말 힘들게 인생을 살아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담대하게 오늘을 충실하게 살라고 하는 그런 의미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을 주셨다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 세상에 근심 걱정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고, 안 되는 것도 많고, 문제도 많고, 참 힘든 거,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앞에 많이 놓여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그 어려운 문제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하면 염려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할 때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셔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내버리시더라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는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가 알기에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가운데 걱정과 근심 가운데가 아니라 오히려 담대하게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도 아주 쉬운 얘기예요.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 새들이 농사짓는 거 봤냐 보셨습니까? 아니에요. 남들이 해놓는 거 따먹는 거지 그 새들이 창고에 모아들이는 거 봤냐? 글쎄요. 모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고, 조류학자라고 한다면, 조류 전문가라고 한다면 아마 새들이 모이를 모아두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낮 미물에 불과한 그 새들도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기르시는 것을 보면서 이 미물보다도 너무나도 소중한 우리를 하나님께서 외면하시겠는가? 하나님께서 그냥 내팽개쳐 두시겠는가? 기억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들에 핀 백합화를 봐라. 이 백합화가 길쌈질하는 거 봤느냐? 옷 만든다고 그러는 거 봤느냐? 아니에요. 쿠팡에 주문하는 거 봤느냐? 아니에요. 그 미물도 오늘 있다가 내일에는 쓰러져버리고 아궁이에 던져지는 그런 들풀도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입히신다고 한다면, 이런 들풀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고 훨씬 더 사랑하는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그냥 외면하시겠느냐? 하나님께서 그냥 내팽개쳐 두시겠느냐? 이 말씀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너무나도 쉬운 말씀인데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하늘을 보세요. 공중의 새가 날아가는 걸 보면 저 공중의 새도 하나님께서 입히시는데 먹이시는데 힘들고 어려울 때 들판에 꽃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저 들판에 꽃들도 식물들도 돌보시는데 그걸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염려하지 말고 걱정하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설사 우리들의 삶 가운데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진다고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됩니다.

왜 두려워하지 말아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육신의 부모님을 보면 불안합니까? 확신이 생깁니까? 불안하죠. 우리들의 연로하신 부모님을 보면 불안해요. 왜 불안하죠? 우리 부모님이 나를 제일 사랑하는 것은 알겠어요. 하지만 무엇이 없어요? 능력이 없어요.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치매도 오시고 이제는 연세가 많으셔서 자신의 몸을 가누기도 힘들고 나를 사랑하는 건 아는데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위해서 더 이상 해줄 게 없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육신의 부모님을 보면 불안한 거죠.


이번에 우리 딸이 결혼해서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요. 다음 주일 지나고 가게 되는데 미국에 가는 김에 무슨 계획을 세웠냐면, 우리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뮤지컬을 보러 갈 계획을 세웠습니다. 표들이 다 매진이 돼 있는데 정말 가까스로 표를 구하게 됐어요. 표를 구하게 됐는데 어떤 날 표를 구했냐면, 미국에 도착하는 날 바로 그다음 날 오후 3시 표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묻고 있는 호텔에서부터 운전을 해서 하이웨이로 3시간 정도 가서 구경하고 와야 되는데 제가 운전해서 가겠다고 하니까, 우리 딸이 뭐라고 얘기했냐면, “안 돼. 아빠, 그 시간에 여독도 풀리지 않았을 거고, 이제는 졸릴 테고, 가다가 사고 나면 큰일 나니까, 아빠 안 돼. 아빠가 지금 젊은 줄 알아? 옛날의 아빠가 아니야.” 그러는 거예요. 저는 자신 있는데 왜 자꾸 그렇게 저를 그렇게 보는지, 좀 씁쓸하긴 합니다마는, 우리 아이의 눈에 제가 이제 늙었어요. 늙어서 그냥 불안해서 그냥 못 보겠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가 직접 드라이브를 해주겠다 그래요.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육신의 부모님은 우리를 사랑하지만, 그러나 더 이상 도울 수도 없고, 더 이상 우리를 위해서 해줄 수도 없고 우리의 곁을 떠나기도 하고, 우리와 함께 더 이상 영원히 있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육신의 부모님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히 함께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그 어떤 것도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근심과 걱정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이 세상을 주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 어려운 일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우리는 묵상해야 되는 거예요. 과연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이루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망하라고 내팽개쳐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 골탕 먹으라고 우리를 정말 힘들고 어려운 고난 속으로 우리를 처박아 놓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그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런 어려운 일을 겪게 만드신다고 한다면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주셨을까 묵상해야 되는 거죠.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예방 접종을 맞게 하기 위해서 병원에 데려갑니다. 그러면 우리 꼬마 아이는 그 사실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요. 사랑하는 엄마, 사랑하는 아빠가 나를 병원에 데리고 와서 주삿바늘로 나를 찌르려고 하는 그 앞에서 너무나도 두려워 떨면서 막 반항하기도 하는 겁니다. 울기 시작하는 겁니다. 주사 맞기 싫다고 맞기 싫다고. 그런데 부모가 그 아이를 데리고 가서 굳이 그 예방 접종을 맞게 하는데 그 이유가 뭐예요? 평상시에 말 안 들었으니까, 골탕 먹이려고? 평상시에 엄마 말 안 들었으니까, 혼내주려고 그게 아니라, 아이로 하여금 건강하게 만들고, 더 잘 성장하게 만들기 위해서, 필수 과정으로 그 아이에게 예방접종을 맞게 하듯이, 우리들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우리가 만난다고 한다면 근심과 걱정할 것이 아니라 묵상해야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어떠한 일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은 결국 이 일을 통해서 어떤 영광스러운 길로 나를 인도해 주실 것인가?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을 늘 묵상했어요. 하나님이 왜 나를 지금 이런 상황 가운데로 집어넣으시는가? 다윗은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서 피난길을 오르게 되었고, 그 피난길에 오르는 동안에 시므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서 흙먼지를 날리며 다윗을 욕하는 그런 상황이 되었을 때, 모두가 다 화를 내면서 그 시므이를 죽이려고 했지만, 그 순간에 다윗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만 둬라. 하나님께서 저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저주하라 하심이니, 그 시므이에게 원수를 갚은 것이 아니라, 다윗은 그 순간에 자신의 죄를 생각해 내고 회개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 순간을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무엇을 깨닫게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해 낸 것이죠.

요나는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이 일게 되었을 때, 모두가 다 아무것도 몰라서 당황하고 있는 그 순간에, 요나는 이 모든 것이 나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 나로 하여금 회개하게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고, 내가 죄인이라고 하는 사실을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될 때, 그의 생명이 살아나고, 영원히 살아나는 놀라운 은혜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려운 고난들이 있다고 한다면, 절망하거나 원망하거나 불평하거나 괴로워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일을 통해서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요.

마치 꼬마 아이가 예방접종 맞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의 머리로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손길이 무엇일지 지금 현재로서는 미래를 볼 수 없기 때문에 도무지 이해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며 믿음으로 일어서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나면 또 어떻게 해야 돼요? 기도해야 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11절의 말씀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오,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오,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오,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아버지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하나님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 세상에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나쁜 걸 주고 싶어 하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혹시 있나요? 없어요. 부모의 마음이 뭐예요? 가장 좋은 것을 자녀들에게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에요.

저는 매달 제가 가지고 받은 돈에서 일부를 우리 부모님에게 어머니에게 보내드립니다. 매월 용돈을 보내드리는데요. 한 푼도 안 쓰셔요. 다 꼬박꼬박 모아놓고 있어요. 다시 나 주려고, 우리 에녹회 회원들 보니까 유일한 소망이 뭐냐 하면, 우리 자식들에게 짐 안 되고, 우리 자식들에게 아무런 부담 안 되고, 편안하게 갔으면 좋겠다는 게 유일한 소망이시더라고요. 사람 부모도 자식들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다. 의로우신 하나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서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는가?

설사 이 세상 인간의 부모는 못된 부모도 있을 수 있어요. 나쁜 부모도 있을 수 있어요. 이사야서 49장 15절의 말씀에서.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대에서 낳은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사람 부모는 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시고 품으시고 가장 선하신 길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염려와 근심할 것이 아닐 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어떻게 기억하신다고 하십니까? 이사야서 49장 16절의 말씀에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잊어 먹지 않기 위해서, 잊을 수 없기 위해서 주님의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 하나하나를 새기시고 기억하시며 끝까지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우리들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날마다 기억하며 바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길을 걸어가다가 풀 한 포기를 바라보더라도, 길을 걸어가다가 하늘에 나는 새 한 마리를 보더라도 하나님이 저것들도, 아무 그냥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도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께서 우리는 얼마나 더 사랑하실까 믿음을 가지고 승리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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