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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이 척도이다

– 이국진

만일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려 한다면, 거기에는 눈물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한다고 했을 때, 이 말은 무조건 불의를 지적하고 책망하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눈물로 불의를 지적하여 고치게 만들어야 한다. 마치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고치기 위해 “많은 눈물로” 편지를 보낸 것처럼(고린도 후서 2:4).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과연 내 마음이 아픈가?”이다. 고름을 짜낼 때 눈물로 짜내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분을 이기지 못하여 화를 내고 있는 것인가?

오늘날은 교회 내에서 치리(治理, discipline)가 사라졌다는 한탄의 소리를 많이 듣는다. 교회 내에서 어떤 잘못을 한 사람을 치리하려 시도할 경우, 당사자는 교회를 옮겨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결국 교인을 잃게 될 것이 무서워, 교회가 교우들의 잘못을 책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만큼 사람들이 더 악해졌고, 그만큼 더 교회의 권위가 떨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이 시대에 권면과 치리가 사라진 더 큰 이유는 그만큼 우리에게서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눈물과 사랑이 없는 권면은 사람을 살리는 양약이 아니라 죽이는 독약이다. 권면과 치리가 없어졌음을 한탄하기에 앞서, 우리에게서 눈물과 사랑이 없어졌음을 탄식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질문을 던졌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옳습니까?” 만일 이 질문이 한쪽 손 마른 자를 바라보면서, 고쳐주고 싶은데 율법의 문제 때문에 망설여지며, 어떻게 하면 율법을 어기지 않고 병을 고쳐줄 수 있을까라고 하는 안타까움과 애절한 고민에서 나왔다고 한다면, 칭찬을 받을만한 질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의 마음은 그게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 한쪽 손 마른자의 불쌍한 상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예수님을 시험하는 데 있었고, 그 율법을 어기면 죽이겠다는 관심만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오늘날의 교회 내에서 바리새인들을 너무 많이 만난다. 교회에서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된다는 철저한 신앙인들을 많이 만난다. 말의 표현만으로 본다면, 그들은 적어도 진리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쉽게도 눈물은 없다. 사람을 살려내고 싶은데, 성경적으로 볼 때 허용되지 않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어기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하면 긍휼을 베풀고 사랑을 베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없다는 말이다.

어느 한 목회자가 타락했을 때, 우리는 교회 내에서 두 가지 반응을 보게 된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타락한 목회자를 사랑으로 감싸주고 용서해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다.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 타락한 것을 철저하게 다룸이 없이 섣불리 용서라는 말을 꺼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놀랍게도 이 두 부류 사이에서 서로 갈등이 생긴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라고 했으므로, 그 타락한 목회자를 아무런 치유의 과정이 없이 무조건 감싸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대하고, 계속해서 목사로서의 직무를 하게 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일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그 행동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결코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없다(사무엘상 3:13). 그런 점에서 타락한 목사를 처벌해야 하며, 그 타락한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고, 다시는 목사로서 사역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그 타락한 목사를 위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진정한 사랑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도 함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눈물이 있어야 한다. 그 목사의 타락한 모습을 보면서 가슴을 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꾼이 넘어졌다고 하는 아쉬움이 있어야 한다.

어떤 미국 목사님이 이런 간증을 했다고 한다. 자신의 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하지 않고 교회 출석을 등한시하였기 때문에, 자기 교회에서 당회를 열어 수찬정지를 시키고 교회에서 제명하는 절차를 거쳤다고 한다. 그런 간증을 하면서, 그 목사님은 한 없이 울었다고 한다. 자기가 아들의 신앙교육을 잘못 시켰다고 하는 자책감과 더불어, 그 아들의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을 가지고 그 아버지는 교회 내에서 치리를 해야 했지만, 눈물을 흘렸고, 그리고 그 아들이 다시 돌아올 것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이며, 사랑은 진리가 무너질 때 마음이 아파 우는 것이다.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바람직한 행동방식이라면, 눈물은 비둘기같이 순결함에 해당한다. 눈물이 있다고 지혜 없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순결을 요구하신 주님은 지혜도 요구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는 적절한 시간과 방법이 있으므로(전도서 8:6), 시간과 방법에 대한 심각한 고려 없이 내뱉는 말은 사랑의 탈을 쓴 폭력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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