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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는 진리를 담대하게 말할 수 있다

– 이국진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는 말은 상대방이 진리 가운데 행하는 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 애정을 가지고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에, 파멸로 향하는 걸음을 멈추지 못할 때가 많다. 여호사밧 왕이 전쟁에 나가면 죽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나가면 승리할 것이라고 거짓 예언했던 선지자들처럼,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파멸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없다 (열왕기상 22:19-24). 파멸의 길을 갈 때, 진리를 말하여 그 파멸의 길에서 돌이키게 할 사람이 필요하다.

하지만 진리를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거짓을 말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진리를 말해야 한다. 비록 진리를 말하는 것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진리를 말해야 한다. 사랑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죽든지 말든지, 망하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망해가는 모습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다. 그래서 진리를 말해야 한다. 사랑한다면, 죄악으로 인하여 망해가는 모습을 두고만 볼 수 없다. 그래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잘못을 고치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 그 잘못을 고치라는 권고의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 편지를 쓸 때, 눈물을 많이 흘렸다고 한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 후서 2:4)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내재하는 여러 가지 잘못과 죄악들을 그냥 모른척하고 지나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라는 권고의 말을 할 수 있었다. 사랑은 진리를 말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한다.

요즘에 종기가 나는 것은 거의 보지 못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종기가 참 많았다. 아마 그 당시에는 청결하지 못한 생활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나는 특히 등에 종기가 많이 났었다. 등에 나는 종기라고 하여, 등창이라고 했다. 그러면 고생이 심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나를 눕혀 놓고, 고름을 짜냈다.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나는 죽겠다고 울면서 소리를 지르는데, 어머니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잔인하게 고름을 짜내었다. 그리고 “이명래 고약”이라는 것을 붙여 주었다. 아파 죽겠다고 외치는데, 어머니는 그것을 피하지 않았다. 아픔을 즐기는 어머니여서가 아니라, 나의 건강과 온전함을 바라는 사랑이 많은 분이셨기 때문이다.

사랑은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고름이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지나가선 안 된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못 본 척 지나가지 않고, 책망하며 훈계하였던 것처럼, 진리를 담대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 약간의 모순이 있는 것 같다. 성경은 한편으로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사랑은 맹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한편에서 말하고 있는데,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을 행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는 길일까? 오래 참고 덮는 것이 사랑일까? 그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것을 고치게 만드는 것이 사랑일까? 성경은 두 가지 모두 사랑이라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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