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닫기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잠 17:14)

이 세상의 가르침은 “싸워서 이겨라”라고 하는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권리를 챙기고, 주장하고,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게, 이 세상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겠는가? 약점을 보여서도 안 되고, 얕보여서도 안 되고, 상대방을 쉽게 제압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세게 강력하게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게, 이 세상의 방법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이 세상의 교훈과는 정반대의 가르침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잠언서 17장 14절 말씀에, 다시 한번 보면, “다투는 시작은 둑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 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시비를 그칠 것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싸움을 시작하게 되면, 그것은 무엇과 같은가? 마치 “댐에서 물이 새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이 말입니다. 그 저수지의 물을 막아놓은 댐이 있는데, 그 댐에 균열이 생기면, 그래서 거기서부터 물이 새어 나오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그 물 흘러나오는 것이 얼마 흘러나오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에는 그 댐이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 물이 흘러내리게 될 때, 완전히 물에 의해서 엄청난 피해를 당할 수밖에 없는, 정말 재앙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싸움을 시작할 때는 우리가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싸움을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또한 직장에서 서로 직원들끼리, 또는 공동체 내에서 서로 만나는 사람들끼리, 그냥 무심코 던졌던 그 말 한마디, 그래서 기분이 나빠서, 서로 싸우게 되는 그것이, 처음에는 그 시작이 아주 미약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나 그 싸움이 어떻게 되는가? 완전히 한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갈 정도로, 어마어마한 파괴적인 힘을 가지고, 우리의 인생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말씀해 주는 것이 오늘 잠언서 17장 14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잘 싸워서 이기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싸우지 말고, 싸움을 시작하지 말고, 싸움이 시작하지 않도록, 미리 시비를 그치라고 권고하고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을 우리가 신중하게 기억하고, 또 늘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늘 묵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 가운데서 싸움이 일어나지 아니하도록 신중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물론 아예 싸우지 말아야 하고, 싸움 자체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외적이 쳐들어온다고 한다면, 싸우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냥 모든 것을 빼앗기고, 국민이 다 죽든 말든 싸우지 말아야 되나요? 외적의 침입이 있으면, 싸워야 되나요? 싸워야 되겠죠! 전쟁을 해야 되겠죠? 외적이 쳐들어온다고 한다면,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 있을 게 아니라, 유비무환으로 군대를 잘 정비하고 준비하고 있다가, 외적의 침입에 대해서 정말 지혜롭게, 전쟁을 통해서 외적을 물리쳐 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민족에게 말씀하시기를 주변의 이방 민족과 더불어 싸우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고, 전쟁하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셨을 뿐만 아니라, 다윗을 향해서, 다윗이 하나님 앞에 질문을 던질 때, “하나님 제가 나가서 싸워야 합니까?” “싸우지 않아야 합니까?”라고 하나님 앞에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많은 경우에 “나가서 싸워라, 네가 나가서 저 블레셋 민족과 싸워라.” 그렇게 여러 번에 걸쳐서 말씀해 주셨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것에 다 때가 있는 것이죠.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다고 하면서, 전도서 3장 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그러니까 오늘 잠언서 17장 14절에서는 싸움을 시작하지 마라. 싸움을 시작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에게 아주 엄청난 재난을 가져오는, 마치 댐이 무너져서 우리를 완전히 수몰시켜 버릴 수 있는, 그런 위험한 것이니까, 싸울 것이 아니라 화평을 추구해야 되고, 싸울 것이 아니라 시비를 그치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낫다고 말씀해 주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모든 경우에 항상 싸우지 않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는, 항상 성경 어느 한 구절만을 볼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그래서 성경의 교훈을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하겠는데요. 싸울 때가 있고, 싸우지 말아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전쟁해야 될 때가 있고, 화친을 청해야 하는 때가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오늘 읽은 잠언서 17장 14절의 말씀을 가지고, 무조건 “우리는 싸우면 안 된다. 우리는 결코 싸울 게 아니라, 우리는 싸움을 그쳐야 한다.”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너무나도 단순하고 순진한 생각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성경 전체의 교훈을 잘 처음부터 끝까지 다 고려해 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들려주시는 그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성경에 어느 한 구절에만 나와 있는 것에 경도되어서, 다른 구절들은 살펴보지 않고, 잠언서 17장 14절의 말씀만 붙들고, 그러니까 “우리는 싸움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혹은 “순진하다”라고, 너무나도 순진한 것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특별히 잠언서의 말씀은 “계명”이 아니라 “잠언”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계명”과 “잠언”을 구분해야 하는데요. 계명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법칙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명령하시는 그 명령이기에, 우리가 반드시 순종해야만 하는 것을 가리켜서 계명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혜롭게 적용해야 할 교훈의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이 잠언의 말씀은 경우에 따라서 옳을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말씀이 적용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는 점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잠언의 말씀으로, 우리가 싸움을 시작할 게 아니라, 시비를 그쳐야 한다. 싸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비를 그치고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이 말씀은, 그러니까 천편일률적으로 항상 싸우지 말고, 외적이 쳐들어오든 말든, 어떤 상황에서든지 전혀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식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우리가 싸우지 않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하는 그런 의미의 말씀으로 잠언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교훈을 깊이 묵상했으면 싶은데요. 이 말씀은 이 세상의 가르침과는 정반대 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 세상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싸워라. 싸워서 이겨라. 제압해 버려라. 손해 볼 것이 아니라, 내 주장을 하고 내 권리를 챙기고, 그래서 내가 스스로 내 권리를 주장하지 아니하면, 너는 손해를 볼 것이다. 너는 아주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없으니, 쟁취하고 투쟁해서, 그래서 싸워서 자신의 권리를 획득하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자주 듣는 그런 이 세상의 교훈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주는가? 싸워서 이기라고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말라고 말씀해 주고 있다고 하는 이 말씀을 오늘 우리가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이 세상의 지혜도 싸우라고 무조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싸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그저 그냥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그런 일반적인 생각일 뿐이지, 사실 이 세상의 지혜자들도, 이 세상의 현자들도, “싸우기보다는 싸우지 말아라”라고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특별히 손자병법이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요. “어떻게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가?”라고 하는 것을 정리해 놓은 그런 교훈들을 적어놓은 책이 손자병법이고, 어떻게 우리는 이 싸움에서,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가를 써놓은 중국의 아주 유명한 책이 손자병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 손자병법에 보면, 이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냥 싸워서 이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승(全勝)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죠. 전승사상. 전승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냐? 이 승! 이기기는 이겨야 되는데, 어떻게 이겨야 되는가? 전(全), 온전할 전(全) 자를 써서, 온전하게 이기는 방법에 대해서, 손자병법에서 말하면서, 손자병법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가급적이면 전쟁을 하지 말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하게 되면 예산을 낭비하게 되는 것이고, 국력을 고갈하게 되는 것이고, 인명을 사실상 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만 피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도 피해가 있고, 결국에 많은 피해가 있어서, 이거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유익한 것이 아니고, 정말 맨 마지막에, 최우선으로 선택할 것이 전쟁이 아니라, 피하고 피하고 피하다가 마지막에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전쟁이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했던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백전백승(百戰百勝) 비선지선자야(非善之善者也), 부전이굴인지병(不戰而屈人之兵) 선지선자야(善之善者也)”라고 그랬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100번 싸워서 100번 이기는 게 가장 좋은 것이 아니고, 싸우지 않고 그 병사들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죠. 심지어 이런 불신자들이 하는 말 중에서도, 싸우는 게 제일 좋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그것이 제일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싸워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싸워야 이기고, 가만히 있으면 당하고 내 권리를 주장해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하는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지도자의 선동에 따라서, 싸우라고 하는 그런 어리석은 방법들을 따라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잠언서 17장 12절의 말씀에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데,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그런 미련한 지도자들의 말을 듣고, 그 미련한 자의 말을 듣고서, 싸우는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부하뇌동하면서 그 싸움의 전선에 뛰어 달려 나가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싸우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싸우는 자가 복이 있다? 싸워서 이기는 자가 복을 얻을 것이다?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해 주셨습니까? 마태복음 5장 9절의 말씀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오.” 내가 싸워서 승리하고 그래서 쟁취하는 자가 그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자,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애쓰는 자,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며, 그렇게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화평을 추구하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는다고 한다면, 화평을 추구하지 아니하고 싸우려고 들고 시비를 걸고 그렇게 해서 자꾸만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고, 싸우려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누구의 자녀이겠습니까? 마귀의 자녀요 사탄의 자녀일 수밖에 없는데, 안타깝게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 그게 마치 정의로운 일인 양, 그게 마치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것인 양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우리가 싸우지 않고 화평을 추구하게 되면, 그러면 어떻게 화평이 만들어지게 되겠습니까? 싸움을 하지 않으면서 화평을 추구하게 되면, 그렇게 싸움을 하지 않고 화평을 추구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요? 그것은 우선 당장에는 우리가 손해 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내가 싸우면 내 것을 보호하고, 내 것을 수호한다고 한다면, 우리의 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지만, 싸우지 않고 화평을 추구하면, 우리의 것을 빼앗기게 될 것이고, 내 권리는 무시당하게 될 것이고, 나의 삶은 짓밟히게 되는 그러한 손해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마태복음 5장 38절에서부터 39절의 말씀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우리를 때리면, 맞고 손해 보고 멈추라는 거예요. 누군가 우리의 것을 빼앗으면 빼앗기고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거예요. 싸워서, 내가 복수를 해버리고, 싸워서 내 것을 쟁취하고 싸워서 이기라.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내 것을 빼앗기고, 내가 두드려 맞고 내가 손해를 봐도, 그것을 그냥 내버려 두고 원수를 갚지 말고 화평을 추구하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결국 싸우지 않게 되면 우리는 손해를 보기 때문에, 손해를 봐야만, 화평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의 본성은 그냥 지고 있기가 어려운 겁니다. 빼앗기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잖아요? 맞고만 있으면 너무나도 억울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내 권리를 얻기 위해서, 싸우고 싶은 게 우리들의 본성이고, 전쟁을 하고 싶은 게 우리들의 본성이고, 평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우리가 한 대 맞으면 몇 배로 갚아주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본성이고, 내 것을 그렇게 해서 수호하고 싶은 게 우리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계산입니다.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싸우게 되면, 손해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늘 잠언서 17장 14절의 말씀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싸우게 되면, 싸움을 시작하면, 그것은 마치 둑에 물이 새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우리가 조그마한 손해를 막기 위해서 싸웠는데, 결국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싸워서 우리의 것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잃게 된다. 댐이 무너진다. 댐에 균열이 생겨서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따라서 약간의 손해를 보며 참고 인내하는 것이, 화평을 추구하는 것이 그것이 훨씬 더 유익하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기억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억울한 일이 있어도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싸워서 해결할 게 아니라, 화평을 추구하며 주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왜 우리는 억울한 일이 있고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싸워서 해결하지 않고, 왜 우리는 그것을 감내하면서 화평을 추구해야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그렇게 해야만 합니까? 그것은 최후의 심판자이시고,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참아도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시고,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우리에게 은혜로 갚아주시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그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 때에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거라고 하는 사실을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내가 억지로 내 것을 챙기기 위해서, 보전하기 위해서 싸우다가 망하게 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영적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로마서 12장 19절에서부터 21절의 말씀에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왜 우리가 참아야 돼요? 왜 우리가 싸우지 말아야 돼요? 왜 우리가 억울한 일이 있어도, 손해 보는 일이 있어도, 우리가 그것을 내 손으로 회복하기 위해서, 싸움을 시작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가 뭐예요? 그렇게 해봤자 손해만 날 뿐이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결국에 우리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들의 어깨를 두드려주시며, 주님께서 인정해 주실 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누가 싸웁니까? 왜 인내하지 못하고 싸웁니까? 왜 참지 못하고 싸움을 시작합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싸우는 거예요.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신앙생활을 한다고 내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그 마음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다고 확신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없으니까, 내 손으로 해결해야 되는 거죠. 내 자신을 완벽하게 해결해 줄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맡겨버릴 수가 있는데, 하나님이 없으니까, 그런 하나님을 못 믿으니까, 내 손으로 해결해야 되는 거예요. 내 손으로 원수를 갚아버리고 내 손으로 싸워야 되는 거예요. 왜? 하나님이 없다고 믿으니까.

요즘 종종 사적 제재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곤 합니다. 어떤 유튜버들은 사적인 제재를 하겠다고 하면서, 사적 제재를 하는 것을 방송하기도 하는 그런 유튜버가 있는데요. 그런 사적 제재를 하는 사람들은 왜 사적 제재를 하겠습니까? 그것은 우리나라 사법 체제가 우리나라의 사법 체제가 완전히 썩어버렸다고 믿기 때문에 그래요. 정의가 세워지지 않고, 돈에 의해서, 권력에 의해서, 이 사법 체제가 완전히 엉망진창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사법 체제에 의존해서 이 사법 체제가 정의를 구현해 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에, 내 손으로 사적 제재를 하는 것이죠. 이와 비슷하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면서 왜 싸우는가?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는 사실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 내가 나서야 하고, 하나님이 안 계시니까, 내 권리를 내가 찾아야 되고, 불신자들이 싸우는 것처럼 나도 불신자와 똑같이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믿기 때문에, 그러니까 내가 내 손으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게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계셔요. 지금도 역사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주장하고 계시고,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이 세상을 온전히 바로잡으실 것이고, 이 세상에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해서 심판하실 것이고, 선을 행하는 자들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하나님께서 은혜로 갚아주실 것을 우리가 믿고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바로 그렇게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로마 정부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었을 때 그 재판장 앞에서 억울한 재판을 당하게 되는 것이죠. 거짓 증인들을 내세우고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그런 순 엉터리 재판정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이 재판장은 순 엉터리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그 재판장을 뒤엎어버리신 것이 아니라, 그 재판정 앞에서 모든 형벌을 받아들이시고 십자가 위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것 같았는데, 예수님의 생은 끝난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셔서 예수님을 죽음 가운데서 다시 일으키시고, 구원의 주로 만드시고, 또 만유의 주로 일으켜 세우시는 그 놀라운 역사를 우리 주님께서 해주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들의 마음 가운데 늘 들리는 이 세상의 속삭임, 사탄의 속삭임, 어리석은 자의 그 어리석은 소리에 우리가 끌려다닐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믿음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Loading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