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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식이 찬양으로 (시 13:1-6)

이번 주간에는 우리가 시편의 말씀을 읽게 되겠습니다. (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편을 잘 읽자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시편은 분량이 많아서 4주간에 걸쳐서 읽게 되겠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근 한 달 동안을 시편만 읽게 되겠는데요. 하지만 하루하루 읽는 분량은 평상시보다는 좀 적게 읽을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앞으로 오늘부터 시작해 가지고, 계속해서 몇 주 동안은 시편에 대해서 같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 시편의 내용을 설명하기보다는 “우리가 시편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고 하는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이 있다고 한다면, 성경은 딱딱한 율법 조항이라든가, 법률 문서 형식으로만 우리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하는 점을 먼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어떤 책인가? 법률 문서 같지 않은 책이죠. 우리 사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공부를 하고 있는 그 사시 문서와 같은 그렇게 딱딱한 법률 문서 같은 게 성경책이 아닙니다. 의사고시를 위해서 공부하는 의학서적처럼 그렇게 복잡한 그런 내용들의 책이 아니고, 성경은 어떻게 주어져 있는가? 다양한 종류의 글들이 모아져 있는 책이 성경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에는 이야기도 들어있고, 성경에는 노래도 들어있고, 편지글도 들어가 있고, 예언의 글도 들어가 있고, 묵시의 글들도 들어가 있어서, 성경은 각 권마다 그리고 같은 책 안에서도 부분 부분마다 그 종류가 다릅니다. 보통 장르(genre)라고 이야기하죠. 그 장르가 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성경을 읽으면서, 이 성경 부분은 어떤 장르에 속한 것인가를 알고서 성경을 읽어야 제대로 이해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 장르를 혼동하게 되면, 우리가 성경을 오해할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종종 농담을 하는데,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면 문제가 생기는 거죠. “아, 왜 조크를 다큐로 받아들여?”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대화 가운데, 대부분 농담이 많고, 조크가 많고, 웃자고 하는 말이 많은데, 사람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받아들여서, 기분 나빠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그래서 관계가 틀어지는 경우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사실 쉽지 않은 것인데, 말을 하는 사람이 상대방이 그렇게 오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세심하게 배려해서 이야기할 필요도 있겠지만, 듣는 사람도 이것이 농담인지, 이것이 진짜인지, 그것을 구분하면서 들어야, 서로 기분이 나쁘지 않고 관계가 나빠지지 않는 것이죠.


성경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성경도 다양한 장르가 있어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율법의 문서도 있고, 편지의 내용도 있고, 예언의 문체가 있는 것도 있고, 시(詩)도 있는데, 오늘 특별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책은, 시편은 시(詩)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점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 시적인 표현은 무엇인가? 시적인 표현은 우리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그리고 우리의 상상력을 동원하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잘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그런 표현들이 시편의 말씀인데, 그러다 보니까 이 시(詩)라고 하는 것은 어느 정도 과장이 있고, 비유가 있고, 그리고 여러 가지 표현들이 직설적인 표현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하는 점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겁니다.


따라서 시편의 말씀을 읽으면서 시편의 문자 그대로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하면, 우리가 시편을 오해하게 될 가능성이 정말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 14편 1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그랬어요. 선을 행하는 자가 이 땅에 있다고 얘기했습니까? 없다고 이야기했습니까? 없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정말 이 세상에는 선을 행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는 것일까요? 선을 행하는 사람이 그래도 있는 것일까요? 성경에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도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어요? 있어요? 있어요? 선을 행하는 사람도 있고, 악을 행하는 사람도 있는 겁니다. 하지만 시편 14편 1절에서 시적인 표현으로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과장법적인 표현이고, 강조하는 표현이며, 우리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부패했는가를 드러내기 위한 시적인 언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이렇게 시적인 표현들을 가지고, 우리가 이것이 사실을 묘사한 것이라고 오해하게 되면, 그러면 종종 엉뚱한 결론으로 이끌어질 가능성이 많이 있는 것이죠.


안타깝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성경을 읽으면서 장르를 혼동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은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 부분도 있지만, 어떤 부분은 시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를 깊이 묵상하면서 그 말씀의 의미를 추출해 내어, 적용하기보다는 그냥 문자적으로 적용하다가, 그래서 마치 엉뚱한 괴상한 주장을 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시편의 말씀을 읽을 때는 “이것이 시(詩)구나.”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풍성하게 알아가게 만들기 위한 시적인 언어라고 하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면서 시편을 읽어야 합니다.


시(詩)라고 하는 장르가 가지고 있는 그 분량이, 따지고 보면, 신약 성경 전체보다도 더 많습니다. 시편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들도 다 시적인 언어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시적인 부분들만 다 모아놓으면, 신약 성경보다 분량이 더 훨씬 더 많이 있는데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시면서, 산문의 형태보다 시의 형태로 많이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시가 주는 장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몸이 건조한 그런 리스트를 우리들에게 던져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의 편지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고, 우리가 이 시편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가 연애편지를 읽는 것 같은 그런 마음으로, 이 성경 말씀을 읽어야 하는 것이죠. 시는 단순한 논리나 지성을 뛰어넘어서, 우리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상상을 불러일으키며, 우리의 전인격적인 반응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시편의 말씀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시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의 특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시 가운데 시조라고 하는 그런 게 있지 않습니까? 시조라고 하는 것은 글자 수로 글자 수가 정해져 있어서, 3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진 그런 것이 시조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시조를 그렇게 쓰면, “이게 시조구나.” 우리가 충분히 알 수 있듯이, 히브리 시도 역시 히브리 시의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특성을 알고 이 시를 접근해야 되는 것이죠.

히브리 시의 시는 어떻게 구성이 되는가? 우선 마디(colon)가 있습니다. 마디. 한 마디 두 마디가 만나서, 하나의 절(line)을 이루고, 그 절들이 만나서 단락(strophe)을 이루고 그 단락이 여러 개가 만나서 하나의 시 한 편(stanza)을 구성하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리딩 지저스 영상에서는 “마디, 절, 단락”이라고, “절, 단락, 시 한 편”이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아니라, 다른 말로 번역을 해서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제 설명과 리딩 지저스의 영상의 설명이 약간 다를 수 있다고 하는 점 기억하면서 이해하시면 좋겠는데요.

예를 들어서 시편 111편 3절 말씀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의 행하시는 일이 존귀하고 엄위하며” 그게 한 마디죠.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 이게 또 한 마디죠. 그래서 이 첫째 마디, 두 번째 마디 두 개의 마디가 하나의 절을 이루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근데 종종 2개의 마디가 아니라 3개의 마디가 하나의 절로 구성된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시편 111편 9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데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한 마디죠?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또 하나의 마디죠?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세 개의 마디가 하나의 절을 이루고 있는 것이고, 이런 절들이 여러 개가 모아져서, 하나의 단락을 구분하고 있고, 그런 단락들이 여러 개가 모아져서, 하나의 시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 148편의 말씀을 보면 한번 그림을 보여주면 좋겠는데요. 시편 148편의 첫째 단락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할렐루야, 하늘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며, 높은 데서 그를 찬양하며” 하면서 두 개의 마디가 이루어진 하나의 절이 6개의 절이 모여서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있는 겁니다. 이 첫 번째 단락에서는 무엇을 노래하고 있습니까? 하늘 높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라고 하는 사상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148편의 두 번째 단락은 7절에서 보면, (다음 그림을 보여주시면 좋겠는데요._ 7절에서부터 14절 말씀에 보면, 역시 한 절이 두 개의 마디로 이루어져 있는데, 두 개의 마디로 이루어진 하나의 절들이 7절에서부터 14절까지 모아져서, 두 번째 단락을 이루는데 이번에는 무엇이 여호와를 찬양합니까? 아까는 하늘과 높은 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7절에서부터 14절까지는 땅에서 이 아래에서 있는 것들이, 모든 사람들, 이 세상의 왕들 짐승들, 산과 모든 것들이 여호와를 찬양하라. 1절에서 6절까지는 하늘에 있는 것들, 높은 데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라. 7절서부터 14절까지는 “아래에 있는 것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라. 할렐루야”라고 하는 것으로 해서, 이 두 개의 단락이 모여서 하나의 시편을 이루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시편의 구조를 보면, 대체로 이렇게 마디마디가 이루어져서 하나의 절을 이루고, 절들이 모여서 하나의 단락을 이루고, 단락들이 모여서 하나의 시편을 구성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세 번째로 히브리시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평행법(parallelism)이라고 하는 겁니다. 평행법. 예전에 제가 잠언서를 강의하면서, 또 종종 다른 구절들을 강의하면서 히브리 평행법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는데요. 히브리시의 가장 큰 특징은 “평행법”이라고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영미시의 특징은 뭐죠? 라임(rhyme)을 맞추는 거죠. 끝의 운율을 맞추는 거잖아요? -king, -ing 해가지고, 같은 발음을 맞추고. 중국 한시도 끝에 운율을 맞추는 게, 한시나 영미시의 그런 시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히브리 시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끝을 운율을 맞추는 게 아니라, 평행을 시키는 게 히브리시의 특징입니다. 두 마디가 하나의 절을 이룬다고 했는데, 그 두 마디가 같은 내용이나 비슷한 내용이나 발전된 내용이나 해서 서로 평행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는 겁니다. 두 마디가 하나의 절을 이루고 있는데, 앞 마디에서 했던 이야기를 뒷 마디에서 되풀이하거나 반복하거나 발전시키거나 혹은 반대로 이야기하거나, 그렇게 평행시키는 그런 히브리 평행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시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히브리시 평행법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그림을 한번 보여주십시오. “동의적 평행법”이라고 해서 두 번째 마디의 내용이 첫 번째 마디의 내용을 다시 설명하고 있는 게 동의적 병행법이에요. 예를 들어서 예레미야 에가 2장 17절 말씀에 보면 “여호와께서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시고” 2절에서 다시 한번 설명하는 겁니다.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셨으니” 이미 정하신 일을 행하신 것이 옛날에 명령하신 말씀을 다 이루신 것과 똑같은 내용이잖아요? 이 똑같은 내용을 한 번 이야기하고,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서, 또 한 번 이야기하는 이런 방식을 가리켜서 동의적 평행법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는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종합적 평행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두 번째 마디의 내용이 첫 번째 마디의 내용을 이어받아 완성시키거나 발전시키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어서 시편 63편 3절 말씀에 보면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같은 내용은 아니에요. 그러나 앞에 있는 내용을 이어받아서 더 완성시키고 발전시키는 그런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게, 이런 종합적인 병행법으로 된 식구들이 있는 것이죠.


그다음에는 어떤 게 있습니까? 세 번째를 보면 “상징적 평행법”이 있습니다. 하나의 마디가 중심 주제를 전달하고, 다른 마디가 이미지로서 제시하고 있는 게 상징적 평행법이죠.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가 지금 주님을 찾는 것이 갈급하다고 하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림 이미지로 마치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서 갈급한 것과 거기에 비유해서, 상징적인 그런 표현을 통해서 나타내는 방법이 상징적 평행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다음에는 “반의적 평행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두 번째 마디가 첫 번째 마디의 내용과 반대되는 것이죠. 대조되는 것이죠.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대조 반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그런 표현법을 가리켜서 반의적 평행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뒤에 또 있습니까? 이것이 “발전적 평형법” 발전적 평형법은 무엇인가? 둘째 마디가 첫째 마디를 반복하면서 상승 발전시키는 것이죠.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그다음에 좀 더 강조되고 좀 더 발전된 내용이 두 번째 나오는 겁니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해서 하나씩 더 발전시키는 그런 것이 발전적 병행법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이것은 어떤 병행법일까요? 퀴즈! 동의적입니까? 발전적입니까? 발전적인 게 있는 거죠. 앞에 것보다는 좀 더 강조하고 발전해서 강조하고 있는 표현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물론 두 사람이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이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다윗을 좀 더 드러내고 있는 그런 표현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히브리시의 표현법이 있다고 하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이 시편을 읽어나가면, 그 시편의 의미가 우리들에게 좀 더 생생하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마디들이 서로 어느 정도의 연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조를 이루든지 동의를 하든지 아니면 발전을 시키, 아무튼 첫 번째와 두 번째가 어느 정도의 관계성을 가지고서 등장하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의미를 이해할 때, 문장과 뒷 문장, 앞 마디와 뒷 마디를 서로 비교해 보면, 해답이 나오는 경우가 정말로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하면 그 의미가 잘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들도 많이 있는 것이죠.


그래서 히브리 평행법을 생각해서 이 말씀들을 읽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 3장 36절 말씀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어요.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고”가 하나의 마디고, (계속 보여주세요.)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가 두 번째 마디인데, 여기서 첫 번째 마디와 두 번째 마디가 비교되고 있잖아요? 서로 병행되고 있는데, 그러니까 아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 아들을 믿는 건가요? 예수님을 믿는 것을, 어떻게 믿는 게 예수님을 믿는 것일까요? 예수님이 계시다고 하는 것을 믿으면 그게 믿음인가요? 요한복음 3장 36절에서는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바로 그다음 마디에서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이라고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아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거예요? 순종하는 거예요! 아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아들을 믿는 것이고,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이 곧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죠. 평행법적으로 보니까 “아들을 믿는다”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아들을 믿는다? 나 믿어! 나 예수님 믿어. 예수님 믿는다고”라고 그렇게 말하기만 하면, 나에게 믿음이 있는 거라고 착각하기가 쉬워요. 하지만 그런 믿음은 진짜 믿음이에요. 아직 엉터리 믿음일 가능성이 많아요. 엉터리일 믿음일 가능성이 많아요. 왜냐하면 그런 믿음은 누구도 믿을 수 있는 믿음이에요. 귀신들도 믿고 떠는 믿음이다 이 말이에요. “아, 허탄한 사람아, 너희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로 믿느냐? 귀신도 그렇게 믿고 떤다.” 근데 귀신이 하지 못하는 게 뭐예요?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 알고 믿고, 순종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 게, 그게 진짜 믿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아들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예수님이 계시지. 예수님이 죽었대. 나를 위해서 죽었대.” 그냥 그렇게 인정하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라, 요한복음 3장 36절 히브리 평행법적으로 본다고 한다면, 아들을 믿는 자는 누군가? 아들을 믿는 자는 아들에게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시편에서는 비유나 이미지 시각화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는 점을 주목해 보셔야 할 것입니다. 이 시편은 그 내용을 우리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이미지를 사용해서, 우리들에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 시적인 표현은 어떤 묘사가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시편 23편의 말씀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하나님을 목자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다고 하는 그 개념을 잘 설명하기 위한 그림 언어로서 목자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면서 아 이 그림 언어가, 시편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 시상이 무엇을 나타내려고 하는가를 생각해서, 잘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 것이죠. 목자라고 하니까, “이 목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구나, 돌보시는 분이구나, 우리를 안전하게 이끄시는 분이시구나, 우리를 푸른 풀밭과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분이구나”라고 하는 그런 개념들을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셨다”라고 하는 표현이 나오는데, 정말 이 시편 기자가 다윗이 웅덩이에 빠졌을까요? 빠진 적이 있었을까요? 빠진 적이 없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내셨다. 끌어올리셨다”라고 시편에서 노래하고 있는데, 다윗이 길을 가다가 수렁에 수렁에 빠진 경험이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몰라요. 왜냐하면 우리가 그 시대에 안 살았으니까, 모릅니다. 하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수렁과 웅덩이라고 하는 게 진짜 수렁과 웅덩이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 헤어 나오기 어려운 위험한 상황을 나타내기 위한 그림 언어로, 시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한 해석이 될 것입니다. 그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이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어떤 사람에게는 병에 들어서 그 병 때문에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던 것을 수렁과 웅덩이로 표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다윗이 경험했던 그런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압박하고, 그리고 자신을 쫓아오는 그래서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것 같은 그런 경험을 했던 것이 수렁과 웅덩이라고 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고요. 뿐만 아니라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이웃들이 나를 향해서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서 “저 나쁜 놈, 저 쓸데없는 놈. 나가 죽어라.” 하면서 나를 향해서, 온갖 비난과 비아냥을 거리하고 있는 그런 상황을 가리켜서,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이라고 하는 말로 표현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렇게 표현했기 때문에 이 표현이 어떤 한 사람 개인의 상황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의미가 있는 시편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대적에서부터 건져내셨다”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대적이 누굽니까? 대적이 사울 왕을 가리킬 수도 있겠고요. 아니면 블레셋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겠고요. 아니면 내 마음속에서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고 나로 하여금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사탄의 말에 순종하게 만들려고 하는 나의 영적인 그 마음을 자꾸만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탄의 세력을 대적이라고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죠. 아무튼 이 시편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구체적인 것들을 이미지화시켜서 웅덩이라든가 대적이라든가 목자라든가 또는 다양한 그런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시편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고 한다면 탄식에서부터 찬양으로 바뀐다고 하는 사실이에요. 이것이 이 세상의 시와는 좀 다른 측면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시편 13편의 말씀을 읽었는데 시편 13편의 처음 부분은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탄식하고 지금 내가 만난 현실 때문에 괴롭고 슬픈 그 마음을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 이 시편의 처음 부분에 등장하는 내용인 것이죠. 하지만 이런 내용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시편을 쭉 읽어보면 결국에는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하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다가, 맨 마지막에 가서는 찬양하는 내용으로 탄식이 찬양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죠. 13장 6절 말씀에 보면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니이다.” 국 이 탄식이 찬송으로 바뀌어 버리는 이 시편의 내용들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의 삶도 우리가 이 세상을 바라보면 감사할 게 없어요. 이 세상을 바라보면 풍랑만이 우리들 앞에 놓여 있는 겁니다. 우리들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는 겁니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거예요. 우리 가족의 문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여러 가지 힘들고 어려운 상황들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바라보면 탄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 나를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이시고, 또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혜와 은덕을 베푸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이 총 5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대로 1권, 2권, 3권, 4권, 5권 이렇게 5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맨 마지막 4번과 5번 쪽으로 가게 되면 주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이 시편을 읽으면서 우리의 상황을 그대로 묘사해 주는 그 표현들 때문에 아마 동질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황 가운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 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면서 이 시편을 읽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총을 체험하는 이번 시편 읽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찬양으로 끝나는 것이죠. 영광송 독설로지(doxology)로 찬양송 프레이즈(praise)로 끝나는 거죠. 그래서 우리의 성도의 삶은 무엇인가 고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늘 감사하는 삶이 이 이 찬양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서도 기쁨이 넘쳐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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