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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분노를 내도 좋다?

– 이국진

잘못된 분노는 안 되지만, 의로운 분노는 내야 한다고들 생각한다. 1 하지만 모든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의로운 일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지, 그 누구도 의롭지 않은 일에 분노하는 경우란 없다. 의로운 분노를 내야 한다면, 이 세상은 분노로 가득할 것이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동시에 “사랑은 성내지(분노하지) 않으며”라고 한 사랑의 8번째 정의를 기억하여야 한다. 또한 “사랑은 오래참고”라고 했던 사랑의 첫 번째 정의를 기억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되, 동시에 분노하지 않으며, 동시에 오래 참아야 한다.

댄 알랜더는 이렇게 말했다. “분노- 그것이 의로운 분노이든 불의한 분노이든-는 결코 빨리 행동에 옮겨서는 안 된다.” 2 분노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주님은 불의에 대하여 의분을 일으키면서도, 그 사랑의 방식이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그 외의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의 분노가 의로운 분노라고 위장하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라고 위장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죄성 때문에 분노하는 것이다.

불의를 보면, 분노하라고 성경에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불의를 보면, 기뻐하지 않는다고 표현되어 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녀가 불의를 행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불의를 행하는 모습에 기뻐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슬퍼하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는 것이다. 애통해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잘못된 길로 나갈 때, 마음이 안타까워 속상한 것이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잘못하는 것을 볼 때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 있는 흑인 지도자들이 동료 흑인들의 삶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한 것을 본 적이 있다. 감옥에 가면, 대부분 미국의 흑인들이 들어가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마약에 빠진 흑인들을 보면서, 가난과 절망의 악순환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흑인들을 보면서, 처절하게 안타까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인종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애통해 했다.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애굽기 32:31). 모세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구원해낸 이스라엘 민족들이 죄악을 짓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가는 그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사랑하는 자가 죄악의 길을 향해 걸어갈 때, 그들이 불의를 행하는 모습을 볼 때, 안타깝고 슬픈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잘못된 길로 갈 때에, 가슴아파했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하다가 많은 고생을 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도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린도 후서 11:23-27). 하지만 바울 사도는 그러한 고생보다도 교회를 향한 염려가 더 컸다(고린도 후서 11:28). 누군가 잘못된 길로 가게 될 때, 바울 사도는 속이 타는 것 같은 경험을 했다(고린도 후서 11:29). 사랑은 상대방이 잘못을 할 때에 무덤덤할 수 없다. 얼마 전에 아주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다모]에서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 이 말 한마디가 시청자들을 울렸다. 그렇다. 이것이 사랑이다. 잘못된 길로 나가는 그 모습 앞에서 슬퍼하는 것이 사랑이다.

하지만 자녀들의 불의를 보고서도 무덤덤했던 사람이 있었다. 사무엘서에 기록된 엘리 제사장이다. 그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온갖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속상한 기색이 없었다. 별로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지 않다. 이미 클 대로 다 큰 아들을 이제 자신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다던 어떤 한국 대형 교회의 목사처럼, 엘리 제사장은 그저 형식적인 충고만을 하고 만다. 하나님은 나중에 엘리 제사장의 가문을 향한 심판을 행하며, 엘리 제사장의 죄를 지적한다. 사무엘상 3:13은 이렇게 기록한다.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진정한 사랑은 불의를 볼 때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분노하는 것도 아니고, 동참하는 것도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애통해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불의 가운데 있을 때 슬퍼하며 애통해 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고 권고하신다(에베소서 4:30). 창세기에 보면, 인류가 죄악을 행할 때, 하나님은 한탄하고 근심하셨다. 종종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을 후회하셨다는 표현은 마치 하나님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일을 벌여놓았다가 일이 그르쳐질 때 후회하는 신뢰가 가지 않는 신처럼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인간의 죄악이 너무나 크고 그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한 것을 보시며 애통해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에,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가는 모습에 애통해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관저에서 심문을 받을 때, 베드로는 몰래 뒤따라갔다. 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들통 날 순간,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다. 누가복음에서는 그 순간 예수님이 베드로를 돌이켜 보았다고 기록한다(22:61). 그때 베드로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어떤 눈빛이었을까? 아마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서, 슬픔과 애통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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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Cf. 김남준, [고린도 전서 13장 묵상 사랑] (생명의 말씀사, 2004), 150.[]
  2. 댄 알랜더, “분노할 때 이렇게 대처하라” [목회와 신학 1999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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