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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이 불의한 일을 당할 때

– 이국진

사람들은 참으로 악하다. 불의를 당하여 고난을 받는 모습을 보고, 위로하고 함께 슬퍼하기 보다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기뻐하는 행동을 하지는 않을지라도, 오히려 고난 받는 자를 비난하고, 욕하고, 비방한다. 하지만 사랑은 불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서,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함께 슬퍼할 것이다.

욥의 친구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사랑이 없는 사람들의 특징을 발견한다. 그들은 사랑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욥이 고난을 당할 때, 친구를 찾아와 위로하는 모습은 사랑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욥에게 다가와 염장을 지른다. 위로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비아냥거렸다. 다독이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아픈 상처에 칼을 더 디밀었다. 무고하게 불의의 고난을 당하는 욥을 향하여, 회개할 죄가 있다면 회개하라고 권고하였다. 어쩌면 가장 정답일 수 있는 욥의 친구들의 권면은 실제로는 가장 사랑이 없는 말이 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현장에서, 우리는 욥의 친구들보다 더한 사람들을 만난다. 예수님이 아무런 죄가 없이 무고하게 십자가에 달리는 그 순간, 주변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침 뱉고, 모욕하고, 비아냥거렸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태복음 27:40)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저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찌어다.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태복음 27:42)

저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저를 기뻐하시면, 이제 구원하실찌라. 제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마태복음 27:43)

예수님의 십자가 주변에서 저주의 말을 쏟아낸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돈을 떼어먹고 도망갔기에, 달려든 채권자들이 아니었다. 예수님이 살인을 저질러서, 가족을 잃은 피해자들이 몰려온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으로부터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비아냥거림의 최고 절정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한 행악자의 말이었다. 그는 중범을 저지르고, 십자가에 달린 자였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누가복음 24:39)

왜 우리는 나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이 불의의 고난을 당하면, 그를 동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함께 일어나 비난의 대열에 동참하는가? 그 심리학적 이유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면, 자신의 죄가 숨겨질 수 있다는 무의식적 동기 때문이다. 큰 소리로 정의를 주장하면, 자신이 저절로 정의로운 사람이 될 것이라는 착각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정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 여당의 비리를 비판하던 야당 중진 국회의원의 뒤를 조사해 보니, 비리가 무수하게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결코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은 자들이 하나님 앞에서 한 일은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기였다. 아담은 하와의 죄를 들추어냈고, 하와는 뱀의 죄를 들추어냈다. 그렇게 하면 마치 자신의 죄가 감추어질 것처럼 생각한 무의식적 자기방어본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라고 한 사랑의 10번째 정의는 “사랑은 투기하지 아니하며”라고 했던 사랑의 3번째 정의와 일맥상통한다. 다른 사람이 “잘될 때,” 시기와 질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사랑인데, 역으로 다른 사람이 “잘못될 때” 통쾌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또한 사랑이다.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위험하게 장난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의를 주었다. 위험하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지만 아이는 그렇게 노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내 말을 무시하면서, 위험한 장난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쳤다. 그리고 아프다고 우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내 말을 듣지 않은 딸을 향해,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그러니 그것 참 잘됐다며 모른 척 하지 않았다. 다친 아이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사랑은 아픈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불의에 빠진 것을 보고, 멀리서 팔짱끼고 앉아계실 수만은 없었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것 참 쌤통이다” 하면서 외면하지 않으셨다.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다.

생각해볼 문제 / 토론 문제

1. 상황윤리가 잘못된 이유는 무엇인가? 불의를 행하면서도 그것이 사랑 때문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는가?

2. 자녀의 잘못을 그냥 보고 넘어가는 것은 어떤 위험이 있는가? 자녀의 잘못을 고치기 위하여 피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어떤 지혜로운 방법이 있는가?

3. 의로운 분노는 가능한가? 화를 내지 않으면서 잘못을 고치는 방법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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