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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다른 사람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것

– 이국진

사랑에 대한 10번째 정의는 “다른 사람(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진정으로 남편을 사랑한다면, 남편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만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이 불의를 행하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아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한다면,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그냥 두고 보아서는 안 된다. 잠언 13:24는 이렇게 기록한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자식에게 사랑의 매를 들지 못한다면, 그 자식을 망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미국 사람들은 자녀가 식당과 같은 공공장소에서 뛰어다니거나 예의 없는 행동을 한다면,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혼내준다고 한다. 그래서 “화장실갈까?”라고 묻는 것은 아이에게 경고의 메시지처럼 들린다고 한다. 자녀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주고, 자녀들의 입장에서 아이들을 대하는 참으로 자상한 미국 부모들이 예의 없는 자녀들을 화장실에 데리고 가서 혼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참으로 놀랐다. 얼마나 엄하게 혼냈으면, 그 아이들이 식당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얌전하게 밥을 먹을까를 생각하며.

하지만 초달을 해야 한다는 잠언서의 말씀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종종 오해되어 악용되기 쉽다. 이 말은 자식을 마음대로 때려도 좋다는 양해각서가 아니다. 자식의 인격을 무시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나의 분노를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 마음대로 퍼부어도 좋다는 말이 아니다.

자식을 초달하기 위해서는 뱀같이 지혜롭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게 하라는 원칙(마 10:16)이 적용되어야 한다. 자식을 초달하는 것에 자신의 죄성이 발동되어서는 안 된다. 때로는 우리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초달하면서도,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찍을 드는 것이라고 위장할 때가 많다. 교회의 순결을 이야기하면서 분노하는 사람이 종종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의 발동을 감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비둘기 같이 순결하지 못한 것이다.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한 사랑의 정의 8번째를 생각한다면, 자식을 초달하는 것이 자식을 향하여 화를 내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을 고치려 할 때, 지혜가 필요하다. 잘못(불의)을 지적하면, 사람들은 순응하고 뉘우치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불의를 감추고 공격적이 되기 쉽다. 따라서 지혜롭지 못한 행동은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다. 자식에게 전하는 진정한 사랑의 권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화를 내는 방법으로는 진정으로 자녀들을 회개로 이끌기 어렵다.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도록 인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테드 트립(Tedd Tripp)이 쓴 책은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 지 좋은 예를 보여준다. 어느 날 한 아이가 교회 헌금함에서 2달러를 훔치는 것을 목격하고 그것을 목사에게 말했을 때, 목사는 그 부모에게 말하였다. 부모는 그 아이를 데리고 목사님에게로 찾아왔다. 그 아이는 2달러를 내놓으며 잘못했다고 말했다. 그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2달러를 훔치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들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인도했다고 믿는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면, 너는 더 나쁜 길로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들키게 한 것이다. 너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근본적으로 죄성이 있단다. 그래서 헌금마저도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단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란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우리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주셨단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이는 큰 소리로 울면서, 주머니 속에서 20달러를 마저 내 놓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인도할 때, 미처 고백하지 않은 다른 죄까지도 그 아이는 고백하게 된 것이다. 반대로 아이가 잘못 했을 때 화를 내고 만다면,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만 무서워하고 말 것이다. 1)

교회 내에서 권징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참다운 교회임을 나타내는 표시로 “말씀의 선포”와 “성례의 시행”과 더불어, “권징의 시행”을 종교개혁자들은 주장해왔다. 교회 내에서 권징이 시행될 때에 참된 교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권징은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사라진지 오래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권징이 사라진 것은 사람들이 악해져서, 권징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진단이 많다. 권징을 하려들면, 그 권징에 순복하기보다는 교회를 옮겨버리고 마는 것 때문에, 이제는 권징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다. 그만큼 이 시대는 권면(勸勉)과 치리(治理)가 사라진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권면과 치리가 사라진 더 근본적인 이유는 그만큼 우리에게서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랑이 없는 권면은 사람을 살리는 양약이 아니라 죽이는 독약일 뿐이다. 권면과 치리가 없어졌음을 한탄하기에 앞서, 우리에게서 참된 사랑의 마음이 없어졌음을 탄식하고 회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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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테드 트립, [마음을 다루면 자녀의 미래가 달라진다] (디모데,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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